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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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모든 대립은 둘이 아니다 ― 무경계(No Boundary)의 핵심

 

의식의 스펙트럼에 이어 윌버는 근본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모든 대립은 사실 선불교 식으로 풀이 하면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

선과 , 삶과 죽음, 나와 너, 심지어 신과 인간까지 우리가 서로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것들은 실은 하나의 동전의 양면에 가깝다고 그는 말한다.

대극(對極)은 대립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만든다

우리는 (善)을 추구하면서 악(惡)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이 없다면 악이 무엇인지 없고, 악이 없다면 선 역시 정의될 수 없다.

둘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드러내는 관계다.


파도가 없다면 바다는 개념이 되지 않고, 바다가 없다면 파도 역시 존재할 수 없듯 대극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윌버는 이것을 ‘대극의 동일성’이라 부른다.

말은 철학적이지만, 실은 아주 일상적인 감각에 가깝다.

삶과 죽음은 정말 반대일까?

가장 극단적인 예는 삶과 죽음이다.

우리는 삶은 긍정하고 죽음은 부정한다.

하지만 윌버는 묻는다.

죽음 없는 삶이 과연 삶일까?

 

우리 몸의 세포는 순간 죽고 다시 태어난다. 생각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감정도 잠시 머물다 흘러간다. 심지어 ‘나’라는 정체성조차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죽고 다시 만들어진다.

이렇게 보면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의 다른 국면일 뿐이다.

윌버는 이를 심리학과 철학의 언어로 설명했고, 불교는 체험의 언어로 말했을 뿐, 가리키는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년 후의 나는 이 대목을 다시 읽으며 신심명과 연관지어 떠올려 본다.

견유몰유 (遣有沒有) 있음에 집착하면 있음에 빠지고

중공배공 (從空背空) 공함에 집착하면 공함을 등진다.

 

있음과 공함은 서로 싸우는 대상이 아니다. 둘 다 집착의 대상이 될 뿐이다.

윌버가 말한 ‘무경계’ 역시 이 지점을 향하고 있다.

지난 편에서 사용한 빨대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 본다.

빨대의 끝은 서로 반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은 하나의 공기 흐름을 위한 입구와 출구일 뿐이다.

 

우리가 “이쪽 끝이 옳다”,,“저쪽 끝이 틀렸다”고 다투는 동안 정작 그 흐름 전체는 보지 못한다.

<무경계> 란 양 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 전체를 보는 시선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피할 없는 질문이 하나 생긴다.

이렇게 완성도 높은 통합 이론에도 한계는 없을까?

 

23살의 켄 윌버가 그린 지도와  50살이 넘은 내가 실제로 걸어본 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음 편에서는 이론이 아닌 거리의 문제, 지도와 발바닥 사이의 간극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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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1일차

<不用求眞/불용구진/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唯須息見/유수식견/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마음을 쉰다는 것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들로부터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머리 , 혹은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생각들.

그런 생각의 찌거기들은 항상 속에 존재하다가 내가 제어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나도 모르게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잡념은 그대로 생각의 찌거기들 이다.

결코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생각과 마음 속에서는 곧 실재할 것 같은 불안감을 동반하게 된다.

이때 부터 찌거기들은 불안한 마음을 양분 삼아 점차 형상을 갖추어 지기 시작한다.

이제 망념은 망견으로 변했다.

공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느새 의식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는 헛된 망상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 즉 뒤바뀐 꿈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전도몽상에서 바르게 깨어 있을까?

 

전공전변(前空轉變)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개유망견(皆由妄見) 모두 망견 때문이니

불용구진(不用求眞)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유수식견(唯須息見)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승찬스님은 참됨도 구하지 말라고 했다.

진리를 추구 한다면서 공함을 쫓고, 진리가 아님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을 쉬어야 한다.

유위법이 작위적인 생각이라면, 그 작위적이며 인위적인 모든 생각과 행동을 쉬어야 한다.

쉼이 바로 유위법에서 무위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된다.

쉼이란 놓는 것이다.

선가(禪家) 에서는 이를 가르켜 *방하착(放下着) 이라고 했다.

 

엄양이란 스님이 *조주(趙州:778~897)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하착!

이미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 놓습니까?

그럼 그냥 짊어지고 가거라.

이에 엄양은 깨달았다.

 

깨달음이란 것도 어쩌면 망견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오직 내려 놓을 뿐이다. 방하착!


: 不用: 아닐 , 쓸 용:  ~ 쓰지 마라

求眞: 구할 . 참 진 : 참됨을 구하다.

