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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치유 여행 - 버림받은 후에 나에게로 이르는 길
수전 앤더슨 지음, 안인희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1.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특히 두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흔히 지니고 있는 커다란 인습적 사고 하나에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제 제기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딱딱한(hard) 사건 중심으로 세상을 봄으로써 말랑한(soft) 사건의 치명성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인정한다. 하지만 버림받아 홀로 남은 것에 대한 슬픔은 대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장례식도 없고 애도 편지도 없다. 오히려 당신은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사람으로 여겨진다.......(하지만) 죽음을 애도하는 경우 슬퍼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다. 그것을 소중히 품고 그로써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사랑하는 사람이 관계를 끝내기로 선택한 경우 당신이 느꼈던 사랑은 뺏긴 사랑이 된다. 파트너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당신에게서 사랑을 거두어간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 의미를 갖는 상실이다. 사랑의 상실과 거부는 당신 자신에 대한 핵심적 믿음에 영향을 주는 특별한 고통이다......." 

사별(死別)이 지니는 분명한 격절성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겪는 생이별의 엄혹한 영향력을 뒷전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다른 곳에서 말하듯 사별은 자연의 사건이지만  생이별은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가하는 모욕의 사건입니다. 생이별, 즉 버림받음은 그야말로 "산 채로 포 뜨기"를 당하는 고통입니다. 

저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버림받음을 예시해줍니다. 물론 그 예만큼 다양한 예화가 실리지 않은 면은 좀 아쉽지만 우리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안내서로서 손색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2. 또 하나는 저자가 상처받은 내면아이와 외부아이를 선명하게 구분지어 세밀하게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는 보통의  내면아이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인격적 개별화가 서구인이 아닌 우리에게는 더 낯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면아이와 어른자아가 대화를 한다'는 개념만으로도 어색한 우리임에 비춘다면 더 혼란스럽기도 하겠지요. 이런 혼란을 위해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까운 이해를 보태 보겠습니다.

내면아이는 버림받아 격정상태(emotionalism)에 있는 우리의 정서를 의미합니다. 외부아이는 그런 격정상태에서 보이는 원시적(성숙하지 않은, 그래서 보호한다는 취지와 달리 오히려 파괴하는) 방어 반응입니다. 저자는 이런 방어 반응에 관해 무려 100가지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가까이 있는 타인을 위해서 이 부분을 두고두고 음미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사회를 어렵게 만드는 소통 부재의 현실을 염두에 둘 때 버림받음의 슬픔을 서로 인정하는 치유적 관점을 지니게 됨으로써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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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공부 - 슬픔, 절망, 두려움에서 배우는 치유의 심리학
미리암 그린스팬 지음, 이종복 옮김 / 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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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신의 삶과 인격이 녹아든 글쓰기를 대할 때 내용의 여하를 떠나 느끼게 되는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누구든 이런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심리치료사인 저자는 전혀 다른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적인 경험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영역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삶을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직성 그 이상의 이미를 지닙니다. 이는 용기가 필요한 사회적 선언이자 실천입니다. 그 무엇보다 저는 이런 면에서 이 책이 주는 울림을 깊이 느끼고 공감합니다. 

물론 여러 대목에서 독서를 멈추고 곰곰이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동의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가령 그의 삶에서 경험한 고통의 폭량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괴리감이 있는가 하면 그가 지닌 투명한 영성과 직관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느끼는 공백감도 있습니다. 위빠사나 등 동양적 수련으로 쌓여진 내공이 때로는 격절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이 책은 실천적 측면까지 진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현상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름 지을 뿐만 아니라 밋밋한 인지 감각을 화들짝 일깨워 돋을새김으로 묘사하는 영롱한 통찰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귀 기울인 대목은 취약성에 열린 사고, 맥락화, 창조성이 지니는 치유능력 등이었습니다. 가까이 두면서 틈틈이 몇 번 더 읽으려고 합니다. 일독만 하고 꽂아두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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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심리학 - 익숙한 인생의 가치와 결별하라
폴 페어솔 지음, 전경숙 외 옮김 / 동인(김영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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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저자 스스로 이 책이 출판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듯이 저 또한 (번역된) 이 책이 우리사회에서 주목받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골적' 사유로 주류적 시장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배후가 누구냐고 다그칠 판이니 읽어 본 사람이 어디 권유나 할 수 있겠습니까?^^ 

2.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결혼과 성 치료 센터를 운영하는 신경심리학자이자 임상가입니다. 또 그 자신이 말기 임파종을 극복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삶과 학문을 통해 터득한 진실은 지금 미국을 필두로해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이른바 '자기치료주의'는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기치료주의'는 번역 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기는 하나 조금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아마도 그 내용은 이쯤 될 것입니다. 자기를 단절적 자율적 존재로 전제하고 그 자아도취적 환상을 최대한 부추기는 극단적 프로세스를 동원하여  이 사회에서 승자가 되도록 선동하는 사이비 마법. 

자기 긍정, 적극적 사고방식, 신념의 기적.......이런 유의 익숙한 표어들로 도배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기계발/치유/위로의 기술은 이미 우리 사회를 제압하는 통치이념이자 종교적 신조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런 풍조를 깡그리 무시하고 정반대의 강령을 제시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입니다.  

