종교 부역 서사

 


들어가며

 

종교, 참 어려운 문제다. 인간 정신을 최고 상태로 인도하는 고매한 가르침이자 운동이다가도 상상 너머 저열한 상태로 처박아버리는 야비한 꼬드김이자 중독이니 말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비대칭 대칭 진리가 드러나는 한 양상일 뿐 특별히 더 심각하지는 않다. 문제는 종교와 그 신자가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거룩함이 뒤엎어졌을 때 드러내는 추악함이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역겹고, 심지어 가소롭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개신교, 천주교, 불교는 어떤 상태일까? 왜 그럴까? 앞으로 어찌 될까?

 

내 시생대 10년은 외양으로 불교 영향 아래 있었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인근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어릴 때 여러 번 들은바 나는 할머니 월정사 치성으로 부처님이 점지해주셔서 태어났다. 내가 생후 6개월 만에 걸으며 영특해서 신동이란 소리가 들려오자 문수보살 가피 덕분이라 했다. 월정사가 문수 도량이라는 전설에 근거한 말이다. 상원사 방한암 선사 이야기도 쟁쟁하게 들었다. 물론 어린 내가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불교에 심취했을 리는 없으나, 오대산 월정사에 깃든 아우라가 빚어내는 서사 영향만큼은 분명히 받았으리라.

 

사실 불교보다 내가 내밀하게 느낀 종교적 영향은 무교, 그러니까 바리데기 신앙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 일로 기억한다. 백부가 사고를 당해 객사하자 할머니는 해원굿을 청했다. 그 굿이 진행되는 여러 날 동안 나는 오감이 열린 채 그 풍경 속에 잠겨 있었다. 천정에 가득 붙은 부적, 풍채 좋은 박수가 경 읽는 소리, 신기를 받아 팽팽히 곧추서는 지푸라기 신주, 다듬돌 위에서 스스로 돌아가는 물푸레나무 신목, 망자 영혼을 초대해 빙의 상태에서 만신이 망자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커다란 떡 시루를 번쩍 들고 공중 뛰어나가던 만신, 망자 영혼을 달래 저승으로 보내준 뒤 돌아온 만신 발바닥에 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는 할머니 증언···나는 60년도 썩 지난 이 풍경을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 선연히 느낀다. 이른바 고등종교가 이 풍경을 뭐라 말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나는 고등종교에 천천히 깊숙이 들어간 먼 훗날, 그 어떤 순간에도 이 풍경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섬세하고 광범위하게 그 실재성을 감지한다. 식물 공부에서 시작해 숲으로 들어간 뒤부터다.

 

서울살이가 시작되면서 동네 교회를 이런저런 인연 따라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진심이지는 않았다. 스무 살 갓 넘었을 무렵, 실존적 고민 끝에 내 발로 걸어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결정적 고비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외부 힘이 작용해 내 희망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보다 큰 인격적 존재를 상정하니 가장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종교가 개신교였던 셈이다. 나는 현실 교회에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다. 누군지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으며 신앙 기조를 잡아갔다. 공부로 신앙 길을 닦아가는 구도자적 경향은 마침내 나를 신학대학원으로 이끌었다. 공부할수록 신앙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서구신학이 지닌 한계뿐만이 아니다. 현실 개신교회가 벌이고 있는 신앙 행위와 그 서사가 전혀 영적이지도 생명 윤리적이지도 사회정치적이지도 않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결별을 준비해야 했다. 안에서 바꾸려는 노력이 적어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은 순간 이미 나는 교회 울타리 바깥에 서 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일과 신앙을 버리는 일은 같지 않다는 말로 알리바이를 댈 생각이 없다.

 

개신교 신앙에 절망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나는 가지 않았다. 내게 개종할 만한 진실과 가치를 지닌 다른 제도권 종교가 있을 리 없었다. 도긴개긴이니까. 서구 지성이 도달한 무신론도 내 길은 아니었다. 저들 한심한 무지와 뒤엉킬 까닭이 없으니까.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걸어간 길은 시생대에서 시작한 바로 그 길이었다. 되돌아가기 장엄한 출발점은 원효였다. 원효 사상은 제도권 불교 사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 생태공동체가 빚어낸 바리데기 사상을 원효 특유 화쟁 어법으로 풀어냈을 따름이다. 이 회향은 내 운명, 아니 천명이었다.

