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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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위해 책을 읽은 적이 없는데,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저자가 창조한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기 마련. 『반지의 제왕』때에도 그런 것처럼, 그와 필적한다는 『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스파이스'라는 물질이다. 스파이스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자, 캐릭터들의 중요한 동기였다. 아라키스 행성을 갖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의 원천이요, 원주민인 프레멘의 삶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게 식물인지, 가루같은 형태인지 뭔지 분명치 않았다. 상상이 안되었는데, 심지어 영화에서조차 그 정체는 소개되지 않는다.  


동시에 가장 명백한 것이 스파이스이기도 하다. 아라키스 행성이 '사막'이라는 점릉 감안한다면, 이곳은 중동을 상징하는 곳일 것이다. 위에서 '욕망의 원천'이라고 했는데, 서구인들이 중동 지역에서 욕망하는 것은 두 가지일 것이다. 근대까지는 후추, 현대에 이르러서는 석유. 후추는 물론 인도에서 건너왔지만, 중간지대에 자리잡은 터키, 아라비아 반도에서 그 무역을 독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결국 마젤란 등이 대체항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석유는 말할 것도 없는 현대사회의 근간이다. 탄소중립성을 이유로  석유 사용량을 줄이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감산하자마자 세계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중동의 석유는 양차 세계대전이 확대된 원인이자 종결시킨 결정적인 이유였으며, 고립주의를 고수했던 미국이 세계 경찰을 자처하게 된 배경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지난 추석 연휴 직전에 석유의 역사를 다룬 대니얼 예긴의 역작『황금의 샘(The Prize)』를 읽었고, 추석 때부터 이 『듄』을 읽기 시작했다. 『듄』에서 하코넨 일가와 조합이 스파이스에 집착한데서 보인 모습은 미국과 중동에서 유전 개발에 뛰어든 혁신가들의 그것과 같았다. 그래서 처칠이 말했다고 하지 않은가. '패권은 모험에 대한 보상(the prize)'이라고.


책의 내용은 사실 단순하다. 원수에게 아버지를 잃고 그곳을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다른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다는 서사는 어디서 많이 보던 것들이다. '복수'라는 점에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떠올리게 하고,  현지인과 동화된다는 점에서 영화『늑대와 춤을』이나 『아바타』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사막에 꽃을 피우려는 생태학자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에도 등장한다. 아버지를 잃은 스타크 형제들의 모험과 복수를 그린『얼음과 불의 노래』의 원형이라고도 할 만하다. 거기에, SF라고는 하지만 주된 무기가 칼이라는 점에서는 『스타워즈』와 닮았다. 이렇게 놓고 보니, 그 많은 명작들에 영감을 주었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다.


덧붙여, 영화는 꽤 괜찮았다. 오니솝터 등 각종 탈 것, 목소리, 방어막 등에 대한 묘사가 뛰어났고,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반면, 원작을 안 읽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예컨대, 카인즈 박사가 갈고리를 들고 있는 장면이 그것일 것이다. 영화를 즐기고픈 사람은 책을 꼭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1권만 읽고 그만두려 했지만, 어렵사리 읽고나니 또 영화까지 보고 나니 완주하고픈 욕심이 생긴다. 영화는 1권에서 끝날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읽을 책들의 목록은 늘고나는데 고민이 깊어가는 가을 밤이다. 


*리디북스에서 대여로 읽음

**번역은 상당히 좋았다. 개인적으로, 김승욱 번역가는 『분노의 포도』 이후 두번째임 

***영화는 용산 cgv 아이파크몰에서 아이맥스 2D레이저로 보았음

처음이란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이다.

무앗딥이 속했던 곳이 바로 아라키스 행성이라는 사실에 가장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가 칼라단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는 사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행성 아라키스가 영원히 그가 속한 곳이다.

그는 ‘공포에 맞서는 기도문‘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베네 게세리트의 기도문이었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나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지나간 길을 살펴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왜 인간을 가려내기 위한 시험을 하는 거죠?" 그가 물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자유라고요?"
"옛날에 사람들은 생각하는 기능을 기계에게 넘겼다. 그러면 자기들이 자유로워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기계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유전적인 특징들이 정체될가 봐 두려워하지. 사람들의 핏속에는 계획 없이 무작정 유전적 특징들을 뒤섞으려는 충동이 있어..."

