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았다 - 목수 할아버지가 전하는 나무의 매력, 인생의 지혜
에르빈 토마 지음, 김해생 옮김 / 살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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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 내용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책이다. 저자는 산림관리사 출신으로 100% 목조주택 국제면허를 지닌 목조건축회사 경영자다. 그는 목수였던 처조부 영향 아래 목재를 따라 신비한 나무 세계로 들어간 특별한 이력자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나무 공부가 어떤 의미로 변곡점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숲 아닌 목재라는 조건에서 만나는 나무는 내게 무슨 말을 건넬까 버썩 궁금해진다.

 

책을 열면 파블로 네루다가 쓴 <목재에 바치는 송가>가 무려 여덟 쪽에 걸쳐 펼쳐진다. 처음엔 왜 나무가 아니고 목재일까, 의아했는데 이 시가 일상의 것들에 바치는 송가일부임을 알자 아연 감성 문이 열린다. 시 첫 부분이 그 뒤 모든 내용을 주석으로 거느린다.

 

! 내가 아는 한

그리고 다시 알아도

모든 사물 중에

가장 좋은 친구는

목재다

 

사물이라는 표현이 네루다 기원인지 번역 기원인지 알지 못한다. (대부분 사람에게는 차이가 없겠지만) 나무는 사물이 아니고 목재는 사물이라 하면, ‘친구란 표현은 은유일 따름인가?

 

나무는 영원한 순환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나무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요소는 나무 하나하나의 성장 상태가 아니다. 결정적 요소는 나무가 품고 있는 불가사의한 신비다.

  나무를 베는 일은 나무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다. 나무를 파괴하는 행위는 영원한 순환을 무시한 채, 나무라는 존재를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는 생각을 말살한 채, 나무의 신비를 파괴할 때 시작된다.”(206)

 

생명의 상징인 나무는 벌채로 말미암아 죽지 않는다. 나무는 인간이 나무와 세계의 연결을 끊을 때, 나무 리듬과 나무가 이 세계에서 할 일을 빼앗을 때,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나무를 배제할 때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은 나무를 즐기고, 나무가 성숙하면 그 목재를 이용해야 한다. 나무가 주는 목재를 받아들여, 나무의 신비를 인간 삶에 포함시켜야 한다. 목재를 다 사용한 다음에는 예정된 순환의 길로 보내, 다시 부식토가 되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런 신비를 보존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도 나무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목재는 나무의 신비를 간직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존재다.......목재는 색체와 형태를 통해, 그리고 가공하는 사람의 정신을 통해 인간과 교감한다.”(207)

 

나무를 베는 일은 나무를 죽이는 일이 아니다. 늙은 나무를 베는 일은 자연이 미리 정해놓은 삶의 여정이다.......

  자연에 경외심을 품고 목재를 가공하는 사람, 목재와 더불어 살며 목재를 다시 순환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이 나무와 숲을 얻는다.”(208)

 

목재로 집을 짓는 사람 관지에서 살아 있는 나무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했다고 비판할 만하다. 그 비판은 동물계 관지를 반영한다는 반박을 부른다. 나무에서 나온 목재와 동물에서 나온 뼈와 살은 생명 작용과 유지 기전을 전혀 달리 한다.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나무의 신비또는 나무의 기적이란 말이 그 다름을 극진히 표현해준다. 그 다름이 동물 뼈와 살로는 불가능한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 둘은 800년 넘게 인간과 교감하는 목재로 지은 건물이다. 인간과 교감하는 목재는 나무의 신비를 간직한 존재. 나무의 신비를 간직하는 한, 목재는 살아 있는 존재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목재를 대면하면 대뜸 떠오를 수밖에 없는 질문 하나.

 

나무의 신비를 간직한 목재가 살아 있는 존재라면 풀의 신비를 간직한 초재草材도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가?”

 

초재 가운데 익숙하기로는 식재가 으뜸이다. 나는 오늘 점심식사 때 두릅을 먹으며 그 한 송이를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는 생각에 깊이 유념한다. 나는 두릅의 신비를 인간 삶에 포함시켜야한다는 원리에 순복한다. 나는 두릅에 경외심을 품고두릅과 더불어 살며두릅을 순환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이되어 나무와 숲을 얻는다.죽은 두릅으로는 그럴 수 없다.