唯須: 오직 , 모름지기 수 : 모름지기 오직

息見:  , 볼 견:  보는 것을 쉰다. 즉 헛되게 보는 (망견) 것을 쉰다.

*전도몽상(顚倒夢想) : <반야 심경> 의 구절 중에서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뒤바뀐 헛된 꿈에서 멀리 떠나야 구경열반에 이른다는 뜻임.

*방하착(放下着):  마음 속의 집착,원망,갈등 같은 번뇌를 내려 놓으라는 뜻.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마음을 내려 놓고 쉬라는 말이다.

*조주(趙州:778~897): 육조 혜능이후 남종선을 이은 당나라 중기 대표 선사. 앞의 잣나무, 차나 마시게 같은 선문답 일화로 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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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9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장 초년생 시절 대형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방하착이란 말에 이끌려 선문답에 관한 여러 책들을 읽어오던 게 인연이었는지 불심 가득한 아내를 만났고 이후 나 또한 천주교에서 불교로 갈아타서 정진 중입니다. 요즘 마힐님의 리뷰가 기다려지기도 해요. 감사합니다.

마힐 2026-01-19 01:37   좋아요 1 | URL
저도 감사합니다.
호시우행님의 인연이라는 말이 제게는 더 와닿습니다.
인연...
이렇게 더불어 정진하는 것도 인연입니다.
함께 쉬어가듯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
 
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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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의식의 지도-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


어제 1일차에서 던진 질문을 이어가 보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켄 윌버는 의외로 단순한 대답을 내놓는다.

인간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존재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어디에 경계를 긋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이다.

피부 안은 ‘나’, 피부 밖은 ‘나 아님’ 이라고 보았다.

가장 기본적인 경계는 피부다. 피부 안쪽은 ‘나’, 바깥쪽은 ‘나 아닌 것’.

윌버의 견해 대로 사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왔다.

, 내 발, 내 몸은 ‘나’ , 남의 손, 나무, 돌, 하늘은 ‘나 아님’ 같은  이 구분은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 아픈 아이를 돌볼 때, 혹은 누군가의 고통에 깊이 공명할 때 ‘나’와 ‘너’의 경계는 분명히 옅어진다.

경계는 고정된 선이 아니라 상황과 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가변선(可變) 가깝다.

윌버는 경계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층위로 존재한다고 본다.

그는 이를 가르켜 의식의 스펙트럼이라고 규정했고, 그 경계를 넘어가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먼저 가장 위에 있는 스펙트럼은 페르소나 수준이다.

사회적 역할과 가면에 따라  “나는 회사원이다”, “나는 아버지다” 라고 규정된다.

다음 아래로 내려가면 자아 수준 이다.

심리적 동일시 “이 감정은 나다”, “저 생각은 내가 아니다” 라고 보았다.

다시 내려가면 켄타우로스 (신심통합 身心統合) 수준이다.

몸과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짐에 따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지는 상태다.

다시 다음은 초개인적 수준이다. 이때 나와 타인, 나와 세계의 경계 확장되며 깨달은 상태에 가깝다.

 

2년 전의 나는 이 과정을 일종의 ‘의식의 상승’이라 보고 계단을 오르듯 위로 올라가는 구조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이건 위로 오르는 사다리라기보다 빨대 안의 굴곡에 가깝다.

굴곡을 지날 때마다 “여기가 전부다”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모든 굴곡은 하나의 통로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신심명이 말하는 ‘일종(一種)’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이 모든 굴곡을 포함한 빨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신심명에서 반복해서 경계하는 것이 있다.

바로 취사심(取捨心)과 간택심(揀擇心) 이다.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린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우리가 경계를 긋는 바로 마음이다.

그래서 신심명은 이렇게 말한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소이불여(所以不如) , 취하고 버리는 마음 때문에 여여하지 못하다

 

윌버가 “경계를 넘어가라”고 말한다면,

신심명은 이렇게 말하다.

“경계를 넘기 전에, 경계를 긋고 있는 그 마음부터 보라.”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이어진다.

모든 경계들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선과 , 삶과 죽음, 나와 남… 이렇게 분명해 보이는 이분법들이 사실은 하나의 연속체라면?

 

다음 여정은 윌버의 핵심 개념인 <‘무경계(No Boundary)’> 를 통해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들여다 볼 것이다.

경계가 사라질 의식은 어디로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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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0일차

<前轉變空/전공전변/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皆由妄見/개유망견/모두 망견 때문이니>

 

공함 이라 '고정됨이 없음'이다.