"이것을 명심해라.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네 가지다..." 그녀는 관절이 커다랗게 불거진 손가락 네 개를 들어 올렸다. "...현자의 지식, 위대한 자의 정의, 올바른 자의 기도, 용감한 자의 용맹.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다스리는 법을 아는 통치자가 없다면 말이다. 이것을 너희 가문의 체계적인 지식으로 만들어라!"

"귀머거리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일종의 귀머거리가 아닌가? 우리 주위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감각이 부족한 까닭인가? 주위에 있는 것을 우리는..."

"나를 파멸시키는 데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나?"

"칼라단에서 우리는 해군과 공군을 이용해서 지배했다. 이곳에서는 사막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군사력을 긁어모아야해. 그게 네가 받을 유산이다, 폴,.."

"...인간은 각자 자신의 자리가 있을 때, 자기가 이 세상의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어떤 사람이 속한 자리를 파괴하는 건 곧 그 사람을 파괴하는 거예요..."

"난 절대 반역자를 믿지 않아. 나 때문에 반역자가 된 인간이라 해도 말이야."

"...당신은 당신의 충성심이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했지만, 난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카드를 갖고 있소. 당신이 내게 충성하는 대가로 나 역시 당신에게 나의 신의를 주겠소... 완전한 신의를."

베네 게세리트의 격언 중에 ‘눈에 모든 것을 의존하면 다른 감각이 약해진다‘는 말이 있었다. 폴은 이 격언을 되새기며 다시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인간과 인간의 활동은 인간이 살고 있는 행성 표면에서 질병과도 같은 존재였다. 자연은 질병들을 보정해서 제거하거나 분리시키고, 자신의 방식대로 그것들을 시스템 속에 통합시키는 경향이 있지."

스틸가가 말했다. "네가 선택한 이름이 마음에 든다. 무앗딥은 사막에서 현명하게 살아가야 하는 동물이야. 무앗딥은 스스로 물을 만들어내지. 무앗딥은 태양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서늘한 밤에 움직인다. 무앗딥은 다산이어서 온 땅 위에서 번성하지. 무앗딥을 우리는 ‘아이들의 교사‘라고 부른다. 우리들 사이에서 우슬이라고 불리는 폴 무앗딥이여, 그건 네 인생의 강력한 기초가 되어줄 것이다. 너를 환영한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죄책감은 실패했다는 감정에서 시작되는 법이지."

"가능한 한 명령을 적게 내려야 한다." 그의 아버지가...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다. "일단 명령을 내리기 시작하면 항상 명령을 내려야 해."

"어떤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거야."

성난 사람이 분노 때문에 내적인 자아가 들려주는 말을 부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당신이 어떤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건 아니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이오.

제시카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봐라, 챠니. 저 공주는 아내라는 이름을 갖겠지만 첩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거야. 결혼으로 자신과 묶여 있는 남자에게서 단 한순간도 부드러움을 맛보지 못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말이다, 챠니, 첩의 이름을 달고 있는 우리는 역사가들에 의해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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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변지영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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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네요. 아직 정재승 추천사, 1/2강, 1강만 읽었을 뿐인데 쉬우면서도 밀도가 높습니다. 다 읽고 리뷰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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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2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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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장편 중 양대 걸작과, 단막극, 단편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쾌활함과 넘치는 자신감, 떠벌이는 여전하지만, 고독과 고뇌가 그만큼 깊어졌다. 세상을 지배하는 왕을 자처하지만 운명 앞에서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결정판 1권과 달리, 뤼팽의 대변지 가 '에코 드 프랑스'에서 '그랑 주르날'로 바뀐 점도 눈길을 끈다.