 

먹기는 물론이고 입거나 붙이거나 바르거나 씻거나 지니거나 간에 풀은 뽑히고 베이고 썰리고 이겨지고 끓여져 초재로 인간에게 온다. 뽑히고 베이고 썰리고 이겨지고 끓여질 때 풀이 죽는다고 우리는 간단히 생각한다. 나 또한 얼마 전까지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죽여 내 생명의 일부로 다시 살려내는 역설 사건이다. 살육도 필연이고 생육도 필연이다.’라고 말했었다.(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식물의 사유주해리뷰5. <생명을 망각한 문화()식물성 의식을 요청함>) 이 말은 생사를 동물 기준으로 규정한 데서 나왔다.

 

생사의 갈림은 입자와 파동의 갈림과 같다. 실재 세계에서 100% 입자와 100% 파동은 존재하지 않고 상태함수를 따라 중간영역에서 요동할 뿐이듯 삶과 죽음은 칼 같은 이분법 안에 갇히지 않는다. 특히 낭/풀은 생명 스펙트럼을 넓게 확보한 상태함수를 따르므로 인간 눈으로 보기에 죽은 모습이 산 모습일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는 정도 차이를 넘어 본성 차이다: /풀 생명은 모듈 분산 운동, 인간 생명은 장기 집중 운동.

 

이 책 덕분에 낭/풀로 빚어진 음식과 한약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다. 이 책 덕분에 낭/풀로 빚어진 집, 가구, , 필기도구, 장신구.......를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란 말을 새삼 실감하니 공부 길은 멀고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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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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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약 6005000~10000, 우리나라에는 50여 속 150여 종이 살고 있는 벼과 식물은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식물이다. 인간과 실로 생사를 두고 엮인 중요한 존재지만 장구한 세월 동안 일상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매순간 정색하고 대하지는 못한다. 나는 향모를 알고 나서 벼과 식물 본성에서 피어나는 향기를 매일 확인하며 상상하며 살아간다.

 

다스운 밥에서 김을 따라 모락모락 올라오는 향기가 지닌 오묘함이 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감동은 도정된 쌀 너머 저 아득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이끄는 마법에 잠길 수 있게 해준다. 마법을 통해 나는 포타와토미 사람들이 향모 드림을 만드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제의이자 영적 네트워킹인 사건이 일어나는 카이로스에서 숨을 멈춘다.

 

지난 3개월 동안 향모를 땋으며와 거의 매일 코인사를 나누며 지냈다. 새삼 실감한다. 뇌 독서에 길들여진 오랜 인습에서 놓여나 심장 독서로 가는 발걸음은 무겁다. 질량이 실리지 않은 깨달음은 깨침에 이르지 못한다. 깨침은 물적 변화다. 물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낭/풀 공부는 낭/풀 본성에 반한다. /풀 본성이 내 몸 가득 채워지기를 빌고 빈다.

 

이 소원 여정은 거대한 나무에서 시작해 잡초를 거쳐 이끼(선태류)에 닿고, 더 나아가 지의류, 조류, 균류(박테리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풀이라는 중용 또는 중도로 돌아오기 위해 낭/풀 경계를 넘어 극한으로 간다. 심지어 생명과 비 생명의 가장자리 사건인 바이러스까지 다가간다. 급기야 흙, , 햇빛, 바람의 영지로 들어간다. 마침내 신과 마주한다.

 

신과 마주한 시공은 아득해서가 아니라 소미해서 멀다. 그 먼 나라에서 절대 평정으로 사는 데 중독된 아라한이 사람나무인 내 천명은 아니다. 내 천명은 나무에게 회향하는 인간으로서 본성을 따라 사는 일이다. 본성 따른 그 삶을 향모를 땋으며에서 로빈 월 키머러가 아금박스럽게 보여주었다. 감사하다. 감사한다. 감사가 내 삶을 고요히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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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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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세상에서는 잔치 주인공이 선물을 받고 영예를 누린다. 포타와토미 방식에서는 정반대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 영예를 누린다.(558)

 

베풂의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모름지기 식물에게 배웠다고 하겠다.(560)

 

이제 우리 차례다. 이제야. 어머니 대지님을 위해 베풂을 열자.(563)

 

지난 수천 년 간 인간은 어머니 대지님이 차려준 풍성한 잔치 주인공으로 선물을 받고 영예를 누린축복 한가운데 있었다. 그 잔치 이름이 문명이든 과학이든 혁명이든 인간은 영예에 취한 나머지 잔치를 차려준 어머니 대지님을 잊어버렸다. 잊어버렸다는 말은 단순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 영예를 누린다.는 천하 이치를 망실했다는 말이다. 천하 이치 망실은 영예를 도둑질하는 행위다. 영예 절도는 급기야 모성살해로 치달아 오늘에 이르렀다.

