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금요일마다 시 한 수를 보내며 안부 전하는 애제자가 어제 보낸 이성복 작 <그 여름의 끝>이다. 나는 웃자고 이렇게 답했다: 내 인생을 놓고 장난치는 절망에게 도로 장난을 걸면 이기는군하~ 하아! 보낸 직후 내 기억을 타고 초르르 지나가는 필름 하나 있었다.

 

커다란 포식동물이 먹잇감을 잡아 놓고 장난치는 광경이다. 사냥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이기도 하다지만 먹잇감 처지에서 보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놀이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려고 할수록 절망은 깊어진다. 살아 나갈 길은 단 하나다. 뒤집어 장난을 치는 거다. 그래, 죽어주마, 하고 힘 턱 뺀 채 축 늘어진다. ? 죽었네, 에이~ 하고 흥미를 잃어 눈길 돌리면 그 틈에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난다. 냉혹한 장난을 이기는 냉철한 장난인 셈이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지는 자세로써 이기는 법을 배운다라는 우치다 타츠루 무도 원리와 맥락이 닿아 있다. 그에 따르면 제자가 스승과 수련할 때 제자는 이기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제자는 스승이 거는 기술에 완벽히 몸을 맡겨 지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이기는 스승의 몸이 제자에게 홀연히 배어든다. 대략 이런 말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지나치게 진지 절거나 엄숙 떨면 정신 근육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지기 마련이다. 안다면서도 문제를 어렵게 느낄수록 뻣뻣해지는 쪽으로 기운다. 직면한다는 말을 오해해서 그렇다. 직면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해결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목적의식이나 예기불안을 안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실제로 뻣뻣해지는 사람은 문제 아닌 문제 앞이나 뒤에 시선을 배치한다. 그러면 문제 실재가 왜곡된다; 대부분 증강된다; 너무 크거나 아뜩해 보인다. 그래서 문제에 휘말리거나 휩싸이고 만다.

 

직면은 문제 자체를 평가·해석 없이 말갛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말갛게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있는 그대로 보면 문제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반드시 있다-을 발견한다. 틈은 나를 휘말리거나 휩싸이지 않도록 살며시 잡아준다. 바로 이때 진지와 엄숙, 그 부푼 자루가 훅 까부라진다. 바로 이때 장난기=놀이 감각=유머가 발동한다. 역설을 창조하는 순간이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난 안 죽어, 하면 문제와 내가 엉겨 붙은 거다; 그래 죽어줄게, 하면 문제와 나 사이 틈을 보고 장난이 터져 나온 거다. 나더러 절망하라는 거지? 난 절망 안 해, 하면 문제와 내가 엉겨 붙은 거다; 그래 절망해 줄게, 하면 문제와 나 사이 틈을 보고 장난이 터져 나온 거다. 이 장난, 그러니까 놀이는 감동·감화하는 두 길을 연다. 하나는 골계다. 골계는 하늘빛 웃음을 몰고 온다. 다른 하나는 숭고다. 숭고는 물빛 울음을 몰고 온다. 둘 다 장엄에 가 닿는 질탕하고 거룩한 노래다. 장난 없는 팍팍한 삶은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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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집을 나가면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 까닭은 길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돌아볼줄 몰라서다. 아기 시선은 한 방향으로 고정돼 있다. 왜 그럴까? 어떤 고전에도 이에 대한 답은 없다. 내가 고전을 참고는 하되 존숭은 하지 않는 까닭이다.

 

아기 때부터 진실이 지닌 모순성, 그러니까 역설을 본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절대조현병에 걸린다. 살아갈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어떤 고전에도 이에 대한 답은 없다. 내가 고전을 참고는 하되 존숭은 하지 않는 까닭이다. , 죄송, 지송.

 

엄마 배에서 나오자마자 걷는 아기 코끼리를 본 적이 있는가. 아기 코끼리는 아기면서 어른이어야 살 수 있다. 모순이 공존하는 역설 현실을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간다.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20년가량 아기 상태로 역설 현실에서 보호받아야 산다.

 

본성처럼 보이는 이 차이는 물론 역사 사건이다. 직립 보행이 빚은 저주다. 직립 보행하는 인간 눈은 정면 중심으로 몰려 있다. 이 중심 시각이 집중을 낳고, 집중은 형식논리를 낳고, 형식논리는 투사/전가를 낳고, 투사/전가는 제국주의를 낳았다.

 

제국주의는 모든 인간을 돌아볼줄 모르는 아기 상태로 가둬둔다. 그래야 쉽게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통치되는 제국 신민은 영영 길을 잃은 채 살아간다. 지상 제국 미국 신민, 그 마름 일본 신민, 그 마름의 마름 한국 신민을 보라.


