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당신은 상대방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가늠해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당신이 상상한 인물과 실제 인물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였는가? 요즘 같은 디지털 영상 시대에 어쩌면 적합하지 않는 질문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을 지나온 나는 실물을 보지 않고 상대의 목소리와 이야기만을 듣고 상대방을 상상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매번 상상은 상상으로 머물렀다. 실물과 비교해보면 그들은 너무도 다른 외양으로, 나는 완벽하게 다른 인물을 창조해냈을 뿐이다. 인간을 빚어낸 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작업을 수락한 화가는 과연 실제 모델과 닮은 초상화를 그려낼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의 이야기이다. 이제 화가의 섬세하고도 고된 붓놀림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1890년대 뉴욕, 피암보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다. 초상화 분야에서는 제법 명성이 자자한 그이다. 하지만 피암보는 진정한 예술에 목말라 있는 상태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표출할 수 없는 초상화 작업에 이골이 나 있는 현 상황을 탈출하고 싶다. 그러던 중, 그에게 거액의 초상화 제의가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 제의는 이상하다 못해 요상스럽다. 모델을 보지 않고 초상화를 완성시켜야 한단다. 피암보는 무작정 돈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샤르부크 부인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그리고 피암보 인생의 마지막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은 "나를 그리되 나를 보지는 말라!", 라는 모순과도 같은 소재로 독자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는다. 게다가 작가는 자신의 뛰어난 구성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작품은 피암보가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을 그리면서 표현되는 그녀의 과거와 뉴욕 시내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의문의 현재 사건을 동시에 전개시키고 있다. 또한 엎치락뒤치락 긴장감 넘치게 진행되는 두 이야기의 축은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피암보의 초상화 작업을 주축으로 의문의 사건을 결합시킨 자연스런 연결구도는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결말과 연관된 급작스런 마무리는 작품에 대한 아쉬움으로 자리잡는다. 사라진 샤르부크 부인의 행적과 그녀의 충성스런 수행인 왓킨의 사연은 너무 짧게 서술되어 있어 부족한 느낌이 든다. 특히 '왓킨'이라는 중요 인물의 과거와 왜 그토록 샤르부크 부인의 곁에 있기를 집착하는지에 대한 서술이 전무한 점은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의 짜임새 있는 구성의 오점이 된다.

작가가 펼쳐놓은 퍼즐 조각을 독자는 어려움 없이 맞춰나간다. 더불어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즐겁게 퍼즐을 완성시켰음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독자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지만 부족한 마무리로 인해 독자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이 나로선 안타까울 따름이다. 제프리 포드는 독자의 흥미를 끄집어낼 만한 소재들을 효율적으로 제시했지만 결말의 미흡함 때문에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은 소설문학으로서 많은 장점을 갖고 있음에 확실한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년', '언나', '간나', '유나'……. 시시각각 소녀를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소녀는 안타깝고 슬픈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지만 마지막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스쳐 지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소녀의 운명은 한곳에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바람'과 흡사하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읽는 동안, 나는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소녀를 불러주고 싶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아비는 술만 먹으면 괴물로 돌변하여 소녀의 어미와 소녀에게 폭력을 가한다. 소녀의 어미는 내내 남편의 폭력을 묵인하다 한계치에 다다르면 큰 가방을 싸들고 가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절대 남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집 근처 여관에서 며칠 기거하다 다시 집으로 되돌아온다. 소녀는 때리는 아비와 맞기만 하는 어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이들이 자신의 '진짜'부모가 아닌 '가짜'부모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소녀는 '진짜'엄마를 찾아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다. '진짜'엄마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만나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이는 역 근처 황금다방의 창문을 통해 '진짜'엄마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아이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과연 소녀는 진짜 엄마와 만날 수 있을까!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은 독자로 하여금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하나는 소녀의 존재 유무에 관하여, 또 다른 하나는 소녀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이름과 나이조차 모르는 소녀를 보고 있노라면 꿈속을 걷는 듯 한 비현실적 몽환의 느낌이 다가온다. (작품 속세계에서)소녀는 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인물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친엄마를 '가짜'엄마로 규정짓고 '진짜'엄마를 갈구하는 소녀는 이 작품에서 이미 죽어버린 사자(死者)의 영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읽는 내내 나와 함께 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으로 작품을 읽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은 나의 추측과 의구심으로 내용을 달리 전개할 수 있다. 소녀가 살아있는 경우와 죽은 경우 모두 가능케 하기에 독자는 하나의 이야기를 두 가지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황금다방의 마음씨 착한 장미언니, 태백식당의 정 많은 할머니, 유랑하는 각설이패의 대장과 삼촌, 따뜻한 목소리의 교회 청년, 사회와 격리된 폐가생활을 하는 아저씨, 보호받지 못한 비행청소년 유미와 나리. 이처럼 소녀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녀가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불쌍하고 비루한 인생들뿐이다. 그리고 작가는 소녀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고 담담하게 풀어가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불안한 인간 군상을 매우 현실적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있는 작가의 화법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소녀가 아닌 '그네들'이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서른을 갓 넘긴 작가는 사회가 암담한 현실 속 소수의 우울에 대해서 관심을 갖길 바라고 있었다.

