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카세 히데아키(加瀨英明, 1936.12.22.~2022.11.15.)는 1936년, 동경에서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카세 슌이치, 일본흥업은행 전 총재를 지낸 오노 히데지로(小野英二郞)의 딸 스즈코 사이에서 출생했다. 참고로 어머니 오노 스즈코의 언니가 바로 존 레논의 두 번째 부인 오노 요코(小野洋子)였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지만, 존 레논은 1971년 오노 요코와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카세 히데아키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존 레논이 <이매진(Imagine)>이란 노래를 만든 배경에는 자신과 일본 신도의 영향이 있었다고 썼다.





게이오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예일대,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했다. 귀국 후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의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외교관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은 덕인지 청년기부터 국제관계나 외교문제에 대한 발언과 평론활동을 통해 일본의 외교평론가이자 유대인 전문가로 활동했다. 일본의 여러 내각에 걸쳐서 고문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대단치 않으나 국내에서도 항상 어느 정도의 인기를 끄는 유대인 처세술서 같은 책들이었다. 예를 들어 『세계를 지배하는 유태인의 성공법』(2002), 『유대인 유머의 지혜』(2003) 같은 책은 한국에서도 출판된 바 있다.

그는 1979년 국제승공연합을 중심으로 스파이방지법 제정촉진 국민회의 활동을 통해 본격적인 극우파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일본 내 여러 극우파 단체의 핵심멤버로 활동하며 “일본의 대동아전쟁 덕분에 전후 아시아와 유색인종의 해방이 가능했다.” “일본 민족이 앞서 싸웠기 때문에 수백 년에 걸쳐 억압된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민족을 해방되었다”는 등의 망언을 일삼아 왔다. 그는 난징학살사건을 부정했고,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도 부정했다.

문제는 이런 책이 국내에서 출판된 시점이 그가 『추한 한국인』의 실제 저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서울 한복판에서 극우적 망언을 해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난 1993년으로부터 1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란 것이다. 현재는 품절이거나 절판 상태이다. 이후 한동안 잊힌 인물이었던 그가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지난 2019년의 일이었다.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Miki Dezaki) 감독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主戰場)>(2018)은 2019년 7월 무렵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소수의 극장에서만 개봉되었는데, 일부러 극장에 가서 영화를 찾아보았다. 영화 막판에 ‘카세 히데아키’의 말에 분통이 터졌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보고난 뒤 페북에도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조만간 붕괴할 것이고 그럼 한국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가장 친일적인 훌륭한 나라가 될 것이다. 정말 귀여운 나라 아닌가? 한국은 버릇없는 꼬마가 시끄럽게 구는 것처럼 귀엽다.”

지난 2022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로 죄를 지은 자들이 가는 지옥을 불교에서는 ‘발설지옥(拔舌地獄)’이라고 하는 데 이곳에서는 죄인의 입에서 혀를 뽑아 몽둥이로 짓이겨 부풀린 다음 밭을 갈 듯 소가 혀 위로 쟁기질을 하는 벌을 받는다.

그가 어떤 벌을 받을지야 알 수 없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 상황이 참으로 처참하다.

아무리 세상이 회전목마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잡지 인생 30년을 눈앞에 둔 편집자로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가지고 장난치는 자들이 죽지도 않고 권력의 비호 속에 부활하는 것인지 그 뿌리가 참으로 깊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이들을 계속해서 부활시키고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가. 이런 상활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기가 차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끔은 우리가 분단국가라서 정상국가나 보통국가가 못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저런 자들의 발호를 막지 못해 정상이 아닌 국가란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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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상암동 난지도는 쓰레기매립장으로 사형선고를 받기 전까지 유명한 신혼여행지였을 만큼 아름다운 섬이었다. 젊은이들한테는 무슨 전설, 그것도 개그 판본처럼 들리겠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난은 난초고 지는 영지다. 오늘날 모습과 사뭇 다르게 배를 타지 않으면 오갈 수 없을 만큼 뭍(!)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대개는 뭍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농사를 지었다. 생활 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1978년 쓰레기매립장으로 지정된 뒤 15년 동안 200만 톤에 달하는 생활 쓰레기, 산업폐기물, 건설 폐자재를 쌓아 올려 90m가 넘는 산을 이루었다. 1992년 매립이 금지되었다. 무너진 삼풍백화점 잔해는 예외로 거기 묻혔다. 먼 훗날 무슨 일로 여기를 발굴(?)한다면 거대 지층을 이룬 라면 봉지와 부서진 백화점 한 동 유적을 보고 대체 뭐라 할까? 모순이 들끓는 식민지 풍경이 그때는 사라지고 없을까?