 

바리데기 사상은 지구 생태계 창발적 네트워킹 전체 사건을 신으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거대유일신론을 관통함은 물론 무신론도 관통한다. 이 두 극단이 공유하는 일극 집중체제, 인간(특히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심주의, 그러니까 제국주의 부역 종교성을 관통한다. 이 반제국주의 참종교는 숲에서 발원했다. 내가 나무와 풀, 돌꽃, 곰팡이, , 버금 바리, 으뜸 바리, 비생명들을 공부하며 숲으로 걸어간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이 바리데기 반제국주의 녹색 종교 언어로 부역 종교, 그 가짜 뉴스진면모를 증언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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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도봉천 계곡 이곳저곳 바위에는 글씨가 유난히 많다(각석군(刻石群)). 제법 오래전 송시열 글씨로 계곡 들머리 바위에 새겨 넣은 <도봉동문(道峯洞門)>을 눈여겨보았을 뿐 대부분 잠깐 보고 그냥 지나쳤다. 절집 포함해 숲에서 보이는 인간 자취·작위를 너무 싫어해 특별한 일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던 습성을 지난주도 따른 셈이었다. 그러다가 <복호동천(伏虎洞天)>이란 글씨에 눈길이 가닿았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도봉서원 역사 기록을 읽었다. 서인 노론 패거리가 도봉서원 중심으로 계곡 포함 그 일대를 장악하고 유세 떨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노론 패거리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에 부역하며 특권층을 형성해 오랫동안 국정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다가 조선을 통째로 팔아 일제 부역으로 갈아타고 식민지 특권 귀족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허울뿐인 독립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에 이어 USA 제국에 부역하며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유세 떨며 준동하는 중이다. 이들 버러지 무리 뇌에는 일천오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사대 DNA가 탑재돼 있으며 몸에는 매판 독혈이 흐르고 있다. 이것들은 도저하게 직시하고 철저하게 성찰해야만 사라질 악귀다(知幻卽離). 직시와 성찰을 담은 정화 신목 버들을 모시고 나는 다시 도봉산을 찾았다.


 

<도봉동문(道峯洞門)>을 새겨 넣은 바위 앞에 선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봉 숲, 그 나무와 풀과 버섯과 흙과 물과 바람에 기도 올린다. “부끄럽습니다. 고맙습니다. 듣습니다.” 노론 패거리 영혼 속으로 천천히 깊숙이 들어간다(知幻).’ 정화 기운이 바위 밑 땅으로 스며들게 신목을 밀어드린다. 저들이 곧 사라진다(卽離)고 숲이 전해주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제의를 마치고 인사드린 뒤, 홀가분한 마음 따라 더 깊은 숲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작은 계곡 조그만 버섯들이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홀연히 또 길을 잘못 들고 만다. 처음 생각했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한참이나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파른 능선에 올라서서야 행로를 재점검하고 새로이 정해서 나아갔다. 평범하다 싶으면 바로 다음 순간 바위들이 우쭐우쭐 발길을 가로막았다. 그나마 쇠 난간이나 밧줄이라도 있을 때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아주 엉뚱하고 위험했던 숲에서 나와 보니 의정부시 호원동이었다. 허름한 음식점이 있기에 살피지도 않고 쑥 들어갔다. 60대 중반 여인이 투박한 손으로 버무려낸 묵무침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잠시 대화했다. 서울 강남 사는 변호사가 집주인인데 수리해주지 않아 안팎이 몹시 낡아 있다. 혼잣말처럼 한 내 말은 예상대로 여인 귀를 스치고만 지나갔다. “노론 패거리 하는 짓은 예나지나 똑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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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학이 내게 다가온 사건은 다소 의외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시조나 번역 한시가 인쇄된 손바닥보다 작은 카드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영문 모른 채 외워 나아갔다. 그 경험은 뒷날 산문보다 운문을 더 가까이하는 경향으로 자라나 지금까지도 그렇게 흘러간다. 이 경향에 세 가지 강화 요인이 더해졌다.

