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죽나무꽃은 모르는 이가 너무 많고 아는 이도 너무 쉽게 지나치지만 참으로 예쁜 꽃이다. 만개해도 종bell 모습을 지키며 다소곳 땅을 향하기에 꽃말이 겸손이다. 이 겸손한 한 생이 끝나 그리던 땅을 향해 떨어지다가 더러는 이렇게 시즌2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이 은총에는 하늘 향해 온몸 활짝 펴는 황홀이 보너스로 추가된다. 그지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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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잠깐, 일요일 오전·오후, 월요일 오후가 제주를 실제로 걸은 시간이었다. 40km 남짓하니 그야말로 소소한 일정이다. 소소해서 쏠쏠한 이 사흘 백릿길은 내 삶에 이미 농밀한 파동으로 작용하고 있다.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5시에 택시를 탔다. 기사에게 일부러 대화를 청했다. 외지인 유입, 중국 자본, 강정 해군기지, 제주 제2공항, 쌍둥이 빌딩, 궨당(권당) 정치 등 여러 주제에 대해 그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정치적 견해가 나와는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그가 주민으로서 제주를 걱정하는 진심은 그 다르고 같음 문제를 넘어선다. 내 심사 때문인지 오늘따라 이륙 과정이 소란하다.

 

평소보다 긴 시간 먼 거리를 이동하고 온 터라 출근길은 아득하고 한의원은 적막하다. 그간 침 맞지 못했던 분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녹용 넣어 한약 짓겠다는 예약 전화가 있어서 제주 향해 꾸벅 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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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곶자왈이다. ()자왈(덤불)은 화산활동으로 분출된 용암류가 만들어낸 불규칙한 암석 덩어리들이 널린 곳에 이루어진 숲이다. 곶자왈도 언제 꼭 한 번 혼자 걸어보고 싶었던 곳이다. 왠지 알 수 없으나 배고픈 생각이 들지 않아 점심 식사를 거른 채 숲으로 들어간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아 내 분위기는 아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인 듯 흘러간다.

 

정말 난생처음 보는 숲이다. 운동하러 오지 않았으므로 연신 시선을 360도 돌리면서 천천히 걷는다. 뭍에서 볼 수 없었던 개가시나무 자태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는가 하면, 청아하게 지저귀는 섬휘파람새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사이사이 달팽이 눈으로 버섯을 찾는다. 돌꽃과 이끼는 뭍보다 훨씬 더 자주 나타나 같고 다름을 재빨리 구별하며 지나간다.

 

비교적 쉬운 테우리(몰이꾼)길을 지나 가장 걷기 힘든 가시낭(가시나무)길로 접어든다. 바닥에 무수히 깔린 돌덩어리 때문에, 수시로 발목이 꺾이며 미끄러진다. 이 험하고 깊은 숲 또한 4·3의 애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숨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 깊은 숲은 얼마나 얕은가; 죽음이 주는 강고한 공포에 비해 그들이 쌓은 돌담은 얼마나 허술한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가시낭길에 비해 농사를 지으려 주민이 만들었다는 한수기길은 한결 편하다. 그보다 더 평탄한 길이 바로 빌레(너럭바위)길이다. 용암대지 지역이라 제법 흙길도 있고 무엇보다 그래서 아름다운 버섯을 만끽할 수 있다. 처음 보는 버섯 군락지에서 많은 시간 머무르며 진지하게 살피고 질탕하게 논다. 밀도 높은 시공이 감사하다.

 

해가 확연히 기울 무렵 곶자왈을 나선다. 들어갈 때, 넓은 곳이니 안내 책자를 가져가라던 직원 말을 떠올린다. 결코, 넓지 않다. 사방이 포위된 작은 숲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제주마저 숲을 속수무책 잃어가고 있다. 나는 오늘 잠시 그 증인으로 왔다 간다. 증인이 방관자이기 십상인 이 흉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걱정한다. 남은 날이 하 많지도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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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뫼산골 2022-05-21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글을 잘 쓴다. 같은 곳을 보고, 걸어도 이렇게 그 감상과 표현이 새로울 수 있구나 부러워 진다..
 



<모슬포> 정군칠

 

모슬포에 부는 바람은 날마다 날을 세우더라.

 

밤새 산자락을 에돌던 바람이 마을 어귀에서 한숨 돌릴 때, 슬레이트 낡은 집들은 골마다 파도를 가두어 놓더라. 사람들의 눈가에 번진 물기들이 시계탑 아래 좌판으로 모여들어 고무대야 안은 항시 푸르게 일렁이더라. 시퍼렇게 눈 부릅뜬 날것들이 바람을 맞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 지나 입도 2대조 내 할아비, 무지렁이 생이 지나간 뼈 묻힌 솔밭 길도 굽어 있더라. 휘어진 솔가지들이 산의 상처로 파인 암굴을 저 혼자 지키고 있더라. 구르고 구른 몽돌들은 입을 닫더라. 저마다 섬 하나씩 품고 있더라.

