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술꾼도시여자의 주류 생활 - 미깡의 술 만화 백과
미깡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9월
평점 :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라서 술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는 한두 잔 마시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서서 술을 즐기지는 않는다. 이제는 건강 상의 이유가 더해져서 아마 앞으로 술을 즐기는 사람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이따금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술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인간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를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만화를 읽을 때 느끼는 쾌락에 가까운 감정을 그들은 술 한 잔에 느끼고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부럽고 아쉬운 일 아닌가 싶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끈 만화 <술꾼도시처녀들>의 원작자 미깡의 신작 만화 <술꾼도시여자의 주류생활>을 읽으면서 든 감정도 그것이다. 저자 미깡은 <술꾼도시처녀들>의 작가답게 오랫동안 술 애호가로 살아왔다. 그런 그가 일종의 '주류 생활 가이드'로서 쓴 이 책에는 그동안 그가 애정하며 마셔 온 수많은 술 이야기가 서양술 편과 동양술 편으로 나누어 실려 있다. 다양한 술의 종류와 맛있게 마시는 법뿐만 아니라 술의 기원과 역사, 경제, 사회적 영향 등 다양한 배경 지식도 실려 있어서, 저자처럼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이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겠지만 나처럼 술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새롭게 배울 점도 많다.
그중 하나가 '에일와이프'이다. 중세 초기 유럽 여성들 중에는 양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에일을 만드는 여성을 '에일와이프(alewife)'라고 불렀고 이들이 에일을 파는 곳을 '에일하우스(alehouse)'라고 불렀다. 그러다 에일에 홉을 넣은 '맥주'가 발명되고 이것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남자들이 에일와이프들을 몰아내고 양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역사학자 조앤 서스크가 말한 "어떤 사업이 번성하면 거기 있던 여성은 서서히 사라진다."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다. 당시 에일와이프들은 눈에 잘 띄기 위해 뾰족하고 기다린 모자를 쓰고, 에일하우스 앞에는 기다란 빗자루를 내걸었는데 이는 중세에 유행한 마녀 사냥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술 문화 하면 과음, 회식, 폭탄주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이런 부정적인 술 문화 대신 '세시주', '절기주' 같은 아름답고 운치 있는 술 문화를 제안한다. '세시주', '절기주'란 이름 그대로 세시풍속이나 계절에 맞는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이다. 겨울을 지나 차츰 하늘이 맑아지는 청명에는 청명주, 진달래꽃 만개한 춘분에는 면천두견주, 향긋한 쑥의 계절이는 쑥 막걸리 쑥크레를 마시는 식이다. 한국에는 또한 전국 각지에서 난 고유의 재료로 대를 이어 기능을 보유한 장인이 만드는 전통술이 존재한다. 그냥 술이 아니라 역사이고 문화라는데 안 마시는 쪽이 손해 아닐까. 술 안 마시는 나도 마셔보고 싶다.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