 

그 하나는 아버지 중학교 졸업 문집이다. 벗들이 남긴 친필 작품을 모아 만든 수제 문집이었는데 대개 유치한 사춘기 문학성이 뛰노는 시였다. 그들보다 더 유치했던 어린 나는 그 운문 리듬에 매료되었다.

 

다른 하나는 형이 끼친 감염이다. 세 살 위인 형은 나름 문학 소년으로 자작 풋 시를 써댔고, 김소월 시집을 통째로 외고 다녔다. 그가 읊조렸기에 아직도 내 귀에는 소월 시 여러 구절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정도다. 그 뒤 나는 닥치는 대로 시를 읽었다. 박인환, 신경림, 김남조, 도종환, 이생진, 이해인, 정호승, 박노해, 김기택, 이문재, 문태준, 그리고 내가 천하 시인이라 부르는 김선우···비교적 최근에는 이른바 뉴웨이브 젊은 시인들까지. 지나치게(?) 어려운 시들은 내가 공들일 데가 아니다 싶어 발길을 끊기까지 나는 옛 종로서적, 광화문 교보에 가면 가장 먼저 시 가판대 앞에 섰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고도 아직 서가에는 시집 백수십 권이 꽂혀 있다.

 

마지막 하나는 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이다. 다른 부분에서도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선생님이 문학의 밤에서 자작시 <마음 가는 길목>을 낭송하던 모습은 내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시 전체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마지막 딱 한 구절이 남았다. 의성어였기 때문이다: “울릴리 불릴리

 

울릴리 불릴리선생님은 전복적 영향을 내게 끼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일이었다.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한 모작 콩트 수준이었지 싶다. 50여 년 뒤에 나는 숙의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숙의 의학 소설 77편을 썼다.

 

물론 나는 그동안 수없이 시와 소설 습작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문학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시와 소설 형식을 빌려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지금도 거의 쉼 없이 글을 쓰지만 거의 모두 실용에 가까운 글들이다. 거기에 아주 소소한 문학성이 깃들어 있도록 마음을 기울인다. 나는 문학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문학적인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술보다는 음악이, 음악보다는 문학이 내 삶에서 미학적 동인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문학적 삶에 자양분이 된 숱한 영감들이 이렇게 저렇게 친일 부역자들에게서 발원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서정주가 가슴에 있지 않은 한국 문학이 어디 가능하기는 한가. 문학인이 아닌 나 같은 무지렁이마저 문학 부역 서사 한 귀퉁이에 똬리 틀고 앉아 있으니, , 대체 우리는 얼마만큼 깊은 제국 심연에 빠져 있는가. 섬뜩하다. 아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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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학 부역은 서정주 같은 상징적 인물 이야기를 통해 익숙해졌다. 상식 수준을 넘어 문학 부역 전경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글을 인용한다. https://dklee.tistory.com <우리 안의 친일 문화>에 실린 문학평론가 홍기돈과 인터뷰한 글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로 전향한 문인들은 두 가지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선일체'에 동의했던 문학가들입니다. 근대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었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광수입니다. 193810월 중국 중경이 일본에 함락됐습니다. 이곳은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불리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조선의용군도 싸웠던 곳이고요. 문인들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 한창일 때 중국이 이기면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패하자 큰 충격에 휩싸인 지식인들은 중국을 비판하면서 친일로 들어섰습니다. 중국은 봉건이고 일본은 근대라고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면서요.