『속이 빈 바늘(기암성)』


'기암성'은 아마 어린이 추리소설 목록에 빠짐없이 포함되는, 뤼팽 시리즈 중 최고의 걸작일 것이다. 어릴 적 TV 인형극으로도 나왔었고(노래 가사까지 기억한다. '루~하 루루 루루하 루팡! 루루루루팡 우하~'), 금성출판사 전집의 책으로도 읽었더랬다. 레몽드와 뤼팽이 결혼하고, 이지도르 보틀레, 가니마르, 셜록 홈즈가 탐정으로 등장했고, 레몽드가 홈즈의 총에 맞아 죽는 정도만 생각난다. 그러하기에 거의 30년 만에 읽는 이 완역본은 처음인 것이나 다름없었고, 실제 처음과 끝을 제외한 중간 부분은 블랙박스였기에 숨죽여 가며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는 패턴에 익숙해져서 누가 뤼팽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지만(작가도 독자들이 이정도는 알아볼 거라는 건 예상했을 거다) 부수적인 것이고, 노르망디 지역에 로마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대한 이야기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 굉장한 흡입력 있었다.


이 작품은 아르센 뤼팽의 흔적을 추적하는 이지도르 보트를레 소년탐정의 모험담이다. 그 이야기자체도 대단하지만, 작가는 이지도르의 입을 통해 자신의 '추리 기법'에 대한 철학을 말하고 싶은 듯했다. 이지도르는 기존의 증거물들을 모아 퍼즐처럼 맞춰가는 수사기법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만약 그 증거물들이 뤼팽이 고의로 뿌려놓은 가짜라면 수사는 미궁에 빠지 셈이라고 본다(이는 셜록 홈즈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며, 역자 해제에서 비슷한 설명이 있다). 그보다는, 눈 앞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먼저 상상한 후 그 범위 내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지도르도 에귀유 크뢰즈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 후 심기일전하여 만회하긴 했지만.


두번째 뤼팽을 읽어나가면서 느낀 또다른 매력은, (주로)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찾아, 팩트와 픽션의 경계선상에서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역사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방식이다. 이번에는 '철가면'이라는,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왕정기의 정치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 카이사르, 샤를마뉴, 정복왕 기욤 등 많은 영웅들을 엮어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런 식으로 소재를 개발하는 건 작가의 최대 장기이고, 프랑스인들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거기에 민족주의가 한창이던 제3공화국 시기, '옛 보물들을 발견해서 조국 프랑스에 기부하는 천재 도둑의 영웅적인 모험담'은 슈퍼챗을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불만은 번역의 제목이다. 본문에도 등장하는 '기암성'이라는 말의 프랑스어는 알 수 없으나, 전체를 읽고 나니 국역본 제목은 원제대로 '에귀유 크뢰즈' 또는 '속이 빈 바늘'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에귀유 크뢰즈'라는 용어 자체가 이중 트릭인데, '기암성'이라는 단어는 그러한 트릭을 암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암성'이 아니라 '에귀유 크뢰즈'로 부르기 운동을 나 혼자서라도 전개해야겠다. '강백호'를 '사쿠라기'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숙제이겠지만, '폭풍의 언덕'이 아닌 '워더링 하이츠' 제목의 번역서가 최근 출간된 사례를 보면 불가능은 아닐 거라 본다(일단 이 글에 해시태그부터 달겠다).


여담으로, 강원도 동해시의 한 해변에는 '추암' 또는 '촛대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원뿔형의 '에귀유 크뢰즈'와는 달리 이 바위는 진짜로 위로 일자로 솟아 있다. '추암'은 '송곳바위'라는 뜻이니 '에귀유'이긴 한데, '크뢰즈'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생성원리는 같을까? 추암에 대한 자료가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813』


2014년 '까치'판으로 한 번 읽고 이번이 두번째인데, 그때에는 대충 읽고 되팔아서, 뜻밖의 인물이 뤼팽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속이 빈 바늘』과 마찬가지로 처음 읽는 것과 같은 셈.


