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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山無人

海無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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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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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성적 직관·······

  남성과 여성이 대립할 때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는 까닭은 여성은 공감을 요구하고, 남성은 수긍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감성의 문제이고, 수긍은 이성의 문제입니다. 여성들끼리 수다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공감에 터 잡은 맞장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들끼리 계약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수긍에 터 잡은 맞바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울림에 대한 직관적 반응입니다. 수긍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타당성에 대한 이지적 반응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사람과 삶, 그리고 병을 느끼는 것은·······이성으로 판단하고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이성은 보는 감각이고, 직관은 듣는 감각입니다.·······들음으로 시작하는 의학은 겸손합니다. 환자와 따스한 공감, 평등한 소통, 나아가 일치와 통섭을 지향합니다. 눈물이 있고 환희가 있는 세계를 꿈꿉니다. 보고 판단하는 의학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입니다.

  이성적 판단은 분석과 평가라는 개념의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 개념의 매개 때문에 이성은 생명의 본령에 더듬거리며 접근해야 합니다. 쓱쓱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거침없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결국 절대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절대고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소외되는 법이 없습니다.(132-133쪽)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가 제법 오랜 기간 상담하러 옵니다. 물론 초기 몇 달을 제외하고는 오다 말기를 반복하며 시난고난 흘러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병적 이성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삶의 모든 부분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올 때마다 쏟아내는 폭포수 같은 말들은 거의 모두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래서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러는 한편 괴로움에 빠진 자기 자신을 무조건 받아들여줄 사람을 찾습니다. 정작 받아들여지면 거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물론 그는 의사인 제 진단과 처방조차 깊이 공감하지 못합니다. 병적 이성에 갉아 먹혀 파리해진 이성으로 겨우 수긍만하다가 속절없이 놓치고 맙니다. 훈습의 가능성이 닿지 않는 긴 시간을 헤매다가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기를 거듭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부모자아’가 내면화한 허구적 이성에 제압되어 자기 자신을 분석·비판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아픕니다.


흔히 말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낸다고. 그러나 그렇게 이겨내진 고통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그 정도에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알량한 승자의 허세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작동할 수 없는 엄혹한 정서적 통증으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전히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정서적 통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암은 인정하면서 어찌 그런 우울증은 인정하지 않는가? 정서의 통증이 몸의 통증에 비해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그렇다면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힘인가? 저 통속한 승자의 허구적 논리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무지와 무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독자적인 쓰임새를 정해두고 있습니다. 정서는 질병, 그러니까 고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를 말하며 감성은 건강, 그러니까 소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입니다. 둘의 실재가 달라서 그리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비대칭의 대칭으로 나타나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입니다. 하여 제 경우 감성적 통증이나 고통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서적 직관이나 공감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 말의 공통 기반인 중용적 감정이라는 말을 이성과 의지에 마주 세워서 그것의 정체를 밝혀보겠습니다.


감정은 몸에서 일어난 최초의 마음 사건입니다. 반대로 마음에서 일어난 최초의 몸 사건입니다. 감정은 몸이자 마음입니다. 감정은 몸만도 아니고 마음만도 아닙니다. 변방의 마음입니다. 변방의 몸입니다. 마음 가운데 가장 단단하고 셉니다. 몸 가운데 가장 말랑말랑하고 여립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몸이 마음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마음이 몸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런 진실을 놓칠 때 질병이 생깁니다. 감정의 상처가 상처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상처 받지 않습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상처받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정서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이 진실을 놓칠 때 치유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감정의 치유가 치유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치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치유해야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감성이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을 치유하려 할 때 요청되는 것은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가 아닙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입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으로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이 치유되면 이성과 의지가 정상 작동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인간 생명이 자라온 역사의 과정이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인간 생명이 지니는 에너지의 역학관계 또한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정에서 넘어진 자, 감정을 짚고 일어섭니다. 정서적 통증으로 넘어진 자, 감성적 직관, 그러니까 공감을 짚고 일어섭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치료합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합니다. 바로 이것이 동종의학입니다. 아니 공현의학입니다.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위중한 질병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울증은 바야흐로 우리에게 최후의 불치병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하루에 40명씩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에 눈멀어 있는 나라입니다. 이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대, 넘어져서 아픈, 똑같아서 서러운, 예은이 이름만 떠올려도 왈칵 눈물 나는 사람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일어섭니다. 공감으로 나아갑니다. 기대 없는 설렘으로 함께 갑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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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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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

