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약물요법은 존속살해다

 

환자들 대부분은 여러 종류 약을 한꺼번에 처방받는다. 노인 환자들은 특히 그렇다.·······이 약들은 모두 인지장애, 착란, 낙상을 유발할 수 있는데, 노인들에게는 꽤 높은 사망률을 유발하는 증상이다. 그리고 대개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은 그런 증상을 고령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치매 또는 파킨슨병 같은 질환 징후로 잘못 해석한다. 하지만 의사가 약 처방을 중단하면 환자 중 다수는 분명히 몇 살쯤 젊어져서, 균형을 잡지 못해 사용하던 바퀴 달린 보행 보조기를 치워버리고 다시 활동적인 모습으로 돌아간다.”(235)

 

<8. 약 유행병이 창궐하고 있다>에서 이미 70대 노인쯤 되면 양약 서너 가지는 기본으로 복용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설마 하겠지만, 사실 노인 환자들에게는 약 욕심이 있다. 이는 모름지기 이들 세대가 지나온 식민지, 전쟁, 독재 세월에서 겪은 곤경·가난과 맞물린다. 밥 많이 먹으라는 말이 축원이었던 시절이 여전히 그들 가슴 속에는 살아 있다. 더욱 설마 하겠지만, 사실 노인 환자들에게는 약 자랑까지 있다. 한 보따리 약은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훈장으로 반짝인다. 왜 아니겠나. 공감한다. 공감한다고 해서 공갈범 희생양이 되는 꼴을 두 눈 뜨고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이런저런 양약 치료 받으며 전전하다가 경로당에서 침 한번 맞아보라는 소리 듣고 찾아온 노인들에게 일일이 물어 양약을 확인한다. 양의들은 한약 암만 봐도 모르지만 나는 양약을 잘 안다. 내가 유식해서가 아니다. 약학정보원이 자상하게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과다중복처방을 받고 있다. 이를 피터 C. 괴체는 다중약물요법이라 하는데, 내가 과다’ ‘중복이라 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같은 질병에 같은 기전을 지닌 약물을, 심하면 서너 가지까지 겹쳐 처방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상세히 말해준 다음, 양의한테 가서 항의하지 말고 힘들어 그러니 줄여 달라고 하라, 초군초군 일러준다.

 

넘어져서 타박상이나 염좌를 일으켜 오는 노인에게는 특히나 신경을 쓴다. 약 때문에 넘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대부분 미심쩍어한다. 넘어지면 사망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할 때야 비로소 눈이 동그래진다. 넘어져서 대퇴부 골절이 일어나는 경우 절반가량이 1년 이내에 사망한다는 통계를 들이밀어야 할 경우도 없지 않다. 상황이 이런데, 본인도 가족도 양의사도 무슨 증상이 생기면 거기 맞추어 약을 추가로 먹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아는 자는 알아도 모르는 자는 몰라서 노인을 소리 없이 학대하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에게 노인은 여성, 아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봉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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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회사는 빅브라더다

 

  우리가 약 유해성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임상의는 심각한 유해 반응을 당국에 보고하게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1% 정도만 보고가 이루어진다고 추정된다. 의사들은 바쁜데다, 유해 반응이 약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무시해버리곤 하는데,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유해 반응을 보고한 의사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 제약회사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 환자에 대해, 그리고 환자가 복용하는 다른 약 등에 대해 온갖 질문을 하며 괴롭히기 때문이다. 약 위해성에 진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피해자 제외하고 말이다.(217-218)

  약을 안전하게 처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약 정보를 임상의가 알아낼 수 없으므로, 당연히 의사들은 의학적 오류를 많이 범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규제당국이 약을 하나하나 별개로 볼 뿐, 의사들이 자기가 사용하는 약들에 관한 모든 경고를 다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데 있다. 규제당국에 중요한 사실은 이뿐이다: 우리 잘못 아님. 우리는 경고했음.(233)

 

의사에게 신약을 설명·소개하는 제약회사 신약 정보 담당 영업 사원을 detail man이라 한다. 악마는 detail에 있다는 말과 미묘하게 어울린다. detail을 놓칠 수밖에 없는 임상의 조건과 이를 악용하는 제약회사와 규제당국 detail은 비대칭 대칭을 이룬다. 제약회사와 규제당국은 악마 짓도 이렇게 야비하게 한다. 의사는 돈에 낚여 자의 반 타의 반 저들 악마 짓에 부역한다. 그 틈에서 환자가 죽어간다.

 

이 틈은 환자 이외 사람들에게는 벽이나 다름없다. 환자에게는 무섭도록 큰 허방이다. 왜냐하면 의사를 신뢰한 결과 빠져드는 사망 공간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망 순간까지 환자들은 의사, 그러니까 제약회사, 그러니까 규제당국이 악마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살인자 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살해당하는 일보다 더 참담한 일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병으로 죽는 사람이 겪는 이중고다.