지금 보니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작품이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매 순간 위기를 헤쳐나가는 스킬, 인간(그리고 독자들) 심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솜씨가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동시의 인간 뤼팽의 한계도 드러나는데, 모든 상황을 완벽히 통제하는 듯한 그였으나 『속이 빈 바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좌절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사람들의 인생마저 조작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되는 걸 보면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떠올랐는데, 막판에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또, 이전 편에서는 뤼팽의 행적을 다른 탐정들이 추적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편은 반대로 '보이지 않는 살인범'을 뤼팽이 한편은 두려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하면서 추적하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다시 말해 '도둑'이 아닌 '탐정' 역할이 크게 부각된 첫 작품 같은데, 실제로 그는 초반을 제외하고는 물건을 거의 훔치지 않았다.


아마도, 작품의 '국뽕'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전의 역사를 소재로 삼았던 이전 편과 달리, 동시대의 국제정세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눈길이 가는데, 프-독-영 간 모로코 식민지분쟁이 그를 매개로 해결되고, '알사스-로렌 지역' 영토분쟁에 대한 작가(그리고 프랑스)의 입장이 그의 입을 통해 대변되었으니, 주인공이 도둑질만 하고 다녔다면 좀 그렇지 않았겠나(공무원 사칭도 중범죄이긴 하다). 이 작품은 프랑스 판 '독도는 우리땅'인 셈이다.


한편으로, 작품을 통해 19세기 말에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반성, 사형제 폐지 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보이지 않게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선배 문인 빅또르 위고가 『사형수 최후의 날』, 『레 미제라블』 등 작품을 통해 사형제 폐지를 강하게 주장한 바 있는데, 18세기도 아니고, 1차 대전을 앞둔 시점에 기요틴으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게 충격적이기도 했다.


에피소드마다 바뀌는 뤼팽의 로맨스는 여기서 이르러 막장을 타는데, 피살자의 부인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것이다(외국에서는 흔한 일이면 말고... 007이 여기에 영향을 받았나?). 그러다가 마침내 사랑하는 여자마다 죽는다는 말을 되뇌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다(이것도 '섹스한 여자는 모두 죽는다'는 제임스 본드 법칙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불행히도 운명이 나보다 더 강하더구나."


마지막으로, 오역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게, 『속이 빈 바늘』에서 '縣'으로 번역했던 행정구역이 여기에서는 '道'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앵드르 현, 크뢰즈 현, 몽토네르 도). 각기 다른 사람이 번역한 전집이라면 모를까, 한 사람이 번역한 '전집'의 바로 앞뒤 작품이 다른 것은 아쉽다.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

별다른 반전은 없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가벼운 꽁트이다.



「암염소 가죽옷을 입은 사나이」


역자 해제 전에 작품 먼저 읽었어야 했다.


*리디셀렉트로 읽음

**이번 권을 읽으면서 전권 종이책 소장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다만, 다른 리뷰에서 지적된 오역이 전자책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 보류.

"...나는 우선 사건의 일반적인 개념부터 찾아내려고 한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일반적인 개념에 부합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가설을 하나 상상하지요. 그래서 적당한 가설이 떠오른 다음에야, 주어진 자료와 사실들이 그 가설에 들어 맞는지 검토한답니다. 『속이 빈 바늘』

"그렇다면 나는 안심이고.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줬던 단 한 사람이 오늘 나의 이 모습을 못 알아본다면, 이제부터 지금의 이 모습을 보게 될 그 누구도 진짜 나의 모습을 못 알아볼 테니까 말이야." 『속이 빈 바늘』

"1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난 거나 같아. 아르센 뤼팽은 남들 1년 살 때, 10년은 사니까." 『속이 빈 바늘』

"나는 오로지 진실의 입장에서만 입을 열 것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치는 기쁨을, 아니 그 어쩔 수 없는 욕망을 말입니다. 진실은 언제까지나 그것을 더듬거리며 발굴해낸 자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움트는 법, 그것은 언젠가 수줍음을 떨친 채 파릇한 몸짓으로 뛰쳐나올 것입니다!..." 『속이 빈 바늘』

"...아무리 대중의 짓궂은 호기심이라 해도, 파렴치한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의 벽을 함부로 유린하는 게 다반사라면 우리 시민의 안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고도 진실을 좀 더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둥 운운하시겠습니까?..." 『속이 빈 바늘』

