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만큼 나는 술을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대뜸 술부터 떠올린다. 서양 사람 기준으로 보면 알코올 중독 표지겠지만, 나는 행복하게 음식 먹는 자리에 술을 금상첨화로 얹는다. 술을 마시려고 좋은 안주 찾는 일은 없다. 결국 내 음주는 반주다. 백반집에서 저녁 식사할 때 반주를 곁들인다.

 

가끔은 남겨 놓았다가 다음날 마시기도 한다. 어느 날인가 기억에 의존해 술 냉장고 문을 여니 같은 상품 거의 같은 양 남겨진 술병이 둘 있다. 신경 쓰지 않고 둘 중 하나를 집어와도 별일 없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내 성품 따라 잠시 망설인다. 이내 구별 방법이 떠오른다. 남길 때 술병 뚜껑에 하는 작은 내 행동 덕분이다.

 

뚜껑을 온전히 분리할 때는 날카로운 톱니 모양 이음새가 남는다. 이치상 그 이음새는 바깥으로 휘어진다. 자칫하면 손을 벨 수도 있다. 살짝 두드려 안쪽으로 조금 밀어 넣으면 안전하다. 오래된 내 습관이다. 이런 습관을 지닌 사람이 나 말고는 없으리란 전제하에 둘을 비교한다. 비교는 적중한다. 사소하지만 내밀한 슬기로 여긴다.


 

내가 이런 습관을 쟁여놓은 곡절이 있다. 영유아기부터 나는 내 삶 모든 과제를 거의 혼자 힘으로 해결해 왔다. 부모가 이끌고 함께 하고 뒷감당해 주지 않아서다. 예컨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대학과 대학원을 네 곳 나왔는데 부모가 등록금 준 적은 두 번뿐이다. 늘 모든 상황에 주의하고 대비해야 했으므로 내게 신중은 디폴트다.

 

물론 이 디폴트는 비대칭 대칭으로 작용한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준 기본 동력이기도 하고 나를 깊은 우울장애에 빠지게 한 병인이기도 하다. 성할 땐 신중이지만, 아플 땐 결정 장애. 이 줄타기가 주는 곤경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칠십 년 동안 갈마들며 이 둘은 결국 내 인격 기조를 이룬다.

 

남겨진 술을 천천히 마시면서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본다. 여느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한 삶은 아니다. 여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성취가 있다. 그 성취는 내밀하면서도 객관 근거를 지닌다. 그 근거에 여느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따름이다. 유감없음을 넘어 사뭇 감사하다. 내가 나일 수 있었으므로.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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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학 연구자 이소영이 쓴 식물에 관한 오해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훼손하기 좋을 만한 대상을 눈으로 고르는 데에 종 특유의 똑똑함을 발휘한다.” 나는 이 한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고 대뜸 알아차린다. 이 책을 발견하는 과정에 식물과 그 이전 생명들이 지은 팡이실이(hyphaeing), networking이 작동했음 또한 알아차린다.

 

30분가량 숲을 걷는 출근길 가에 오동나무 노거수가 있다. 언젠가부터 그 앞에 후계목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유심히 보면서 지나다녔다. 변화 과정이 눈에 띌 때는 사진에 담아 두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듬지가 뜯겨 나간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다. 놀라움보다 먼저 솟구친 감정은 맹렬한 분노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커다랗게 소리치고 말았다. “어떤 새끼야?!”

 

남은 줄기는 서서히 푸른빛을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보니 잘려 나간 바로 아래 양쪽에서 새 줄기 둘이 돋아 자라나고 있었다. 감동에 겨워 손뼉을 쳤다. 다음 순간, 걱정이 들이닥친다. 얘들도 누군가 꺾어버리지 않을까? 얼마 뒤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더 세게 욕을 퍼부어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하릴없이 다음 봄을 기다린다. 생명은 포기하지 않으니까.



이듬해 봄. 밑동 길지를 택한 새 줄기가 중력과 맞짱 뜨며 옹골차게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그리고 셋으로 분기한다. 이번만큼은 안 된다. 나는 그들이 사람 눈길을 끌지 않도록 다른 풀과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위장해 준다. 그러나 그게 통할 리 없다. 또 불길한 생각에 빠져드는 나를 어쩌지 못한다. 걱정은 또 그렇게 현실이 되고 만다. 새 줄기 셋이 몽땅 잘려 나갔다.



 

왜 자꾸 이러는데?!” 빽 소리를 친다. 순간, 동일인 소행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한 살해 의도를 가지고 저질렀음이 틀림없다. 이번에는 정말 궁금했다. “정말 왜 이럴까?” 즉답을 찾지 못한다. 이런저런 추론과 상상을 해보지만, 며칠 동안 속만 시끄러울 뿐이다. 그러다가 광화문 교보에서 식물에 관한 오해와 마주한다. 그 의문과 무관했음은 물론이다.