절대로 비어 있다고 고정되게 생각하면 된다.

유위법에서 () 무위법의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와도 같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고정 시켜 놓으면, 무수히 많은 변화의 공의 변화를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공은 변화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고정해 점찍을 없기 때문에 공이라 했다.

가정에서 나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아들이며, 직장에서 나는 부장이자 직원이 되고, 식당에선 손님이고, 차량을 타면 승객이 되고, 친구를 만나면 내 이름이 불린다. 어느 때의 내가 진짜 나인가?

나라는 실체는 하나 이지만 모습의 나는 없이 조건에 따라 변한다.

공은 바로 조건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고정됨이 없음 되었다.

그래서 일찍이 큰 스님들께서는 어느 하나로 나를 고정 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 이라 하셨다.

공은 본래 변화를 머금고 있다.

무위법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만하다.

 

수유반조(須庾返照)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승각전공(勝却前空)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전공전변(前空轉變)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개유망견(皆由妄見) 모두 망견 때문이니

 

결국 공함이란 변화 하는 것이 때문에 고정되게 바라 보면 바로 헛된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니 헛된 것이 보여지는 것이다.

실체를 가린 망견이 눈앞에 나타나 보인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반조(返照) 하지 않고 공함을 바라보는 것을 망견이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반조는 끊임없이 돌이켜 봄이다.

나에게 비줘지는 모든 것들을 잠시 돌려 놓고 지켜 뿐이다.

 

 

: 前空:  , 빌 공:  앞의 공은

轉變: 구를 , 변할 변 :  굴러 변한다

皆由: 모두 , 말미암을 유 : 모두~ 말미암아

妄見망령할 , 볼 견:  망령되게 본다, 즉 헛되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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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9일차

<須庾返照/수유반조/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勝却前空/승각전공/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근본으로 돌려 놓음은 인위(人爲) 짓는 모든 것의 끊어짐이다.

인위적이라 함은 사람의 생각을 우선에 두고 희망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위는 *유위법(有爲法)에 해당된다.

유위법은 작위적이다. 일부러 지어내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모두 인위적이고 유위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위법이 작동하는 유위의 세계이다.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위법(無爲)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무위 함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려면 일단 작위적인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모두 잠시 멈춰야 한다.

멈춤은 단순히 중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멈춘다는 것은 인위적이지만 무위로 들어가기 위한 인위의 마지막 단계이리다.

돌려 놓는 다는 것은 유위에서 무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멈추는 행위는 다시 돌려 놓기 위한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경지가 너무나 경지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경지에 이르기 위한 출발은 되돌려 놓음이다.

근본으로 돌려 놓는 ,

수행은 돌려 놓음의 반복이다.

 

귀근득지(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수조실종(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수유반조(須庾返照)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쳐보면

승각전공(勝却前空)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우리는 놓치지 말고 있어야 한다.

봄은 바로 반조이다.

비추어 본다는 것은 근본 마음 자리를 지켜보는 것이다.

승찬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공을 알았다 하더라도 잠깐 근본을 비춰봄만 못하다고 하신다.

그럴까?

반조(返照) ,비춰봄이 바로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이 아닐까?

 

                                                        

 

須庾:모름지기 , 잠깐 유:  모름지기 잠깐 사이에

返照:돌이킬 , 비출 조 :  돌이켜 비추어 보면

勝却: 이길 , 물리칠 각 : (물리쳐 이길 정도로)  뛰어나다

前空: , 빌 공:  앞의 공 혹은 앞의 깨달음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스스로를) 비춘다. 회광은 빛을 돌이킨다는 역동적, 능동적 움직임으로 단순한 지켜봄을 넘어선 의식적 전환을 상징함.

*유위법(有爲法): 모든 조작이 되고 생멸(生滅) 있는 것으로, 인과(因果) 있으며, 인연(因緣) 의한 생멸변화(生滅變化) 있는 법을 뜻하는 불교용어

*무위법(無爲法): 어떤 조건 혹은 인연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 상주불변(常住不變) 법을 뜻하는 불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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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광반조의 경지에 올라야 할텐데. 여전히 부끄럽네요ㅠㅠ

마힐 2026-01-17 23:51   좋아요 0 | URL
회광반조의 ‘경계’가 따로 있는지, 저도 늘 의심하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고 계신 지금 이 자리가
어쩌면 이미 돌이켜 비추어 보고 있는 중이 아닐까요?
호시우행님, 바람이 차가워 졌네요.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세요. ^^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