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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나이가 들수록 육체가 쇠하고 기력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은 당연하게 해왔다. 하지만 최근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기사나 정보를 접하면서 몸보다 머리가(구체적으로는 사고, 판단, 기억력 등이) 쇠하는 속도가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겁이 난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생각한 건, 수지 주연 드라마 <안나>의 원작 소설 <친밀한 이방인>의 작가 정한아가 8년 만에 발표한 장편 소설 <3월의 마치>의 주인공 '이마치'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기 전 마치는 유명한 여성 배우였다. 젊은 시절부터 60대인 지금까지 다수의 영화, 드라마 등에 출연했고 광고도 찍었다. 미모와 인기, 부와 명예 등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전부 가졌지만, 사실 마치의 삶에는 행복한 순간보다 불행한 순간이 더 많았다. 마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고, 어머니는 마치의 언니인 준과 마치를 걸핏하면 학대했으며, 좋은 언니였던 준은 오래 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배우로 데뷔해 직업적으로는 승승장구했고, 착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해 딸과 아들을 차례로 얻었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급기야 아들이 실종되는 사태까지 겪었다.
마치는 혹시라도 실종된 아들이 돌아올지도 몰라서 한 집에서 오래 살았는데, 그 집도 이제는 재건축이 되어 고급 아파트가 되었다. 그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마치는 알츠하이머병 증세가 심해진 걸 자각하고 뇌의학 클리닉에 찾아간다. 이 클리닉은 최신 VR 기술로 환자를 치료하는데, 비용은 비싸지만 효과는 좋다는 지인의 말에 혹한 마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계약한다. 이후 마치는 치료를 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클리닉을 찾아가는데, 그 때마다 몸무게가 갑자기 늘어난다든지 미팅이 돌연 취소된다든지 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정한아 작가의 전작으로는 <달의 바다>, <술과 바닐라>, <친밀한 이방인>을 읽었는데, 여성이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을 할 경우 인생이 어디까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술과 바닐라>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고,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것은 분명한 여성 캐릭터의 생애를 사실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점에서 <친밀한 이방인>과 닮았다고 느꼈다.
이제까지 주로 여성의 '현실'을 담은 작품을 발표해온 작가라(고 생각해왔어)서, VR 기술로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전(全) 생애를 재구성하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일단 현재로서는) 설정이 등장한 것이 의외였다. 하지만 완전히 뜻밖은 아닌 게, 정한아 작가의 데뷔작인 <달의 바다>에도 NASA니 우주비행사 같은 설정이 등장한다. (작가님이 과학에 관심이 많으신가.) 다소 튀는 듯하기도 한 이 설정을 '이야기 속 이야기'를 담은 액자로서 활용한 점이 신선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