 

제약회사와 규제당국이 한통속이라는 사실 내막은 단순한 부패동맹을 넘어선다. 자본이 권력을 먹어 권력을 사적 형태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러다가는 기업이 정부를 통째로 사는 일이 벌어질 터이다. ‘사실상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 사회 경우 삼성이 권력의 일정 부분을 매수한 측면을 두고 삼성 장학금이라 표현한다. 공동체 전체가 거대 기업 독점 망에 걸리는 일이 꼭 상상만은 아니다.

 

종교적 권위를 지닌 의사가 처방하는 약으로 인간 정신을 지배한다면 의외로 상상은 간단하게 현실이 된다. 사실상 SSRIADHD 약은 이미 이런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양극성장애에 일단 포획되면 한평생 저들 백색 화학합성물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광경을 가까이서 목격한 바 있다. 앞으로 속수무책 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자꾸 떠드는 거다. 부디 이 소식이 널리 퍼져가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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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제국 권력, 부패 제약회사, 그리고 종말

 

한 설문조사에서 FDA 소속 과학자 중 70%FDA가 허가한 제품의 안전성을 확신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194)

  제약회사들은 정권에도 손을 뻗어 부정부패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제약회사들의 로비는 워싱턴 D.C.에서 가장 심하다. 제약회사들은 또 정치 후원금도 두둑하게 낸다. 후원금은 대부분 공화당으로 간다.·······1994년에는 공화당에서 그나마 FDA마저 아예 해체하고 제약회사들의 자체 규제를 허용하려고도 했다!(202)

  미국 대법원은 FDA가 허가한 의료기기로 피해를 본 환자는 제조사를 고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207)

 

이쯤 되면 제약회사가 제국 권력을 부패로 물들이는지, 부패한 제국 권력이 제약회사 비즈니스 모델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혼돈 상태다. 물론 역사적으로야 제국주의가 제약회사를 낳았지만, 일정 시점을 지나면 인과관계가 뒤엉키고, 어떤 부분에서는 심지어 역전하기도 한다. 오늘날 제국 USA가 다다른 패권적 금융제국에서는 그 인과관계를 가리는 일이 전혀 의미 없다. 문제가 너무 심각해 판단 아닌 결단을 요구하는 카이로스 선상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카이로스 표지는 대멸종, 그러니까 인류에 관한 한, 지구 종말이다.

 

종말은 유구한 세월 동안 인류에게 신화였다. 그러나 행정·입법·사법 모두가 저렇듯 속속들이 썩은 돈 놀음 복마전에서 제국주의 지배 전략이 나오는 현실을 보면 종말 이야기가 마냥 신화만은 아님이 틀림없다. 만일 제국이 퍼뜨린 대로 유일·거대·인격신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제국을 심판해 종말이 의로운 실재임을 증명해야 한다. 물론 그럴 리 없다. 그러니 그 대신 인격에 갇히지 않은 불인(不仁) 팡이실이(networking) -그를 가이아라 표현하든 않든-이 제국에 종말을 선물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는 사태를 최소화하려면 소소(小少) 공동체 반제국주의 팡이실이(networking) 운동이 동시다발로 일어나야만 한다.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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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단체가 환자를 단체로 죽인다

 

의약품 상술을 다루면서 환자단체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다. 환자단체는 대개 거대 제약회사 자금 후원을 받는다. 그래서 제약회사와 같은 목소리를 낸다.”(185)

 

모든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모든 인간이 법 앞에서 실제로는 불평등한 까닭은 이 말이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에서 왔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은 서구 제국주의 유일신교가 만들어낸 가장 큰 거짓말이다. 이치상 불평등한데 평등하다고 했대서 거짓말이 아니다. 평등을 균질로 인식했기에 거짓말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균질화된 인간은 고유한 특성을 박탈당하고 오직 도구적 기회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이때 서구 기독교가 발하는 사랑은 자아를 사로잡은 결핍감을 채우려는 욕망이므로 그 대상은 이웃 인간이 아니라 사랑 자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랜드라는 기독교 기업이 같은 신앙, 균질한 신앙인을 근거로 임금을 착취해 사회 문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문제는 사주만이 아니다. 임금을 착취당하면서 기꺼이 견딘 노동자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정반대 풍경을 상상하는 밝은 의식은 어두운 무의식에 덮인다. 같은 신앙, 균질한 신앙인이라는 대전제가 타자를 착취한다는 가해의식을 먹어 치운다; 타자에게 학대당한다는 피해의식을 먹어 치운다.

