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 8
오쿠보 케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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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여성은 화가가 될 수 없다는 편견에 도전하는 귀족 출신 소녀 아르테의 모험과 성장을 그린 만화 <아르테> 8권이 출간되었다.


베네치아의 귀족 유리의 제안으로 고향인 피렌체를 떠나 베네치아에서 카타리나의 가정교사로 일한 아르테는 이제 가정교사 일을 마치고 피렌체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아르테가 베네치아에서 팔리에로 가문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소문이 피렌체에 쫙 퍼지는 바람에, 아르테는 피렌체에 돌아오자마자 공방 일을 돕는 한편 개인적으로 초상화 주문을 처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르테의 사부인 레오는 그런 아르테를 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한편 아르테는 초상화 납품을 마치고 공방으로 들어오는 길에 우연히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그 아가씨... 종교화 같은 의뢰는 받은 적 없다고 했던가. 여성 화가니 그럴 법도 하지. 종교화처럼 고상한 걸 남자보다 머리고 나쁘고 지식도 모자란 여자가 어떻게 그리겠어. 돈을 시궁창에나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지." 이 말을 들은 아르테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진다. 이제 겨우 여자는 화가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깼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그릴 수 있는 종교화를 여자는 그릴 수 없다는 또 다른 편견, 새로운 유리천장을 맞닥뜨린 것이다.


남자들이 그렇게 편견에 편견을 더하며 자신들의 결탁을 공고히 하는 동안에,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며 남자들이 만드는 편견을 깰 준비를 한다. 베로니카는 아르테에게 에라스무스의 책을 빌려주고, 아르테는 다차에게 산수를 가르친다. 아마도 베네치아에선 카타리나가 아르테를 그리워하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겠지. 그렇게 조금씩 - 그러나 부단히 -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여성들의 미래가 너무나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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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마리코 5
오자와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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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있지만 작품을 발표할 자릴 찾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 싶어요."


80세에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한 마리코 할머니의 도전을 그린 만화 <80세 마리코> 제5권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랫동안 집필해온 잡지 <군세이>로부터 연재 중단 선고를 받은 마리코는 자신처럼 나이는 있지만 작품을 발표할 자리를 찾고 있는 작가들을 위해 인터넷 문예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마리코가 인터넷의 인 자도 모른다는 것.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된 75세의 치에조와 대학생 게이머 가리오가 마리코를 돕겠다고 나서지만 큰 힘이 될 것 같진 않다.


마리코는 가리오로부터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웹 매거진 편집자인 쿠라하라 테츠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섭외하러 간다. 쿠라하라 테츠로는 "늙은이를 구제하기 위한 인터넷 잡지는 아무런 매력도 없어.", "인간은 점점 뒤떨어져 가는구나."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지만, 마리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동감이라는 듯이 웃으며 의견을 더 들려달라고 매달린다(나도 이렇게 여유있고 능청스러운 어른이 되고 싶다!). 결국 쿠라하라 테츠로는 마리코의 간청에 넘어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철학이나 노하우를 하나둘 알려준다. 마리코는 쿠라하라 테츠로의 조언에 따라 이런저런 과제를 수행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남자는 여든이 넘어도 현역에서 활발하게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여자는 여든 아니라 '서른'만 넘어도 '계란 한 판' 소리를 들으며 일을 그만두고 집 안으로 물러나길 강요받는 풍조가 한국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든까지 현역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출판사로부터 연재 중단 선고를 받은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직접 연재할 공간을 만들겠다고 나선 마리코 할머니가 눈부시게 멋지다. 연령과 직업을 불문하고 모든 여성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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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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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도쿄타워>인 일본 소설이 둘 있다. 하나는 중년 여성이 스무 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작사 작곡가, 방송인, 배우 등으로 활약하는 릴리 프랭키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공교롭게도 두 소설 모두 큰 인기에 힘입어 영화화 또는 드라마화되었고,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내가 읽은 <도쿄타워>는 후자다(전자는 고등학교 때 읽었다. 그때 내가 오카다 준이치를 많이 좋아했다... ). 2005년에 발표되어 230만 부 이상 팔리고, 서점인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제3회 서점대상까지 수상한 이 작품을 왜 이제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알겠다. <도쿄타워>가 왜 출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는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베스트셀러인지 직접 읽어보니 잘 알겠다.