가끔씩 제목만으로도 읽고자하는 의욕이 불끈불끈 생기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과 마주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나에게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은 매우 현실적이었으며 매우 몽환적인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나란히 존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 같은 현실과 몽환의 경계를 작가는 작품 속 소녀로 분(扮)하여 너무도 능수능란하게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또한 무언가 알 수 없는 매력으로 이야기에 힘을 더하고 있는 신선한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 샤크
베르너 J. 에글리 지음, 배수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대륙의 삶은 처참하다. 특히 약자인 아이들의 삶은 처참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우리는 수많은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이미 그들의 비극을 익히 들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고통과 상처를 제대로 정확히 알고 있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는 머나먼 거리상의 이유도 한 몫을 하지만 마음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리라. 간혹 뉴스에서 전해오는 소말리아 해적의 우리 선박납포 소식은 오히려 그네들에 대한 반감을 키우게 한다. 언론을 통한 빈번한 노출 덕분에 아프리카 아이들의 고통에 대한 체감지수는 상당히 높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의 아픔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블랙 샤크』는 영국 소년이 소말리아 소년소녀와 만나게 되면서 점차 알아가는 아프리카의 실상을 다룬, 결코 가볍지 않은 성장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우울한 토미는 아버지의 친구인 캡틴 루니의 엠마 루 호에 주방보조로 승선하게 된다. 항해를 하던 중, 토미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 누리아를 발견하고 에이미와 함께 그녀를 구한다. 그리고 소말리아 해안 근처에서 블랙 샤크 해적단의 공격을 받는다. 게다가 캡틴 루니와 에이미는 몸값요구의 인질로 해적에게 납치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

나는 『블랙 샤크』를 읽으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블랙 샤크의 이중성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미와 에이미에게 블랙 샤크는 악명 높은 악당일 뿐이다. 만약 오마르와 타렉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이 작품은 그저 해적과의 모험을 다룬 한 소년의 성장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블랙 샤크』에는 또 다른 주인공 오마르와 타렉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하게 된다. 블랙 샤크를 만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두 소년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무장 군인들을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블랙 샤크는 정의의 사도이다. 블랙 샤크는 소말리아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영웅이자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이처럼 토미와 에이미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오마르와 타렉에게는 존경의 대상인 블랙 샤크! 과연 그는 선(善)일까? 악(惡)일까?

결론부터 말하지만 그는 선과 악의 경계선 위 애매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블랙 샤크는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는 결코 소말리아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단지 정부군의 폭압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사기꾼이다. 나에게도 토미와 에이미가 그랬던 것처럼 블랙 샤크는 자만심으로 가득 찬 독재자, 악이다. 하지만 정부군의 폭격으로 해적단의 은신처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에는 그토록 가증스럽던 블랙 샤크와 그의 부하들이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겨져 나는 약간의 당혹감마저 들었다. 이 순간에는 분명 오마르와 타렉의 시선으로 그들을 선으로 바라본 것이 분명하다.

『블랙 샤크』는 값싼 동정심을 얻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비참한 소말리아와 이와 연관된 국제정세를 알리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다.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려고 작가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풀어가고 있지만 그들의 참혹함은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오래전 강대국의 이권다툼으로 조각난 아프리카는 현재까지도 강대국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블랙 샤크의 이중성은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생산된 것이 바로 선도 악도 아닌 "블랙 샤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아 여름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Asia 제17호 - Summer, 2010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종교 간의 문제로 심한 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 나에게는 딱 이 정도의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국가이다. 가끔씩 뉴스에서 폭탄 테러 소식이 들렸을 때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게 전부인 내 관심 밖 세계이다. 도서출판 아시아의 계간지 『ASIA 제17호』를 통해서 나는 팔레스타인 문학에 대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문학에 대하여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문학과 아시아 문학의 보편성을 가볍게 맛볼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ASIA 제17호』는 팔레스타인 문학 특집으로 엮어진다. 이스라엘 공항에서 겪었던 일화를 다룬 소설가 오수연의 에세이를 필두로 팔레스타인 문학의 대표적인 문인들에 대해 논하는 좌담이 이어진다. 그리고 단편소설과 시, 산문, 에세이, 민담, 현대문학연표 등이 소개된다. 게다가 계간지의 제목인 'ASIA'에 걸맞게 우리 작가의 단편소설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 『ASIA 제17호』는 한역과 영역을 나란히 편집 구성되어 있다. 나는 영어와 그다지 친하지 않지만 영역으로도 읽어보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한다.