 

쓰레기 매립장 난지도에도 사람이 살았다. 전성기에 700여 명, 최후에는 400명 정도였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물건을 캐내 삶을 이어갔다. 공식으로 출입 금지였으니 공권력도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극빈층으로 분류돼 이를테면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다. 그들과 후손은 어찌 됐을까? 오늘 푸른 난지도가 깔고 앉은 검은 역사를 대체 어찌해야 할까? (이상 내용 많은 부분은 나무위키를 참조.)


 

지금은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나는 그 공원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난지도 경계를 따라 한바퀴 돌면서 물에 가까이 닿는 일이 목표다. 한강 지천인 홍제천, 홍제천 지천인 불광천, 한강, 한강 또 다른 지천인 향동천, 향동천 지천인 난지천-아마도 옛 이름은 샛강이었을-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점검한다. 마포구청역 7번 출구로 나가자마자 홍제천과 만나면서 오늘 걷기 출발이다.

 

홍제천은 삼각산과 백악산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는데 제법 물이 깨끗하다. 가장 하류인 지점에서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있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자, 지천인 불광천과 만나는 꼬꼬마 두물머리가 나타난다. 불광천은 오염이 심하다. 최하류 지점에서는 흐름마저 거의 없다. 그 불광천을 만나면서부터 홍제천도 신음을 토한다. 주춤주춤 역류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내려간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선다.


불광천-홍제천 꼬마 두물머리


홍제천이 한강과 만나는 두물머리부터 나는 다다 물 가장 가까이 놓인 길을 골라 걷는다. 그러나 한동안 좀처럼 물에 가닿지 못한다. 처음 닿은 곳은 의외로 물가에 깔아 놓은 덕 뜯어진 부위다. 그 아래 찰랑거리는 물을 반가이 모신다. 별일이라며 웃는다. 그다음부터는 수시로 자연스레 물에 닿을 수 있도록 곁 내주는 길이다. 35도짜리 땡볕 피하려 나무 그늘 좇으며 서둘러 걷다 보니 가양대교 아래 서 있다.


홍제천-한강 두물머리


희한한 물모심 


드디어 향동천 두물머리가 보인다. 하지만 접근 불가다. 수량도 아주 적을 뿐 아니라 방치 상태로 거기까지 시난고난 흘러왔음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향동천은 나지막한 봉산이나 망월산 어디선가 시작됐을 테니 본디부터 작은 시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강으로 흘러드는 열한 개 지천 가운데 하나-가장 서쪽에 있는-임은 틀림없다. 따로 떼어 걷기는 그렇고 오늘 난지도 경계를 따라 최대한 다가가기로 한다.


향동천-한강 두물머리 


강변북로 밑에 뚫어 놓은 생태로를 통해 푸른 쓰레기 산으로 올라간다. 가장 먼저 나타나 가장 끄트머리까지 이어진 길을 따른다. 가양대로 가까이서 찾았지만, 향동천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여러 번 숲 틈을 기웃대 겨우 작은 물길을 발견했지만 여기도 접근 불가다. 결국 통행 금지된 곳까지 내려간다. 향동천과 난지천 꼬꼬마 두물머리를 찾아낸다. 여기마저 접근 불가다. 난지천에 닿고서야 물 위에 선다.


난지천-향동천 꼬마 두물머리


난지천(샛강)


폭서는 가차 없이 땡볕과 땀과 갈증과 허기, 그리고 단내나는 거친 숨으로 나를 몰아댄다. 가져간 물도 동이 났다. 빨리 식당을 찾아 목을 축이고 속을 채워야 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마지막 발걸음은 더듬대고 구불거린다. 지도만으로는 찾기 어려운 복잡함을 견디며 찾아낸 최단 경로는 월드컵경기장역 직전에서 불광천 따라 내려가 처음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 잘됐다. 불광천은 이렇게 마무리다.

 

마포구청역 일대 음식점이 죄다 문을 닫았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 건널목을 건넌 다음 다시 올라와 찾은 유일한 음식점에서 나는 막걸리부터 시킨다. 없단다. 이런! 얼른 맥주로 바꾼다. 한 병을 순식간에 다 마시는 순간 나는 깨닫는다: 500ml까지는 맥주가 다만 시원한 물일 뿐이구나. 다음은 대구맑은탕 차례다. 찬 맥주 바로 뒤에 닿은 뜨거운 국물도 몸은 시원한 물로 감지한다는 사실 하나를 더 깨닫는다. !