이야기는 릴리 프랭키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청년기로 이어진다. 릴리 프랭키의 본명은 나카가와 마사야. 1963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 변변한 직업이 없는 아버지 때문에 '엄니(저자는 어머니를 '엄니'라고 부른다)'는 일찍부터 온갖 일을 전전했다. 행실이 좋지 않고, 이따금 술을 마시면 가족들에게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던 아버지는 얼마 후 집을 나갔고, 그때부터 몇 년에 한 번씩 큰일이 있을 때만 가족들을 찾았다.


결코 유복한 환경이 아닌데도 저자는 나름 즐겁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집이 없어서 친가와 외가를 전전하는 생활도 나쁘지 않았고, 탄광촌의 아이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은 지금 떠올리면 흐뭇하기만 하다. 없는 살림에도 하나뿐인 아들의 부탁이라면 엄니는 뭐든 들어줬다. 아들이 음악을 좋아하면 외출할 때마다 레코드판을 사다 주고, 아들이 미술학교에 보내달라고 하면 군말 없이 보내줬다. 입학이나 취업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같이 살지 않는 아버지까지 나타나 아들을 챙겼다. 저자가 아버지를 원망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이 소설의 백미는, 언제까지나 엄니 품 안의 자식일 줄 알았던 저자가 어느새 어른이 되고 철이 들면서 엄니를 한 여자로, 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기모노 장사를 하는 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엄니는, 당시로서는 늦은 서른한 살에 네 살 어린 남자와 결혼했다. 당시 의사인 남자친구도 있었는데 변변한 직업이 없는 남자를 택했다. 그 후 인생이 크게 꼬였다. 남편은 돈을 못 벌고 집에도 안 들어왔다. 하나뿐인 아들을 혼자서 길러야 했다. 아직 삼십 대니 다른 남자를 택할 수도 있었다. 아들을 친가에 맡기고 새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엄니는 그러지 않았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아들을 지켰다.


"어머니란 욕심 없는 것입니다. /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 내 자식이 큰 부자가 되는 것보다 /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주기만을 /진심으로 바라고 기원합니다. / 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 내 자식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 넘칠 만큼 행복해집니다. / 어머니란 / 실로 욕심 없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어머니를 울리는 것은 /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일입니다." (495~6쪽)


방송이나 영화, 잡지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릴리 프랭키의 모습에만 익숙했기에, 이토록 서글픈 사연을 간직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새삼 놀랐다. 릴리 프랭키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는 건, 역시 하늘에서 그를 지켜주는 엄니 덕분일까. 언제 다시 도쿄에서 도쿄타워를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이 소설이 준 가슴 벅찬 감동을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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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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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에 적힌 문장 그대로,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설레는 이름이 된' 정세랑 작가님의 첫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는 중이다. (지금 보니 띠지에 실린 사진 속 정세랑 작가님, 왠지 일본 배우 아야세 하루카와 닮은 듯 ㅎㅎㅎ) 전부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한 편씩 아껴 읽을 작정인데, 자꾸만 한 편 읽으면 다음 한 편을 더 읽고 싶고, 다다음 한 편 내용도 궁금해져서 미치겠다. 정세랑 작가님 소설을 열심히 읽고 있기는 하지만 다 읽은 것도 아니면서. 오늘 트위터에서 보니 정세랑 작가님의 2012년작 <지구에서 한아뿐>이 조만간 재출간될 예정이라는데 그 책 나오기 전까지 천천히 읽으면 될까.


맨처음에 실린 <웨딩드레스 44>는 한 벌의 웨딩드레스를 대여해 입은 44명의 신부들의 이야기를 이어붙인 구성의 소설이다. 어떤 신부는 남자 친구와 동거하다가 양가 부모들의 협박 비슷한 간청에 못이겨 식을 올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어떤 신부는 졸업도 하지 않았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자 쪽 집안이 서두르는 바람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이 이어진다. 