나는 팔레스타인의 유명 작가 4인(갓산 카나파니, 마호무드 다르위시, 에드워드 사이드, 파드와 뚜깐)에 대한 좌담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문학의 대략적인 개관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과 분쟁 중인 팔레스타인과 과거 일본 식민지의 아픈 역사가 있는 우리나라의 문학적인 성향이 많이 닮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단편『샤키라의 사진』과 시『아무 문제없다』는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책을 내려놓은 지금도 기억나는 작품들이다. 단편『샤키라의 사진』에서의 서류를 갱신하기 위해 인기가수 샤키라가 친척이라며 거짓말을 하던 삼촌의 위선은 마치 6.25전쟁 직후의 우리문학작품이 연관되어 떠올랐고, 시『아무 문제없다』는 우리 저항시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같은 아시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멀게만 느껴지는 팔레스타인이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다.

『ASIA 제17호』는 팔레스타인 문학만의 특수성보다는 아시아 문학 속 팔레스타인 문학의 보편성을 인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당신은 팔레스타인인일 수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라고 말했단다. 팔레스타인 문학과 아시아 문학은 별개의 것이 아닌 공통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ASIA 제17호』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실질적인 주제로 빛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무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침묵의 무게
헤더 구덴커프 지음, 김진영 옮김 / 북캐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현명한 선택은 행복으로, 어리석은 선택은 불행으로 인도한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현명한 선택보다는 반대의 것을 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고 그럴 때마다 신기하게도 매번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엉뚱한 선택을 하더라도 때로는 전화위복으로 좋은 결과를, 때로는 설상가상으로 나쁜 결과를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시행착오라는 말이 있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좋은 결말을 얻는다고 굳게 믿는다. 『침묵의 무게』의 안토니아, 벤, 칼리 역시 행복으로 향하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복잡했지만 다행스럽게 행복한 마무리를 짓는다.

어느 날, 절친한 친구인 칼리와 페트라는 각자의 집에서 실종된다. 두 소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경찰과 부모는 백방으로 찾아다니고 칼리의 오빠인 벤도 여동생이 자주 갔던 집 앞의 숲을 정신없이 뒤지고 있다. 경찰은 용의자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쉽사리 지목할 사람이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소녀들의 부모는 피가 마른다. 『침묵의 무게』는 두 소녀의 실종일 단 하루와 등장인물이 회상하는 과거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실종이라는 급박한 소재 덕분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이야기이다. 또한 『침묵의 무게』는 작가가 표현한 '침묵'의 잔인함에 대하여 여러번 숙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안토니아는 벤과 칼리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이다. 벤이 학교에서 줄행랑을 치고 돌아왔을때나 교장실로 불리워갔을때, 아이에게 무작정 혼을 내기보다는 진심으로 믿어주는 모습으로 안토니아는 보통 엄마들과 다른 행태를 보여준다. 단 한가지만을 제외하고 부모자격 시험을 치른다면 그녀는 상위권에 해당될 수 있을 정도의 좋은 엄마이다. 하지만 술주정뱅이 남편의 폭력 앞에 '침묵'한다는 것이 바로 안토니아의 수많은 장점을 단번에 지워버리는 단 하나의 크나큰 문제이다. 남편 그리프의 폭언과 폭력은 안토니아와 그녀의 어린 아이들까지 상처를 입힌다. 또한 임신 7개월째의 태아마저 가정폭력으로 유산되었고, 그것을 목격한 4살 된 딸 칼리는 그날 이후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는 이미 결단을 내렸어야 한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어렵고 힘든 결단보다는 간단하고 쉬운 침묵을 선택한다. 나는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고 불쌍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안일한 대처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작품의 원제 역시 『The Weight of Silence』이다. 이야기 초반에는 말을 하지 않는 7살 칼리의 침묵에서 기인된 제목이라 여겼다. 하지만 중반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지자 '침묵'은 칼리가 아닌 안토니아에게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술주정뱅이 남편의 폭언과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상황을 잠깐 잠깐 모면하고자 하는 임시방편적인 회피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녀의 이런 대응방식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상처를 점점 곪아가게 만들뿐이었다. 결국 안토니아의 '침묵'은 간접적으로 어린 벤과 칼리에게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줘버린 격이 된 것이다. 다시 찾은 딸의 얼굴을 마주한 뒤에서야 안토니아는 자신의 '침묵'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고 반성하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독자에게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이제 안토니아는 침묵의 무서움과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노란 색으로 집을 색칠한다. 이는 그녀와 벤, 그리고 칼리의 행복으로 향하는 첫발걸음을 의미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들에게 행복한 햇살이 비춰지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침묵은 더 이상 금이 아니다. 안토니아의 침묵은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금은 침묵이 아니라 소통이 금이라는 사실을 되뇌이며 『침묵의 무게』를 홀가분하게 내려놓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