 

또 하나는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근대의 종말을 고했던 문인들입니다. 이 시기의 문인들은 근대를 비판하면서 근대 이후의 신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에 소설가 채만식이 있습니다. 19403월 중국 혁명의 선도자 쑨원의 양 날개로 불리던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있었습니다. 장제스는 계속 싸우자고 주장했으나, 왕징웨이는 일본과 타협안을 내고 친일 정부를 세웠지요. 이때는 프랑스 파리가 나치에 의해 함락된 시기입니다. 이 사건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파리는 근대의 정서가 싹튼 곳이었거든요. 이에 지식인들은 또 한 번 큰 충격에 빠지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식민지에서 문학을 업으로 삼은 지식인이 왜 부역할 수밖에 없었는지 큰 맥락에서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문학을 한다라고 하지 않고 업으로 삼았다라고 한 이유가 있다. 식민지에서 문학 하는일은 목숨 걸고 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 문학을 업으로 삼은자들은 이미 목숨이 아까워 부역하기로 작심한 거다. 저들이 종주국인 일본과 중국 성쇠를 기준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했다는 사실이 그 결정적 증거다. 저들은 조국이 처한 식민지 상태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데 문학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고, 거꾸로 제국 일본 승리에 붙여진 의미를 좇아 문학(인으로서 삶)을 구성했다. 저들 각자마다 곡진한 사연이 있고 부역 스펙트럼도 단순하지 않겠지만, 일제 식민 통치 진경을 경험한 상태에서 하필 문학 행위를 삶으로 선택했다면 기본적 부역 고의를 차마 부인할 수 없다.

 

서정주 이야기는 극적이면서도 전형적이다.

 

서정주의 삶과 작품은 첫 번째 시집 화사와 두 번째 시집 귀촉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화사시집에서 서정주는 <랭보의 두개골>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랭보가 돌아다니다가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너는 신 존재를 믿느냐라고 물었던 일을 비판한 시입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 해도 랭보는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랭보 모더니즘은 실패했지만 자기만은 꼭 이뤄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서정주는 만주, 금강산, 해인사 말사가 있는 산속까지 방랑했습니다. 더럽고 추한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는 전 세계와 맞선 모더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시절 시 <자화상>에 나온 나는 뉘우치지 않겠다라는 말은 친일을 뉘우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속물 같은 세계를 떠나 방랑 세계로 뛰어들었던 사실을 뉘우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서정주는 화사시집이 나온 이후 모더니즘과 결별하고 친일로 들어섰습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었고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죠.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천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상대방을 이상화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쓰인 듯 한 사람을 이상 자아의 자리에 가져다 놓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대상은 점점 중요한 무엇이 됩니다. 결국 자기 자아를 지워버리지요. 특별한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한 사람을 이상 자아 자리에 들어다 놓습니다. 이를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정주 경우에도 그 시절 그가 흠모했던 대상이 바로 일본 천황이었으며 친일 파시즘을 찬양합니다. 그에 의해 통제받고 지시받기를 원합니다. 화사에서 귀촉도로 넘어가면서 강렬했던 자아를 없애버린 셈이지요. 어떤 문인들은 삶과 문학을 분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정주 경우를 보더라도 삶과 문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정주는 해방이 되면서는 이승만을 다시 그 자리에 놓습니다. 파시즘 체제 심미적인 무엇, 문학, 사고체계 유형이 반복됐지요. 친일을 얘기하면서 단순하게 친일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그때 만들어진 유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함을 느낍니다. 친일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서정주가 지운 자아 대신 영원성 자리에 가져다 놓은 표상은 전두환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런 행태를 놓고 예술에는 천재고 정치에는 천치라는 말로 그 순진무구를 찬양하는 자도 있다. 이런 논리는 오늘날 정명훈에까지 이어지며 예술계 전가 보도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하필 왜 예술인만은 정치 천치를 자랑할까. 사실은 그 말 자체가 순수예술론이 지껄이는 신념에 찬 동어반복이다. 정치를 모른다고, 몰라야 한다고 말하는 짓이 제국주의에 부역한다, 해야 한다고 말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 인식이 부역을 증강 재생산한다.

 

이런 상황에서 불어오는 탈식민주의 바람은 과연 무엇인가?

