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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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의 재미는 뭐니뭐니 해도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러가지 단서를 조합해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2006년에 발표한 소설 <붉은 손가락>은 이 재미를 포기한 듯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독특한 작품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 소설은 초반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독자에게 확실히 알려준다. 그러면 범인이 누구인지 찾는 재미는 포기했구나 싶은데,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독자들과 달리)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형사가 뒤늦게 나타나 범인이 누구인지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범인과 형사의 추리 대결인 동시에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독자와 형사의 추리 대결이기도 한 셈이다.


그래서 결국 형사가 범인 찾고 끝, 이라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금의 명성을 얻었을 리가 없다. 다양한 방법으로 범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노력한 범인의 가족은, 경찰의 수사망이 거의 다 좁혀진 것을 눈치채고 범인이 아닌 다른 인물을 범인으로 내세우는 대담한 수를 쓴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반전인데 얼마 후 하나의 반전이 더 나온다(!!). 그 전까지 솔직히 좀 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심드렁한 기분으로 이 소설을 읽던 나도 이 반전 앞에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전의 내용상 단순히 독자를 놀래키려고 이런 반전을 생각해냈다기 보다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의 심리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그걸 통해 자신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인간 심리의 일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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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강의 시간 4
요시다 아키미 지음, 김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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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아키미의 최신 연재작 <우타강의 시간>은 쇠락해 가는 온천 마을을 지키려고 분투 중인 세 명의 청년 가즈키, 루이, 다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가즈키는 오랜 역사를 지닌 여관 '아즈마야'에서 온천수 관리자 견습생으로 일을 배우는 중이다. 다에는 아즈마야의 큰여사장님의 손녀로서 여관 일을 배우고 있다. 루이는 마을사무소 관광과에서 일하며 마을을 외부에 알리고 있다. 이 마을은 겉보기에 조용하고 평화롭고 사람들도 다 선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그렇듯이 이 마을에도 문제가 있고 주인공들에게도 남모를 고민과 갈등이 있다. 가즈키에게는 그것이 복잡한 가족사이다. 


가즈키의 어머니가 여러 남자를 만난 바람에 가즈키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도 있고(현재 함께 살고 있는 마모루), 피가 섞이지 않은 누나도 있다(<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넷째 스즈). 가즈키의 친형제는 도모키 하나인데, 몇 해 전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고 마을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런 도모키가 양어머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오랜만에 형 앞에 나타나는데, 용서를 빌기는커녕 뻔뻔한 말들을 늘어놓는 도모키에게 가즈키는 평소 모습과 다르게 크게 화를 낸다. 도모키의 잘못도 있지만, 이들이 싸우는 건 결국 부모들이 지은 죄 때문인데... 부모가 만든 허물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 이야기는 언제 봐도 가슴 아프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얼마 전부터 연락하고 지내게 된 스즈네 가족과의 인연이 가즈키에게 큰 힘을 준다(스즈의 셋째 형부가 많은 활약을 한다). 마을에서 신뢰 받는 공무원으로 열일 중인 루이는 도쿄에서 사업을 하는 다에의 이모의 눈에 들어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다. 다에는 어른답지 못한 엄마 때문에 고생인데, 그러고 보면 세 주인공 모두 (아빠가 아닌) 엄마 때문에 고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루이는 아빠라도 있지 다른 둘은 아빠도 없다). 오래 전 마을의 산에서 실종된 청년과 관련해서도 새로운 사항이 발견된다. 잔잔하지만 잔잔함뿐이지만은 않은 이 만화. 가끔씩 나와도 좋으니 오래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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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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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찬양할 만큼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는 못 되어도 스스로 생각할 때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은 없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살다 보면 모르고 그런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고, 알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아무도 안 보니까, 남들도 다 하니까, 돈이 되니까, 귀찮으니까 등등)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지 않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김애란 작가가 8년 만에 발표한 다섯 번째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에는 그러한 상황이 다양하게 나온다. 


<홈 파티>의 '이연'은 이른바 '사회적 주류'라는 사람들의 모임에 초대되어 그중 한 명인 오 대표의 집에서 열리는 홈 파티에 참석한다. 이연은 대화에 드러나는 그들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온전히 공감하진 못했지만, 손님으로 온 처지이기도 하고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시종 온화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대화가 어느 대목에 이른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찜찜한 기분으로 자리를 뜨게 된다. 이연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면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순 있었겠지만 이연 자신이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순 없었을 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과, 반대로 부끄럼을 모르는 사람들이 얻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숲속 작은 집>의 '은주'는 결혼 후 계속해서 미룬 신혼여행을 대신해 남편과 동남아로 한 달 살기 여행을 떠난다. 한국보다 적은 비용으로 훨씬 더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음에 만족해하던 은주는 예상치 못한 문제를 겪는다. 매일 숙소를 관리해 주는 메이드에게 팁을 주어야 하는지, 준다면 얼마를 줘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남편과 달리, 은주는 메이드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데다가 메이드를 볼 때마다 청소 일을 하며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은주가 호의를 베풀수록 은주가 기대한 것과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은주는 자신의 선의가 그들의 존엄을 건드렸을 수도 있음을 깨닫고 부끄럼을 느낀다. 