 

물과 술이, 찬물과 뜨거운 물이 하나로 경험된 염천 속 물 걷기는 여태까지 물 걷기 기운데 가장 힘들었다. 갈증은 밤까지 이어졌다. 집에 와 확인하니 오늘 걸은 거리는 20km였다. 힘들 만했구나. 경강(京江) 걷기는 이로써 7구간 가운데 하나만 남았다. 마무리되면 지천 걷기로, 지천 걷기가 끝나면 철길 따라 경기도, 강원도로 번져간다. 그다음은 모른다. 물이 이끄는 대로 간다. 의전이자 놀이인 생명 참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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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오늘날 세계질서는 거대한 지각 변동을 겪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반 천년 만에 찾아온 변화인 것 같기도 하다. 지난 500년 이상 세계질서는 유럽 그것도 서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돼왔다고 할 수 있다. 서방의 득세가 시작된 역사적 분기점은 흔히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의 페란도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1492년으로 꼽힌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비유럽지역에 대한 유럽의 제국주의적이며 약탈적인 진출에 물꼬를 튼 해이기도 하다.

15세기 말 이후 서구는 비서구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자본주의적 세계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세계 곳곳으로 진출했다고 해서 서구가 곧바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니다. 18세기까지도 오스만이나 중국 등 세계에는 서구와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비서방 제국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계가 자본주의적 체계로 작동하게 되면서 서구의 위력은 계속 강화되었고, 반면에 비서방 세력은 갈수록 약화한 셈이다.

서구의 부상은 기독교, 자본주의, 근대적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임과 동시에 비서구, 전근대 비자본주의, 비기독교 세계는 타자화되어 학살과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과정이었다. 그와 같은 흐름 또는 ‘서세동점’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제국주의가 창궐하여 세계 수많은 지역과 나라가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19세기 후반이다. 한국도 이때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고 급기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서세동점은 20세기 말에도 불변의 대세처럼 보였기에 그 흐름에 동참한 비서방 국가들도 적지 않다. 그런 점은 오늘날 ‘집단서방’으로 불리는 나라들에 유럽 이민자들이 건국한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물론이고 일본과 한국처럼 비유럽 아시아국까지 포함되는 데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유럽에서 기독교 세력에 의한 이슬람 세력의 축출이 일어난 1492년 또는 15세기 말 이후 500여 년이 지난 이제 ‘서세동점’의 장기 지속은 종언을 맞은 듯싶다.

서구나 구미, 서방, 나아가서 집단서방의 추락을 보여주는 징후는 차고 넘친다. 지난달 10〜11일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열린 제75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의 모습도 단적인 한 예다. 나토는 군사 동맹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1949년에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 12개국이 결성했는데 이제는 32개국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나토의 외형상 성장은 집단서방의 군사적 위력이 계속 강화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격적인 세 확장과는 별도로 나토의 실상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번 회의에 참석한 주요 회원국 정상들의 모습에서도 그런 점이 역력했다. 회의가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토가 수호한다는 ‘자유세계’의 수장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보여준 모습은 가련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으로 부르며 피아를 구별하지도 못하는 무능을 드러냈다.

바이든의 혼동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해프닝일 뿐이라면, 나토의 위상 추락을 보여주는 현실은 매우 엄중하다. 나토국가들이 총력 지원을 해온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속절없이 패퇴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한 예다. 최근에 들어와서 우크라이나군은 전선 전체에서 대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7월 한 달 우크라이나군이 입은 사상자 수가 무려 60,000명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일방적 발표이니 믿을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러시아와의 협상 시도 자체를 불법화해온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최근에 협상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른 것도 전선의 현실로 인해 압박받은 결과일 공산이 크다.

