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보수 일기 - 영국.아일랜드.일본 만취 기행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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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가 쓴 에세이라고는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것만 읽어보았는데 온다 리쿠 에세이도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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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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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돈이 생겼고, 아내는 다시 꿈꿀 수 있었다. 희망 사항을 적고, 잡지를 넘기고, 새 인생을 계획할 수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 희망과 동경에 부풀어서, 스스로에게 확실히 이룰 수 있는 약속을 하고 있는 모습을 - 머릿속에 그리자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끔찍하게 슬픈 구석도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함정에 빠졌다. 우리는 한계를 넘어섰으며, 돌아갈 수 없다. 그 돈 덕분에 꿈꿀 기회를 얻었지만 그 때문에 현재의 삶을 경멸하게 되었다. 사료상의 일, 알루미늄으로 옆면을 댄 집, 주변 마을. 우리는 그 모두를 이미 과거의 것으로 보고 있었다. 백만장자가 되기 전의 과거, 형편없고, 우울하고, 시시한 과거. (p.169)

 


주말에 <심플 플랜>을 읽었는데 좋아하는 장르인데도 재미가 없었다. 왜 재미가 없는지 곰곰 생각해보니 주인공 미첼이 안온한 삶을 버리고 너무 쉽게 범죄에 빠져드는 모습이 나에게는 현실성 없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괜찮은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장에 입사, 대학 동창과 결혼해 곧 아이 아버지가 될 예정인 미첼은, 더없이 평범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성실히만 살면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하루아침에, 수차례나 그만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에 빠져들었나? 누구 하나 종용하는 사람도 없고, 갚아야 할 빚이나 무의식을 조종하는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살인마가 되었나? 대체 왜? 그의 행동이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대목에서 무언가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아침에 수백만 달러로 짐작되는 눈 먼 돈이 손에 들어왔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백수인 형과 형의 친구 루, 단 둘뿐. 돈의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줄 계획이었지만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고, 경찰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돈이 있으면 포기했던 야망도 이룰 수 있고 사랑하는 아내의 꿈도 이뤄줄수 있을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이 아니라 훨씬 좋은 직장을 구할 수도 있고, 부모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헌 집을 떠나 세련된 새 집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다. 곧 태어날 아이를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아이로 만들 수도 있다. 불가능한 일로 애초에 접어버린 꿈이 갑자기 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고, 상상만 했던 일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왔을 때 이성이 마비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쳐버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미첼처럼 꿈같은 미래를 담보로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은 현실에도 있다. 나중에 부자가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되리라는 꿈에 미쳐 현실을 방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도 그렇지 않은가, 다가오지 않은 미래(未來) 때문에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현실을 대충 살고있지는 않은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87년이 배경이라서 그런지, 90년대 초반에 나온 소설이라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주인공이 전문적인 범죄자가 아닌 생초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 납득이 안 된다. 한두명도 아니고 한 손으로 다 못 셀 정도로 많은 사람을 단번에, 깨끗하게 죽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살인을 한 뒤 너무 쉽게 완전범죄로 만들었다는 점도 이해가 안 된다. 머리카락 한 올, 표피하나로도 범인을 색출할 수 있는 CSI의 과학 수사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라서 그런 걸까? 범죄자를 잡을 의무가 있는 보안관과 지역 경찰, FBI는 그를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선의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범죄를 눈치채고 끝내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또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그 점이 단순한 계획(simple plan)을 더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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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더 스토리콜렉터 17
마리사 마이어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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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고전동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마리사 마이어의 소설 <신더>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신데렐라를, 그것도 SF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먼 미래의 언젠가, 몸의 일부를 기계로 개조당한 사이보그 소녀 '신더'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의붓어머니와 의붓자매들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정비공으로 일하며 집안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제국의 황태자 카이토가 안드로이드를 수리해 달라며 신더를 찾아오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한다. 기쁨도 잠시, 동생 피어니가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레투모시스에 걸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신데렐라와 대부분의 설정이 비슷하지만, 신더가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이고, 집안일을 하는 대신 정비공으로 일하며, 왕자와 파티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전부터 아는 사이이며, 전염병이 둘 사이를 가로막는다는 점은 다르다(전염병 말고도 둘 사이를 가로막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더 있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한다). 



