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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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인 은둔형 외톨이 '나'는 전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여학생 '야마우치 사쿠라'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것은 사쿠라가 불치병에 걸려서 앞으로 일 년밖에 살 수 없다는 것. 비밀을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은 사쿠라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임시 친구 계약을 맺는다. 오랫동안 친구를 사귀지 않았던 '나'는 사쿠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연인이 되고 싶다는 감정마저 품는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단 일 년. '일 년 한정 친구'인 두 사람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순수 문학이라기보다 미디어 믹스를 노린 대중 소설 내지는 라이트 노벨에 가깝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 일본 소설로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1리터의 눈물>, <연애사진>, <태양의 노래> 등 다수가 있는데, 이들 모두 영화 또는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또한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신속하게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올해 10월 한국에서 개봉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도 소설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슬프거나 처연하지 않고 때때로 발랄하며 웃기기까지 하다. 아픈 부위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믿는 사쿠라는 자신과 함께 내장 요리를 먹으러 다닐 친구를 원한다. 가족도 있고 절친 교코도 있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고 싶진 않다. 마침 '나'가 사쿠라에 눈에 들어온다. 조용하고 친구도 없으니 비밀을 잘 지켜줄 것 같다. 결국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내장 요리를 먹는 것으로 모자라 후쿠오카까지 가서 '모츠나베(한국으로 치면 곱창전골)'를 먹는 사이로 발전한다. 


물론 사쿠라가 원하는 건 내장 요리가 아니라 혼자서 간직하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또는 연인)다. '나' 또한 사쿠라에게 끌려다니면서도 내심 사쿠라 같은 친구(또는 연인)를 원했음을 깨닫는다. 그런 두 사람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미래를 맞게 되고, 오랫동안 감정을 절제해 왔던 '나'가 결국 감정을 폭발하고 마는 대목에선 나조차 마음이 먹먹해졌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겨우 드러나는 '나'의 이름을 맞히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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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혼자 떠나는 두근두근 교토산책
시로 후쿠로샤 지음, 조민경 옮김, 다이라 사토코 원작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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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혼자 떠나는 두근두근 교토산책>은 지난주(벌써!)에 다녀온 교토 여행을 준비하면서 구입했던 책이다. 만화라서 부담 없이 쉬엄쉬엄 읽기 좋고, 만화인데도 나름 알차고 유니크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저자 다이라 사토코는 교토 소재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교토와 연을 맺었다. 대학 졸업 후 도쿄로 이사한 후에도 돈과 여유가 생기면 교토를 방문해 교토의 숨겨진 명소, 맛집, 디저트 가게 등을 샅샅이 훑었다.





저자가 제안하는 교토 여행 필수 코스는 에이칸도 부근에서 긴카쿠지 부근까지 이어지는 '철학의 길'이다. 철학의 길을 걷다가 출출해지면 '기미야'에서 '마메칸(콩을 달착지근하게 조린 디저트)'을 먹고, 점심 먹을 시간이 되면 프렌치 반찬 가게 '살짝궁 프랑스'에 들러 '빵 도시락'을 먹거나 '료쿠안'에 들러 화과자를 먹는다. 5월 말에서 6월 사이, 밤에 철학의 길을 걸으면 반딧불이를 볼 수도 있다.





니조성(니조조)에서 가까운 JR 니조 역 근처의 '교토 산조카이 상점가'에는 저자가 교토 전역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파는 가게가 있다. 바로 '야노지사쿠엔'의 '녹차 소프트아이스크림'이다. 우지에서 재배한 녹차로 만든 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의 가격은 단돈 160엔. 지역의 아이들이 용돈으로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렴한 가격을 책정했다(일본은 소프트아이스크림 가격이 300~500엔 대 정도로 한국보다 비싸다. 맥도날드는 100엔.).





교토 여행을 할 때 가장 좋은 교통수단은 버스지만, 체력이 좋으면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교토 시내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 또는 호텔에서 자전거를 대여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교토의 이곳저곳을 누빌 수 있다. 이 밖에도 교토에서 직접 살아보고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방문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깨알 같은 정보가 담겨 있다. 좌선 체험, 기모노 체험, 가죽 공예 체험 등 다양한 체험기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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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스트 즈보라의 아침밥 - 요리 바보도 OK!
오노 마사토 글, 최유진 옮김, 오다 마키코 요리 / 효형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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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스트 즈보라의 아침밥>은 아침밥을 직접 만들어 먹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쓴 오다 마키코는 중학교 가정 교과서 제작 및 감수를 맡고 있는 요리 연구가이자 영양사.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 절약은 물론 맛까지 보장하는 아침밥 아이디어 260가지를 소개한다(참고로 '즈보라'는 일본어로 '대충대충함, 흐리멍덩함'을 뜻한다).





