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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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승은 당신이 준비되었을 때 찾아온다.......들으려면 침묵해야 한다.(327)

 

우치다 타츠루(소통하는 신체)를 따르면 무도 수련에서 제자는 스승한테 절대적으로 지는 법을 배운다. 절대적으로 지기 위해 몸을 절대적으로 이완된, 그러니까 위험한 상태에 둔다. 스승 칼날 아래 흔쾌히 목을 내민다. 절대적으로 위험한 상태에서 절대적으로 지는 법을 배움으로써 절대적으로 이기는 법을 배운다는 이치다.

 

여기 들으려면 침묵해야 한다.는 말과 정확히 같다. 스스로 떠들면서 스승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는 없다. 떠들지 않는다는 데서 침묵이란 조건은 끝나지 않는다. 더 중대한 침묵 조건은 스승의 언어를 제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 일이다. 이 번역은 원천적으로 오역일 수밖에 없다. 오역이라는 사실을 제자는 모른다. 제자는 스승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다.’고 강변한다. 강변은 허위 유능감정을 반영한다. 허위 유능감정은 배움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 증거를 우리 대부분은 가지고 있다. 설명 잘하는 수학 선생님이 칠판에 쓰면서 풀어줄 때, 고개 끄덕이는 일과 스스로 푸는 일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를수록 수학 점수가 낮다는 경험적 증거 말이다.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치지 못하는 까닭은 고개 끄덕이는 일이 오역(일 따름인 번역)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상담치료 임상에서도 이런 경우가 어렵다. 치료자가 말할 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수긍했는데 그 다음에 와서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사람. 단순한 오해일 수도 있으나, 이를 반복한다면 결국 이 사람은 들을 생각 없고 자기 말만을 하는 치료저항성 환자다. 정말 어려운 경우가 하나 남아 있다. 치료자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허위 유능감정에 사로잡혀 스스로 병을 통제하겠다며 발길을 끊는 사람. 이런 사람 의외로 많다. 물론 바로 그게 중병인데 속수무책이다.

 

속수무책이라는 표현에는 내 어수룩함, 아니 모자람이 묻어 있다. 환자로 하여금 허위 유능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려면 곡진함에 짝하는 결곡함이 있어야 한다. 결곡함은 전략이 차마 명함 내밀 수 없을 정도로 영적 카리스마가 갖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영적 카리스마를 갖추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반성한다.

 

반성은 이미 전복된 사유를 반영한다. “제자는 당신이 준비되었을 때 찾아온다.......말하려면 침묵시켜야 한다.” 제자의 침묵은 제자만의 조건이 아니라 스승의 조건이기도 하다. 참 제자가 흔쾌히 침묵함으로 스승을 기다리듯 참 스승은 제자로 하여금 흔쾌히 침묵하도록 함으로 찾아간다. 스승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는 제자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를 모순으로 끌어안아 창조해낸다. 살육과 생육을 한칼에 이루어버리는 윤리학이다. 윤리학은 역설 수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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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받은 명령은 "걸음걸음이 어머니 대지님에게 드리는 인사가 되"도록 걷는 일이었으나, 무슨 뜻인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다.(303)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질경이님이 늘어서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너그러운 치유자인 '백인의 발자국'포타와토미족은 질경이를 이렇게 부름_인용자은 잎을 땅에 바짝 붙여 걸음걸음이 어머니 대지님에게 드리는 인사가 되도록 자란다.(316)

 

질경이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고루 갖춘 생명이다. 잎은 겉이 부드러운 반면 속이 강인하고, 줄기는 그 반대다. 줄기는 밟혀도 죽지 않게 비스듬히 선다. 잎은 줄기 맨 아래서 지면에 바짝 붙어 겹으로 핀다. 밟혀도 죽지 않는다. 인간이 길을 만드는 한 질경이는 밟힘으로 존속한다. 밟힘이 그에게는 명예다.

 

이 생명 본성을 포타와토미족 정서 지혜는 잎을 땅에 바짝 붙여 걸음걸음이 어머니 대지님에게 드리는 인사가 되도록 자란다.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질경이 본성이 어머니 대지님에게 드리는 인사라는 서사가 머금은 진실은 사뭇 엄밀하다. 걷는 인간은 대부분 걷기 본성을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한다. 질경이 늘어선 길을 따라가고서야 알 수 있으리라.

 

나는 오늘 질경이 발자취질경이 꽃말를 따라 걸음걸음이 어머니 대지님에게 드리는 인사가 되도록 걸어본다. 인사는 만남과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극상 선물이다. 몸을 활짝 펴서 행한다. 인사는 인간 존재의 빛나는 발현 양식이다. 몸을 활짝 열어 행한다.