 

전혀 다른 생각으로 읽어 거의 끄트머리 <왜 식물에 낙서를 할까>에 다다른다. 낙서도 훼손이고 훼손 극한은 살해니까 큰 문맥에서는 앞에 인용한 문장 하나쯤 예상하지 못할 바 아니나, 바로 앞뒤를 잇는 치밀 문맥상으로는 오히려 없어야 매끄러울 문장이 보편 경구처럼 좌정하고 있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 짐작은 할 만 하지만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돌출성이 크다.

 

이 큰 돌출성이야말로 내게는 벼락같은 화두로 작용한 선물이었다. 마치 장량을 깨우치기 위해 던져놓은 황석공(黃石公) 신발이나 시각 같다고나 할까. 나는 이 문장을 부둥켜안고 사유를 재우친다. 단도직입 번역한다. “인간은 특악한 훼손(살해) 본성을 지닌다.” 그 본성은 고대와 근대 두 번에 걸친 광범위한 이주 정착형 제국주의 물결이 구성하고 극한으로 증폭시켰다.

 

제국주의는 인간이 지닌 공동체 본성을 파괴한다. 공동체 본성은 상생 평등 네트워킹이다. 상생 평등 네트워킹을 일극 지배 계급구조로 대체한 제국은 필요 넘어 축적하기 위해 제국 바깥 모든 세계를 함부로 대놓고 훼손하고 살해한다. 진보, 성장, 그리고 구원이란 주술을 써먹더니 이제는 쾌감만을 위해서도 타자를 훼손하고 살해한다. 훼손과 살해는 익숙한 생활 양식이다.

 

숲을 걷는 인간에게 길가 어린 오동나무 한 그루란 대체 무엇인가. 그 인간은 왜 거듭해서 그 어린 생명을 훼손하고 우듬지를 살해했을까. 그 작은 나무가 위험해선가. 그 짓이 건강에 좋아선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혹 그 짓이 재미있어선가. 부자 동네 아파트에서 병아리를 떨어뜨려 죽이는 아이들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훼손과 살해는 제국 일상 속 목록행위다.

 

근원으로 다가가 생각하면 생명은 다른 생명을 살해함으로써 제 생명을 유지한다는 진실에 닿는다. 이 불가피성에 짝하여 불가결한 대칭 진실을 유념할 일이다. 생명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살해는 엄금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최소한의 살해를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행해야 한다. 제국 주구가 된 인간만이 탐욕과 오락을 한껏 부추기는 살해를 자행한다. 엎어야 모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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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으러 단골 백반집으로 간다. 면식이 있어 인사 정도 나누는 여자 사람 하나가 일행과 함께 옆자리에 앉아 있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소 영상이 뉴스로 나온다. 소도 주인도 울부짖는다. 순간 그 여자 사람 입에서 아이고 저걸 어째!” 소리가 터져 나온다. 바로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는 아연 충격에 빠진다. “추석 때 소고기 가격 뛰겠네!”

 

나중에 백반집 주인장한테 들으니, 임대료만 가지고도 넉넉히 먹고사는 건물주란다. 아무리 서울이지만 여긴 변두린데 얼마나 뜨르르하기에 저리도 영혼 부재 증명이 확실한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가 돌연 생긴다. 가진 거 자랑이 자뻑이 되는 찰나 안와전두엽이 해골 밖으로 탈출하기는 조만장자나 백만장자나 차이 없다. 인간 세상 이치다.

 

명신네 일당 반란 뒤 우리 사회는 단군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커밍아웃 사태를 겪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사대 매판 세력이 남김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중이다. 주둥이 열고, 몸뚱어리 내돌리고, 낯짝 구겨댈 때마다 사악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 까닭은 저들이 쓴 인두겁 안이 텅 비어 있어서다; 인두겁만으로 인간 놀음을 해왔던 탓이다.

 

점입가경 폭로되는 목불인견 범죄상은 요샛말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더는 그 행태들을 입에 담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든 역사든 거대 담론은 말할 자격 없으니 그저 내 깜냥에서 이런 소망 하나 지닌다: 이 심판과 정화 시대를 건너면서 우리가 쓴 인두겁 값어치만이라도 제대로 지키고 사는 사람들 세상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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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선 어떤 비인간 존재들, 또는 내가 그 주변에 선 어떤 비인간 존재들과 나 사이에 일상 네트워킹-내 용어는 팡이실이(hyphaeing)-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최근 들어 제법 자주 언급한다. 그 실재 여부를 정치하게 따질 며리는 없겠고, 내가 의도하지 않은 선택이 의도한 선택과 동일한 결과로 인도될 때 느끼는 경이와 경외를 확인한 기억은 남길 만하다고 여긴다.