저자는 먼저 아침밥을 쉽고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요령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설거지 줄이기. 머그잔에 바로 수프를 만들거나 주먹밥을 접시에 낼 때 밑에 깻잎을 깔면 밥풀이 그릇에 달라붙지 않아 설거짓거리가 줄어든다. 둘째, 불 쓰지 않기. 그 대신 재료 그대로의 맛을 즐기는 요리를 시도해 본다. 셋째, 도마 쓰지 않기. 한두 번 자르는 정도라면 키친타월을 사용하거나 손으로 찢거나 주방용 가위를 사용한다.





레시피는 크게 밥을 이용한 레시피와 빵을 이용한 레시피로 나뉜다. 밥은 두께 1cm, 휴대전화 정도 크기의 네모 모양으로 얼려 놓고, 아침마다 전자레인지로 해동해서 먹는다. 네모 밥 한가운데에 속 재료를 넣으면 주먹밥이 되고, 네모 밥 위에 날계란, 간장, 김 등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계란덮밥이 된다. 버터를 넣고 달군 프라이팬에 얼린 네모 밥을 넣고 굽다가 우유, 베이컨, 치즈 등을 넣으면 오븐 없이 맛있는 도리아를 만들 수 있다(맛있겠다ㅠ).





취향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 수 있는 주먹밥 레시피가 무려 55가지나 실려 있다. 올리브오일+후추, 카레 가루, 후추+치즈 가루 조합의 주먹밥도, 참치+마요네즈, 명란젓+마요네즈 조합의 주먹밥도, 스팸이나 닭튀김 하나 달랑 넣은 주먹밥도 충분히 맛있고 속이 든든하다. 일본 책이다 보니 한국인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 즐겨 먹는 재료 위주가 아닌 점은 아쉽다.





잉글리시 머핀을 활용한 레시피만 해도 이렇게 많다. 잉글리시 머핀 위에 햄이나 치즈, 계란 등을 얹어서 먹는 방법 외에 명란젓+무+무순, 초콜릿+딸기+휘핑크림+민트, 스크램블에그+스노우피+바지락 조림 등을 얹어서 먹는 방법 등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잉글리시 머핀이 없으면 식빵을 대신 써도 좋을 듯. 가을에는 버터+간장+양송이버섯, 단호박+설탕+버터 조합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고.





아침마다 계란 프라이를 즐겨 해 먹다 보니 계란 프라이를 활용한 레시피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채 썬 양배추를 볶다가 중간에 홈을 파서 달걀을 깨 넣으면 비타민과 식이섬유, 단백질 등이 풍부한 아침 식사가 된다. 계란 프라이 위에 쪽파+세멸치+피자치즈, 토마토+치즈가루 등을 얹어서 먹는 방법도 있다고. 아아... 빨리 아침밥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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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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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분명한 동기나 자극적인 계기가 있다. <와일드>의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완주하기로 마음먹은 건 어머니의 죽음과 낙태, 이혼에 따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결심한 건 20년 만에 찾은 조국과 가까워지기 위한 방편이었다. 


<온 트레일스>의 저자 로버트 무어가 장거리 하이킹에 관심을 가진 건 오로지 책 한 권(정확히는 시리즈)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지독한 독서가였던 저자는 얇은 문고판 <초원의 집>을 읽고 숲 속 모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마크 트웨인과 잭 런던의 소년기 모험담, 존 뮤어의 산중 몽상기 등을 탐독하며 언젠가 나도 이들처럼 자연 속에서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저자가 오로지 상상만 했던 모험을 현실에서 실행으로 옮긴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인 2009년이다. 대학생이 된 저자는 학교생활을 하는 틈틈이 하이킹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녔다. 어느 해 여름방학, 저자는 한 젊은 스루하이커에게 나도 언젠가 트레일을 완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스루하이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학교를 그만둬.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그때부터 하이킹 준비를 한 저자는 1년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5개월간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돌입했다. 저자의 관심사는 오늘 뭘 먹을까, 내일 어디서 잘까 같은 일상적인 고민도,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나 장래에 대한 불안 같은 내면의 문제도 아니었다. 저자는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길을 언제 어떻게 다 걸을까 하는 걱정보다도, 두 눈앞에 이 끝없는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자체에 전율했다.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길이 내 눈 아래로 지나가는 동안, 나는 휘갈긴 글씨 같은 이 끝없는 길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왜 생겼을까? 아니, 길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9쪽)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와일드>, <나를 부르는 숲> 같은 여행서보다 <코스모스> 같은 과학서에 가깝다. 첫 번째 장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 트레일을 살펴보며 동물들이 처음에 이동하기 시작한 이유를 추론한다. 두 번째 장에서는 곤충, 세 번째 장에서는 코끼리, 사슴, 가젤 같은 네 발 달린 포유류의 트레일을 살펴본다. 네 번재 장에서는 고대 인류 사회가 형성한 길과 언어, 구전설화, 기억 등의 관계를 확인하고, 다섯 번째 장에서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비롯한 여러 현대 하이킹 트레일의 기원을 파헤친다. 