 

요즘 문학계에는 민족적인 것을 버리자는 탈식민주의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는 종군위안부들이 돈을 받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은 것입니다. 한국을 말살했던 일본의 군대와 일제에 대항했던 의병을 싸잡아서 '사람을 죽인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자기중심적이었던 이들이 민족적인 것을 탈피하겠다고 해서 우리가 덩달아 그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친일인명사전만드는 일을 국회에서 막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뿌리부터 세워야 하는 법인데, 이런 것을 막는 세력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민족의 근간까지 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사실관계조차 규명하지 않고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구체적인 실증자료 만드는 작업이 선행된 후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탈식민주의라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나는 스스로 부역자임을 고백하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저 뜨르르한 특권층 부역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지렁이 부역자지만 저들을 언급하면서도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또 다른 검열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탈식민주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일단 이 문제를 짚고 간다.

 

내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주의하는 일이 과연 적절한가? 탈식민주의와 내가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보다 훨씬 더 배타적이며 잔혹한 제국주의와 부역 권력 자국 식민주의가 나날이 증강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생각은 제국주의 앞에서 과연 무엇인가?

 

문학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탈식민주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문인들이 누구며 어떤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민족적인 것을 버리자.’라는 표현을 보면서 내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던 중에 선문대 교수 손종업이 쓴 글 <친일의 정신분석-친일문학의 해석 문제->를 읽었다.

 

손종업은 친일 논의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되면 도리어 교묘한 제국 논리에 말려들 우려가 있으므로 청산 이전에 정치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성찰이 없으면 우리 안에 키워온 민족국가의 형태를 띤 또 하나의 제국또는 우리 안에 간직된 제국적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그러면 제국 또는 제국적 고리는 무엇인가?

 

손종업은 식민지지배를 위한 일제 전략을 분할통치로 요약한다. 분할통치는 일제 특유 전략이 아니라 고대 로마 때부터 있어 온 고전적 통치술이다. 그런데도 손종업이 구태여 이렇게 요약한 뜻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제국 또는 제국적 고리를 정확히 아는 데 제국 권력을 단일한 것으로 추상화하는 일은 독이 된다. 식민지인을 갈라쳐 각각 다른 방식으로 통치해 복잡한 굴절을 일으키려면 제국 자체가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수천 개의 가면을 쓴 괴이한 존재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거기 빙의된 식민지인이 부역하는 양상도 단일화할 수 없는 복잡한 굴절을 그리게 된다. 부역이 지닌 이 복잡한 굴절을 구체적으로 읽어내지 못하면 제대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부역을 청산할 수 없다.

 

복잡한 굴절을 구체적으로 읽어내면 끝인가? 물론 아니다. 그다음은 무엇이고, 그러려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귀띔조차 하지 않은 채 손종업 글은 끝난다. 내가 손종업에게 품었던 의구심은 이 사실에서 비롯했다. 기존 친일 논의가 민족주의나 또 다른 제국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비판하고, ‘이효석에게도 저항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읽어 진짜 섬세하게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발톱을 숨기는 전술 아닐까, 운운. 물론 글 전체 맥락은 그렇지 않다고 시사한다.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렇든 아니든 나는 이제 내 말을 해야겠다.

 

손종업 같은 읽기 아닌 다른 많은 읽기 모두를 전선에 세워야 한다. 이분법적 외과적 읽기도 필수 불가결하다. 서정주가 그런 시를 쓰고 있을 때 어느 항일무장투쟁 전사는 제국 군대와 싸우다 총탄에 스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한 사람을 말하면서 항일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누락시키는 일은 그 자체로 고의적 친일 부역이다. 더군다나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강고한 제국과 부역 권력 시스템이 작동해 복잡한 굴절을 계속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닌 현재 부역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내 말 자체가 부역 언어가 아닌지 칼같이 살피려면 칼 들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을 직시해야 한다.

 

원효 어법으로 말한다: 친일에 관해 말하는 한 모두 맞다[皆是]. 진리 전경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모두 틀리다[皆非]. 그러므로 쟁[]을 세워야 한다[立諍]. 옹골차게 입쟁하고야 쟁이 다한다[破諍]. 화쟁[和諍]이다. 화쟁을 현대 제국 언어로 Networking이라 한다. Networking이야말로 제국주의 반대말이다. 정치적 용어로 번역하면 통일전선이다.

