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34일차

<放之自然/방지자연/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體無去住/체무거주/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

 

집착()이란 무엇인가.

본래 잡을 ()  수갑에 채워져 붙잡혀 가는 형국을 의미하는 글자들로 만들어진 회의문자이다.

그리고 붙을 ()  매달려 붙어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한자는 잡을   붙을   합해서 집착 이라 쓴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대상에 붙잡혀 끌려 가는 형국이 때를 집착  한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죄를 지은 죄수가 오랏줄에 붙잡혀 끌려가듯, 집착은 내가 대상에 매달려 발버둥이를 치며 안간힘을 쓰는 마음 상태가 된다.

우리에게 집착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재물이 될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집착의 문제는 대상에 대한 나의 마음 상태이다.

붙잡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서 것인가.

단지 좋아서, 너무나 가까이 하고 싶어서 인가.

마음은 욕심에서 것인가.

우리는 집착의 다른 말을 때때로 욕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욕심이 단지 좋아 하는 마음에서 강한 소유욕으로 변질이 집착이라고 부른다.

변질된 강한 소유욕, 즉 욕심은 어디서 온 것일까.

욕심은 어쩌면 결핍에서 오지 않았을까.

결핍은 부족함이다.

부족함은 고통을 유발한다.

고통을 유발하는 결핍의 마음을 우리는 집착이라고 부른 것이다.

 

집지실도(執之失度)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필입사로(必入邪路) 반드시 삿된길로 들어가고

방지자연(放之自然)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체무거주(體無去住)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선지식들께서는 모든 집착에 대해 결국은 놓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집착이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면 놓아야만 하는가.

원래 없어서 결핍인데 다시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야 한다니.

놓는 것이 쉽다면 이미 수행은 수월한 것이고 깨닫기는 무척 이나 쉬운 것이 된다.

그러니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척간두갱진일보(百尺竿头更进一步) 해야 하는가 보다.

집착을 놓기가 어려운 것은 집착의 깊이가 어쩌면 이번 생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불교도들은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다.

윤회의 시간 동안 쌓여 집착은 누적이 되어 처럼 없애기 힘든 (: 카르마 कर्म) 되었다.

업보와도 같은 집착을 어찌 단번에 놓아 버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집착을 놓는 것도 어렵고, 또 다시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 딛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놓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수행은 끊임없는 놓음의 연속이다.

 

 

: 放之: 놓을 , 갈 지: 놓고 간다

自然: 스스로 , 그러할 연:  스스로 그러하게 된다. 즉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體無: , 없을 무 :본체는 ~없다

去住:  , 머무를 주:  감과 머무름

 *백척간두갱진일보(百尺竿头更进一步): 백 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서 다시 발을 딛는다 . 무척이나 위태하고 절대절명의 순간이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목숨을 버릴 각오로 한 발을 내딛는 결단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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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33일차

<執之失度/집지실도/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必入邪路/필입사로/반드시 삿된길로 들어가고 >

 

어린 왕자에게 '길들이기' 가 무엇인지 알려 여우는 현자에 가깝다.

여우는 어린 왕자가 깨닫지 못했던 꽃에 대한 사랑이 바로 길들이기에서 기인 됐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세상에 많은 예쁜 장미가 존재해도, 어린 왕자에게 소중한 장미는 단 하나 뿐이었다.

길들임이라는 단순하지만 엄청난 비밀을 알게 어린 왕자는 이제 이상 어리광 피우는 어린 왕자가 아니다.

이제 어린 왕자는 사랑의 책임을 깨달은  B612행성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여우는 사실 의심이 많은 동물이 아니다.

자연계의 먹이 사실에서 호랑이나 사자 같은 최상의 포식자도 아니고, 자신 보다 아주 작은 포유류만 사냥할 뿐 약한 육식동물에 불과하다.

그런 여우에게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들은 여우를 의심 많고 많은 동물로 비유해왔다.

편견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가 의심이 많은 동물이었나?

우리 인간의 의심 또한 진화의 본능이라면, 그것이 나쁜 것인가.

결국 의심이란 것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일 그것이 어찌 여우 같다고 것인가.

또한 편견이며, 집착이 아닐까.

 

소견호의(小見狐疑)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전급전지(轉急轉遲) 서두를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집지실도(執之失度)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필입사로(必入邪路)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관계를 맺는 것은 길들이기이지만, 그 관계를 소유하려 드는 순간 그것은 집지(執之) 되어 법도를 잃게 된다.

우리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편견이라는 안경을 쓰는 자체가 이미 삿된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간사한 것은 여우 같은 마음이 아니라, 그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믿음 없는 내 마음 뿐이다.                