"... 이 아르센 뤼팽이 조국 프랑스에 얼마나 많은 걸작 진품을 기부해왔는지 깨닫게 될 것이네. 하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자행한 짓과 하나 다를 것도 없지..." 『속이 빈 바늘』

"...왼쪽에 있는 건 런던 직통 전화지. 런건을 통해서는 미국과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거머쥘 수가 있지! 그 모든 지역의 숱한 회계원들이나 중개인들, 정보원들, 선전꾼들이 다 내 휘하에서 움직인단 말일세. 그야말로 국제적인 그물망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세계 시장인 셈이지..." 『속이 빈 바늘』

"...에귀유 크뢰즈는 그 자체가 곧 ‘모험‘을 의미하네. 그것을 차지하고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모험 속에서 살아야 해. 하나 그것이 내 수중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과거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네. 그리고 미래가 시작되는 거지. 내가 레몽드의 시선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평화와 행복의 미래 말일세..." 『속이 빈 바늘』

"문제는 그 모든 게 말뿐이라는 거요! 대중은 행동을 원합니다, 행동을! 단 하나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건 범인을 붙잡아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813』

"...실은, 너무 흥미롭고 또 내 격에도 맞는 사건인 것 같아, 지난 4년 동안 책과 내 충견 ‘셜록‘ 사이에서 아늑하게 지내던 보금자리를 모처럼 털고 나서기로 했답니다." 『813』

"...나는 제일 큰 부자보다 더 부자라네. 왜냐면 그 부자의 재산이 모두 내 것이니까. 마찬가지로 이 세상 어느 권력자보다도 나의 권력이 더 강하지. 그 권력자가 나를 위해 일을 하니까 말일세." 『813』

"...내가 자네보다 한 수 위일 수밖에 없는 비결을 제발 명심 좀 하게나. 난공불락의 육체에 불굴의 영혼 말이네!" 『813』

"실제로 범죄자 인체측정과에서 찾아낸 아르센 뤼팽의 색인표에는 지금의 당신 인상과 전혀 닮은 데가 없는 기록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오."
"이거 점점 더 오리무중인걸."
"설명도 그렇고, 제반 치수도 그렇고, 지문 역시 완전히 달라. 결정적인 건, 사진상으로 전혀 닮지가 않았다는 거요! 따라서 이제는 우리 앞에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밝힐 것을 요청하오." 『813』

이 모든 것은 언젠가는 나의 상임 전기 작가께서 나 자신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작성하여 출간하게 될 매우 독특한 이야기에서 낱낱이 다루어질 것임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손 대대로 매우 흥미롭게 읽을 프랑스 역사의 멋진 한 페이지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813』

"자, 잘 봐라! 지금 난 경찰에 몸담고 있다. 할 수 없지 않은가. 원래 우리 같은 범죄 전문가나 대도(大盜)는 다 경찰 쪽으로 돌아서게 되어 있는 법이지." 『813』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것도 아니잖소? 대중의 증오에 내던져진 건 어디까지나 말레이히라는 이름이오. 정확히 범인의 이름 말이오. 그럼 됐지, 뭘 더 바랍니까?" 『813』

"...불행히도 운명이 나보다 더 강하더구나..." 『813』

"전 프랑스인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긴 황제의 심기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한 대답이었다.
"당신을 구속하던 끈이 모두 제거된 상태라더니..."
"그것만큼은 제거될 수가 없는 끈입니다, 폐하." 『813』

바다가 날 원치 않았든 마지막 순간에 내가 바다를 원치 않았든, 하는 수 없이 이제는 모로코 놈들의 총알이 그보다 더 관대한지 알아보는 수밖에! 더구나 그게 더 멋지지 않겠어? 프랑스를 위해 적을 무찌르는 뤼팽 말이야!" 『813』

요즘 시대처럼 예술만으로 벌어먹기 힘든 세상에선, 그때그때 칭길 줄도 알아야 한다!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

상황은 서로 현저히 다르지만,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같은 유형의 범죄사건이 우연히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네. 하지만 자네뿐만 아니라 다른 보통 사람들이 그걸 꺠우치려면 누군가 나서서 눈을 뜨게 해주어야 했지. 이를테면 내가 쓴 편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거야..." 「암염소 가죽옷을 입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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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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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뤼팽은 어릴 적『기암성』과 『수정마개』 , 그리고 (이 결정판을 통해 안 것이지만) 홈스가 처음 등장한 단편 하나를 읽은 게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세계 최초의 뤼팽 집대성인 만큼, 결정판 1권은 거의 역자가 센터에 섰는데, 본인이 쓴 서문을 비롯하여 각종 해설이 초반을 빼곡히 차지한다. 당연히 그에게는 자격이 있으리라.