 

자신이 아기인 줄 모르는 아기 둘이 자신이 아기인 줄 모르는 아기 오천만을 끌고 현해탄으로 들어간다. 무슨 짓인 줄 알아도 몰라도 아기인 그 둘은 이 물귀신 놀이에 도취해 있다. 낄낄대는 언론인도 악악대는 정치인도 당최 어른 될 생각이 없다.

 

어른은 돌아볼줄 안다: 내가 혹시 잘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왔다면 돌아가지 못할 길이란 없다.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않으면 방법은 둘뿐이다: 강제로 되돌려지거나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거나. 필경 이렇게 될 양이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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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주 동안 물 걷기를 했다. 한강, 특히 경강(京江) 중심으로 걸으면서 이런저런 서사를 만지작거렸다. 숲에서와 달리 아픈 물 몸 냄새를 맡고 그 매운 기운을 통증으로 감지하면서 한층 더 깊은 지경으로 걸어 들어가는구나, 했다. 그러는 동안 이 문제를 화두 삼을 때 여태까지와는 뭔가 다른 사유를 해야 한다는 통찰이 찾아왔다. 그 이야기 들머리를 열어 볼 때다.

 

몇 번 툭툭 던지고 지나쳤던 질문을 아금박차게 한다: 물은 무엇인가? 아니. 물은 누구인가?

 

먼저 물이 본디 숲이라는 이야기부터 다시 불러온다. , 그러니까 바다 생명이 뭍으로 올라와 이룬 숲은 물이 덜 있는 바다다. 덜 있다는 말은 단순히 양만을 뜻하지 않는다. 질도 그렇다. 이를테면 뭍 속, 껍질, 바깥에 있는 모든 물은 민물이다. 뭍에 사는 생명체 몸속에는 소금물이 들어 있지만, 그들이 몸 밖에서 섭취하는 수분은 특별한 예외를 빼고는 모두 민물이다.

 

인간 몸은 바다를 담고 있다. 하여 민물을 몸속 정맥에 주사하면 죽는다. 입부터 항문까지, 넓은 의미로 말하는 창자, 곧 장()은 엄밀히 말하면 인간 몸이 아니다. 대롱인 몸 안쪽에 있는 바깥이다. 하여 바닷물을 직접 마시면서 살 수는 없다. 이런 이치는 바닷속과 바다 밖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어떤 교언으로도 인간 생명이 물에서 발원했다는 진실을 왜곡할 수 없다.

 

이 진실은 단지 인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이 필수적이다, 뭐 이런 도구 차원하고는 전혀 다르다. 생명체와 물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그 이상으로 완전히 쪼개질 수 없다. 물 자체는 생명체가 아니지만 생명체를 형성하는 계기·기조이므로 비생명이 생명을 창조했다는 표현은 지나친 수사거나 생명 모독일 수 없다. 생명이 비생명에 우선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생명에 관한 한 모든 물이 다 물이지는 않다. 액체 물만 물이다. 액체 물에서만 삼차원 생체 고분자(biopolymer: polynucleotide, polypeptide, polysaccharide)가 형성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명 품은 액체 표층수는 태양계에서 지구에만 존재한다.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는 근거가 액체 물이므로 이 물 고리를 벗어난 생명은 존재 불가능하다.

 

이 놀라운 사실 말고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물 고리, 그러니까 생명 고리를 존재 가능하게 하고 유지하는 주체가 바로 달이라는 사실이다.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지구 공전 궤도가 생명 공간을 유지할 수 있게 균형 잡는다. 지구 자전축 안정도 달이 좌우한다. 이를테면 달은 태양계 생명 시스템 거대 에너지 전류를 제어하며 조절하는 미세 정보 전류다.

 

내친김에 아금박찬 질문 하나 더한다: 달이 지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데 생명은 어찌 될까?