이제 여우는 의심의 동물이라는 가면을 벗어 던진다.

의심의 상징이었던 여우를 우주 행성 B612 왕자의 스승으로 격상 시켜 , 생텍쥐베리 선생께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 執之: 잡을 , 갈 지: (놓지 못하고) 잡고 간다 즉 놓치 못하고 자꾸 잡으려 함은 집착을 의미함. 집착은 달리 말하면 욕심이기도 하다. 욕심은 어리석은 결핍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다.

失度: 잃을 , 법도 도:  법도를 잃는다.

必入:반드시 , 들어갈 입 : 반드시 들어간다

邪路: 간사할 , 길 로:  간사할 길이란 바로 삿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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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6-01-31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튜브에서 여우를 본 적 있는데요 정말 예쁘더라고요 여우에 홀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더라고요 그림 속 여우와 왕자 장미 다 참 예쁘네요

마힐 2026-01-31 23:08   좋아요 1 | URL
예쁜 귀여움은 치명적입니다. ^^
아마도 오타쿠들이 빠지는 이유가 ‘귀여움‘ 때문이란 말도 있더라구요.
어쩌면 귀여움은 모든 진화와 생존 본능중에 가장 강력하지 않을까요?
귀여우면 용서가 되잖아요.^^;
저만 그런가요? ㅎㅎ
 

- 다시, 100일 정진,  32일차

<小見狐疑/소견호의/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轉急轉遲/전급전지/서두를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대도는 문이 없다.

무문관의 수행도 문이 없다.

문이 없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는 길이란 뜻이지만 반드시 문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길 없는 길을 걸을 안다면 없는 문도 통과한다.

대도는 문이 있고 없고에 상관 없으며, 본래 길이란 사방이 툭 터져 정해진 선이 없다.

길은 만들어진다.

누군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것인가.

아니면 길을 찾아 것인가.

 

대도체관(大道體寬)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무이무난(無易無難)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도다

소견호의(小見狐疑)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전급전지(轉急轉遲) 서두를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길을 가기로 했다면 의심이 우선 나에게 다가 온다.

과연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인가.

차라리 남들이 가는 길을 의심없이 가야 했는가.

점점 다급해지는 마음이 든다면 결국 길은 틀렸다.

아직 마음이 좁으니, 의심으로 인한 내 길이 막혔다.

급해지는 마음일수록 더욱더 도를 찾는 길은 더디어진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무문관도, 길없는 길도 다 부질없다.

조차 믿지 못하는데 어찌 좁은 마음으로 길을 있겠는가.

나에 대한 믿음이 바로 길없는 길을 가기 위한 출발이다.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 小見: 작을 , 볼 견: 소견, 즉 작은 견해

狐疑: 여우 , 의심할 의:  여호처럼 의심하다

轉急:구를 , 급할 급 : 급하게 돌아가고

轉遲: 구를 , 더딜 지:  더디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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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6-01-3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이미지가 눈길을 사로잡네요...여우야 여우야 생각이 너무 많구나 타고 나길 그렇게 타고 나서

마힐 2026-01-31 00:45   좋아요 1 | URL
서곡님의 댓글을 보니 저도 여우에게 동정심이 생기네요. ^^;
저는 의심 많아 꺄웃거리는 여우가 좋아요. 귀엽잖아요. ㅎㅎ
추운 날씨에 서곡님 감기 유의하세요. 감사 합니다.

호시우행 2026-01-31 0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대도무문‘, 이들이 선의 세계를 물 흐리고 있어요.ㅠㅠ

마힐 2026-01-31 05:41   좋아요 0 | URL
네, 한때 문민정부를 열었던 대통령이 서예로 ‘대도무문‘ 를 써서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고 하죠. 그런데 정작 그 대통령 종교는 카톨릭이었다는 얘기도 있네요. ^^
어쨓든 그분 덕에 ‘대도무문‘이 대중에게 더 친숙해진 것 같아요.
 

- 다시, 100일 정진,  31일차

<大道體寬/대도체관/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無易無難/무이무난/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도다>

 

선종(禪宗)에는 혹독한 수행법 가운데 무문관(無門關) 수행이란 불리는 길이 있다.

수행자가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에 들어가면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가 버린다.

정확히 다시 말하면 문을 없애 버린다.

무문관에 들어간 수행자는 근기에 따라 달에서 수년까지 문없는 방에서 정진을 한다.

오직 무문의 관문을 통과할 까지 수행자는 목숨을 놓을 각오로 용맹정진하는 수행이다.