 

모성살해를 사이코패스가 살인하듯 가장 잔혹하게 저지른 현장은 숲이다. 죽인다는 인식도 없이, 대놓고, 함부로, 향락으로, 한 그루 한 포기, 숲 통째 도륙했다. 인간이 인식하지 못한 중대한 사실이 더 있다. 도륙 이전에 베풂이 있었다는 사실. 인간 어법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칼을 빼어들 때 이미 낭/풀은 목 길게 늘여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이 베풂 이전에 인간 생명 자체를 지구상에 가능하게 한 원천적 베풂이 있었다는 사실. 문명 이전 조상들은 베풂을 식물에게 배웠다는 사실.

 

문명 인간은 더 이상 낭/풀에게 베풂을 배우지 않는다. 배움을 복원해야 한다. 배워서 베풂을 복원해야 한다. “이제 우리 차례다. 이제야. 어머니 대지님을 위해 베풂을 열자.늦었지만 늦게라도 베푸는 사람이 영예를 누리는 천하 이치를 복원하자. 진실로 인간이 영예로운 존재가 되려 할 때 베풂 말고 갈 다른 길은 없다. 베풂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다. /풀에게 받은 선물을 전하는 호혜다. 호혜는 순환이다. 돌고 도는 나선 춤을 추며 세계는 더불어 새로워진다. 새로워라, 길이 새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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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10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최근 화두는, 특히 아멜리 노퉁브 소설을 읽고 나서, ˝부메랑˝인데, bari_che님 글에서는 부메랑의 답으로 ˝베풂˝을 알려주시네요.^^ 그게 답이 되겠습니다. 제게

bari_che 2021-09-10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소설 읽지 못해 사실 드릴 말씀 없는 처지인데^^ 부메랑과 베풂-선물-이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느낌은 와락 옵니다~ㅎ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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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풍요한 사회원조인) 수렵·채취인을 묘사한 글에서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이렇게 환기시킨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아무리 풍요롭더라도 희소성 법칙에 집착한다. 경제적 수단 부족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따르는 제일원리다.” 부족은 물질적 부가 실제로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라 이 부가 어떻게 교환되고 순환되느냐에 달렸다. 시장체제는 부의 원천과 소비자 사이 흐름을 차단함으로써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낸다. 쌀이 창고에서 썩어나가는 동안 굶주린 사람들은 쌀값이 없어 죽어간다.......

  대안은 뭘까?......물과 땅, 숲처럼 우리 안녕에 기본적인 자원을 상품화하지 않고 공동으로 향수하는 공공자원 경제........ 공공자원 접근법은 올바르게 관리한다면 희소성이 아니라 풍요를 유지한다.(550)

 

우연히 알게 된 거물급 변호사와 술 한 잔하다가 우리나라 부동산 문제는 특정 정권 정책 능력과 무관하게 강남 건물 부자 몇 사람이 좌지우지한다는 말을 들었다. 절친한 대학동기한테서 들은 얘기에 따르면 빌딩만 400개를 가진 어떤 부자아마도 앞에 그 몇 사람 중 하나가 재산 대부분을 사회 환원하려고 절차를 밟는 도중 술병으로 급사해 물거품이 되었다고 한다. 도표로 제시된 어떤 자료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집을 가진 어떤 사람은 5천 개가 넘는 등기권리증을 가지고 있다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까닭은 얼마 뒤 이사를 가야 하는데 필요한 임대보증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 걱정하는 와중이어서다.