신데렐라를 SF물로 재해석, 재창조했다는 점도 돋보이지만,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가 사용화되는 경우 생길 수 있는 사회적 차별, 계급의 형성 같은 문제를 지적한 점도 인상적이다.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기술이 발달하고 보편화되면 인간과 이들 사이에 계급이 형성되고 차별이 생길 것이라는 상상(혹은 예측)은 전부터 있어 왔지만, 그러한 상상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연결한 것은 <신더>가 최초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같은 형제자매 간에도 누구는 인간이고 누구는 사이보그, 안드로이드면 부모가 차별을 할 수도 있다. 인간과 사이보그, 안드로이드가 결혼을 하는 데 제약이 생길 수도 있다. 말도 안되는 상상같지만,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양반과 평민 또는 노비, 백인과 흑인이 결혼할 수 없었고, 지금도 다른 민족, 다른 종교 간의 결혼을 금하는 사회가 많다. <신더> 속 이야기가 픽션이면서도 실감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신더>가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의 1편이라서 신더와 황태자 카이토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신더가 다른 가족들과 어떻게 화해를 하는지(또는 복수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고, 남은 재미라면 재미겠다.



이 소설은 단점도 적지 않다. 먼저 어색하고 일관성 없는 설정이 자주 눈에 띈다. 작가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배경을 '동방'연방제국의 신베이징이라는 중국의 도시로 설정한 점, (배경이 중국인데) 카이토, 이코 등 일본 이름을 쓴 점, 신더의 의붓어머니가 파티에서 드레스나 치파오가 아닌 기모노를 입는 점 등 어색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만약 아시아 작가가 미래에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서방'연방제국으로 통합될 것이고 중심 도시는 런던이나 파리가 아닌 워싱턴이나 뉴욕이 될 것이라고 한다면 서양의 독자들이 그냥 넘길까? 배경이 아시아이고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일본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는 것 역시 한국인이자 아시아 사람으로서 보기에 불편하고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으로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황태자 카이토가 다른 유능한 정비공을 다 놔두고 뜬금없이 신더를 찾은 것은 개연성 있게 느껴지지 않고, 아름다운 신더는 선인으로, 추한 외모의 레바나 여왕은 악인으로, 의붓어머니와 의붓자매들은 끊임없이 신더를 괴롭히고 신더의 사랑에 훼방을 놓는 존재로 그려지는 설정도 불편했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SF물이고 동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라도 이런 식의 스테레오타입은 독자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다른 식의 접근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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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데보라 잭 지음, 이수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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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간관계와 관련된 책들은 특별한 사람들, 즉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도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들을 위해 집필되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은 전체 인구 중 겨우 30~50퍼센트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이제껏 그런 성격이 대다수인 양 다뤄진 것은, 틀림없이 저자들이 그 나머지 사람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리라." (p.8) 