3. 저자의 사유 방식과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일단 부정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처음엔 불쾌할 수 있지만 들어 보면 과연 그렇다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치면 안 될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른바 자기치료주의가 오늘날 이렇게 압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하는 의문의 지점이지요. 생각컨대 이는 서구 정신사의 거대한 파동적 흐름을 일별해야 풀리는 문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사유는 각성된 고대(古代)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각성된 고대정신이라 할까요? 중세로부터 야기된 정신사적 왜곡을 바로잡아 원래 자리로 복귀했기 때문입니다.  

중세는 교회의 이름으로 초월적 인격신 아래 인간의 개별성을 매몰시키는 억압의 시대였습니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원죄 교리를 동원하여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자기부정을 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기 때문에 중세인은 총체적으로 자기모멸적 인간이었습니다. 

이 어두운 중세를 깨부순 것이 근대입니다. 인간의 개별성, 그리고 자기긍정을 신 앞에서 혹은 신을 짓밟고서 선언한 것이지요. 그 근대 정신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학적 무기를 앞세우고 지금까지 승승장구해 왔습니다. 이런 맥락에 슬그머니 무임승차한 통속 기독교의 전면적 세속화가 바로 자기치료주의인 것입니다. 

그리고보면 자기치료주의는 얄미우나마 근대적 정신 혁명의 계보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숙고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처럼 일도양단으로 '자기긍정'을 때려엎을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우울증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조금 피상적입니다. 우울증의 본령이 지나친 자기부정 타인긍정에서 오는 존재의 무의미감, 아니 무(無: nothing) 감각일진대 거기다 대고 자기긍정을 버려야 한다고 꾸짖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저자의 명제가 전체적으로 전략적, 의도적인 것임을 십분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적인 이의를 가지고 그의 사유 모두에 제동을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고유한 컨텍스트를 지니고 있는 법이므로 상호 소통이 일어나도록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저자와 독자는 근대 정신의 극단화, 세속화를 넘어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인간은  개별자인 측면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타자와 분리될 수 없는 연대적 존재라는 사실, 더 나아가 보편적 우주와 합일되는 '영적' 존재라는 사실 또한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저자와 독자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4. 아무튼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꼭 한 번은 읽어 볼만한 책임은 분명합니다. '반골적' 또는 전복적 사유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상가인 저도 읽다가 가끔 책을 덮고 스스로 지녀온 생각을 진심으로 흔들어 보았습니다. 

모두에 말씀드린 대로 아마 많이 읽히지 않았을 겁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그래서 더욱 권해드리고 싶군요. 아, 출판사나 번역자, 더구나 저자와 저는 아무 인연도 없습니다.^^ 

끝으로 읽을 때 주의하실 사항 하나만 더 얹어 드립니다. 저자의 사유를 드러내는 핵심적 단어인 '신중함'은 번역이 조금 아쉬운 바, 본디 아마 mindfulness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불교의 명상이나 선(禪)에서 말하는 '마음챙김'을 영어로 옮긴 말인 듯합니다. 이것을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나름대로 숙고하여 선택한 용어인데 '신중함'만으로는 그 깊고 넓은 뜻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관련 서적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마음챙김이란 제목의 책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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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심리학 - 상담학 총서 상담학총서
존 웰우드 지음, 김명권.주혜명 옮김 / 학지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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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사람이라 하면 대뜸 정신과 의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 스승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흐름 속에 있습니다. 실제로 정신과 의사들은 영적 스승들에게 없는 방법론적 측면을 염두에 두고 말하며, 영적 스승들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동시에 틀린 말입니다.

인격의 문제를 다루는 정신과 의사는 상대주의(色)의 틀에 갇혀 있으며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영적 스승은 절대주의(空)의 틀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개별적 생명체로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도정에서 인격 문제를 구체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아야 하는 한편 인간 생명의 개별적 차원을 넘어서는 보편적 존재론적  차원이 있다는 사실 또한 여실히 보야야만 하기 때문에 진실은 바로 이 둘 사이 경계의 시공간에서 포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 웰우드는 이런 점에서 그의 삶의 경험이 그러하듯 정확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음의 병, 특히 우울증 치유를 삶의 최고 화두로 삼는 사람으로서 의학의 한계를 넘나들어야 하는 경험을 할 때마다 이른바 영성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존이나 그리스도처럼 절대적 수준의 관통치유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픈 이의 마음을 온통 감싸안고 통짜배기로 고쳐내는 내공을 향해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에 도달하면서 의학과 깨달음의 통합을 모색하던 차에 우연히 존 웰우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기회에 쓴 글을 모으고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책이라 유기적 통일성과 뒷심이 떨어지는 흠을 안고있습니다. 우울증을 포함하여 부분적으로 함량이 떨어지는 곳이 더러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흠보다 내용이나 자세가 제시하는 이익이 워낙 커서 감히 일독을 권합니다. 아, 마냥 가볍지는 않다는 점 또한 기억해 두십시오. 읽다가 책을 덮고 그 의미를 머리에서 끌어내려 가슴으로, 몸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뇌과학적 접근이 신속하게 퍼지면서 마음의 치유 문제는 점입가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뇌과학자들과 달라이라마가 함께한 학술 모임이 지성사회의 큰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사회가 어떤 수준에서 이런 흐름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 제 개인 능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의사로서 어떻게 반응하고 독자적인 인식과 실천의 얼개를 마련해야 할까, 생각은 온통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어쨌거나 마음 치유 문제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면서 어떤 울림과 공유가 일어날지 자못 궁금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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