 

내 일요일 루틴 가운데 하나는 광화문 교보에 들러 과학-식물인문-시 코너에서 신간 서적을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모셔 오는 일이다. 얼마 전 책 제목과 목차, 그리고 저자 면면을 살펴본 뒤 현재 관심사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 도로 내려놓은 책이 한 주 지나 다시 눈에 들어오길래 집어 들고 목차를 조금 더 세심히 살핀다. 처음에는 눈길을 끌지 않았던 소제목 하나가 돌연 튀어 오른다: ‘쩌는 음색과 소리의 육체성. 그래서 품어온 책이 바로 듣기의 철학이다.

 

우선 거기부터 읽는다. 음악학자가 쓴 글인데 잘 읽힌다. 이른바 MZ세대가 음악 행동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음색 쩔잖아요.”라는 표현에 뿌리내려 이야기를 짜나간다. “쩔다/쩐다라는 말은 어원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매우 좋은, 뛰어난 대상을 대뜸 느끼는 상황을 묘사한다. 설명 없이, 이해 전에, 몸으로 벌써 들어와 있다는 이 표현은 칠십 대인 내게도 익숙하다.

 

그런데 왜 하필 쩌는감각이 음색으로 향할까? 글쓴이에 따르면 음색은 간접 또는 부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음악 요소다. 음높이, 길이, 크기가 모두 같은 두 음악이 존재할 때 서로를 구별해주는 기준이 음색이라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음색이 단연 중요해지기 이전까지 음악에서는 부차또는 이차요소였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반전 계기나 근거를 모바일 사운드스케이프 시대 이어폰 문화, 몸 매질로 듣는 음악 경험에서 찾는다.

 

설득력도 있고 흥미롭기도 하다. 읽다가 불현듯 되살아난 기억에 터 잡아 이 이야기를 좀 더 곱고 촘촘하게 톺기로 한다. 음색이 간접 또는 부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음악 요소라는 말은 보편 진실인가부터 살핀다. ‘불현듯 되살아난 기억이 전하는 바로는 아니다, . 왜냐하면 우리 전통음악, 그러니까 국악은 서로 다른 음색이 어울려 빚어내는 단선율 음악이기 때문이다.

 

국악은 창이든 악기 연주든 본디 화음이 없다. 실제로 생황을 제외하고는 모든 악기가 화음으로 연주하게 되어 있지 않다. 생황마저도 중국 묘족(苗族)에서 유래해 정착한 악기다. 국악은 음을 정성(定性)으로 파악한다. 정량(定量)으로 파악하는 서구 음악과 본성이 다르다. 비단 음악만이 아니라, 언어를 포함한 문화 전반에서 이런 차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할 따름이다. 음악학자인 글쓴이 자신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이렇게 쓰고 멈추었을 터이다.

 

여기서 멈추면 다음 내용도 따라 멈출 수밖에 없다. MZ세대가 이어폰 문화를 통해 쩌는 음색 세계로 들어갔다는 분석에서 멈추면 이 현상이 서구에서도 일어났으리라는 추정이 당연해야 한다.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인용한 롤랑 바르트 이야기가 방증이다. 음색과 닮은 결정(結晶)’ 감수성은 롤랑 바르트 아닌 일반인에게는 서구 MZ세대라도 어림없다.

 

같은 MZ세대지만 서구 MZ세대와 달리 우리 MZ세대에게는 음색 음악을 지어낸 생태 본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아귀가 맞는다. 식민지 교육에 쩔어서본성을 거의 상실한 기성세대와 전혀 달리 개별성, 육체성으로 열린 우리 MZ세대가 모바일 사운드스케이프 시대와 때마침 만나 옛 본성을 되찾은 사태로 해석하는 일이 그렇게나 무리일까. 이 해석이 틀릴 수 있음에도 제시하는 까닭은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여전히 제국 패러다임에 갇혀 있어서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이다. 8개월여 전, 일제에 부역한 특권층 매국 세력이 반란 일으켜 나라를 식민지 상태로 되돌릴 뻔한 일을 겪고, 가까스로 정상 되찾아가는 중이라 심사가 복잡하다. 장갑차 막아선 민주 시민이 자랑스럽다가도, 여전히 악귀로 준동하는 반란 무리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나마 요 며칠 제국 가로질러가는 이재명 정부 보며 섟 푼다. 수제천이라도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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