이어지는 단편 <좋은 이웃>에서는 독서지도사로 일하는 '나'가 내심 자신의 가족보다 형편이 안 좋다고 여겼던 학생의 가족이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 간다는 걸 알고 시기한다. <이물감>에는 전처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하고 직장 후배들에게 꼰대짓을 하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은행원 '기태'가 나온다. <레몬케이크>의 '기진'은 자신이 운영하는 책방의 중요한 행사 날짜가 시골에 사는 엄마가 병원 검진을 받으러 오는 날짜와 겹치는 걸 뒤늦게 알고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좋은 사람답게 행동하려고 했던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을 때 느낄 법한 당혹감, 실망감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돈이나 계급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보여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또한 보여준다. <안녕이라 그랬어>의 '은미'는 원어민 강사 로버트와 화상 영어 수업을 하면서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단어로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빗방울처럼>의 '지수'는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내는 도배사의 모습을 보면서 삶을 이어갈 용기를 얻는다. 부끄러운 일이 많다는 건 말 그대로 부끄러운 실수나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부끄럼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 나에게는 부끄럼을 느끼는 양심이 남아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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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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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말도 있지만, 어떤 일들은 안 하고 후회하는 편이 하고 후회하는 편보다 낫다. 대표적인 예가 '말'이다. 감사나 칭찬처럼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말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 거절이나 비난, 지적처럼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은 웬만해선 안 하는 편이 좋다. 그러나 살다 보면 상대가 기분 나빠질 걸 알면서도 어떤 말을 해야 할 때나 상대가 기분 나빠질 걸 모르고 그런 말을 할 때도 있고, 그런 말을 듣는 때는 훨씬 더 많다. 김혜진의 소설집 <완벽한 케이크의 맛>에는 그런 말과 그런 말이 빚은 상황이 다양하게 나온다. 


<강사의 자질>에서 팬데믹 기간 중에 어렵게 학원 강사로 취직한 '나'는 비염으로 인해 재채기를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안 좋은 눈초리를 받고 급기야 원장으로부터 호출을 당한다. <밀 베이커리>에서 '나'는 단골로 다니는 빵집을 아이가 다니는 수영 강습반 부모들에게 추천했다가 식중독 사건이 일어나 본의 아니게 공범자 취급을 당한다. <재택근무>의 '나'는 아파트 단지에서 소음을 일으키는 할머니에게 이웃과 함께 항의하러 갔다가 할머니의 사정을 알고 찜찜한 기분을 느낀다. <모르는 일처럼>의 '나'는 직장 내 갑질을 고발한 인턴사원의 글을 읽으며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을 반추한다. 


어떤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 편이 만나는 편보다 낫고, 어떤 관계는 지속하지 않는 편이 지속하는 편보다 낫다. 그런 만남,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도 있다. <십 년>에서 대학 친구인 두 사람은 우연히 연락이 닿아 오랜만에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지만 다음 만남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안강에서>의 '나'는 오래전 가족과 절연한 고모를 아버지와 함께 만나러 갔다가 아무리 혈육이라도 세월의 간극을 메울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 상대에 대한 호감이나 존중이 전혀 없는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면, <수국>의 친구들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추해질 수도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다는 건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자제력과 인내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 사람의 미덕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다. 친구의 식물을 돌보다 손을 다쳐도 굳이 말하지 않는 배려(<극락조>), 이따금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만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고백을 참는 우정(<완벽한 케이크의 맛>), 상대에 대한 감정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섣부른 판단을 삼가고 서로에게 좀 더 기회를 주는 여유(<호린>). 무엇이든 하는 것이 좋고 많이 하면 더 좋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하지 않음'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읽으니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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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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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의 해질녘. 아내는 외출하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남자들이 자신의 존재는 신경도 안 쓰고 텔레비전 한 대를 두고 사라진 것에 황당함을 느낀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그동안 없던 텔레비전이 방 한 가운데 있는데 못 알아보는 눈치다. 남자는 텔레비전을 두고 간 의문의 남자들을 'TV 피플'이라고 부르며 정체를 고민하지만 알아낼 길은 없다. 전자제품 기업 홍보부에 근무하지만 정작 자신은 전자제품에 일절 관심이 없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 남자는 자신의 일상에 침투한 텔레비전의 존재가 불편하지만 함부로 버리지도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0년에 발표한 소설집 『TV 피플』에는 표제작 <TV 피플>을 비롯해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스무 살 남자와 스물일곱 살 유부녀의 연애를 그린 <비행기 _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나>를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우연히 동창을 만나 순결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그의 첫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_고도자본주의 전사>, 여동생을 성폭행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 <가노 그레타>, 약혼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남자의 실체를 폭로하는 <좀비>, 안정적이고 풍족한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의 심리를 묘사한 <잠> 등을 읽으며 '하루키가 의외로 페미니스트였나?'라는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


<좀비>라는 단편이 특히 좋았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성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전부이고, 그것 외에 여자에겐 아무 관심도 없고 애정도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작가 자신의 생각?). 물론 이건 여자가 꾼 꿈에서 남자가 한 말이지만, 꿈에서 깬 여자가 남자에게 들은 말을 감안할 때 꿈속의 일만은 아닌 듯한 느낌적인 느낌... (여자가 평소에 남자로부터 그런 느낌을 느껴서 그런 꿈을 꾼 걸까, 아니면 그런 꿈을 꿔서 이후에 남자가 하는 말이 다 그렇게 들리는 걸까) 이런 전개, 이런 내용의 소설을 90년대 초에, 그것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미 써서 발표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요즘은 왜 이런 소설 안 쓰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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