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7일 바렌보임이 라 스칼라에서 지휘한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가 내가 감상한 100번째 오페라 공연물이 되었다(봤어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제외). 그 간 20명의 작곡가의 52편의 작품을 보았는데, 이제 스탠더드로 분류된다는 150개 작품을 보고 이짓을 그만둬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올해는 (시간도 많기도 했지만) 6월부터 몰아서 보기 시작하면서 조금 숨가쁘게 달려왔던 것 같다. 그간 감상한 프로덕션들을 엑셀파일에 정리했는데, 복기하는 의미에서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몇가지 순위를 매겨봤다.

 

 *

 

□ 작곡가 별 감상한 작품 수

 

1. 베르디: 11개

 

 

 

 

 

 

 

 

 

 

 

 

베르디는 작품 수도 많거니와 이전 벨칸토 오페라와 다르게 연극적인 요소를 강화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완성자이다. 대중성 뿐 아니라 실험 정신도 뛰어나 '시몬 보카네그라' 같은 독특한 위치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27개 오페라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에 비유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 깊이를 알고 싶어 우선은 중후기의 작품들만 주로 봤다.

 

2. 푸치니: 7개 

 

 

 

 

 

 

 

 

푸치니의 선율은 가히 최고다. 이전까지 나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작곡가는 슈베르트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적 감수성을 극대화하면서도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관현악을 동시에 감상하려면 푸치니만한 게 없는 것 같다. 

 

3. 모차르트: 5개

 

 

 

 

 

 

 

 

 

오페라 처음보기 시작할 때 모차르트의 작품은 '저속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초짜의 오만이었지. '돈 조반니'와 '코지 판 투테'는 나의 최애작품이 되었다(오히려 가장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과 '마술피리'는 지루하다). '티토의 자비'와 같은 세리아 역시 괜찮았다.

 

 

□ 작품 별 감상한 프로덕션 수

 1. 라 트라비아타: 12개

'라 트라비아타'는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다. 새로운 비올레타, 새로운 연출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2. 리골레토: 6개

이에 비해, 리골레토는 이제 좀 질려서 덜 보는 중. 그래도 '아름다운 아가씨' 4중창은 좋다. 

 

 

 

 

3. 돈 조반니, 일 트로바토레, 라 보엠, 토스카: 각 4개

 

 

 

 

 

 

 

'돈 조반니'는 곧 '라 트라비아타'를 따라잡을 것 같고, '일 트로바토레'는 한때 가장 많이 봤지만 지금은 주춤. 푸치니의 작품은 '토스카'를 더 좋아했지만, 지금은 '라 보엠'과 거의 대등해졌다.

 

 

□ 인상적인 프로덕션 5

가장 재미있게 본, 가장 놀라웠던 프로덕션을 순위 없이 5개 꼽았다. 물론 구력이 쌓이거나 다시 보게 되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돈 조반니(잘츠부르크, 2014)

돈 조반니는 내가 보았던 4개가 다 좋은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처음 보았던 이 프로덕션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도 있구나'는 걸 처음으로 느꼈고 끝까지 한시도 지루하지 않았다. 연출 자체는 평범하지만, 무엇보다 석상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다르칸젤로의 연기는 정열적이면서도 느끼하거나 밉지 않다.

 

 

 

 

피에라브라스(취리히, 2007)

나는 오페라를 보기 전 슈베르트를 매우매우 좋아했다. 그런데 처음 보았던 잘츠부르크 공연이 충격적으로 재미가 없어 좌절했는데, 두번째로 본 클라우스 구트의 이 프로덕션은 충격적일 만큼 재미있었다. 작곡가가 이 오페라를 기획한다는 설정을 보면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이 허접해도 연출이 좋으면 통한다.

 

 

 

 

라 트라비아타(잘츠부르크, 2005)

두말할 필요 없는 오페라 공연물의 레전드. 미니멀리즘 공연 중에서도 이만한 걸 보기는 당분간 힘들 것 같다. 무대 디자인도 대단하지만, 내내 무대 위를 배회하는 노인의 정체는 '유주얼 서스펙트' 급의 반전이었다. 

 

 

 

 

 

 

라 트라비아타(라 페니체, 2006)

Top 5에 '라 트라비아타'를 두 개 꼽더라도 갈등이 없다. 그러나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부먹이냐 찍먹이냐와 같이 심각한 실존적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로버트 카슨이 연출한 이 프로덕션을 보고비로소 내가 이 작품을 진짜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사회 비판적 메시지는 그 어느 프로덕션보다도 강렬하다.