첫 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르센 뤼팽의 출발일 뿐 아니라, 작가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기법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는 역자의 설명도 있고(과연 그렇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작품에서는 자신을 뤼팽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서술자로 소개하기도 한다. 모리스 르블랑 자신이 뤼팽의 행적을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프리퀄 격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도 소개된다. 셜록 홈스에 대한 경의가 곳곳에 배어 있으며 그의 첫 등장도 여기서부터이다. 무엇보다 대도가 체포되고 탈출하는 방식으로 전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단숨에 대중의 시선을 잡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두번째 권,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은 홈스와의 대결을 담은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대도와 명탐정 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전개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누구도 우위에 두지 않는 결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뤼팽의 난봉질도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만, 왓슨이 얼빵하게 행동하는데다, 심지어 그를 忠犬에 비유하는 점이 아쉽고(르블랑이 자신을 뤼팽의 왓슨 역할로 자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홈스가 왓슨을 무시하거나 여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등 행동이 원래의 캐릭터를 충실히 살린 것인지 의심스럽다. 홈스가 아니라 에를로크 숄메스라는 핑계를 댈 수는 있겠지만.


셋째 권, 「아르센 뤼팽, 4막극」은 본 결정판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희곡이라고 한다. 희곡은 거의 읽지는 않는데 이 형식의 추리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이후로는 처음이라, 대도의 행각을 관객 앞에서 시각적으로 어떻게 그려낼지는 분명 흥미를 자아내는 점이다. 그 외에도 이 희곡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처음 소개되는 루팽의 주변 인물들이 몇 명 있기 때문이다. 


책의 출간연도가 1900년대 초반인 점을 고려하여, 그 시대의 기술, 문화, 유럽의 역학관계 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게 좋았다. 일례로, 초반부터 뤼팽이 '수퍼카'를 끌고 다니고, '택시'도 등장하는 반면, 말과 마차도 함께 거리를 다닌다. '가스등'이 있는가 하면 '전등'도 보급되어 있다. '전화'와 '전보'가 공존한다. 잠수함 관련 국뽕 에피소드도 소개된 점은 1차대전의 전조를 느끼게 한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점은, 의외로 번역이라 하겠다. 세계 최고의 뤼팽 덕후의 성과물인 만큼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높고 오역도 거의 없을 거라 생각된다. 향후 몇십년간 우리나라에서 이 권위를 능가하는 번역본이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 포털을 검색해 봐도 번역에 대한 불만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 개인에 한한 문제이길 바라지만) 아쉽게도 나는 역자의 번역이 쉬이 읽힌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페라의 유령』과 조르주 심농의 작품 하나가 그랬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이라는 제목이 그의 번역에 대한 나의 불편한 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가 한데, 「뤼팽 대 홈스」(이게 원제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또는 「뤼팽과 홈스의 대결」이 맞지 않나? 이런 번역들이 암암리에 있다면 몰입에 방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를로크 숄메스'를 '홈스'로 표기한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역자는 '영미권에서도 '뤼팽 대 홈스'라고 번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했으나, 내가 알라딘에서 'Lupin'을 검색한 결과 '홈스'로 한 표기는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식 역어들을 그대로 계승한 점이 안타깝다. 'Gentleman-thier'라면 '괴도신사'가 아니라 '신사도둑'이라고 해야하지 않겠나. 그의 본질이 '도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둘의 뉘앙스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식 역어나 기존의 오역 제목들이 역자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세계최초 결정판'임을 자부했다면 좀 더 신경써줬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 문학 번역계가 함꼐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어쨌거나, 어린시절 추억을 곱씹을 수 있어 보는 내내 즐거웠다. 읽어볼 마음이 생기도록 이렇게 멋진 전집을 출간한 역자와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한다. 일단은 좋아했던 「수정마개」까지는 보고 열 권을 모두 읽을지 결정할 생각이다.