  ·······남성은 부분에 집중합니다.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봅니다. 그러므로 그 밖의 것은 눈에 안 들어옵니다. 이를 ‘중심 시각’이라고 합니다. 이런 감각은 원시시대 사냥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전체를 부분의 합이라고 보고 부분을 분석하는데 집중하는 삶의 태도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부분을 분석해서 다 모아 놓아도 전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집중 또 집중합니다.·······

  여성은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 상황을 한눈에 읽는 데 능합니다. 중심 시각을 흩트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감각입니다. 아마 월경-임신-출산-육아-완경으로 이어지는 변화와 돌봄의 삶, 그리고 전통적인 가사노동의 경험 등에서 비롯한 감각일 겁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의 명암과 흐름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과 늘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생각도, 행동도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진행할 수 있습니다.·······

  병도 생명 현상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병만 뜯어서 본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입니다. 병‘만’ 보다가는 병‘도’ 못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의사는 궁극적으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과 삶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에 주의하는 생명 감각이 아니면 참의사가 되기 어렵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의사 두 분이 붓다와 예수라면 그 분들의 공통점은 사람과 삶을 전체로 꿰뚫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각에 포착된 사람과 삶은 다름 아닌 슬픔이었습니다. 붓다의 자애로움에 슬픔이 녹아 있기에 자비慈悲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사랑에 슬픔이 녹아 있음을 신약성서는 특별하게도 ‘예수께서 우셨더라.’는 말을 세 번이나 등장시킴으로써 드러냅니다(웃으셨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사의 감각이 머물러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요.(130-131쪽)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을 낸 ‘바둑 황제’ 조훈현이 최근 정치를 하겠다고 큰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고 ‘멘붕’이 와서 바둑 발전을 위해 집권여당으로 들어간다고 했다니 과연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대한민국 정치판에 대한 정밀한 형세판단 끝에 내린 결론이라 전제하고 일단 추이를 지켜보겠습니다.


한 방면에서 ‘도가 트이면’ 모든 방면의 안목이 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견성한 승려들만 지니는 생각이 아닌 모양입니다. 하기는 산꼭대기 올라가 보면 발아래 깔린 수많은 길들이 결국 한곳으로 모이니 자신이 올라온 길이 아니라 해도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테지요. 특이한 것은 우리사회의 경우 그런 고수들이 정치에 발을 담글 때는 대부분 수구집단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도가 트인’ 사람들이라 범속한 사람들은 모르는 깊은 뜻을 지니고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이 그 동안 내왔던 정치적 결과를 통해 판단하건대 그 깊은 뜻이라는 것은 사실상 실체가 없는 허깨비임이 분명합니다. 이 길로 ‘도가 트인’ 사람이라고 해서 저 길로도 ‘도가 트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싶습니다. 강자의 위선 클럽에 합류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명쾌한 설명 아닐까요.


이치를 따지자면 인간 그 누구도 전체적 안목을 완벽하게 지닐 수 없습니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고 매순간 더 큰 맥락을 고려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계가 비대칭의 대칭으로 구성되고 운동한다는 진실 안에서 삶의 감각을 벼려내야 합니다. 한 쪽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한 방향으로 경도되어 부분적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자체 오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침내 권력으로 변하여 타자를 강제하고 착취합니다. 모든 사상과 종교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과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날 부분의 전체 지배는 불가피한 최소한을 뒤집고 제약 불능의 최대한으로 군림하며 전 인류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이 폭력은 가파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은 언젠가 기술특이점을 형성하면서 극소수 지배층의 신노예제사회 전략에 획기적인 공헌을 할 것입니다. 이 비관적 예측이 단지 예측으로 끝나려면 “수많은 감정들, 수많은 긴장감들, 이 느낌들이 모이고 쌓여 인간에 존경심으로 귀결되는” 전체적 생명 감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돈만이 가치이고 돈 버는 능력만이 자랑인 이 세상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오늘 아침 김소연 시인이 쓴 <인간의 감정들>이라는 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가 네 차례의 대국을 치렀다. 처음엔 알파고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점차로 이세돌 기사에게 관심이 옮겨가는 게 느껴진다. 승패의 결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터뷰나 기자회견 같은 것조차 이세돌에게만 가능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세돌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알파고는 우리의 존경을 얻기엔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더 이상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길 수 없게 되더라도, 우리가 알파고를 존경할 일은 아예 없거나 요원해 보였다. 그는 조마조마해했고, 바둑알을 손끝에 쥐고서 떨었다. 떨리는 손끝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이 실려 있었으니, 그 손끝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손끝에 마음을 주었다. 사람들은 패배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을 할지가 궁금했고, 그는 가장 차분하고 가장 깨끗한 대답을 했다. 듣는 우리는 감탄을 했다. 당황하고 긴장한 표정, 잔뜩 찌푸린 미간, 초조가 극에 달했을 때에 담배를 피우며 보였던 뒷모습.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에 우리는 마치 내 일처럼 아슬아슬해했다. 그는 세 번을 졌으면서 마침내 이겼고 함박웃음을 보였다. 세 번을 졌으면서도 마침내 이길 수 있는 게 진정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감정들, 수많은 긴장감들, 이 느낌들이 모이고 쌓여 인간에 존경심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파고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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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3-15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들의 수구집단행에 대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