 

우리나라는 주택 공급과잉 상태임에도 내게는 집이 없다. 희소성의 법칙은 원리가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조작한 인위적 개념이다. 조작의 본영은 화폐이자를 전제한. 화폐가 부족정확히는 결핍의식과 시장 왜곡의 양성되먹임을 항구화한다. 화폐를 폐기하면 이 광란 질주가 멈출까? 그럴 수 있을까? 가능한 현실 대안은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말하는 공동체 향수자원 기반 화폐체제다. 이 체제는 모든 것에 재산(소유) 개념 적용하기를 멈춘다. 공유도 소유니, 공유는 물론 향유享有조차 조심스럽다. 결국 공동체 전체가 향수享受하는 자원 이야기를 한다. 공동체 향수가 인간을 결핍의식에서 해방해 풍요를 준다는 담론을 물질화한다. 이 물질화 성패야말로 인류 생사를 가른다. 여기가 로도스다.

 

나는 집 소유를 소망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임대보증금과 임대료에 끌려 다니며 끊임없이 떠도는 이 피곤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따름이다. 자기 소유 집을 타인에게 임대함만으로 끊임없는 소득이 산출되는 세상을 전복시킬 힘은 없으니 그저 임대보증금과 임대료 버느라 허리 휘는 삶에서나마 놓여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정도 소망도 아직은 아득한 세상에서 공공자원 접근법을 입에 담는 일은 아무래도 물색없으나, 돌이켜보면 참 인문정신에 눈 번쩍 뜨인 순간 이래 나는 늘 그 물색없는 짓으로 일관하며 살아왔다. /풀 공부는 미상불 그 물색없는 짓의 끝판 왕이지 싶다. 공공자원 접근법 또한 낭/풀 본성에서 비롯한 지혜일 테니 물색없음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내가 몸담은 세상에서 맞을 수 있기를 어찌 바라랴.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춤춘다. 여기가 내 장미 꽃밭이다.”

 

* 마지막 두 문장은 김선우 <혁명력의 시간, 로도스의 나날>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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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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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종 고독이라는 크나큰 아픔을 겪고 있다(522)

 

세밀하게 말하는 이들은 고독solitude이 외로움loneliness과 다르다고 한다. 고독은 객관적 조건으로서 홀로 있음이거나 그 홀로 있음을 정서적으로 문제 삼지 않음을 가리키고, 외로움은 홀로 있음을 쓸쓸하게 여기는 정서 상태를 가리킨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둘을 사실상 동의어로 이해했던 사람에게 이 분별은 명쾌한 느낌을 선사하는 세밀함이 된다. 기왕 세밀함 안으로 들어왔으니 온전히 세밀해져야겠다. 정말 객관적 조건으로서 홀로 있음이 있을 수 있는가? 그 홀로 있음을 정서적으로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가?

 

더불어 있지 않는 존재가 인간일 때, 여기서 특별히 문제 삼을 일은 없다. 그 곁에 나무가 진득하니 섰고, 풀이 하늘하늘 춤추고, 새가 낭랑하게 지저귀고, 시내가 졸졸 흐른다면, 이를 홀로 있다 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과 교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 고독인가? 그렇다고 할 때, 인간은 정말 아픔을 겪고 있는가? 적어도 대부분 인간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현대인 가운데 누가 자연과 교류할 수 없어서 아픔을 느낀다고 하는가. 병식 유무와 병 여부는 다르다, 에 주의한다.

 

많은 병이 병식을 동반하지 않고, 많은 병인이 병식을 지니지 않는다. 병식 있는 병과 병식 없는 병 둘 중에 어느 병이 병인에게 더 위험한가?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생사를 좌우하기도 하는 병에 병식이 없을 경우 대개 죽기 직전에 알아차리게 된다는 점에서는 병식 없는 병이 더 위험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인이 종 고독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위험하다. 거꾸로 말하면 병식이 없어서 위중한 병이다. 병식 없는 종 고독이 기후재앙을 증강시킴으로써 인간의 대멸종을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종 고독이란 병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화급하다. 통증이 있으면 쉬운데 아무런 느낌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전방위·전천후 자각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인간 행위가 폭로하는 비윤리성을 확인하면 된다. 병의 지성소에 모셔진 악을 대면하면 된다. 생리 통각이 마비되었을 때에는 윤리 통각을 깨운다. 종 고독은 인간 일극집중논리로 자행하는 다른 종에 대한 살해·수탈 그 자체와 결과를 인간 관지에서 붙인 이름, 즉 악의 지성소에서 불러낸 병의 얼굴이다. 병의 얼굴에서 악의 심장을 보는 눈이 어둠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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