흥미진진한 사연들을 매끄럽게 읽어가다가 이따금 과속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속도를 늦추게 되는 대목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신랑보다 한참 어린 신부에게 사람들이(아마도 신랑 쪽 집안 사람들이 아닐까) "어리고 깨끗하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라든가, 여자의 목에 새겨진 타투를 보고 남자가 비난을 했다는 대목이라든가, 남편과 같은 시험에 붙었는데 가족들이 여자 쪽에게만 '살살 다닐 직장'에 들어가라고 요구했다든가 하는 대목들. 아무리 남편이 좋아도 남편 쪽 집안 사람들이 잘해줘도, 결혼은 굴욕적이고 가부장제가 가하는 압박은 여성 한 사람이 극복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더 잘 알게 되었고, 이미 굳어있던 비혼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이어지는 <효진>은 한국의 2,30대 여성이라면 친구와 가볍게 할 법한 전화 통화를 그대로 옮겨 쓴 듯한 소설인데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똑같은 자식인데도 아들은 귀하고 딸은 만만하고, 똑같이 나가 살아도 아들은 애틋하고 딸은 원망하는 한국의 부모들. 다행히 나는 남자 형제가 없어서 부모님에게 아들과 비교당하는 일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아들 없는 집의 딸, 그것도 장녀로 산다는 건 그 또한 고역스런 일이다(없는 오빠, 없는 남동생과 경쟁하는 기분이랄까). 집에선 딸이라서, 집 밖에선 여자라서 당하는 무시와 차별, 배제.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장한 걸까. 아님 독한 걸까. 씁쓸한 기분으로 다음 소설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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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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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묵은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일본 야쿠시마에 있는 '조몬 삼나무(조몬스기)'를 보러 가는 것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나무로도 유명한 조몬 삼나무는, 높이 25미터, 둘레 16.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도 놀랍지만, 추정 수령(樹齡)이 최소 2170년에서 최대 7200년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7200년 전이면 우리나라는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기나긴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낸 나무. 그 나무의 기운을 받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 나의 작은(?) 꿈이다.


그런데 굳이 가고시마에서 배 타고 네 시간은 가야 도착하는 야쿠시마까지 가지 않아도, 익숙지 않은 트레킹과 산행을 불사하면서까지 조몬 삼나무를 보러 가지 않아도, 생명력 강한 나무의 기운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미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리처드 파워스의 장편소설 <오버스토리>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심지어는 나와 내 주변에 심어져 있는 나무는 공통 조상에서 나왔다고 하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야쿠시마에 있는 조몬 삼나무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엄마가 키우는 고무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나무와의 관계라고는 사주 일간에 갑목(甲木)이 있는 정도인 나하고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나무와의 관계를 일부러 찾아야 찾을 수 있는 나와 달리, <오버스토리>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또는 등장할 때부터) 나무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오버스토리>의 중심인물은 모두 아홉 명이다. 이야기는 이민자 출신의 가난한 농부인 요르겐 호엘이 어느 날 밤[夜]에 구워 먹고 남은 밤[栗]을 마당 한구석에 심으면서 시작된다. 여섯 개의 밤알 중에 다섯 개만이 싹을 틔웠고, 그중 하나만이 커다란 나무로 성장했다. 그 아들이 나무를 돌보고, 그 아들이 나무를 돌보다 마침내 니컬러스 호엘에게까지 책임이 돌아왔다. 조상들을 닮아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니컬러스 호엘은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의 사진을 찍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


이어지는 미미, 애덤, 레이와 도러시, 더글러스, 닐리, 올리비아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패트리샤 웨스터퍼드다. 패트리샤는 중심인물 아홉 명 중에서도 가장 식물 친화적이고 나무와 가까운 인물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영향으로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패트리샤는, 학창 시절 내내 '식물녀'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대학에서 식물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얼마 후 패트리샤는 명망 있는 저널에 논문을 수록하고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지만, 패트리샤가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성 학자들의 조롱과 비난을 견디다 못해 학계를 떠나버리고 만다. 인간에게 상처받은 패트리샤는 숲으로 들어가 나무에게 치유받고, 다시 나무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나무의, 나무에 의한, 나무를 위한 삶을 살기로 한 패트리샤의 다짐은 지켜지고, 끝내 보상까지 받게 된다.