2016-03-17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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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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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기체·······

  사람 몸의 각 부분은 기계의 부품이 아닙니다.·······미토콘드리아는 독자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합니다. 세포 하나하나·······피부에도 기억과 사유 능력이 있습니다. 심장은 다만 펌프가 아니고 뇌와 같은 성격의 기관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소화관에 있는 장신경은 자율신경이나 뇌의 기계적 조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소화 작용을 지휘합니다.

  한편 이렇게 독자성을 띤 각 부분은 상호연관성 없이 따로 떨어져 있는 고립 개체가 아닙니다.·······피부는 신경과 발생의 뿌리가 같습니다. 그래서 아토피 질환은 정신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추신경은 장신경에서 진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화 상태는 감정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유기적인 복합생명체로·······몸의 각 부분은 상당한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전체적 관련성을 놓지 않은 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부분마다 전체 운동의 과제와 일정을·······인지하여 유기적으로 정보와 에너지를 교환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부품이 조립된 기계로 보는 남성의학은 근본 관점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128-129쪽)


5년 전, 40대 초반 제자 하나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월경 출혈이 20일째 멈추지 않아서 산부인과에 갔더니 수술해야 한다 하더랍니다. 즉시 예약은 잡았지만 몸에 칼 대는 게 무서워 한의사인 제게 연락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뜸 수술을 보류하고 자궁과 대화하라고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 증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진심을 다해 왜 그런가 물어보라 했습니다. 그는 과연 선생님다우신 대답이라며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음 날 밤늦게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출혈이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네 남편이 일시적 현상이라 하지 않더냐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시냐고 그가 놀라 되물었습니다. 이틀 뒤에는 그도 인정할 것이다, 웃으며 말해주었습니다. 물론 상황은 거기서 이미 종료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신비론 냄새를 맡는 분은 아무래도 기계론mechanism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기계론으로 위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밖에 달리 길은 없을 것입니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수술 대상으로 진단한 병이 대체 어떤 우연의 일치로 그렇게 넘어갔을까요? 이거야말로 신비한 논리입니다. 아니면 산부인과 전문의의 오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 만에 출혈이 우연히 멈출 수 있는 병 아닌 병을 수술 대상으로 진단한 그 산부인과 전문의의 의학은 과연 무슨 의학일까요? 그게 바로 서구의학, 그러니까 기계론에 터한 의학입니다. 기계론 의학으로 오진한 중병이 우연히 나았다 한다면, 이 또한 기막힌 신비론 아닌가요. 신비론은 필연적으로 기계론과 적대적 공생 관계입니다.


유기체로서 생명은 신비론과 기계론이 마주하는 변방에 핀 실재의 꽃입니다. 유기체에는 기계와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신비성이 존재합니다. 유기체에는 신비와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기계성이 존재합니다. 이 모순이 분열 없이 공존하므로, 이 역설이 멀쩡하게 살아 있으므로 양쪽 모두한테 오해받거나 공격받습니다. 예컨대 사회정치적 유기체론은 보수·반동 집단이 체제 유지를 위해 신비론의 외피로 써먹는 저급한 이데올로기입니다. 대놓고 이 말을 떠벌이지는 않으나 저간 우리나라 지배층의 논리가 꼭 이와 같습니다. 극단주의가 어찌 악용하든, 유기체로서 생명의 본령은 각기 독자성을 지닌 개체들이 구조-기능-정보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합을 생성·유지하는 운동입니다. 유기체의 연합 운동은 신비에 기댄 권위, 기계에 기댄 억압 모두에 저항합니다.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개체는 부품이 아닙니다. 고유한 주파수를 지닌 생명입니다. 상호 소통합니다. 상호 소통하는 개체들의 연합인 전체는 불변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연합의 과정을 따라 흘러가는 사건입니다. 사건에는 권력이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유기체 생명 안에서는 극단의 통합도 극단의 해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사회가 정녕 유기체로서 생명에게 배우려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매판독재분단고착 세력이 쥔 극단의 패권부터 분쇄해야 합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실체화한 전체주의 세력의 수탈을 더는 방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전이 교설하는 각자도생의 구원론을 타파해야 합니다. 세월호에 탔던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세월호사건이 남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이 참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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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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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동적 흐름·······