 

지구 자전 주기가 어떻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어떻고 말하지만, 달이 지구 중력장을 벗어나 우주로 사라진다면 지구 공전 궤도가 태양에서 멀어질지 가까워질지 말하는 이는 없다. 멀어지든 가까워지든 물 고리를 벗어나면 생명은 끝이다. 아직도 인간은 달이 누군지 모른다. 물이 달 물이라는 사실은 더욱 모른다. 여기가 제국과학의 한계다. 범주 인류 과학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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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우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지도자들은 중동의 사태를 놓고 논의했다. 우리는 가자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휴전과 인질 석방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되는 노력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천명했다. 우리는 합의를 최대한 빨리 종결하기 위해 바이든 대통령, 이집트의 시시 대통령, 카타르의 아미르 타밈이 이번 주말에 협상을 재개하라고 공동으로 요청한 것을 지지하며, 더 이상 잃을 시간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든 당사자는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 덧붙여 구호품의 수송과 배포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란의 침략에 맞서, 그리고 이란의 후원을 받는 테러 집단의 공격에 맞서 이스라엘을 방어하겠다는 지원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계속되는 군사적 침략 위협을 중단할 것을 이란에 요청했고, 그런 침략이 일어나면 지역 안보에 생겨날 엄중한 결과에 대해 논의했다.” 


이것은 8월 12일 자로 ‘중동 사태에 관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공동성명(Joint Statement from the United States, United Kingdom, France, Germany, and Italy on the Middle East)’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에 게재된 다섯 나라 공동성명의 전문이다. 


이런 성명이 왜 나왔는지는 분명하다. 지금 중동, 정확히 말해 서아시아에서는 핵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대규모 지역전쟁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이 그것이다. 그런데 성명 내용을 들여다보면 서방 ‘지도자들’은 위기의 원인을 ‘이란의 침략’과 ‘이란 후원을 받는 테러 집단의 공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왜곡된 것이다. 


성명은 이스라엘을 방어와 지원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이란과 그 동맹 세력은 침략과 테러 공격의 주체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서아시아에서 지역전쟁의 위기가 생긴 것은 이스라엘 때문이지 이란과 그 동맹 때문은 아니다. 지금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지난 7월 31일 이스라엘은 이란을 방문한 하마스의 정치국 최고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를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암살했다. 하니예가 이란의 새 대통령 마수드 페제시키안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숙소에 머물던 사이 단거리 발사체로 살해한 것이다. 손님으로 온 외국의 고위인사가 자국 영토에서 암살당하는 것을 용납할 나라는 없다. 사건 직후 열린 유엔안보리 회의에서 이란의 주유엔대사 아미르 사에이드 이라바니는 “이란은 이번 테러 범죄 행위에 대해 국제법에 따라서 필요하고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시점에 단호하게 대응할 고유한 정당방위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성명에는 이번 사태의 책임이 이스라엘 측에 있다는 점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스라엘의 책임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반면에 피해자인 이란의 예상되는 대응에 대해서는 ‘침략’으로, 그 동맹 세력은 ‘테러 집단’으로 규정한다. 성명문에서 언급된 ‘긴장을 완화하고’ ‘휴전과 인질 석방’을 해야 하는 의무도 살펴보면 이란과 하마스에만 지워져 있다. 


그러나 서아시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당장 ‘휴전’을 실시해야 할 당사자는 이스라엘이지 이란 측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세계인 다수—특히 남반구의 인민 대부분—가 가자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육을 멈추고 휴전할 것을 외치고 있는데도 북쪽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공격하고 있고, 이란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쟁을 도발하려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그런 태도는 특히 개인적 부패 문제로 전쟁이 종식되면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 갈 공산이 큰 총리 비비 네타냐후, 이스라엘을 시온주의 유대 국가로 재건하려는 강경 극우세력으로 현 내각에 들어와 있는 국가안보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 재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치 등이 이란과의 갈등 격화를 통해 전쟁을 도발해 미국이 직접 개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다섯 나라의 공동성명을 보면 서방의 태도, 특히 다섯 나라의 수장인 미국의 태도가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지금 서아시아에서 전쟁 확전을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임을 모를 리 없으면서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되레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고, 피해국인 이란에 대해서는 불법 공격을 받은 데 대해 정당방위를 행사하려는 것도 되레 침략으로 말하고 있다. 