힘들고 피곤하고 속이 상하면 나는 방에 홀로 앉아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술도 마셔보고, 친구도 만나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춤도 춰보았지만 나에게는 이게 최고다. 데보라 잭의 <혼자가 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은 나처럼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보다 혼자 있을 때 활력을 얻는 '내향형' 인간을 위한 인간관계 매뉴얼이다. 이제까지 사회는 감정을 드러내길 좋아하고, 말이 많고, 행동이 큰 외향형 인간을 우대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과 자기계발서 역시 외향형 인간 위주였다. 자기계발서에 자주 등장하는 '틈날 때마다 자기자랑을 하라', '식사는 절대로 혼자 하지 말라' 같은 경구들만 떠올려보아도 세상이 얼마나 외향형 인간 위주인지를 알 수 있다. <콰이어트> 를 비롯해 내향형 인간 대상의 자기계발서가 최근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이런 경향의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말이 없다, 소극적이다, 소심하다, 우유부단하다, 비밀스럽다 등등의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지만, 내향형 인간에게도 물론(!) 장점은 있다. 말을 신중하게 하기 때문에 실수가 없고, 집중력이 뛰어나며, 일의 끝맺음도 확실하다. 사람을 사귈 때에는 소수의 사람과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정이 깊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나서기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수가 많고, 한번에 여러 사람에게 정을 주다보니 깊이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힘든 것과 비교하면 내향형 인간의 장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말이 좀 없더라도 진실하고, 잘 나서지는 않지만 약속은 꼭 지키는 친구, 연인이 더 좋은 것처럼 말이다. 인간관계뿐 아니라 취업이나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외향형 인간이 주목받기는 쉽지만, 시간이 갈수록 꾸준히 성실하게 일을 하는 내향형 인간이 빛난다. 자신이 내향적인 성격이라면 억지로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꾸려고 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내향적인 성격의 장점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그래도 인맥 쌓기가 어렵고 두렵다면 어떻게 할까? 저자는 여러가지 팁을 제시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한꺼번에 많은 감각적 자극이 쏟아지는 것에 취약하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거나 큰 일을 앞두고 있어서 긴장이 되면 주변을 한 바퀴 돌거나,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에 들러서 기분을 전환하자. 모임이나 공적인 자리에 나서는 게 두렵다면 자원봉사를 해보자. 내향형 인간은 총무나 회계, 사회 등 어떤 역할이 주어지면 열심히 하는 성향이 있다. (멍석이 깔려야 빛을 보는 성격이라고나 할까?) 일부러라도 역할을 맡아서 적극적으로 임해보자. 일행 없이는 못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혼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기 쉽고, 그만큼 인맥을 넓힐 기회도 늘어난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대화가 두렵다면 질문을 해라. 직업이나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거창한 질문이 아니어도 좋다. 옷이 예쁜데 어디서 샀는지, 머리는 어디서 했는지, 오늘 나온 음식 중 무엇이 제일 좋았는지 등 별 중요하지 않은 질문도 괜찮다. 이렇게 자신의 성격을 받아들이고 부담스러운 상황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부딪친다면 내향적인 사람도 외향적인 사람 못지 않은 '인간관계의 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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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자가 되는 법 -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괴짜 칼럼니스트의 여자 생태보고서
케이틀린 모란 지음, 고유라 옮김 / 돋을새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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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도 이렇게 하나?'는 내가 부르카를 입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사용했던 질문이다. 그렇다. 부르카는 당신의 정숙함을 보증하고, 사람들이 당신을 성적 대상이 아닌 인간 존재로 여긴다는 것을 보장한다.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당신은 누구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는가? 남자들이다. 그리고 (당신이 규범에 따라 올바르게 옷을 입는 한) 누가 당신을 남자들로부터 보호하는가? 남자들이다. 그리고 누가 처음 본 당신을 성적 대상이 아닌 인간 존재로 간주하는가? 남자들이다. 글쎄, 전부 남자가 결부되어 문제다. 나는 이 문제에 '100퍼센트 남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째서 여자들이 머리에 부르카를 뒤집어 써야 하는가. 당신이 진심으로 부르카를 좋아해서, 혼자 드라마를 보면서도 부르카를 굳이 뒤집어쓰고 싶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pp.127-8) 

 

"역사는 '남자들'의 것이었다. 여자들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제국, 군대, 도시, 예술작품, 철학자, 독지가, 발명가, 과학자, 우주인, 탐험가, 정치인, 유명인사 등은 모두 1인용 가라오케 부스 하나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모차르트도, 아인슈타인도, 갈릴레이도, 간디도 없다. 비틀즈도, 처칠도, 호킹도, 콜럼버스도 없다. (중략) 지금까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명예나 우월함이나 성공은 모두 남자들만의 것이었다. 여성들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로 패배했다. 사실, 우리는 한 번도 시작한 적이 없다. 시작조차도.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p.193) 

