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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평점 :
지금이 아닌 다른 시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당신은 어느 시대로 떠나고 싶은가. 얼마 전 코니 윌리스의 소설 <블랙아웃>을 읽고 든 생각이다. <블랙아웃>은 시간여행 기술이 개발된 2060년 영국이 배경이다. 옥스퍼드 대학교 사학과에 재학 중인 폴리, 메로피, 마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40년대 초 영국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가 대공습이 한창인 런던에 갇힌다. 책이나 영화 등으로 간접 경험했던 전쟁의 공포와 극심한 궁핍을 직접 체험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이들처럼 머리로만 아는 역사적 사건이나 현장의 분위기를 몸으로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고고학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의 책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에 따르면, 고고학자는 "시간여행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적지에서 유물을 찾고 연구함으로써 현재가 아닌 과거를 경험한다. 보이는 거라곤 흙과 모래뿐인 땅에서 과거에 사람들이 생활하고 거주했던 건물을 상상하고, 오래 전 어느 때에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과 대화하고 그의 삶을 유추한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이나 유물을 통해 알게 되는 역사는, 교과서로 배우는 역사나 책 또는 영화로 접하는 역사와는 또 다른, 보다 생생한 느낌과 깊은 감동을 준다.
이 책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고학자를 꿈꾸며 살아온 저자가 지난 20여 년간 시베리아, 몽골, 중앙아시아, 중국의 여러 유적지 발굴에 참여하고 유물을 채취하면서 겪은 일과 이를 통해 얻은 지혜와 통찰을 소개한다. 세계 고고학 자료의 절반 이상은 무덤과 관련되어 있다. 무덤은 죽은 자를 묻은 곳이기도 하지만, 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자신에게도 죽음이 멀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극심한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일부러 크고 화려한 무덤을 짓거나, 무덤 안에 각종 물건을 넣는다. 이는 죽은 자에 대한 추모와 숭배를 상징하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자신을 위로하고 나아가 자신이 죽었을 때도 같은 의식이 치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다.
유물이나 유적처럼 물리적 형태가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연구 주제에 속한다. 음악이나 향기처럼 물리적 형태가 없는 것이야말로 연구하기가 어려운 주제이고 그만큼 가치 있다. 저자는 3년 동안 구금이라는 고대의 악기를 연구해 2017년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구금은 고대 유라시아 초원에 살았던 유목민들이 즐겨 연주했던 악기다. 저자는 구금이 유목문화를 대표하는 악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기원도 흉노와 같은 초원의 제국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발해 유적에서 구금이 발견되었고, 저자는 연구 끝에 발해의 음악이 당시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다만 당시의 악보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이 유행했는지, 어떤 곡조였는지 복원하여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매우 많다. 단군신화의 마늘은 사실 우리가 잘 아는 그 마늘이 아니라 명이나물의 옛이름인 '야생마늘' 또는 '곰마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초에 단군신화를 비롯한 곰 신화가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전역에 존재하며, 단군신화는 그 중 하나가 변형되어 전래된 것일 수 있다. 국사 시간에 발해가 일본과 교류했다는 사실은 배웠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배웠다 발해 초기에는 20~30명 정도의 사신이 오고 갔고, 후기에는 100명 정도의 사신이 오고 갔다. 발해의 사신은 주로 지금의 일본 아키타현에 해당하는 데와와 후쿠이현에 해당하는 에치젠에 머물렀으며, 아키타성에는 발해 사신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의 유적과 유물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도했던 일들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조선고적도보>를 15권이나 발간하게 했다. 일본의 학자 에가미 나부오는 기마민족설과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일본의 야마토 민족이 한반도로 건너와 김해 일부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거짓 주장을 했다. 이는 자신들이 다른 유럽 민족들과 구별되는 우월한 아리안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히틀러의 나치이론을 모방한 것이며, 올바른 자세로 학문에 정진해야 할 학자가 국가와 정부시책에 협조하는 어용학자로 전락한 사례다.
저자는 고고학이 막연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학문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쉽게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학자들은 쉽게 그러한 시류에 편승한다. 역사학과 달리 고고학은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한다. 고고학은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을 통해 과거에 진짜로 있었던 일을 밝히고 사실과 거짓을 구별해낸다. 고고학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기 위한 여러가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도굴한 유물 또는 유적을 '재발굴'하는 과정을 통해 바로잡은 역사적 진실이 여럿 있다. 우리가 고고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