자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귀빈으로 참석한 온 외국 지도자를 국제법을 무시하고 살해한 이스라엘을 이란이 용납할 리는 없다. 이란은 지난 4월 1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주재 자국 영사관을 이스라엘이 공습해 혁명수비대 소속 장성 2명을 포함한 10여 명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300대 이상의 드론과 미사일로 이스라엘의 군사기지를 공격해 세계 최강의 방공망임을 자랑하는 ‘강철지붕(Iron Dome)’을 무력화한 바 있다. 당시 이란의 공격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미리 통보한 뒤에 이뤄졌고 이스라엘의 방공망, 미국과 프랑스의 공중 지원, 요르단 등의 미사일 요격 등을 뚫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져 세계가 놀랐다. 이번에 예상되는 이란의 공격은 지난 4월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성명문을 보면 미국 등 서방 주요국이 커져만 가는 서아시아 전쟁 위기를 완화하려는 기색은 전혀 없다. 오히려 있지도 않은 이란의 ‘침략’을 거론하고 동맹국을 테러 집단으로 폄하해 이란을 도발하려 한다는 인상이다. 이미 미국은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에 대비해 항공모함 전단과 핵 잠수함 등을 이스라엘 근해에 추가 배치하는 조치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스라엘이 당장 가자에서 학살을 멈추고 휴전을 한다면 이란은 7월 31일의 불법적 암살을 불문에 부칠 수 있다는 전언이 있다. 자국 영토 내 귀빈 살해라는 이스라엘의 도발 행위를 응징하는 것을 이란이 포기하려면 이스라엘이 적어도 가자 지역에서 자행하는 살육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조건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이란 측의 보복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스라엘이 먼저 휴전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지금처럼 계속 도발적 태도를 드러낸다면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은 필연적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개입도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란은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다. 이란과 미국 사이에 군사적 갈등이 벌어지면 러시아가 개입한다는 예상도 가능하다. 러시아는 지금 이란에 상당한 군사적 원조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8월 5일 러시아 전 국방장관이자 현 국가안보회의 서기인 세르게이 쇼이구가 이란을 방문해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이란군 참모총장 등을 두루 만나고 갔다. 러시아뿐이겠는가. 이란과 미국 간의 군사적 갈등이 생기면 중국의 개입도 배제되기 어렵다. 중국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이란과도 군사적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이란을 방문한 하마스 정치국 최고지도자를 이스라엘이 암살한 데 대한 응징을 이란이 할 때 만약 미국이 양국의 갈등을 완화하기보다는 부추기는 선택을 하면 서아시아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우려가 있는 것은 그런 점들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법을 무시하고 타국과의 공존과 협력 의무를 무시하며 안하무인으로 타민족을 살육하는 이스라엘의 무모한 행위로 세계는 새로운 대규모 전쟁의 위기로 빠지고 있다. 서아시아는 지금 아마겟돈으로 변할 조짐이다. 이런 상황을 앞두고도 미국 등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행동을 제지해 확전 우려를 더는 대신에 되레 이란을 탓하고 전쟁을 도발한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지구를 파탄으로 빠뜨릴 전쟁을 일으키려 안달인 것만 같다. 


이란, 러시아, 중국의 지혜로운 대응이 무엇보다 요청된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서아시아에서 깊어가는 지역 긴장, 전쟁 위기를 완화하는 데 이스라엘과 서방이 좋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정당하게 응징하되 더 이상의 확전은 일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이 이스라엘과 서방이 무모한 확전을 하지 못하도록 이란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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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으로 나눈 서울 한강(京江) 걷기가 오늘로써 마무리되었다. 실제로는 더 있었다: 경기도 양평 구간 다녀온 끄트머리에 걸었던(616) 옥수동·금호4가동 구간, 그리고 어제 걸은 이촌1동 구간. 굳이 하나 더 끼워 넣는다면 한강과 청계천 알레고리에 터 잡아 걸었던 두물개부터 청계천 두물다리까지 구간.

 

어제는 전혀 뜻하지 않았던 약속이 이 동네 한 음식점으로 잡히는 바람에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한 시간가량 걸었다. 정북방에 자리한 대통령실을 향해 축징하기 위해 불현듯 잡은 일정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버드나무 신목을 챙겨 가서 강가 단단한 돌 옆에 심고 허리 접어 발원하였다: 모쪼록. 부디. 제발. . .

 

그제도 후배들과 잡은 저녁 약속으로 10km가량 걸었고, 어제도 8km가량 걸었는데, 오늘 길은 20km 넘을 듯해서 일단 각오부터 한다. 게다가 나지막하나 산도 둘을 올라야 한다. 물을 넉넉하게 챙기고 양산도 넣는다. 오전 오후 두 일정을 이어서 진행하기로 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염제가 훅하고 들어온다.

 

방화역에서 내려 우선 국립국어원부터 간다. 경강 걷기 마무리가 여기서 비롯할 줄은 몰랐다. 몰라서 필연이 아닐까. 다시 한번 식민지 어문 현실 정화와 겨레말 현창을 빌어마지않으며 꿩고개를 오른다. 넘어가면 한강 둔치로 가는 나들목이 있다고 한 지도를 믿고 거침없이 나아가다가 막힌다. 되돌아서 찾아간다.


 

왔던 길 되돌아가며 길 찾는 일은 이제 이골이 난 상태다. 언제 봐도 식민지 도로는 자동차 위주다. 악의 없는 불친절로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러구러 다족류 괴물 같은 방화대교 교차로 밑을 지나 강서 습지생태공원으로 들어선다. 입구부터 나름대로 손탄 흔적이 역력한 산책로가 손쉬운 걷기를 안내한다.


