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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화사 외 42인 지음, 한국여성민우회 엮음 / 궁리 / 2017년 9월
평점 :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 '거침없는 해장상담소'를 즐겨 듣는다(http://www.podbbang.com/ch/8915). 제목 그대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부딪치는 문제에 관한 성토가 '거침없는' 방식으로 펼쳐져서 들을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지고 막혔던 속이 시원하게 '해장'된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43인이 모여 책을 냈다기에 얼른 구입해 읽었다. 제목은 <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한국여성민우회 소식지 '함께가는 여성'과 홈페이지에 실렸던 글을 보완해 엮었다. 글의 주제는 제모, 패션, 건강, 결혼, 육아, 직장, 교회, 장례식 등 다양하다. 비혼 및 기혼 여성은 물론, 남성, 성소수자의 글도 실렸다.
페미니즘이라는 게 말로 하면 얼마나 쉬운가? 특히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면 경계선의 이쪽에서 "외모지상주의에 반대한다, 성폭력에 반대한다, 성별 구분에 반대한다" 안전하게 외치기만 하면 된다. 그걸 외치는 나는 짧은 머리에, 입만 열면 "현재 한국사회가" 어쩌고저쩌고...... (53쪽)
위 글을 쓴 '헤움'은 남성이다. 헤움은 어른들 말씀도 잘 듣고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잘 따라하는 아이였다. 머리도 당연히 짧은 머리, 옷 입는 것에도 무관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애인이었던 여성 친구의 제안을 계기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온갖 태클이 들어왔다. 머리 자르라는 잔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그제야 헤움은 외모 또한 사회가 개인을 규율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머리를 짧게 자르고 살았던 건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거나 스스로 좋아서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비난이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음을 인정했다.
여성들이 외모 때문에 사회로부터 받는 압박과 스트레스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긴 머리를 감거나 말리면서 여성들이 외출 준비에 들이는 시간이 남성보다 훨씬 긴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긴 머리뿐 아니라 분홍색이나 빨간색, 노란색 옷 등 소위 '여자 색'으로 분류되는 색에 대한 편견도 깨달았다. 남성도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고 여성도 파란색을 좋아할 수 있는데도 남성은 파란색, 여성은 분홍색이 디폴트 값인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이 존중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와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1학년 청소시간, 한 남학생이 내 가랑이를 만지고 지나갔다.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며칠 후 청소시간에 비명이 들렸다. 그 남학생이 다른 여학생을 만졌고, 여학생이 소리 지르며 운 것이다. 남학생이 내 몸을 만졌을 때가 아닌 여학생의 비명을 들었을 때, 마음이 다쳤다. 그리고 알았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100~1쪽)
'화사'의 글 <운이 좋아 살아남은 나는, 인간입니다>를 읽으며 삼십여 년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당했던 성희롱과 성차별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성희롱 또는 성차별인지 몰랐고, 학창 시절에는 내신에 영향을 줄까 봐 참았으며, 어른이 된 후에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웃으며 넘겼던 일들. 그 일들이 나만 상처 입히는 게 아니며 내가 참거나 무시함으로써 다른 여성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나 한 사람이라도,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해보려 한다.
'차라리 페미니즘을 몰랐다면'. 페미니스트가 되면 곧 세상이 변할 거라고 들떠 있다가도 한숨짓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페미니즘을 모르는 채 가부장제에 편입되거나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 조연, 2등 국민으로 사는 게 훨씬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무례를 무례라고, 오지랖을 오지랖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지금 험한 길이라도 걸을 수 있는 건 없던 길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길을 씩씩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