 

진정한 통일전선은 각성한 부역자, 그러니까 제국이라는 절대 조건을 삶에서 도려낼 수 없다는 진실을 뼈에 새기고 기어이 저항 틈을 내는 역설 주체가 평등한 연대를 이룰 때 형성된다. 평등 연대를 이룬 각성한 부역자 입에서 탈식민주의라는 말이 나올 리 없다. “유행처럼 번지고있다니 상당한 힘을 받는 모양인데 나는 이 논자들은 물론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한국 문학계 전반을 신뢰하지 않는다. 416을 대하는 자세와 글쓰기를 보고서 굳힌 생각이다. 이들 이름을 아래 식민지 시대 부역 문인 명단과 나란히 놓아야 하지 싶다.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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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일 줄은 차마 몰랐다. 비교적 이른 시각에 아무 작정도 하지 않은 채 출발해 무심히 들어선 도봉산 도봉천 계곡은 등산객이라기보다 행락객이라 해야 할 사람들로 너무 소란스럽고 너저분했다. 산에 들어서기도 전 냇가에는 벌써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소주에, 삼겹살에 거나한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앞을 지나 길이 끊어진 곳에 다다랐다. <출입 금지> 표를 매단 밧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밧줄을 넘어 직진했다. 물과 바위,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이 계속해서 돌아가라 윽박질렀지만 나는 그대로 앞을 향했다. 마침내 제법 높다란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가 이어주는 큰길이 눈에 들어왔다.

 

큰 계곡 길은 더욱 소란스럽고 너저분했다. 안전하게 잘 정돈된 길을 걷는데도 왜들 그렇게 스틱으로 땅을 찍어대는지, 산에 와서까지 구태여 돈 얘기를 떠들썩하게 지절거려야 하는지, 여성끼리만 있다 싶으면 미팅하자고 들이대는 놈팡이 표정은 왜 그리 게걸스러운지··· 능선 코밑에 이르러서야 고요가 깃들기 시작했다.

 

능선에 이르자마자 나는 원통사를 거치지 않고 무수천 계곡으로 바로 가는 길을 찾았다. <출입 금지> 표를 매단 밧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그 길로 들어갔다. 물론 처음부터 길을 잃었다. 스마트폰으로 방향을 확인하며 직진했다. 이번에는 절벽에 가까운 경사와 바위 낭떠러지가 돌아가기를 강요했다.

 

되돌아오고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중심 시각으로 헤매다 비 중심 시각으로 발견한 버섯들을 사진에 담을 때, 또 때늦은 각성이 들이닥치며 안심했다. , 이들이 나를 불렀으니 갈 길도 알려주겠구나. 바위틈을 이리저리 빠져나오다 보니 길 아닌 듯하나 인기척을 간직한 소로가 나타났다. 대뜸 어디쯤인지 알아차렸다.



원통사로 올라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에 이르러보니 길을 잃었다기보다 아예 길이 지워진 상태임이 틀림없었다. 원통사 쪽은 누가 봐도 길처럼 생겼는데 내가 내려온 계곡 꼭대기 길로 진입하는 초입은 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쉽게 들어서지 못함으로써 이곳저곳 인적이 지워진 결과였다. 길이 지닌 운명 아닐는지.

 

길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 삶도 그렇다. 누군가 먼저 살아갈 때 다른 누군가가 인기척을 듣든지 인적을 보든지 뒤따라가야 공생 서사가 형성돼간다. 먼저 사는 사람은 더불어 살 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뒤따라 사는 사람은 먼저 산 사람에게 고마워하며 그 삶을 뒤 사람에게 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살림 없이 삶은 없다.

 

이 단순한 이치가 무너질 때 길이 사라지듯 인간 공동체도 사라진다. 대한민국을 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 특권층 부역 집단이 틀어쥔 사회 모든 분야가 식민지 본성을 중첩적으로 지니고 있다. 본디 길을 찾는 일이 없는 길을 새로 내는 일과 같은 숲으로 우리는 깊숙이 들어왔다. 길 없는 숲에서 바른 방향으로 직진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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