 

 

 

 

루살카(뮌헨, 2010)

패륜적인데 무대감독의 똘끼가 상상을 초월한다. 원작의 동화같은 이야기와 오스트리아 등에서 발생한 두 개의 감금-성폭력 사건을 믹스했는데, 대본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는 걸 보면서 도대체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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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읽기 2022-04-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감삼평 잘봤습니다 덕분에 뭘볼까 고민하는 초보인 저에게 길잡이가 되었네요
 
[수입] [블루레이] 바그너 :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 [4Blu-ray 한글자막]
마이어 (Waltraud Meier) 감독,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 / Arthaus Musi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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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번째 반지이자 100번째 접하는 오페라 공연 영상물이다. 꼬박 5일 걸렸다. 보기 위해 한달 여 전 바그너 평전을 읽었고 풍월당의 대본집을 다시 정독했으며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를 읽는 등 사전 준비를 꽤 했는데 감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으므로 이번 감상포인트는 관현악에 두었다. 아직 귀에 익은 유도동기들이 몇 개 안되기 때문에 이번엔 좀 많이 잡아내려 했다.

 

바렌보임이 지휘한 반지는 처음인데, 관현악 파트의 긴장감이 최고다. 연출은 빛을 이용한 무대 색감과 백스크린 영상이 굉장히 고급지다. 직접적인 표현은 최대한 자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감나게 잘 표현했다(숲, 용 파프터 등). 안무가 있다는 게 독특한데, 단순히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춤추는 게 아니고 직접 사건진행에 참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검은 색 옷 입고 뭐 소품을 끌거나 미는 다른 연출들과 달리 그냥 대놓고 연출의 일부로 가져가는 것이다.

 

보탄, 브륀힐데 등 대부분의 배역이 매번 바뀌는 게 아쉬울 수는 있겠으나 뒤집으면 비교해서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도 되겠다. 의외로 하겐 역의 미하일 페트렌코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판매 중인 링 싸이클 블루레이 중 거의 유일하게 한글이 지원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일 것 같다. 번역 수준도 높고 꼼꼼하다. 링 사이클을 처음 보는 사람은 원전에 충실한 연출(메트 판)과 좋은 한글자막 (라 스칼라 판) 중 개인의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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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보수를 말하다 - 한국 보수를 향한 바깥의 시선
진중권 지음 / 동아일보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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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논객 진중권이 주간동아에 10여회 연재한 '대안으로서 보수의 재건' 주제의 칼럼 모음집이다. 한국일보에 연재한 '트루스 오디세이'와 달리 별다른 수정 없이 그대로 묶은 것 같다. 건진 건 부록으로 실린 김종인과의 대담 정도.

책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두가지이다.

1. 보수 생존 방안. 철지난 반공주의, 시장만능주의에 매몰되어 있고, 정부 수립 이후 항상 '갑'의 지위에 있어왔기에 아직도 자기들이 주류라고 착각한다는 것. 현실은 땅 속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운동권들이 김대중-노무현 때 인터넷-벤처로 진출한 동년배들과 함께 사회 주류로 자리잡았음에도. 이는 최근에 읽은 강원철 교수의 '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의 분석과 통하는 면이 있다. 영국 보수당은 300년을 유지하는데 있어 구 체제의 유지를 목표로 하지 않고, 시대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젊은 보수주의자들을 양성하고, 교육, 사회보장제도 등 진보진영의 아젠다를 선점함으로써 프랑스와 같은 대혁명을 피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국왕중심의 의원내각제,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 등). 진중권도 박정희 사회보장제도, 이명박 시내버스운영체계 등을 통해 보수도 진보아젠다를 끌여들이는 등 유연성을 발휘하라고 조언한다.

2. 싸움의 기술. 586 운동권 출신은 선전-선동의 도사이고, 프레이밍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니, 상대방의 프레임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공격할 것. 구 보수는 언제나 갑이었기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본인들의 문제가 왜 문제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이다. 오거돈-박원순 등 일련의 사건으로 민주당의 도덕적 우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 민주당의 주장을 점검하여 민주당 정책 전부가 아닌, '내로남불' 부분을 국지적으로 공격하면 지지를 얻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지금 민주당에 환멸을 느끼고, '존경받는 보수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에 관련 책들을 뒤적이고 있는데(그렇다고 지금의 국힘을 찍을 건 아니고), 이 책이 다이제스트로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만 읽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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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보수를 말하다 - 한국 보수를 향한 바깥의 시선
진중권 지음 / 동아일보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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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뜨자마자 주문함. 주간동아에서 읽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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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네트렙코가 드디어 벽을 넘었나보다. 최고의 라이벌을 만나서. 메조 소프라노 아니타 라흐벨리쉬빌리는 라 스칼라 판 '아이다'에서 암네리스 역을 맡아 아이다 역의 크리스틴 루이스를 깔아뭉개는 굉장한 포스를 보여줬는데, 여기 전의에 불타는 공작부인 역할에서는 더욱 격정적이다. 덩치가 산만한 두 여자가 뿜어내는 에너지에 치인 테너 베찰라가 쪼그라드는 느낌. '아드리나아 르쿠브뢰르'는 처음인데, 연극무대 뒷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묘사, 19세기 귀족들의 은밀한 이중생활 고발, 액자식 구성 등이 매력적이다. 메트만의 대본에 충실하되 촌스럽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디테일을 모두 잡는 연출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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