 

몸을 펴고 열지 않은 걷기는 일상 이동, 경쟁, 건강, 수행 도구인 걷기다. 도구에 걸맞게 속도, 보폭, ·착지, 시선, 체간과 견갑 각도, 하지 굴신, 상지 회전들이 왜곡된 걷기다. 몸의 본성을 대부분 접어 넣은 걷기다. 접힌 걷기를 가슴 깊이 느끼고 가차 없이 거절할 때 본성이 열린다.

 

본성 걷기는 연극배우가 연기하는 듯도 하고 무용수가 춤추는 듯도 하다. 과하게 또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꼭 똑 그만큼 무심코 얕고 짧게 걷는 타성에 젖어 있었다. 이 타성 걷기에서 공포·불안은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다. 홀연 돌연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여기서부터 몸 사람이 다시 깨어난다. 몸 사람으로 낭/풀에게 가 닿는다. 외길이다. 길섶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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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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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볼 일 있어도 우리는 같은 언어를 구사하지 않기에 직접 묻지 못하고 그들도 말로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리적 반응과 행동은 유창할 수 있다. 식물은 살아가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 질문에 대답한다. 우리는 어떻게 물을지 배우기만 하면 된다.(235)


 

제법 오래 전에 우울증 치료를 받은 분이 최근 다시 찾아와 숙의치료를 하고 있다. 물론 다른 문제가 있어서다. 여러 번 망설였다며, 두 번째 날 놀라운 얘기를 꺼낸다.

 

얼마 전에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들어서 40여 일 동안 대상도 없이 기도하다가 어느 날인가는 7시간이나 엎드려 있었는데, 한 순간 어떤 존재가 자기 몸속으로 들어오더란다. 놀라긴 했지만 나쁜 느낌이 들지 않아서 몸을 맡겼더니 알 수 없는 몸동작이 시작되더란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평안을 찾아가기 시작하자 아무런 의심도 들지 않더란다.

 

뭔가 하지 않은 내밀한 얘기가 있는 눈치긴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가지 중요한 해석을 해주고 그 영을 대하는 자세와 필요한 대화를 일러주어 보냈다.

 

내가 일러준 대로 누구냐고 물으니 당신이 요가 책에서 본 바로 그 요기인데 하도 간절히 기도해서 치료하러 오지 않을 수 없었노라 하더란다. 영들끼리 회의를 했다는 말도 하더란다. 그렇게 하기를 몇 주, 마지막으로 폐부 깊숙이 들어 있던 슬픔을 걷어냈다며 어느 날 홀연히 떠나가더란다. 다시 오느냐 물으니 아니라고 대답하더란다.

 

그가 내게 얘기를 꺼낸 이유는 경험을 공유하고 해석해줄 사람이 나 말곤 없어서였다. 사려 깊은 치유 스승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그 영도 찾아오지 않았겠나. 나는 상세히 기억하고 간직해서 차후 다른 삶을 사는 기틀 삼도록 당부했다. 현재 느끼는 평안에 감사하는 만큼 공동체 네트워킹으로서 영이 지닌 책임을 거듭 얘기했다.

 

그의 질문에 응답한 영의 인간 본성은 그가 지닌 인식 범주, 인지방식과 맞물려 있다. 내 질문은 인간 본성을 넘어서 가며, 인간 인식 범주, 인지방식 경계 밖으로 간다.

 

내 질문은 낭/풀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하는 대답과 조응한다. 몸 움직임으로 질문한다. 크리스틴 콜드웰이 말한 대로 행위 없는 성찰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바디풀니스280)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말에 눌려 접힌 몸을 구석구석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그 다음, 몸을 한껏 편다. 질문의 필요조건이다.

 

지난 9일 동안 말하기를 멈추고 내가 최초로 맞닥뜨린 진실은 걷는 인간으로 자부해온 내 걷기에 똬리 튼 몸 접힘이었다. 걷기를 접힌 몸으로 했다면 뭔들 펴진 몸으로 했겠나.

 

통렬하다. 나 또한 몸을 도구화한 인간의 전형에 지나지 않는구나. 상담으로 하는 마음치유를 업으로 삼고 있으니 오죽하랴. 내 치우침이 낭/풀을 불렀고, /풀은 몸을 건넸다.