혹독한 수행의 목적은 오직 하나.

깨닫기 위해서다.

무엇을?

도(道).

그러나 수행을 한다고 반드시 도를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순간에도 소수의 수행자들은 무문관에서 수행 중이다.

그들은 대체 지독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대도무문(大道無門)  도에는 문이 없다. 다만 천차유로(千差有路) 천 개의 다른 길이 있.

투득차관(透得此關) 이 관문을 꿰뚫을 수 있다면 , 건곤독보(乾坤獨步) : 하늘과 땅을 홀로 걸으리.>

 도는 문이 없다고 하는데 길은 개나 있을까.

도와 길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길이 도라면 수행자는 문을 없애서 길마저 끊어 버리는가.

모순처럼 보이는 질문, 이 수수께기가 곧 화두이다.

대도는 문이 없는데 길은 갈래로 나뉘는가?

 

대도체관(大道體寬)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무이무난(無易無難)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도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도를 알기 위해 수행자는 다시 무문으로 들어간다.

이제부터는 말의 영역이 아니다.

설명도 이해도 이상 소용이 없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없는 문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

하늘과 땅을 홀로 걷는 날을 기리며.

 

 

 

 

: 大道:  , 길 도: 

體寬:  , 넓을 관:  본체가 넓음

無易:없을 , 쉬울 이 : 쉬움이 없다. 즉, 쉽지 않다.

無難: 없을 , 어려울 난:  어려움이 없다. 즉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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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30일차

<不見精麤/불견정추/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寧有偏黨/영유편당/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중도(中道)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러나 중도는 종종 양극단의 중간 지점으로 오해된다.

중도는 위치가 아니다.

중도는 지점이 아니라 무게에 가깝다.

중도는 양극단의 중심을 고정하는 점이 아니라, 양극단이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다시 맞추는 추에 가깝다.

그러나 무게의 추는 고정되지 않는다.

양극단의 무게가 달라지면, 중도의 자리 또한 함께  이동한다.

양극단은 고정되지 않으며 중도 역시 고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중도란 변화하는 양극단의 무게에 따라 그때그때 평형을 이루는 자리다.

지점에서 중도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

중도는 양극단 사이의 절충점이 아니라, 양극단 모두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 감당하는 무게다.

그래서 중도는 어렵다.

공이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모두 포함하듯, 중도 또한 양극단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고 양쪽을 모두 감당한다.

 

일공동양(一空同兩)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제함만상(齊含萬像) 삼라만상을 함께 포함하며

불견정추(不見精麤)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영유편당(寧有偏黨)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중도를 서라  하지 않고, 지켜라  말했다.

이는 중도가 있을 있는 지점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에게 생존은 본능이다.

살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진화를 거쳐 왔고 결과 사회적 동물이 되었다.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하면 생존할 없었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을 가른다.

편과 , 속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능이 양극단을 만들고 결과 중도의 자리는 본래부터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극단의 끝은 공멸( )이다.

공멸을 경험하고도 살아 남은 소수의 인간들은 공멸하지 않는 도리를 찾아낸다.

그것이 중도다.

그래서 중도는 자연스런 선택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야 하는 자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도는 소수에 속하기에 여전히 양극단에 가려진다.

만약 그렇다면 중도 또한 하나의 생존 본능의 변형이 아닐까.

공멸이 아닌 공생(共生) 위해서 우리에게 중도가 필요하다면,

깨달음 이전에 먼저 살아남는 길이 있어야 한다.

오늘도 중도는 조용히 무거워지고 있다.

 

: 不見: 아닐 , 볼 견: 보지 못함.

精麤: 세밀할 , 거칠 추:  세밀하고 거칠다. 거칠 추() 사슴 (鹿)이 3개가 합쳐진 글자다. 사슴은 놀라면 쉽게 날뛴다. 즉 사슴 세 마리가 놀라서 거칠게 뛰는 것이 연상 된다. 현대 중국어 에서는 粗(:) 로 쓴다.

寧有: 어찌 , 있을 유: 어찌 ~있겠는가.

偏黨: 치우칠 , 무리 당:  무리가 있으니 치우침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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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28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를 ‘서라‘ 고 하지 않고, ‘지켜라‘ 고 말했다.
空,常 ...의 자리도 비슷하지 않나 싶군요.

마힐 2026-01-29 00:4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중도도, 공도, 상도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인연과 조건에 따라 드러날 뿐,
서로 고정됨이 없이 흐른다는 점에서 같은 결인 것 같아요.
역시 잉크냄새님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