*리디셀렉트로 읽음

무엇보다 아르센 뤼팽을, 그 태양처럼 빛나는 열정과 자신감뿐 아니라 고독과 실존의 그림자까지도 사랑하여, 그가 펼쳐 보인 파란만장한 모험들 하나하나에 흔쾌히 동참해온 친구들, 그리고 동참할 준비가 된 모든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전집을 펴낸 것 같아, 한없이 기쁘다.

이 얼마나 기괴한 여행이란 말인가! 그래도 시작은 꽤 좋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보다 더 신나는 기분으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도대체 왜 한정된 모습만을 가져야 하는 거지? 늘 똑같은 성격을 굳이 왜 고집해야 하느냔 말일세. 어차피 내가 저지른 행위들만으로도 충분히 나라는 사람이 떠오를 텐데 말이야." (중략) "‘이자가 아르센 뤼팽이오!‘하고 분명히 얘기할 수 없으면 더 좋지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건 아르센 뤼팽이 저지른 일이다!‘라고 확실히 명심하는 것이니까."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 저들은 내 윗도리 안감까지 뜯어보고 신발 밑창까지 훑어내는가 하면 이 보잘것없는 벽면도 여차하면 두드려대면서도, 누구 하나 이 아르센 뤼팽이 훨씬 손쉬운 은닉처를 고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더라고요! 바로 그런 맹점 때문에 내가 편해요."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

"... 마치 내 맘대로 섞은 카드 패처럼, 나한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이미 하나 조성되어 있었다오. 다름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언제 나의 탈출이 현실로 드러날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당신을 포함해서 숱한 사람이 빠져버린 그 엄청난 미몽(迷夢)에다 결국 나는 나의 자유를 판돈으로 내건 거나 다름없었소. (후략)"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

"...보드뤼든 다른 누구든 되어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오. 개성을 마치 셔츠를 갈아입듯 바꾸고, 외모와 목소리, 눈빛, 필체 따위를 맘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 말이오! 하지만 문득 그 모든 모습 가운데서 진짜 자기 자신을 못 알아볼 때가 있어요. 그땐 몹시 서글퍼진다오. 지금도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후략)"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

"...도둑질이란 얼마나 쉬운가 말이야! 왜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손쉽고도 안정된 직업을 마다하는지 모르겠어. 약간의 기술과 머리만 있으면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도 없을 텐데 말이야. 이처럼 편하고 이처럼 견실한 직업이 또 어디 있겠어? (후략)" 「흑진주」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당신이 알아낸 것은 무시하세요. 현재를 떠나 부디 과거를 돌아보세요. 저는 간밤에 당신이 본 사람이 아니라, 그 옛날 당신의 시선이 머물렀던 존재입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옛날에 당신이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그렇게도 변했나요?" 「셜록 홈스, 한발 늦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그자를 신뢰하는 겁니까?"
홈스가 감탄한 듯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조건 신뢰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지요? 그가 원하는 일은 모든 게 성취되고, 당신은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겠죠?"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뤼팽 대 홈스: 금발의 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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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진도율을 나타내는 무슨 지수가 있는데, 찾기 어려워 패스)


철학자 강유원은 한 강의에서 "고전을 왜 사느냐"라고 자문하면서 "인테리어"라고 답했다. 애서가를 자처하며 책을 사는 많은 이들이 겪는 일일텐데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알라딘중고, 네이버 중고나라 서비스로 정리했지만, 아직도 많은 책들이 내 책장에 '인테리어' 또는 '적폐'로 남아 재판매되거나 주인이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은 자학 또는 질책하기 위해 쓴다. 읽지 않고 쌓아만 두면서 틈만 나면 다른 책을 사려는 나를 꾸짖는 포스팅이다. 아래 소개된 책들은 구입한 지 최소 1년은 경과된 것들이다.