 

몸으로, 움직임으로 회귀하는, 그러니까 몸 환원주의로 가는 과정이 아니다. 몸이 몸임을 인정하고 몸 움직임 실재를 삶과 치유 주체로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의 전체성을 확충하는 도정이다. 바로 이 길이 낭/풀의 길이다. /풀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중첩극상 세계를 구사하는 지식·지혜 형상. 지식·지혜 형상는 인간처럼 심신분리를 일으키지 않는다.

 

심신분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접힌 몸이 보인다. 접힌 몸을 펼 때 비로소 무엇을 어떻게 왜 질문해야 할지 알게 된다. 질문은 답변을 머금고 있다.

 

펴진 몸으로 낭/풀 생명 이치에 깃드는 순간부터, 질문과 답변, 질문자와 답변자의 이분법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풀 본성이 네트워킹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킹은 상호주체면서 상호객체고, 나아가 그 교차다. 이런 생명 교류는 신비를 공유한다. 신비를 공유하면 신비주의에 기대지 않는다. 신비주의 아닌 신비가 실컷 펼쳐지는 세상을 묻는 질문은 그대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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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 연장은 톱이 아니라 대화다.

  토박이 벌목꾼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개별성을 인정하여 사람처럼 대한다. 사람인간 아닌 사람나무로 여긴다는 뜻이다. 나무를 취하지 않고 나무에게 부탁한다. 예를 갖추어 자기 목적을 설명하고 벌목 허가를 청한다. 때로는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한다.(214)

 

사랑은 다양한 문맥에서 소통과 동의어다. 사랑한다면서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찾아오는 천차만별 부부나 연인에게 주는 내 기본 처방은 동일하다. “질문이 소통의 시작입니다.” 대부분 수긍하고 동의한다. 중증인 사람은 대뜸 저항한다. “나는 질문 엄청 잘 하는데요?”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이 턱을 치받쳐 올리고 눈을 내리까는 것과 반대로,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치뜨면서 말한다. “당신은 명령을 의문문 형식으로 내렸을 뿐입니다.”

 

때로는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도하므로 토박이 벌목꾼이 나무에게 한 부탁은 본질적으로 질문이다. “삼가 생명을 거둬드려도 되겠습니까?” 정갈한 제례다. “흔쾌히 목숨 내어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축의다. 엄숙과 질탕, 파괴와 창조를 가로지른 벌목 논리는 아닌 대화가 벼려낸 역설 미학이다. 거두는 사람에게는 죄책감이 없고 내주는 나무에게는 박탈감이 없다. 그러려고 거두는 사람이 기품 있고 결곡하게 나무 생명을 거둔다. 살육을 응시한다. 모진 시간을 찰나에만 둔다. 찰나 예절이 영원을 기린다.

 

두족頭足류 동물, 예컨대 낙지는 다리 모든 부분도 뇌다. 당연히 그 모든 부분에서 독립적 감각, 대표적으로 통각을 느낀다. 다리를 토막 낼 때마다 각각 통증을 느낀다. 최근까지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 뒤부터 나는 그 동안 일부러 청해 먹지는 않았으나 아주 드물게나마 기회가 생기면 먹기도 했던 낙지OO이를 먹지 못한다. 채식주의자가 날리는 비웃음을 가만히 끌어안으며 묻는다. 식물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할까? 그러니 마음 놓고 먹어도 될까? 묻지도 않은 채, 베고 찢고 데치고 끓이고.......게다가 또 그런 방식으로 만든 온갖 양념을 끼얹어 잡냄새없앤 향락무인지경 음식 만드는 짓을 해도 될까? 그리 해도 될 정도로 식물은 얼굴 없는 하등 생명체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식물은 몸 전체가 얼굴인 고등생명체다. 생명 거둘 때 예의를 극상으로 지켜야 한다.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비상한 생태주의자들이 왜 이 진실에 통 관심이 없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은 도리어 내가 미친놈 아닐까 더럭 생각이 곤두박질치곤 한다. 정색하고 자가진단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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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 호박 세 가지 식물은 사람을 먹이고 땅을 먹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침으로써 우리 상상력을 먹인다.

  수 천 년 동안 멕시코에서 몬태나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땅에 이랑을 만들고 이 세 가지 씨앗을 한자리에 심었다.......

