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짜 여자가 되는 법 -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괴짜 칼럼니스트의 여자 생태보고서
케이틀린 모란 지음, 고유라 옮김 / 돋을새김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들도 이렇게 하나?'는 내가 부르카를 입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사용했던 질문이다. 그렇다. 부르카는 당신의 정숙함을 보증하고, 사람들이 당신을 성적 대상이 아닌 인간 존재로 여긴다는 것을 보장한다.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당신은 누구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는가? 남자들이다. 그리고 (당신이 규범에 따라 올바르게 옷을 입는 한) 누가 당신을 남자들로부터 보호하는가? 남자들이다. 그리고 누가 처음 본 당신을 성적 대상이 아닌 인간 존재로 간주하는가? 남자들이다. 글쎄, 전부 남자가 결부되어 문제다. 나는 이 문제에 '100퍼센트 남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째서 여자들이 머리에 부르카를 뒤집어 써야 하는가. 당신이 진심으로 부르카를 좋아해서, 혼자 드라마를 보면서도 부르카를 굳이 뒤집어쓰고 싶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pp.127-8)
"역사는 '남자들'의 것이었다. 여자들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제국, 군대, 도시, 예술작품, 철학자, 독지가, 발명가, 과학자, 우주인, 탐험가, 정치인, 유명인사 등은 모두 1인용 가라오케 부스 하나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모차르트도, 아인슈타인도, 갈릴레이도, 간디도 없다. 비틀즈도, 처칠도, 호킹도, 콜럼버스도 없다. (중략) 지금까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명예나 우월함이나 성공은 모두 남자들만의 것이었다. 여성들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로 패배했다. 사실, 우리는 한 번도 시작한 적이 없다. 시작조차도.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p.193)
한 소녀가 있다. 아버지의 군용 코트와 어머니의 팬티를 물려받아 입은 이 소녀는 열세 살의 나이에 몸무게가 80킬로그램에 육박해서 남자 아이들이 '사내새끼', '거지발싸개'라고 놀리며 돌을 던져도 빨리 도망칠 수 없다. 집에는 어머니가 동생들이 자그마치 일곱명이나 있는데, 소녀를 언니, 누나로 대접해주기는커녕 하나같이 무시하고 놀려댄다. 학교에서는 물론 동네에도 친구 한 명 없다. 말벗이라고는 아버지가 술집에서 주워온 강아지 한 마리와 라디오, TV가 전부다. 어느날 소녀의 팬티에 빨간 피가 묻었다. 월경이 시작된 것이다. '진짜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중충하기 그지 없던 소녀의 삶에 한줄기 빛은커녕 비구름을 몰고 오는 일이나 다름 없었지만, 소녀는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기로 결심했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우상인 저메인 그리언을 따라 소리내어 말했다. "나는 여성주의자다." 몇 년 후 열여섯이 되던 해 소녀는 음악주간지 <멜로디 메이커>의 기자가 되고, 2년 후에는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BBC 채널4 <네이키드 시티> 진행자가 되면서 유명세를 얻었고, 1992년부터는 영국 <타임스>의 '셀러브리티 워치'라는 코너의 연재를 맡았다. 그로부터 19년 후인 2011년에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논픽션 책 한 권을 썼다. 제목은 <진짜 여자가 되는 법>. 그녀는 바로 영국에서 지금 가장 핫한 인기 칼럼니스트 케이틀린 모란이다.
몇 장을 채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일단 재미있다. 영국 논픽션 하면 재미있기로 유명하지만, 이 책은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발적이고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동안 남자의 일생에 관한 책은 많았지만, 여자의 일생에 관한 책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 등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월경, 음모, 자위, 성희롱, 낙태 등등 이제까지 여성들이 쉬쉬하던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까발렸다. 학창시절 좋아하던 남자한테 뚱뚱하다는 이유로 고백도 못하고 차인 이야기라든가, 직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남자 저남차 추파를 던지고 다니다가 남자 상사한테 성희롱을 당한 이야기라든가, 취재를 위해 스트립 클럽에 갔다가 창녀로 오해받은 이야기 등등 여자로서 창피하고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읽고나면 가슴 한켠에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저절로 여자의 일생과 여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가상인물이기는 하지만)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가 연애와 결혼에 천착했다면, 케이틀린 모란은 연애와 결혼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과 사회와의 관계 전체를 조망했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것을 어려운 지식이나 딱딱한 설교 대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유머로 승화했다. 저자의 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저자는 남성들만 비판하지 않고, 여성 문제에 무관심하고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여성들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로 패배했다'는 말에 선덕여왕, 테레사 수녀, 잔 다르크,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여성들의 이름이 목밑까지 차오르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남성에 비하면 그 수가 턱없이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실망할 것 없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업적이 남성들의 공이라면, 1,2차 세계대전을 포함한 크고 작은 전쟁과 대량학살, 흉악범죄 등을 저지른 사람들도 대부분 남자다. 게다가 남성은 마녀사냥을 당하지도, 조혼을 강요받지도, 강간을 당하지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을 의무를 부여받지도 않았다. 만약 여성에게 역사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동안의 굴레와 억압이 사라진다면 다른 역사도 가능하다. '진짜 여자'가 된다는 것은 여자라는 사실을 원망하고 비하하는 것도 아니요, 가부장적인 사회제도를 개탄하며 남자들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도 아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할 일은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