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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평점 :

외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일뿐더러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느끼는 스트레스 중에는 모국어와의 분리로 인한 고통도 있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모국어로는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걸 외국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워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모국어로는 표현할 생각도 못 했던 걸 외국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되어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외국어 학습자는 필연적으로 모국어를 자기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과 분리된 '타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모체와 '한 몸'이었던 태아가 모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버금가는 충격이다.
다와다 요코는 이러한 충격을 이미 경험하고 이것에 대해 오랫동안 고찰하고 사유해 온 작가다. 그는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부터 독일에서 거주하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영혼 없는 작가>는 2011년 국내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나 오랫동안 절판 상태라서 많은 독자들이 아쉬워했던 책의 개역 증보판이다. 이 책에는 그의 초기작인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부적>(199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에서 엄선한 스물세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초판에는 열네 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저자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새로운 말엄마[語母]'를 가지게 되는 것에 비유한다. '새 말엄마'를 가지게 되면 누구나 유년 시절을 다시 한번 겪을 수 있다. 어릴 때 새로운 단어를 배우며 이제까지 표현할 수 없었던 걸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걸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 수 있다. 가령 저자는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 "하느님(Gott)"과 "그것(es)"을 입에서 뱉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둘 다 일본어로는 의미가 다르거나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독일어에는 단어마다 성(性)이 있다는 것도 저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연필은 남자, 타자기는 여자라는 구분은 대체 누가 만든 것이며 왜 이렇게 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어에서는 '나'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와타시', '와타쿠시', '보쿠', '오레' 등이 있고 각각의 의미나 용법은 나이나 성별, 청자와의 관계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독일어에서는 무조건 '이히(Ich)'인 점은 좋았다.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할 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청자가 나보다 연상인지 연하인지, 청자와의 관계가 가까운지 먼지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표현 자체의 장벽이 낮아진다. 어쩌면 사고(思考)가 언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 건 아닐까.
다와다 요코가 언어, 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에 언어에 관한 내용이 많은 건 읽기 전부터 짐작이 되었는데, '인형'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건 의외이기도 하고 신선했다. 특히 오래전 일본에서 가난한 여자들이 죽은 아이를 기억하기 위해 '코케시'를 만들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인형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요즘 들어 많은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이 다양한 인형을 키링의 형태로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것은 어떤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것일까. 이런 식으로 평소에는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것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