 

소규모 모임이나 사업장에서 서로 가족 호칭으로 부르는 행위도 여기에 해당한다. 유사 가족 의식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뒤에 도사린 늪을 모르지 않으면서 빠져든다. 혼인으로 맺어지는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식 가면 주례한테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며느리라 생각 말고 딸이라 여겨라, 사위라 생각 말고 아들이라 여겨라. 그 결과가 대부분 어떻게 나타나는지 모를 수 없는데도 여전히 불패 덕담이다.

 

트인 눈으로 저간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누가 어떻게 상전으로 군림했고 누가 어떻게 종노릇을 해왔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상전 노릇 한 자들은 걸핏하면 조국과 민족을 들먹이며, 하나라고 속삭이며 등골을 빼먹어왔다. 종노릇 한 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제 살을 베어가며 그 하나를 지키는 일이 도리라고 믿어왔다. 그 잔혹사는 자신감에 눈이 먼 두 인간 패악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하나라는 허위의식에서 놓여나야 한다. 피차 다른 그래서 깎듯이 존중해야 하는 존재임을 전제해야 비로소 하나가 지닌 참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같다고 포개 놓고 착취·살해하는 제국주의 속임수를 깨뜨려야 살 수 있다.

 

어리석기 짝이 없으면서도 자신감에 가득 차 제 공동체 등골을 파먹고 있는 특권층 부역 집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민함으로 무장한 제국 제약회사가 균질화 마케팅을 놓칠 리 없다. 환자단체를 매수, 심지어 설립해서 환자를 단체로 죽이고 있다. 환자단체는 가해의식이 없다. 단체로 죽어 나가는 환자는 피해의식이 없다. 이 무지를 아는 제약회사만이 미소를 머금은 채 돈을 쓸어간다. 바로 그 돈으로 산 독극물이 팔만 뻗으면 바로 손에 집히는 한 우리 모두는 믿으면서 웃으면서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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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상충을 먹고 사는 의학지

 

이익 상충은 보통 일차적 이익(환자 복지, 연구 타당성 등)과 관련된 전문직 판단이 이차적 이익(금전적 이득 등)에 의해 대체로 과도한 영향을 받는 상황으로 정의한다.(123)

최고로 권위 있는 학술지들도 제약회사 임상실험을 다루면서 심각한 이익 상충을 경험한다. 너무나 비판적인 입장에 서면 재인쇄 판매 기회를 놓쳐 큰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학저널전 편집장 리처드 스미스는 의학지는 제약회사가 지닌 또 다른 마케팅 무기라는 논문을 썼다.(124)

·······제약회사들은 의사와 의학지 편집자를 매수함으로써 의학을 건강 증진이 목표인 공공재에서, 금전적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이 일차적 기능인 상품으로 변모시켰다.·······유감스럽게도 의학지는 의학 부패 실질적 원흉이다.”(131)

 

내 아침 출근 과정에는 40분가량 산길 걷기가 포함된다. 관악산 까치 능선이 한강으로 내달리다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그중 왼쪽으로 살짝 틀면서 남북으로 살피재를 이루는 동서 방향 능선이다. 작지만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제법 원시림 느낌을 자아낸다. 큰 나무들이 자연사해서 곳곳에 쓰러져 있다. 지척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건만 꾀꼬리, , 되지빠귀, 물까치 같은 새들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 청설모가 나무 위에서 나를 구경하기도 한다. 이런 숲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마치 60년 전 오대산 숲길을 걷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 고요를 깨뜨리는 고약한 사람이 있다. 70대 전반 남성인데 스마트폰으로 종편 뉴스를 들으며 걷는다. 나는 그를 대할 때마다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그에게 뉴스는 이미 단순한 소식이 아니다. 진리며 계시다. 구원받을 복음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세뇌한바 저들은 무한한 신뢰로써 뉴스 앞에 엎드린다.

 

어디 저들뿐이랴. 제국주의 제약회사가 건네주는 자료를 의사들은 뉴스로 믿는다. 그런 자료를 받아 적은 의사 논문을 의학지는 뉴스로 싣는다. 의학도나 관련 일반인들은 의학지를 뉴스로 읽는다. 결국 뉴스 본질은 가짜가 된다. 가짜 뉴스는 이른바 늬우스교를 일으키는 태초 말씀으로 군림한다. 하염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늬우스를 경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스마트폰이든 의학지든 결국 예배를 위한 지성소다. 산책도 아니고 연구도 아니다. 어처구니없다 싶다가도 처연해진다. 대체 인간이란 존재가 고작 이뿐인가, 울컥해진다.

 

마케팅과 연구가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과학 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홍보와 정견이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정치 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구복과 구원이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종교 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개소리가 접수한 백색 사회는 의도된 무지를 탑재한 자들과 알고 나서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장착한 자들을 사냥개로 풀어놓는다. 녹색 인간은 물어 뜯겨 피를 흘린다. 핏빛이 붉을수록 녹색은 선명해진다. 녹색 선명함 하나를 잃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내준다. 진욕(進辱)이 개벽을 앞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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