  남성이 주목하는 입자는 불변하는 공간구조물입니다. 몸은 물론 마음도, 병도 그런 공간구조물입니다. 그러나 여성은 딱딱한 공간구조보다 율동과 변화를 통해 생명과 병을 느끼고 포착합니다.·······

  변화하는 흐름으로서 삶과 병은 아무리 정교하게 포착해도 건축학적 구획과 궤도를 넘나들게 마련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이탈과 역류, 혼합과 분지, 비약과 몰락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성의 생명 현상, 특히 마음이 남성이 만든 구획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경계를 가로지르거나 공존 병리 현상이 복잡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울증에서 여성은 정형성을 벗어난 우울증일 경우가 많습니다. 남성 위주의 정형에 맞춘 치료가 전혀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황이 흔들릴 때 남성은 불변하는 구조와 구획, 패턴으로 그것을 제압하려 하지만 여성은 다양한 변화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변화의 결을 감지합니다. 변화 속에서 변화에 유념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개념에 사실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격자 틀을 가지고 사람과 삶과 병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도, 병도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갈 도상의 존재라는 사실에 깊이 주의합니다. 그 역동적 과정에 동참함으로써 유익한 간섭파를 일으킬 길을 모색합니다.(126-128쪽)


가투街鬪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일상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 나라 민주화운동에 일말의 기억만이라도 있는 사람한테라면 ‘가투’가 소환해내는 풍경, 냄새, 소리란 가뭇없이 사라졌다가도 문득 들이닥치는 플래시백 같은 무엇일 터입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지나치게 일찍 상처로 감지했기 때문에 저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증득證得이 더뎠습니다. 서른 즈음에야 가까스로 대한민국의 실상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깨달음으로 주춤주춤 현실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치열한 가투 현장에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를 전혀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백골단’에 쫓기거나 잡히는 상황에서 겪는 보호받지 못하는 자의 공포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제가 생각해낸 유일한 방법이 검정색 정장과 넥타이였습니다. 실제로 막다른 골목에서 홀로 여러 명과 대치한 적이 있었는데, ‘백골단’도 검정색 정장을 입고 검정색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신사(?)를 차마 때리거나 잡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홀로이거나 여럿이어도 조직·구조가 아닌 경우는 불안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원시사회의 소박한 것에서 현대사회의 고도한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조직·구조의 진화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진화 과정에서 조직·구조의 헤게모니를 남성이 독점해왔음은 물론입니다. 남성 헤게모니블록은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는 물론 자연까지도 조직·구조의 틀로 통제했습니다. 분석적·기계적 방식으로 안정되게 관리·수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도 일찌감치 여기에 복속되었습니다. 이치로 따지면 인간이 만들어낸 조직·구조는 인간의 몸을 모방 또는 대유代喩한 것입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관계는 뒤집혀 도리어 몸을 문명적 조직·구조의 관점에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질병 자체에 대한 이해는 물론 진단과 치료도 당연히 그렇게 역전되었습니다. 주류 서구의학이 몸을 기계구조로 보고 치료를 고장난 기계 고치듯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전가의 보도가 다름 아닌 수술입니다. 수술은 몸 조직·구조에 일으키는 토건사업입니다. 토건은 남성적 착취의 전형입니다. 남성의 토건의학은 정신질환에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저들에 따르면 정신이라는 것도 결국 뇌 조직·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 현상은 조직·구조의 안정성 이상의 것입니다. 조직·구조는 바로 그 이상의 것에 이바지하기 위한 인프라일 뿐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역동적 흐름을 통해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 경이로운 창조입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은 바로 이 변화와 창조가 뿜어내는 빛입니다. 인간 생명에게 일으킨 남성적 토건의학의 ‘4대강사업’은 ‘녹조’와 ‘큰빗이끼벌레’ 같은 독성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보’를 터야 합니다. ‘강물’을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흘러야 삽니다. 살아야 생명입니다.


복잡하게 뒤엉킨 정신장애를 지닌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 이야기를 자꾸 조직하고 구축합니다. 그 속에 들어앉아 타인을 조종하려 합니다. 한사코 같은 증상을 거듭 말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과 변함없는 동맹 조직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오늘도 지치지 않고 말해줍니다. 


“안전한 성을 쌓는 치료란 없습니다. 치료는 변해가는 것입니다. 변화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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