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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 인생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힘이 되어 준 열 명의 그녀들
이화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중에는 그 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런 책들을 나는 멋대로 '씨앗책'이라고 부른다. 씨앗 하나로부터 줄기가 뻗어나와 여러 개의 가지로 이어지는 것처럼 그 책 한 권에서 다른 책들로 독서의 가지가 쭉쭉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등장 인물들이 쓴 책을 읽어보고 싶어지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도 책을 다 읽자마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구입했다. 조만간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과 한나 아렌트의 책도 구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제목만 보아서는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 책같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저자 이화경은 <꾼>, <화투 치는 고양이> 등을 쓴 소설가로, 자신에게 많은 영감을 준 매혹적이고 지적인 열 명의 여성들의 삶을 이 책에 담았다. 그 중에는 버지니아 울프도 있고, 제인 오스틴, 조르주 상드, 프랑수아즈 사강, 헤르타 뮐러 같은 소설가와 로자 룩셈부르크,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정치가, 저널리스트, 학자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녀를 비롯한 열 명의 여성들이 '공동 주연'인 셈이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이 여성주의 논의에 자주 거론되는 인물들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중 대부분은 여성주의를 알지도,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인데, 그것이 다른 여성들의 삶에 등불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제인 오스틴은 경제적으로 윤택하지만 굴종적인 결혼생활 대신 가난해도 작가로서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을 택했다. 조르주 상드는 여성 작가들이 가정과 연애 같은 소재에만 천착하는 것을 개탄하며 남성이 향유하는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남장을 불사했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들의 선택이 지극히 당연하고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남성들은 물론 같은 여성들에게도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가족과 친구, 연인마저도 등을 돌리는 삶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삶을 받아들인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고개가 숙여진다.
더욱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산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철학과 경험을 작품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작품 중 다수가 당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피땀 흘려 작품을 남긴 덕분에 후세 사람들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윤택해졌다. 여자라는 것이 때로는 삶을 옭아매는 족쇄처럼 여겨지지만, 여자이기에 이런 위대한 여성들의 삶에 귀기울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본받고자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