서아시아에서도 미국과 나토는 무력함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자지구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하마스 세력이 작년 10월 ‘알 악사 홍수 작전’을 펼친 것을 빌미로 이스라엘이 가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자, 나토와 미국은 그런 폭력행위를 노골적으로 방조해왔다. 그러나 몇 주 안에 하마스 지도부를 소탕하고 인질을 구출하겠다는 이스라엘 군사작전의 목적은 실현이 요원한 가운데, 가자에서는 민간인 그것도 60%가 어린이와 여성인 사망자가 8월 1일 현재 공식적으로 39,480명에 이른다(의학 전문지 『란셋』은 7월 초까지의 실제 사망자가 186,000명을 초과한다는 추산까지 내놓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이스라엘에 이미 집단 학살 혐의를 걸고 있는 가운데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포학한 살육이 그치지 않자 이를 방조하는 미국과 나토에 대한 세계인의 규탄도 하늘을 치솟고 있다. 국제법과 세계 여론을 무시하며 안하무인으로 극악한 살육행위를 자행하는 이스라엘을 서아시아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라며 무조건 지원하는 서방과 미국, 나토의 도덕적 위상은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나토의 도덕적 위상만이 아니라 군사적 위상도 크게 떨어졌다. 그런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막강하다는 미 해군이 안사르 알라 세력이 주도하는 예멘군과의 군사작전에서 아무런 전과를 보여주지 못한 점이다. 팔레스타인 전쟁 발발 이후 예멘이 이스라엘 선적 또는 이스라엘행 선박의 홍해 통행을 금지하자, 미국은 물류대란을 막을 목적으로 영국 등과 함께 ‘번영 수호 작전’을 펼쳐 해역을 장악하려 했지만, 항공모함 아이젠하워가 공격받아 전역을 떠나야 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미국과 나토의 군사력이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동안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국가들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들로 구성된 나토는 한편으로는 회원국을 늘리며 세를 불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해왔다. 그러나 그런 위력은 군사적 약체국가나 비국가 단체에나 통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군사적 초강대국 러시아와의 대결에 직면하자 나토의 군사적 능력은 허장성세였음이 그대로 드러났고, 서아시아에서도 하마스, 헤즈볼라, 안사르 알라, 이란 등‘저항의 축’을 맞아 나토는 이스라엘과 함께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잘하는 것이 없지는 않다. 무고한 민간인 살육에 동참하고, 반인륜적이며 반국제법적인 안하무인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세계질서의 지각 변동을 예시하는 또 다른 징후는 비서방의 놀라운 굴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제국주의적 서방과 비교하면 비서방에는 아직도 열악한 처지에 놓인 국가들이 많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 비서방에서 경제적 군사적 능력의 괄목할 성장으로 지리정치적 위상이 서방 어느 나라와도 뒤지지 않는 국가들이 출현한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중국과 러시아로, 비서방 세계는 지금 두 나라의 주도로 경제적으로는 브릭스, 군사 안보로는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중심으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나토 정상회의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인 7월 3〜4일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에서 SCO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채택된 선언문의 첫머리가 관심을 끈다. “세계의 정치, 경제, 그리고 기타 국제관계 분야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중이다. 더 공정한 다극적 세계질서가 태어나고 있다.” SCO는 2001년에 출범했으며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이란, 인도 등 유라시아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가, 올해 벨라루스가 새로 들어와서 회원국이 10개국으로 늘었다. 회원국 외에 ‘대화 상대국’도 있는데 튀르키예와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런 나라다. SCO 회원국의 인구는 30억으로 세계의 40%를 차지하며, 영토 면적은 유라시아 대륙의 60%를 차지하고, GDP는 세계 GDP의 25%가 넘는다. 보다시피 SCO 회원국 가운데는 중국과 러시아, 인도 등 브릭스의 주요 국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은 SCO가 미국이 주도하는 G7과는 다른 방향의 세계질서를 추구하며 브릭스와 협력관계를 추구할 것임을 말해준다. 올해 SCO 정상회의의 선언문이 국제관계의 ‘지각 변동’, ‘더 공정한 세계질서’를 언급한 것은 비서방 주요 국가들이 나토와 G7이 강요하는 국제관계가 공정하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과 다르지 않다. SCO 선언문은 비서방이 그동안 서방이 전개해온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즉 다극적인 세계질서를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비서방이 앞으로 서방과 적대적인 대결을 벌이겠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서방과의 국제관계에서 비서방의 자신감 표명인 것은 명확해 보인다.

500년 또는 반 천년 넘게 작동해온 서방 제국주의의 지배가 바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의 맹주인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고, 경제력 또한 적어도 명목 GDP로는 세계 최대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의 국력도 여전히 막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서방의 전통적 강국들의 쇠퇴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 집단서방의 핵심인 G7과 비서방의 핵심인 브릭스의 경제력을 비교해보면 최근에 중대한 변동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중국 경제의 굴기가 특히 놀랍다.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중국의 GDP는 2016년에 미국을 이미 추월했다.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준 것은 브릭스도 마찬가지다. 1992년 브릭스 국가들은 PPP 기준 GDP가 세계의 16.45%에 불과했고 G7은 45.80%나 되었으나, 2022년에 이르러서는 두 진영의 지분이 역전되어 브릭스는 31.67%, G7은 30.31%가 되었다.