전반부가 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씩 차례대로 펼쳐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고 통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이유다). 밤나무를 지키던 니컬러스는 한때 파티광이었으나 감전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난 여대생 올리비아와 우연히 만나 농장을 떠난다.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엔지니어로 일해온 미미는 더글러스와 함께 벌목 반대 집회에 참가한다. 집회에서 미미와 더글러스는 애덤을 만나고, 레이와 도러시는 결혼 생활이 위기에 빠졌을 때 패트리샤의 책을 읽는다. 닐리는 패트리샤의 강연에 참석했다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다. 패트리샤는 강연 도중에 미미와 눈이 마주친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자의 삶을 영위하던 인물들의 관심을 하나로 집중시킨 건, 곳곳에서 끊임없이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벌목이다. 거대 기업의 이윤을 위해 시행되는 대규모 벌목부터 마을 환경 정비를 위한 나무 제거 활동까지, 온갖 목적으로 나무가 파헤쳐지고, 베어지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인물들은 시위를 벌이고, 공권력과 맞서고, (문자 그대로) 피 흘리며 투쟁한다. 환경 운동의 효과는 물론 당위성마저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인물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무 한 그루를 자를 때 그걸로 만드는 건 최소한 당신이 잘라낸 것만큼 기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나무가 단순히 있는 그대로 대대손손 보전해야 할 자원이어서가 아니다. 나무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이고, 나무와 인간은 같은 지구상에서 공생하며, 나무가 없으면 인간도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뻔히 보이는데도 행동하지 않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애덤, 결혼이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제도라고 생각해서 갈등하는 레이와 도로시의 이야기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비해 나무와 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들의 이야기 또한 나무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심장마비로 사람이 쓰러져도 구하러 가지 않는 사람들이 나무 한 그루가 눈앞에서 쓰러진다고 눈 하나 깜짝할 리 없다. 인간이 인간을 - 정확히는 남자가 여자를 - 소유하고 그것이 결혼 제도로 정당화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인간이 나무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사용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낄 리 없다.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견과를 보고, 목재를 보고, 그림자를 본다. 장식품이나 예쁜 가을의 나뭇잎을 본다. 길을 가로막거나 스키장을 훼손하는 장애물을 본다. 깨끗이 밀어야 할 어둡고 위험한 장소들을 본다. 우리 지붕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지들을 본다. 환금성 작물을 본다. 하지만 나무는, 나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596쪽)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묻는다. 인간은 무슨 권리로 나무를 함부로 베고, 자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가. 만약 나무가 인간을 함부로 베고, 자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인간은 어떤 감정이 들겠는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게 '아낌없이 받기만 하는 인간'은 과연 타당한가. 남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을 만들던 닐리가 패트리샤의 강연을 계기로 전혀 다른 게임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질문들의 답을 찾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남보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가지는 것을 목표로 살고 있는 우리도 실은 이 질문들의 답을 알고 있다. 다만 보지 않을 뿐이다. 보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나무는 집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도 있고 집 안에도 있는데, 그것들은 생명이 아니라 배경이나 장식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눈 앞에 있는 나무는 보지 않고, 진짜 나무는 저 먼 야쿠시마 산속 깊숙한 곳에나 있다고 생각한다(반성한다).


버킷 리스트를 수정해야겠다. 지구 환경에 해로운 온실가스를 배출해가며 야쿠시마까지 가는 대신,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나무, 내 손 뻗으면 닿는 나무들부터 신경 써야겠다. 나무로 된 가구를 사든, 수첩을 사든, 그것을 사용한 가치가 최소한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간 나무 이상의 것이 되도록 해야겠다. 문제는 내가 한 달에 열 권 이상씩 읽어치우는 책들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줄이기가 힘들 것 같다. 전자책으로 읽자니 그 또한 전기를 사용하니 지구 환경에 좋다고만 볼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래도 <오버스토리>처럼, 나무의, 나무에 의한, 나무를 위한 책을 읽기 위한 독서라면 나무에 해롭다고만 볼 수도 없지 않을까. 독서도 나무에 해로운 행위라면, 대체 나는 그동안 저지르고, 앞으로 저지를 죗값을 언제 어떻게 다 갚을까. 갚을 순 있을까. 이제야 나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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