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렌트에게 정치 철학이란 말은 마치 '둥근 사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으로 간주된다.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 다양성(아렌트는 이를 인간의 복수성이라 표현한다)을 존중하고 차이를 그 자체로서 다루어야 하는 정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11.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은 'the banality of evil'을 필자가 그 책을 부족하지만 우리말로 옮기면서 선택했던 번역이다. 이때 banality는 '평범', '낡아빠짐', '익숙해짐', '진부성' 등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진부성'이라고 번역을 했으나 사실 '진부성'이나 '평범성 두 단어 모두 아렌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25. 남자들은 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어 해요. 나는 남자들의 그런 성향을 이를테면 허울만 그럴싸하지 실속은 없는 문제로 봐요. 나 자신을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느냐고요? 아뇨.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이 - 내가 이해한 것과 같은 의미로 - 세상을 이해한다면 나는 그 사실에서 편안함과 만족감을 얻을 거예요.
76.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 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77. 기능하기(functioning)는 정말로 변태적인 행위 양식이고, 이런 기능하기에는 항상 쾌감이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렇지만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돼요. 당신이 거기서 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는 것이죠.
81. 악은 항상 유혹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반면 선은 우리가 자발적으로는 절대 하려고 들지 않는 일이라고들 생각하죠. 무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건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브레히트는 선한 일을 하려는 유혹은 우리가 늘 이겨내야 하는 무엇이라는 점을 항상 보여주고 있어요.
85.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98. (소크라테스) "자기 자신과 불일치disunity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unity니까."
102,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