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후 두 번째 맞는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베란다 정리에 들어간다. 생각보다 묵직한 물건들이 이곳저곳에서 뒹군다. 거실에서 바깥 풍경을 볼 때 시야를 시원하게 틔워주려 가운데를 비우고 양쪽으로 짐을 몰아 간동하게 마무리한다.

 

간단히 늦은 점심을 먹고 종묘로 향한다. 정릉이나 낙성대가 그랬듯 이제 종묘는 내 ritual이다. 특별한 걷기 계획을 세우기 힘들 때는 무조건 종묘로 간다. 갈 적마다 새로운 정서와 각성이 일어나니 창발로 열리는 한 시공임이 틀림없다.

 

여느 때보다 각별하게 숲에 주의하며 걷는다. 수시로 멈추어 깊숙한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나부시 시선을 낮춰가며 톺아본다. 차마 침범할 수 없는 숲을 향한 그리움이 영성으로 번져간다. 별로 반짝이는 버섯들은 숲을 한껏 푸르게 한다.

 

거룩한 숲, 저 화룡점정 마침내 정전으로 향한다. 서문을 들어서는데 막 나서는 장년 남자 사람 하나가 일행에게 하는 말이 들려온다. “우리나라 고건축은 거칠고 투박해. 서양 같으면···.” 유럽 여행깨나 한 자부심에 절은 무식이 역력하다.

 

방금 지나온 종묘 정전과 월대(月臺) 박석(薄石)을 보고 한 말이렷다. 정전은 신들 거처라 단청도 하지 않고 처마도 들지 않고 현액도 걸지 않은 사실을 몰라서다. 여러 번 증축했음에도 흔적 전혀 남기지 않은 극치의 정교함을 몰라서다.

 

월대 박석은 일부러 거칠고 자연스러운 단면을 그대로 두었다. 이는 신들이 거니실 때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다; 무엇보다도 돌에 빛이 반사되어 신들 안식에 방해되지 않도록 분산시키려 함이다. “서양 같으면어찌했으려나.


 

별것 아닌 듯하지만 이런 자기 비하, 부정이 식민지를 거치고도 여전히 허울 국가일 뿐인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빠진 함정이다. 아니, 사이비 종교다. 그 사이비 종교 잡귀에 빙의된 명신이가 벌인 굿판을 벗어나지 못한 오늘이다.

 

다시 정색하고 월대 박석을 삼가 밟는다. 푸른 숲을 점정하는 정전에 깃들어 자연을 점정하는 인간 하나에 소망 품는다. 그 소망이 담긴 발걸음을 종묘에 헌정하면 나는 표표히 물로, 먼지로, 마침내 탄소로 돌아가리라. 맛있게 해가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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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9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수시로 종묘를 산책할 수 있으시다구요? 그런 복된 나날이...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bari_che 2025-09-11 08:53   좋아요 0 | URL
복된 일 맞습니다.^^ 실은 거리가 그렇게 가깝지는 않고요 종묘가 워낙 ˝복된˝ 곳이라서 그렇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