지금 인류는 역사상 새로운 변곡점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있다. 지난 500년 지배적 위상을 누려온 자본주의적 세계체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서방 세계가 자발적으로 그동안의 지배를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 팔레스타인 갈등에서 미국 등 서방은 기존의 헤게모니를 관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7월 28일 대선을 치르고 ‘21세기 사회주의’의 주창자 우고 차베스의 후계자로 차베스가 시작한 볼리바르 혁명을 잇고 있는 니콜라스 마두로의 3선이 확정된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에서 일으킨 마이단 쿠데타와 유사한 정변을 일으키려는 중이다. 그래도 세계체계가 지금 거대한 변동을 겪는 중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세력이 그동안 주도해온 국제관계가 해소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세계질서는 과연 자본주의적 세계체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 눈 뜨고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세계의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 관건이라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할 실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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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참으로 다양한 인간 행태를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부분 스마트폰 들여다보는데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대부분 자던 풍경과 비교하면 뭐 꼭 그렇지만은 않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각양각색이기 마련이다. 요즘 내가 궁금해하는 색다른 풍조 하나가 있다. 많은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신경 안 쓰고 넘어갈 문젠데, 옆 기대기 이야기다.

 

전동열차 맨 앞이나 뒤 칸 가로 벽은 보통 너덧 사람이 기대서서 간다. 언제부턴가 기대는 방식이 달라졌다: 등을 대어 뒤로 기대지 않고 한쪽 어깨를 대어 옆으로 기댄다. 내가 이런 기대기를 불편하게 느껴서 유심히 살피게 됐다. 내가 뒤 기대기로 섰는데 어느날 누군가 옆에서 내 얼굴-실제로는 그 사람 스마트폰-을 보는 자세로 기대는 바람에 촉발된 일이 분명하다.

 

며칠 동안 궁금해했다: 왜 사람들이 저런 옆 기대기로 바꾸었을까? 정답 없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내 결론은 코비드-19가 몰고 온 불안이 폐쇄 의식을 증폭시켰다, . 옆 기대기를 하면 뒤 기대기보다 폐쇄 면이 배가된다. 뒤 기대기는 등과 가로 벽이 폐쇄 면 하나를 이루지만, 옆 기대기는 어깨와 가로 벽으로 하나, 타인에게 돌린 등으로 둘, 이렇게 폐쇄 면이 늘어난다.

 

폐쇄 면을 늘려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 본능 또는 무의식은 팬데믹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 심리와 맞닿는다. 마스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대부분은 불안 지수가 높다. 불안 지수가 높은 사람이 위험에 더 잘 대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비 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불안이 증폭된다고 거꾸로 생각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깝다.

 

옆 기대기 풍조가 우리 사회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계속되고 증강될 때 공동체성은 약해진다는 추론이 불가피하다. 아니다. 그 반대다. 제국이 부리는 신자유주의 주술에 걸린 개인이 저렇게 고립되고 소외되는 거다.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런 풍조가 더 결 지고 겹 지면 평범한 인간 모두가 참혹함으로 내몰리고 만다.

 

문제 삼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문제 삼기 위해 섬세하고 치밀하게 사유하는 습관부터 길러간다. 대충 사유하고 대번 판단하면 대병 들어 죽기 마련이다. 이미 우리는 그 길로 너무나 깊숙이 들어왔다. 이제부터라도 죽을힘을 다해 살길을 찾는다. 제국이 풀어 놓은 악한 주술을 확인하고, 내가 거기 걸려 있음을 직시하고, 함께 벗어나서, 팡이실이 선한 주술로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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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강(京江) 걷기는 강동구 천호동, 암사동, 고덕동, 그리고 강일동 일부를 거쳐 가는 동쪽 마지막 구간이다. 광진교 남단에서 떠나 동북쪽으로 강변을 크게 돌아 고덕천 두물머리까지 간 다음, 거기서 꺾어 고덕천을 따라 들어가 강일동 풍경과 살짝 마주치고는 곧바로 상일동역에서 일정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경강 일곱 구간 중 다섯을 채운다.

