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뚫기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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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살인 '나'는 군대에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 평생 엄마와 한 집에서 살았다. 엄마는 종종 자취를 하든 결혼을 하든 집에서 나가 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첫째로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버는 월급을 생각하면 자취보다 엄마 집에 붙어 사는 편이 경제적으로 낫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한국에선 아직 동성혼이 합법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라도 애인이 있으면 동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매칭 앱으로 만난 남자들과 원나잇 하기도 벅찬 그로서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언감생심이다. ​ 


박선우 작가의 장편소설 <어둠 뚫기>는 그의 전작인 <우리는 같은 곳에서>, <햇빛 기다리기>와 마찬가지로 남성 동성애자의 삶을 그린다. 이 소설이 수상한 문학동네소설상 심사평 중에 "어머니를 향한 애증을 그려낸 남성 퀴어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조금 익숙할 뿐만 아니라 제법 반복된다고 생각했"다는 문장이 있는데, 실제로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선입견이 이것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박선우 작가의 전작에서 본 듯한 장면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심사위원들도 인정한 대로 이 소설이 기존 남성 퀴어 서사들에 비해 좀 더 나아간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 


이 소설은 남성 동성애자인 아들이 엄마에게 품은 애증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남성 동성애자인 아들이 엄마 이외의 관계(아빠, 형, 친구, 군대, 회사, 원나잇 상대, 전 애인 등)에서 어떤 실패를 겪고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아빠는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하나뿐인 형과는 신체적 장애와 성적 지향의 차이로 소원해진지 오래다. 학교, 군대, 회사에서 남성 호모 소셜 집단에 속하지 못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은 적은 허다하고, 남성과 연애하거나 섹스하는 데 있어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건 여성 이성애자만이 아니라 남성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남성, 남성성이 야기하는 문제를 남성의 입으로 고백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귀하지 않은가 싶다. ​ ​ 


이런 식으로 집 밖에서 고통 받고 상처 압은 '나'가 유일하게 안심하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집인데, 이 집에서 평생을 함께 산 엄마라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나'가 필요로 하는 사랑은 결코 주지 않는다. 가령 '나'의 엄마는 '나'를 위해 평생 돈을 벌고 매일 밥상을 차려줬지만, 어릴 때 엄마가 형과 '나'에게 했던 잘못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정한다. '나'가 동성애자라서 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여자 만나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일삼는다. '나'는 엄마 자신도 그런 식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주지 못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서운하다. ​ 


엄마에 대한 애증은 딸들의 전유물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아들이 엄마에게 품은 애증을 고백하는 이 소설이 독특하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딸이나 아들이나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이 비슷하구나 싶기도 했는데,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친구의 말("마르셀 프루스트도 그렇고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그렇고 자비에 돌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예술하는 게이들은 왜 하나같이 마마보이인 거야?")을 떠올리면 모든 아들이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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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 오브 타임 1~3 세트 - 전3권
로버트 조던 지음, 강동혁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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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의 열렬한 팬은 아니지만, 문학적으로 가치 있고 문화적으로도 영향력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은 취향 불문하고 읽어보는 편이다.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 등을 읽어본 것도 그래서였다.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과 함께 세계 3대 하이 판타지 걸작으로 꼽히는 <휠 오브 타임>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이 한국에 정식 출간되기 전까지 존재조차 몰랐다. ​ 


하지만 <왕좌의 게임>의 작가 조지 R.R. 마틴이 "<휠 오브 타임>이 없었다면 <왕좌의 게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헐리웃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 다니엘 헤니가 드라마 <더 휠 오브 타임>의 주연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왕좌의 게임> 작가가 극찬하고, 로자먼드 파이크, 다니엘 헤니 같은 배우들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에 출연 결정을 한 건지 궁금했다.





책을 받고, 일단 엄청난 사양에 놀랐다.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품인 만큼 분량이 엄청날 거라는 건 예상했던 일인데, 일반적인 책보다 훨씬 큰 크기에 전권 사철 양장 제본이라니. 게다가 1-3권 세트 구매시 세트 구매자를 위한 스페셜 굿즈인 '휠 오브 타임 전3권 북박스'와 아이즈 세다이와 함께 하는 ​'휠 오브 타임 여행 가이드북'도 받을 수 있다. 인터넷 서점별로 특별 굿즈도 준다. 


판타지 소설 읽기에 익숙지 않은 독자로서는 '휠 오브 타임 여행 가이드북'의 존재가 특히 반갑다. 괜히 '여행 가이드북'이 아닌 게, 책을 펼치면 일단 휠 오브 타임 세계관의 무대가 되는 공간의 지도가 나온다. 작품의 의미와 영향, 인기 등을 설명한 글을 넘기면 휠 오브 타임 세계관 속 장소들의 위치, 인구, 체류 기간, 위험도, 추천 이유, 명소와 추천 음식, 주의사항 등이 실제 여행 가이드북처럼 소개되어 있다. 팬이든 팬이 아니든 반할 만한 기획이다. 





