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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평점 :
김영하 작가가 2009년에 발표한 여행 에세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개정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서문을 읽다가 '언젠가 읽어본 글인데...' 싶어서 확인해 보니 짐작이 맞았다. 서문의 내용이 워낙 강렬해서 기억한 것일 뿐, 책의 전체 내용을 기억하는 건 아니라서 찬찬히 읽어보았는데 역시 좋았다. 여행하기 힘든 시기이다 보니 저자의 여행 이야기를 읽으며 대리만족하기도 하고, 언젠가 상황이 좋아져서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나도 저자를 따라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해보리라 하는 다짐도 해봤다.
이 책은 저자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지역을 여행한 기록을 담고 있다. 저자는 당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국립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다양한 행사에 불려 다녔고, 여러 매체에 수시로 글을 기고했다.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서울에 괜찮은 집 한 칸도 가졌지만, 정작 자신의 글은 쓸 수가 없었다. 소설가인데, 소설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 상황을 알아본 사람들이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도리질하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얼마 전 방송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를 여행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일정에 쫓겨서 가보지 못한 곳들, 가봤지만 또 가보고 싶은 곳들이 생각났다. 아내의 동의를 얻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집도 내놨다. 그리하여 떠난 여행은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열차가 지연되지 않나, 숙소가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나,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 연결이 잘 안되는 곳도 많았다. 열차 예약도 숙소 예약도 짧은 이탈리아어와 웬만해선 통하지 않은 영어로 해결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여행을 마쳤을 때, 저자는 진심으로 여행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단지 여행을 계기로 단조롭고 권태로웠던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먼 곳을 여행하며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글을 쓰는 삶은 어릴 때부터 저자가 동경한 것이었다. 그러한 동경을 현실로 이룰 수 있어서 기뻤고, 덕분에 잃어버렸던 과거의 꿈도 떠올리고, 이를 통해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유익했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떠남으로써 도착할 수 있는 상태가 있고 삶이 있다. 여행을 하기 힘든 요즘이 그래서 더 힘든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