 

   

한 소녀가 있다. 아버지의 군용 코트와 어머니의 팬티를 물려받아 입은 이 소녀는 열세 살의 나이에 몸무게가 80킬로그램에 육박해서 남자 아이들이 '사내새끼', '거지발싸개'라고 놀리며 돌을 던져도 빨리 도망칠 수 없다. 집에는 어머니가 동생들이 자그마치 일곱명이나 있는데, 소녀를 언니, 누나로 대접해주기는커녕 하나같이 무시하고 놀려댄다. 학교에서는 물론 동네에도 친구 한 명 없다. 말벗이라고는 아버지가 술집에서 주워온 강아지 한 마리와 라디오, TV가 전부다. 어느날 소녀의 팬티에 빨간 피가 묻었다. 월경이 시작된 것이다. '진짜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중충하기 그지 없던 소녀의 삶에 한줄기 빛은커녕 비구름을 몰고 오는 일이나 다름 없었지만, 소녀는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기로 결심했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우상인 저메인 그리언을 따라 소리내어 말했다. "나는 여성주의자다." 몇 년 후 열여섯이 되던 해 소녀는 음악주간지 <멜로디 메이커>의 기자가 되고, 2년 후에는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BBC 채널4 <네이키드 시티> 진행자가 되면서 유명세를 얻었고, 1992년부터는 영국 <타임스>의 '셀러브리티 워치'라는 코너의 연재를 맡았다. 그로부터 19년 후인 2011년에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논픽션 책 한 권을 썼다. 제목은 <진짜 여자가 되는 법>. 그녀는 바로 영국에서 지금 가장 핫한 인기 칼럼니스트 케이틀린 모란이다.

 

 

몇 장을 채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일단 재미있다. 영국 논픽션 하면 재미있기로 유명하지만, 이 책은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발적이고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동안 남자의 일생에 관한 책은 많았지만, 여자의 일생에 관한 책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 등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월경, 음모, 자위, 성희롱, 낙태 등등 이제까지 여성들이 쉬쉬하던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까발렸다. 학창시절 좋아하던 남자한테 뚱뚱하다는 이유로 고백도 못하고 차인 이야기라든가, 직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남자 저남차 추파를 던지고 다니다가 남자 상사한테 성희롱을 당한 이야기라든가, 취재를 위해 스트립 클럽에 갔다가 창녀로 오해받은 이야기 등등 여자로서 창피하고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읽고나면 가슴 한켠에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저절로 여자의 일생과 여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가상인물이기는 하지만)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가 연애와 결혼에 천착했다면, 케이틀린 모란은 연애와 결혼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과 사회와의 관계 전체를 조망했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것을 어려운 지식이나 딱딱한 설교 대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유머로 승화했다. 저자의 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저자는 남성들만 비판하지 않고, 여성 문제에 무관심하고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여성들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로 패배했다'는 말에 선덕여왕, 테레사 수녀, 잔 다르크,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여성들의 이름이 목밑까지 차오르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남성에 비하면 그 수가 턱없이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실망할 것 없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업적이 남성들의 공이라면, 1,2차 세계대전을 포함한 크고 작은 전쟁과 대량학살, 흉악범죄 등을 저지른 사람들도 대부분 남자다. 게다가 남성은 마녀사냥을 당하지도, 조혼을 강요받지도, 강간을 당하지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을 의무를 부여받지도 않았다. 만약 여성에게 역사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동안의 굴레와 억압이 사라진다면 다른 역사도 가능하다. '진짜 여자'가 된다는 것은 여자라는 사실을 원망하고 비하하는 것도 아니요, 가부장적인 사회제도를 개탄하며 남자들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도 아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할 일은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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