  토박이들은 이런 파종법을 세 자매라고 부른다.......세 자매는 키가 다른 덕에 해가 준 선물인 빛을 남김없이 알차게 쓴다.......세 자매 밭은 셋을 따로따로 심을 때보다 더 많은 소출을 낸다.(192~196)

 

  세 자매 재주는 생장과정에만 있지 않다. 식탁에서 세 종이 서로 보완하는 데도 있다. 세 자매는 맛이 잘 어울리며 각각 사람에게 필요한 세 가지 영양소를 지니고 있다.......이번에도 세 자매는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가 더 낫다.(204~205)

 

 

  세 자매가 의도적으로 협력한다는 상상은 그럴 법하다. 정말 그럴지 누가 알랴. 그러나 협력 묘미는 각 식물이 자기 생장을 증진하려고 이렇게 한다는 사실이다. 개체가 번성하면 전체도 번성한다.(199)

  

  살아오면서 만난 지혜로운 스승을 통틀어 세 자매가 가장 유창하다. 그들 잎과 넝쿨은 관계 지식을 말없이 몸으로 보여준다. 혼자 있으면 콩은 넝쿨일 뿐이요 호박은 넙데데한 잎일 따름이다. 옥수수와 함께 서 있을 때에만 개체를 초월한 전체가 생겨난다. 각각 선물을 따로 아닌 함께 준비할 경우 더 온전히 표현된다. 익은 이삭과 부푼 열매에서 세 자매는 모든 선물이 관계 속에서 증식한다고 조언한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207~208)


 

세 자매가 함께 자라가는 풍경을 그리기만 해도 가슴 다습다. 세 자매가 어우러진 음식을 떠올리기만 해도 입속에 침 고인다. 세 자매 네트워킹이 일으키는 동반상승과 뜻밖 창발을 상상만 해도 소름 돋는다. 읽을수록 수긍·공감이 증식하므로 당최 췌사를 붙이기 민망하지만 내 이야기 몇 마디 엮어 주절거린다.

 

강원도 오대산 산골마을에서 보낸 내 유년기 기억 속 옥수수, , 호박은 북미대륙 토박이 지혜 속 세 자매와 사뭇 다르다. 옥수수, , 호박은 중남미에서 태어나 까마득히 오래 전에 가까운 북미로 건너왔다. 거기서 세 자매 농법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들 영양 네트워킹은 식탁을 접수했다. 우리 경우, 장구한세월 동안 쌀이 옥수수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 나중에 옥수수가 들어왔지만 쌀에 필적할 만한 위치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 자생 콩은 저 세 자매 속 가족과 달리 옥수수 대궁 같은 지주가 필요하지 않았다. 중남미 콩이 들어왔어도 그들 자리는 또한 옥수수 곁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한 호박 이야기는 아는 바가 거의 전혀 없을 정도다. 이 정도로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나만 지닌 호박 이야기로 세 자매를 구성할 수 있다.

 

기억이 비교적 생생할 나이 때 나를 사로잡은 식물은 호박이었다. 청명한 날 이른 오후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쫙 편 어른 손바닥보다 훨씬 더 큰 잎사귀 사이로 연두에서 진초록까지 다양한 결을 지닌 동그마한 호박이 언뜻언뜻 몸을 내보이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봐선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하듯 조심조심 잎사귀를 살짝 들치고 햇빛 받아 반짝이는 생명체를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때 무슨 생각 따위를 한 기억은 없다. 매혹당한 채 그저 무념무상이었으리라.

 

내 마음을 사로잡는 크기는 대략 정해져 있었다. 작은 능금보다 작거나 큰 배보다 크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유년기 내 생명체와 일치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무렵 이미 어머니한테서 받은 상처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적 부재. 게다가 할머니마저 먼저 서울로 올라가셔서 사실상 홀로 남겨진 상태였다. 노년기로 들어선 지금도 그 크기 호박은 설마 먹으랴 하는 표정으로 애틋하게 눈길을 끈다.

 

호박은 다양한 방식으로 식탁 위에 오르지만 가장 뚜렷한 인상으로 남은 기억이 있다. 제법 컸지만 속이 부드러울 때 통째로 삶아 반으로 가른 뒤 속 부분을 제자리에서 긁고 버무려 양념과 비벼 먹는 것이다. 양념은 대부분 장류였다. 호박과 토종 콩이 만나는 때다. 호박이 옥수수를 만나려면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다 익은 호박을 도장방에 보관해두었다가 겨울 깊어진 어느 날 죽을 끓여 먹는다. 이때 옥수수와 만난다. 그리고 다시 콩을 만나는데 이번에는 강낭콩이다. 세 자매가 어울린 죽 한 대접을 기억하면 나는 아득한 그리움 속으로 순간이동 한다. 오롯이 기억나는 향에 비해 맛은 유년기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등잔불빛에 의지한 두런두런 달그락달그락 풍경이야말로 절대 매력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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