 

버드나무 중심으로 무성히 자란 푸나무가 자잘한 섬들을 경계 삼아 아옹다옹 어우러지는 습지를 구불구불 걷는다.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작은 물줄기가 정겹지만, 단 한 번도 가닿을 수는 없게 돼 있다. 심지어 습지 관찰하도록 만든 데는 나무판자 길이 아예 공중에 떠 있다. 아쉽다. 분명 더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물 걷기를 하는 나로서는 무엇보다 물에 가 닿아야 한다. 이윽고 행주대교다.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는 삭막한 공사 차량 통행로로 들어선다. 직진하면 물이 나오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거기서 아픈 물과 만난다. 신음을 들으며 매운 체취를 맡으며 물 모심에 몰입한다. 돌아 나와서 경강 끄트머리로 간다.


 

명박 운하 아라뱃길까지는 가지 않으련다. 그 토건에 토역질하느니 곱게 숲길 돌아서 마곡나루로 가자. 시간을 가늠해 보니 조금 서둘러야겠다. 마곡동 구간은 곱촘히 살피지 않고 곧게 난 흙길을 따라 빠르게 걷는다. 마곡 나들목 가까이서야 길을 벗어나 물가로 간다. 삼가 물 사룀을 한다. 사뢰면 병이 나으니까.


 

마곡동은 삼()을 많이 재배했던 골짜기란 뜻으로, 본디 고고마진 나루터가 있는 어촌 마을이었다. 큰 홍수가 난 뒤 제방을 쌓으면서 나루터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지금은 하수처리장이 있다. 이곳 습지를 중심으로 짰던 야심 찬 오세훈표 수변 토건 계략이 무산되고 남겨진 허울뿐인 생태습지공원엔 얄팍함만 빈둥거린다.



 

땡볕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궁산으로 스며든다. 궁산은 나지막하나 건너편 행주산성과 더불어 한양 서쪽 하구를 지키는 군사 요충이었다. 실제 임진년 왜란 때 의병과 관군이 여기 집결했다가 행주산성 권율 장군과 합류해 대첩을 이루었다. 그 역사를 못마땅히 여긴 일제가 산 동남쪽에 군사용 땅굴을 파 앙갚음했다.

 


산 정상에는 성터가 있고 그 한가운데 성황사가 있다. 도당 할머니 신을 모신 사당이다. 뱃사람 물길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신앙과 결부돼 있을 듯하다. 순우리말 이름이 있을 텐데 조선시대는 사대 벼슬아치들이 한자 음차로 모욕하고, 식민지 시대 이후는 제국 잡귀가 능멸함으로써 초라한 모습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나는 준비한 물로 제수 삼아 예를 갖춘다. 이른바 고등종교야말로 도리어 큰 미신이다. 저들이 사악한 정치꾼 앞뒤에서 벌여 온 주술을 역사가 기억하는 한,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남의 신 데려다 머리 조아리느라 제 신 짓밟고 버리는 식민지 살풍경과 행주대첩이 이루는 모순을 직시하며 나는 소악루로 내려온다.


 

겸재가 양천 현감 시절 남산 일출을 보고 반했다는 소악루에 걸터앉아 남산을 밀어낸 쓰레기 산을 탄식한다; 봉산 줄기와 삼각산을 내쫓은 거대한 토건 괴물에 경악한다; 제국 따라 하기에 골몰하는 부역 국가 내부 식민주의 패거리를 축징한다. 오늘 하늘은 왜 저리 이글거리도록 파란지, 구름은 숨 막히도록 하얀지.



 

숲을 착취 주술 도구로 삼았듯 물도 돈 쏟아내는 화수분 취급하는 특권층 부역자 권력에 대체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갈수록 미궁이다. 그리하여 걷는다; 걸음으로써 숲을, 강물을 서로 주체로 세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먹는다; 증언한다. 나는 물 한 방울 입에 물고 불난 산으로 날아드는 벌새일 뿐.

 

궁산을 나와 경강 줄기 따라 직선으로 열린 가양동 구간 산책로를 따라간다. 가양역에서 경강 걷기를 마무리하면서 생각을 매만진다. 예상보다 충실히 걸었다. 걷기가 이끈 서사도 나로서는 마무리답게 풀렸다. 기획 아닌 기회가 빚은 구성이다. 음모 넘어 운명 같은 거다. 다음 주엔 운명과 대놓고 의논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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