저자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남쪽 구간을 걷는 동안 나무 몸통이 두 갈래로 나뉜 자리에서 기이한 모습의 작고 하얀 텐트들을 여러 번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텐트들은 텐트나방 애벌레로 불리는 곤충인데, 이들은 "홀로 있을 때는 완벽하게 무력하지만, 집단을 이루면 숲 전체를 벌거벗길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다. 이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며, 무리의 우두머리가 나아가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문제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잘못 택할 때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잘못 택해도 무리 중 어느 누구도 경로를 벗어나 다른 경로를 모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기 십상이다. 


어린 시절 책 한 권을 읽고 자연을 모험하는 꿈을 품은 남성이 직접 길 위에 올라 장거리 하이킹을 하면서 자연을 탐색함은 물론, 자연 속에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 생명의 신비를 깨닫고,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여정이 흥미롭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엄청난 혼란과 방황을 겪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도 인상적이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와 연결된 무수히 많은 생명을 깨닫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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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화사 외 42인 지음, 한국여성민우회 엮음 / 궁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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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민우회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 '거침없는 해장상담소'를 즐겨 듣는다(http://www.podbbang.com/ch/8915). 제목 그대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부딪치는 문제에 관한 성토가 '거침없는' 방식으로 펼쳐져서 들을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지고 막혔던 속이 시원하게 '해장'된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43인이 모여 책을 냈다기에 얼른 구입해 읽었다. 제목은 <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한국여성민우회 소식지 '함께가는 여성'과 홈페이지에 실렸던 글을 보완해 엮었다. 글의 주제는 제모, 패션, 건강, 결혼, 육아, 직장, 교회, 장례식 등 다양하다. 비혼 및 기혼 여성은 물론, 남성, 성소수자의 글도 실렸다. 


페미니즘이라는 게 말로 하면 얼마나 쉬운가? 특히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면 경계선의 이쪽에서 "외모지상주의에 반대한다, 성폭력에 반대한다, 성별 구분에 반대한다" 안전하게 외치기만 하면 된다. 그걸 외치는 나는 짧은 머리에, 입만 열면 "현재 한국사회가" 어쩌고저쩌고...... (53쪽) 


위 글을 쓴 '헤움'은 남성이다. 헤움은 어른들 말씀도 잘 듣고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잘 따라하는 아이였다. 머리도 당연히 짧은 머리, 옷 입는 것에도 무관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애인이었던 여성 친구의 제안을 계기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온갖 태클이 들어왔다. 머리 자르라는 잔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그제야 헤움은 외모 또한 사회가 개인을 규율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머리를 짧게 자르고 살았던 건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거나 스스로 좋아서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비난이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음을 인정했다. 


여성들이 외모 때문에 사회로부터 받는 압박과 스트레스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긴 머리를 감거나 말리면서 여성들이 외출 준비에 들이는 시간이 남성보다 훨씬 긴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긴 머리뿐 아니라 분홍색이나 빨간색, 노란색 옷 등 소위 '여자 색'으로 분류되는 색에 대한 편견도 깨달았다. 남성도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고 여성도 파란색을 좋아할 수 있는데도 남성은 파란색, 여성은 분홍색이 디폴트 값인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이 존중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와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1학년 청소시간, 한 남학생이 내 가랑이를 만지고 지나갔다.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며칠 후 청소시간에 비명이 들렸다. 그 남학생이 다른 여학생을 만졌고, 여학생이 소리 지르며 운 것이다. 남학생이 내 몸을 만졌을 때가 아닌 여학생의 비명을 들었을 때, 마음이 다쳤다. 그리고 알았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100~1쪽) 


'화사'의 글 <운이 좋아 살아남은 나는, 인간입니다>를 읽으며 삼십여 년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당했던 성희롱과 성차별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성희롱 또는 성차별인지 몰랐고, 학창 시절에는 내신에 영향을 줄까 봐 참았으며, 어른이 된 후에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웃으며 넘겼던 일들. 그 일들이 나만 상처 입히는 게 아니며 내가 참거나 무시함으로써 다른 여성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나 한 사람이라도,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해보려 한다. 


'차라리 페미니즘을 몰랐다면'. 페미니스트가 되면 곧 세상이 변할 거라고 들떠 있다가도 한숨짓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페미니즘을 모르는 채 가부장제에 편입되거나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 조연, 2등 국민으로 사는 게 훨씬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무례를 무례라고, 오지랖을 오지랖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지금 험한 길이라도 걸을 수 있는 건 없던 길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길을 씩씩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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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0-2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