 

광진교 남단 한쪽에는 도미(都彌) 부인 동상이 있다. 백제 개로왕이 권력을 이용해 평범한 백성의 옆지기를 빼앗으려 했으나 슬기로운 여인이 잘 대처해 끝내 사랑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고 하니 허구만은 아닐 테지만 신라계 부역 지식인 김부식이 지닌 편견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 볼 만하다. 도미 부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일대는 건국 초기부터 백제와 깊숙이 얽혀 있는 곳이다.


 

광진교를 걸어 조금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이내 강가를 향해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물에 바투 낸 호젓한 길을 따라 얼마 가지 못해 길은 드론 공원에 막힌다. 뭍 쪽으로 한참 나와 미루나무 길을 따라간다. 드론 공원 지나면서는 생태 보존 지역이라 더 한참 물을 보지 못한 채 간다. 이윽고 암사 둔치 생태공원이 숲을 열고 물 가까이 닿을 수 있게도 길을 내준다. 작은 습지가 징검돌처럼 놓인 사잇길을 가면서 제 본성 따라 피어난 푸나무며 버섯, 이끼가 목숨 내음을 자욱하게 풍겨낸다. 큰 낭아초 군락 길을 벗어나자, 고개가 시작된다.


 

고갯마루에 이르러보니 바위절터(巖寺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숲에서 절 건너뛰던 버릇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다 뭔가에 이끌려 되돌아간다. 절터에는 뜻밖에 정자 하나가 떡하니 서 있다. 본디 백제 시대 암사, 또는 백중사(伯仲寺)가 있던 자리에 구암서원을 세웠으며 이를 기려 최근에 구암정을 지었다고 한다. 구암서원은 1667년 건립된 광주군 구천면 최초 서원이다. 이 일대 유생은 여기서 배워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할 수 있었으며 노론 집단에 속했다. 백제 흔적을 지우고 신라계 특권층 부역 집단 후예인 서인 노론 근거지를 만들어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하니 참으로 검질긴 매판 흑역사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심사가 울적하다.



 

구암정 현액 글씨는 여초 김응현 작품이다. 그 집안도 노론이다. 놀라울 따름이다.


고개를 내려오는데 온통 어수선하다. 세종포천고속도로라는 뜬금없는 토건 때문이다. 이따위 길 장사가 숲과 물에 무엇을 뜻하는지 아프디아프게 느끼는 나는 마치 무슨 큰 범죄자가 된 듯 형언할 수 없는 감정 상태로 곤두박질친다. 포효하는 자동차 소음까지 덤벼들자 나는 맹렬한 속도로 암사 고개를 벗어난다. 지도로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고덕천 다리 위에 몸이 서 있다. 고덕천 꼬마 두물머리가 얌전하게 콘크리트 단장한 모습으로 내려다보인다. 개울 수준인 시내가 아픈 몸 냄새를 풍기며 끌려 나간다. 양쪽 언덕 위에는 알 수 없는 토건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크게 오른쪽으로 돌자, 내를 건너온 강일동 자락과 마주친다. , 그 강일동···.


 

20여 년 전 나는 강일동에 의료봉사를 온 적이 있다.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1967년 흥인동·서부이촌동 철거민과 1968년 창신동·숭인동 이재민이 쫓겨와 정착한 곳이라 들었다. 좁고 꼬불거리는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은 내가 10대를 살았던 동소문동 산동네와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동사무소 공간에 진료소를 차리고 하루에 250명 정도를 무료 진료했다. 정말 가난한 곳이라 계속 봉사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적잖은 부자들이 그랜저를 타고 와 진료받고 약 받아 가는 바람에 분노한 회원들 반대로 전격 중단하고 말았다.

 

그 강일동이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이른바 강남 따라하기”(탈성장 도시와 에너지 전환중 이상헌이 쓴 <한국의 탈성장 도시 이데올로기형성을 위한 개념적 고찰> 197) 전형에 해당한다. 옛 강일동 주민 대부분이 지금 그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마치 구암정에 자리 빼앗겨 암사라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백중사와 같다.

 

강일동 최북단, 한강과 가장 가까운 마을 가래여울은 옛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여기는 백제가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막아 철저한 고립 상태다. 부역·독재 세력이 자주·민주 세력을 빨갱이로 모는 일과 맥락이 같다. 일정을 마무리하러 지하철역 쪽 대로로 들어선다. 물 잡아먹는 불귀신 토건 괴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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