<휠 오브 타임> 1-3권 세트는 1부 '세계의 눈', 2부 '위대한 뿔나팔 사냥대', 3부 '드래건의 환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세계의 눈'은 3000년 전 전설의 드래건이 어둠의 존재 샤이탄을 봉인했지만 여전히 불안과 공포가 남아 있는 에먼즈 필드에서 시작한다. 아버지 탬을 도와 농장에서 일하는 청년 랜드는 벨 타인 축제를 앞두고 마을로 가는 길에 수상한 존재를 마주친다.


탬은 랜드가 잘못 본 거라고 말했지만, 랜드는 그동안 봉인되어 있던 어둠의 존재가 풀려 났다는 소문을 떠올리고 불안에 떤다. 마을로 가까워질수록 랜드처럼 어둠의 존재를 봤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평화로운 마을에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 '아이즈 세다이' 모레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혼란은 더욱 커진다. 결국 모레인은 환생한 드래건일 가능성이 있는, 랜드를 비롯한 젊은이 몇 명을 데리고 어둠의 세력에 맞서기 위한 기나긴 여정에 나선다. 





소설 초반에는 랜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남성 중심 서사라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모레인이라는 강력한 여성 캐릭터가 더욱 두드러지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드라마 <더 휠 오브 타임>에서 로자먼드 파이크가 연기한 캐릭터 모레인은 마녀처럼 강력한 마법을 지닌 여성으로서 어둠의 세력에 맞서는 청년들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왕좌의 게임>에도 멋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지만 모레인처럼 강력한 리더 캐릭터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 


에먼즈 필드를 떠난 모레인, 랜드 일행은 샤다 로고스, 케임린, 세상의 눈, 팔 다라 등 세계관 속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엄청난 모험을 벌인다. 일행이 도착하는 장소마다 풍경이나 특징이 달라서 중세 도시를 여행하는 듯하기도 하고, 게임 속을 직접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처럼 거대한 세계관을 지닌 중세 판타지 소설이면서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에 없는 매력 또한 존재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 납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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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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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일뿐더러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느끼는 스트레스 중에는 모국어와의 분리로 인한 고통도 있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모국어로는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걸 외국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워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모국어로는 표현할 생각도 못 했던 걸 외국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되어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외국어 학습자는 필연적으로 모국어를 자기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과 분리된 '타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모체와 '한 몸'이었던 태아가 모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버금가는 충격이다. 


다와다 요코는 이러한 충격을 이미 경험하고 이것에 대해 오랫동안 고찰하고 사유해 온 작가다. 그는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부터 독일에서 거주하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영혼 없는 작가>는 2011년 국내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나 오랫동안 절판 상태라서 많은 독자들이 아쉬워했던 책의 개역 증보판이다. 이 책에는 그의 초기작인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부적>(199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에서 엄선한 스물세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초판에는 열네 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저자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새로운 말엄마[語母]'를 가지게 되는 것에 비유한다. '새 말엄마'를 가지게 되면 누구나 유년 시절을 다시 한번 겪을 수 있다. 어릴 때 새로운 단어를 배우며 이제까지 표현할 수 없었던 걸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걸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 수 있다. 가령 저자는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 "하느님(Gott)"과 "그것(es)"을 입에서 뱉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둘 다 일본어로는 의미가 다르거나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독일어에는 단어마다 성(性)이 있다는 것도 저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연필은 남자, 타자기는 여자라는 구분은 대체 누가 만든 것이며 왜 이렇게 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어에서는 '나'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와타시', '와타쿠시', '보쿠', '오레' 등이 있고 각각의 의미나 용법은 나이나 성별, 청자와의 관계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독일어에서는 무조건 '이히(Ich)'인 점은 좋았다.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할 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청자가 나보다 연상인지 연하인지, 청자와의 관계가 가까운지 먼지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표현 자체의 장벽이 낮아진다. 어쩌면 사고(思考)가 언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 건 아닐까. 


다와다 요코가 언어, 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에 언어에 관한 내용이 많은 건 읽기 전부터 짐작이 되었는데, '인형'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건 의외이기도 하고 신선했다. 특히 오래전 일본에서 가난한 여자들이 죽은 아이를 기억하기 위해 '코케시'를 만들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인형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요즘 들어 많은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이 다양한 인형을 키링의 형태로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것은 어떤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것일까. 이런 식으로 평소에는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것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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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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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육체가 쇠하고 기력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은 당연하게 해왔다. 하지만 최근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기사나 정보를 접하면서 몸보다 머리가(구체적으로는 사고, 판단, 기억력 등이) 쇠하는 속도가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겁이 난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생각한 건, 수지 주연 드라마 <안나>의 원작 소설 <친밀한 이방인>의 작가 정한아가 8년 만에 발표한 장편 소설 <3월의 마치>의 주인공 '이마치'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기 전 마치는 유명한 여성 배우였다. 젊은 시절부터 60대인 지금까지 다수의 영화, 드라마 등에 출연했고 광고도 찍었다. 미모와 인기, 부와 명예 등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전부 가졌지만, 사실 마치의 삶에는 행복한 순간보다 불행한 순간이 더 많았다. 마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고, 어머니는 마치의 언니인 준과 마치를 걸핏하면 학대했으며, 좋은 언니였던 준은 오래 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배우로 데뷔해 직업적으로는 승승장구했고, 착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해 딸과 아들을 차례로 얻었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급기야 아들이 실종되는 사태까지 겪었다.