우리 모두는 천병희 선생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아이네이스』는 대학도서관에서 대출하여 강대진 해설서와 함께 재미있게 읽었는데 사놓고 안 읽었다. 다른 책들은 거의 읽어보지 않았다. 플라톤 책들은 알라딘중고를 통해 꽤 구입했지만 모두 팔고 두 권만 남았다.




베르길리우스를 마음으로 섬기는 단테는 자신이 호메로스 등 대선배들과 동급임을 『신곡』을 통해 은연중에 과시한다. 『신곡』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김운찬 교수의 두번째 개정판(3권 분권)을 두번 읽었으나, 단권에 대한 로망 때문에 팔고 구판을 샀고, 이어 박상진본, 한형곤본을 알라딘중고를 통해 구입했으나 한형곤본은 팔았다. A.N. 윌슨의 단테 평전인『사랑에 빠진 단테』는 2015년 서울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재미있게 읽었고, 이후 절판된 것을 알라딘중고에서 좋은 가격에 샀다. 이렇게 정리한 책들 전부를 거의 펼쳐보지도 않았다.




 

단테와 『왕좌의 게임』때문에 한창 중세에 빠져서 관련 책들을 알라딘중고를 검색하고 사모았는데, 다 팔고 세 편만 남았다. 신촌의 어느 중고서점에서 구입한『비잔티움 연대기』전 3권(구판)과, 2015년 서울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고 절판 직전 교보문고 등을 통해 구입한 수잔 바우어의 『중세 이야기』2권, 알라딘중고에서 구입한『중세, 하늘을 디자인하다』가 그들. 모두 중고시장에 내놓긴 했지만, 안 팔리더라도 언젠가는 읽을거라는 생각은 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야심차게 사긴 했지만 주제를 알고 사실상 포기한 상태, 20대 중반 충격을 주었던 박노자의 책들 2권을 알라딘중고 종로점에서 샀지만, 미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예측이 빗나간데다 최근 행보를 보면 이상하기 그지 없어, 되팔곳도 없으니 책장이 차면 그냥 버릴 듯하다. 한영우의『율곡 이이 평전』은 내놓긴 했지만 조선왕조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기면 최고 경세가의 생애를 언젠가는 읽을거란 생각은 하고 있다.




한때 열광했고, 지금도 전집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 시바 료타로의 책들. 창해의 전권을 새책으로 구입했었으나 팔아버렸던 아픈 과거가 있다.『료마가 간다』는 대학도서관과 서울도서관을 통해 두 번, 『신센구미 혈풍록』은 대출로만 한 번 읽었고, 『미야모토 무사시』는 아직껏 못 읽고 있다. 『타올라라 검』만 최근 다시 정독했다.




예술 관련 책은 4권 남아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대학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고 절판된 책을 좋은 가격에 가까스로 구했지만 방치 중.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첫 슈베르트 평전인 『프란츠 슈베르트』도 사놓기만 했다. 두 작곡가 모두 최근 두꺼운 평전들이 발간되었으나 이거부터 읽으려고 구입을 미룬 상태다. 『연출가를 위한 핸드북』은 오페라를 이해하기 위해 주문했지만 한 번도 읽지 않아 괜히 샀다는 생각 뿐이다.




『논어』와 『홍루몽』은 중국 문화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나에게는 히말라야 같은 산이라 문제. 에밀 졸라의 『루공 마까르』 전권이 출간되도록 문학동네 세계문학을 응원하지만, 정작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두 권, 오페라 때문에 야심차게 주문한 이탈리아 회화책은 영원히 하지 않을 숙제. 언제 샀는지도 모를 『소피의 세계』와 해문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4편은 책장이 여러번 바뀌는 동안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너무도 사랑하여 한때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권 읽기를 꿈꿨지만 이윤기, 안정효 등 노번역가들의 역서는 읽기 힘들다. 이 네 권은 내놓긴 했어도 가능하면 읽어볼 생각이다.


리디북스에서 결제하고 방치한 책들은 중고로 되팔 수도 없어 문제가 더 심각한데, 금액으로는 거의 100만원에 이른다. 다음에 기회되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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