 

날마다 나를 세우는 모슬포 바람이 한겨울에도 피 마른자리 찾아 산자고를 피우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그래야, 시절마다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을 수 있다더라. 그 길 위에서 그 바람을 들이며 내 등도 서서히 굽어 가더라.

 


모슬포,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 이름이 왜 내 기억 깊은 자리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슴아슴 찾아가면 오래전 사라호 태풍과 관련된 라디오 드라마에 가 닿는다.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 무대가 제주도였고, 그 지명 가운데 모슬포가 있었던 듯하다. 드라마 제목을 포함한 내용 거의 모두가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기이하게 최백호가 부른 주제가 대부분이 남아 있다. 이마저 모슬포를 다녀온 뒤에 떠올랐으니 어떤 기억은 몸에 깃드는 모양이다.

 

운진항에서 내려, 올레 10길이 지나가는 하모 해변을 걸었다. 정군칠 시에서처럼 날 세운 바람이 불었다. 모든 길을 걷지 않아 그 굽은 내력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다시 돌아가 모슬포항으로 갔다. 콘크리트 잿빛 귀퉁이에 언뜻언뜻 바다 남빛이 보이는 부두 음식점에서 소주와 고등어회로 저녁 식사를 대신했다. 똑같은 메뉴인데 옆 음식점엔 줄이 길다. 얼마나 더 맛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음에 와도 이 집에서 먹겠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디를 가도 제주는 4·3을 피해갈 수 없다.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는 표현만으로도 폐부를 찔러온다. 조선조에서도 일제 강점기에서도 대한민국 시대에서도 제주는 가혹한 착취와 살해 대상일 뿐이었다.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지극히 개인적 기억을 따라 그리움으로 왔으나, 모슬포 떠나는 발걸음은 공동체적 애통이 실려 철버덕거린다. 그렇게 오늘 60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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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을을 벗어나 길 건너편 북오름(314.3m)을 향한다. 외지 사람이 거의 전혀 들어올 일 없어 보이는 곳이다. 나도 여기 와서 지도를 보고서야 알았다. 조금 걷다가 또다시 커다란 축사와 마주친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냄새가 풍겨 나오기도 하려니와 여러 마리 서 있던 누렁소 가운데 한 마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통에 그만 냄새를 잊는다. 무심한 듯, 슬픈 듯, 그 시선이 온갖 상념을 단박에 걷어 내버린다. 자신을 죽이려고 먹여 살리는 인간과 같은 종을 바라보는, ! 저 눈망울이라니. 홀연히 처연해진 마음이 이름 모를 후미진 길을 따라 오름 둘레에 번지듯 머물다 흩어진다.

 

스마트폰 지도 보고 가다가 길을 놓친다. 지도 작성 뒤에 누군가 길을 막았는데 version up이 안 된 탓인 듯하다. 마을 주민이 다시 가르쳐준 대로 숲길로 접어든다. 오름 안내판이 서 있으나 거의 방치 상태다. 걸을수록 길은 없어져 간다. 길 없는 길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면서 오직 두 가지 감각으로만 전진한다: 옆 거린오름(298.2m) 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오르지 않고 내려가야 한다. 길 잃은 긴장감과 숲이 주는 안정감 경계를 오가며 한참 걷다가 나 스스로 북오름 둘레길을 만들고 있구나, 싶어 웃는다. 어찌 생각하면 한평생이 그랬다. 남이 가르쳐준 대로 산 적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이탈과 개척이 겹치는 발길 따라 북오름과 거린오름 사이를 지난다. 왼쪽으로 돌아 나아가자 거린오름 영역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확연히 든다. 거린오름 자태를 확인하고는 둘레를 다 도는 대신, 서남쪽 자락에 펼쳐진 길을 따라 마을 아닌 마을로 향한다. 묵은 땅 군데군데 정체 모를 집들이 서 있을 뿐, 후미진 버덩이다. 이번도 방향감각만 믿고 가다가 막다른 곳을 만나 되돌아 나온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개에게 길 잃은 길손과 도둑이 뭐 다르랴. 저 너머 들리는 자동차 소음이 멀지 않은 곳에 돌아갈 길 놓였음을 알린다. 무덤 한 기가 서두르지 말라며 길가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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