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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평점 :

어느 일요일의 해질녘. 아내는 외출하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남자들이 자신의 존재는 신경도 안 쓰고 텔레비전 한 대를 두고 사라진 것에 황당함을 느낀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그동안 없던 텔레비전이 방 한 가운데 있는데 못 알아보는 눈치다. 남자는 텔레비전을 두고 간 의문의 남자들을 'TV 피플'이라고 부르며 정체를 고민하지만 알아낼 길은 없다. 전자제품 기업 홍보부에 근무하지만 정작 자신은 전자제품에 일절 관심이 없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 남자는 자신의 일상에 침투한 텔레비전의 존재가 불편하지만 함부로 버리지도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0년에 발표한 소설집 『TV 피플』에는 표제작 <TV 피플>을 비롯해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스무 살 남자와 스물일곱 살 유부녀의 연애를 그린 <비행기 _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나>를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우연히 동창을 만나 순결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그의 첫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_고도자본주의 전사>, 여동생을 성폭행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 <가노 그레타>, 약혼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남자의 실체를 폭로하는 <좀비>, 안정적이고 풍족한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의 심리를 묘사한 <잠> 등을 읽으며 '하루키가 의외로 페미니스트였나?'라는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
<좀비>라는 단편이 특히 좋았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성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전부이고, 그것 외에 여자에겐 아무 관심도 없고 애정도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작가 자신의 생각?). 물론 이건 여자가 꾼 꿈에서 남자가 한 말이지만, 꿈에서 깬 여자가 남자에게 들은 말을 감안할 때 꿈속의 일만은 아닌 듯한 느낌적인 느낌... (여자가 평소에 남자로부터 그런 느낌을 느껴서 그런 꿈을 꾼 걸까, 아니면 그런 꿈을 꿔서 이후에 남자가 하는 말이 다 그렇게 들리는 걸까) 이런 전개, 이런 내용의 소설을 90년대 초에, 그것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미 써서 발표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요즘은 왜 이런 소설 안 쓰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