마치는 혹시라도 실종된 아들이 돌아올지도 몰라서 한 집에서 오래 살았는데, 그 집도 이제는 재건축이 되어 고급 아파트가 되었다. 그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마치는 알츠하이머병 증세가 심해진 걸 자각하고 뇌의학 클리닉에 찾아간다. 이 클리닉은 최신 VR 기술로 환자를 치료하는데, 비용은 비싸지만 효과는 좋다는 지인의 말에 혹한 마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계약한다. 이후 마치는 치료를 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클리닉을 찾아가는데, 그 때마다 몸무게가 갑자기 늘어난다든지 미팅이 돌연 취소된다든지 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정한아 작가의 전작으로는 <달의 바다>, <술과 바닐라>, <친밀한 이방인>을 읽었는데, 여성이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을 할 경우 인생이 어디까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술과 바닐라>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고,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것은 분명한 여성 캐릭터의 생애를 사실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점에서 <친밀한 이방인>과 닮았다고 느꼈다. 


이제까지 주로 여성의 '현실'을 담은 작품을 발표해온 작가라(고 생각해왔어)서, VR 기술로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전(全) 생애를 재구성하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일단 현재로서는) 설정이 등장한 것이 의외였다. 하지만 완전히 뜻밖은 아닌 게, 정한아 작가의 데뷔작인 <달의 바다>에도 NASA니 우주비행사 같은 설정이 등장한다. (작가님이 과학에 관심이 많으신가.) 다소 튀는 듯하기도 한 이 설정을 '이야기 속 이야기'를 담은 액자로서 활용한 점이 신선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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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블러드 -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 2 여고생 핍 시리즈
홀리 잭슨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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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 시리즈에 푹 빠져 있다. 하루 일과 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고 넷플릭스 드라마도 다시 보고 있다. 아쉽게도 이 시리즈는 3권으로 끝이 났다. 1권의 인기에 힘입어 2권, 3권이 나왔으니 4권, 5권도 계속 나와주면 좋으련만. 작가님의 다른 책이 번역, 출간되어도 좋고. (아직 안 되었음. 원서로 읽어야 하나.)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시리즈의 1권도 재미있지만 2권부터가 정말 재미있다. 사실 사건 자체는 평이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핍이 사는 영국의 작은 마을 리틀 킬턴에서 한 청년이 실종된다. 이름은 제이미 레이놀즈. 핍의 친구인 코너의 형이자 핍의 엄마가 일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접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런 제이미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한 앤디 벨과 샐 싱의 추도식 이후 사라진다. 경찰은 단순 가출로 보고 수사를 안 해서 제이미의 동생인 코너가 핍에게 조사를 의뢰한다. 앤디 벨 사건 이후 조신하게 지내고 있던 핍은 자신만 바라보는 코너 엄마와 코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조사에 나선다.


여기까지만 보면 2권에서는 1권과는 별개의 새로운 사건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추리 소설이 그렇다. 범인을 잡으면 법이 정당한 판결을 내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재판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다르다. 핍이 제이미 실종 사건에 매달려 있는 동안 핍의 남자 친구인 라비는 앤디 벨 살인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다. 그들은 앤디 벨과 샐 싱을 직접 살해한 범인은 아니지만 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맥스 헤이스팅스 또한 강간 등의 죄목으로 처벌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재판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온다.


안 그래도 앤디 벨 살인 사건에 손을 댄 이래 크고 작은 공격과 협박 등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핍은 이 때 이후 멘탈이 크게 흔들린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알아낸들 재판에서 정당한 판결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감에 빠진다. 핍처럼 직접 범죄의 진상을 밝혀본 적은 없지만, 상식이나 여론과는 다른 사법 판결 때문에 분노하거나 절망해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핍이 어떤 마음일지 공감이 되었다. 이제까지 착한 아이, 똑똑한 모범생으로만 행동했던 핍이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서 폭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1권에서 핍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냅챗 같은 SNS를 활용해 범인을 찾았다면, 2권에서 핍은 자신이 진행하는 범죄 팟캐스트를 활용해 범인을 찾는다. 핍이 업로드 시점까지의 수사 과정을 음성 파일로 제작해 올리면 구독자들이 청취한 후에 핍이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을 지적하거나 수사에 필요해 보이는 정보를 제보하는 식으로 수사에 도움을 준다. 일종의 집단 지성을 활용한 수사인 셈인데, 이런 식으로 최신 기술을 이용해 탐정 아닌 사람이 탐정으로 활약하는 전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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