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줄탁동시,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다. (仁者心動)- 육조단경 중에서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이 오조홍인(五祖弘忍,601~674)으로 부터 의발과 법을 전수 받고 남방에서 숨어 살다가 어느덧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느낀 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광주의 법성사란 사찰에서 열반경 법회가 열렸는데 혜능은 그 법회에 청중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사찰에 세워진 깃발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을 보고 스님들 의견이 분분했다.
'저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야!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바람이 움직이니 깃발이 움직이니 대중들은 설왕설래를 하며 논쟁을 하던 중,
그때 혜능이 홀연히 답한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그럼 뭔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仁者心動)' 라고 하자 청중은 놀랐다고 한다.(一衆駭然: 일중해연)
이때, 5조의 법을 이은 혜능이 세상 밖으로 자신의 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당시의 대중은 어떻게 혜능이 단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는 대답에 심상치 않음을 알고 놀랐을까?
그냥 무시 할 수도 있는 답이 아닌가?
어떻게 대중들은 혜능의 대답에 주목하고 탄복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혜능의 대답보다 그 당시 대중들이 답을 알아보는 안목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이란 답을 아는 인식을 대중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혜능이 당시에 깨달음을 지녔다고 하지만 그 깨달음을 아는 대중의 안목 또한 대단한 게 아닌가 싶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천재란 자신의 경지를 보통 일반 사람들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한 바가 있다.
즉 천재성을 깨달음으로 바꿔 표현한다면 진정한 각자(覺者)의 위대함은 누구 에게나 가지고 있지만 발현 되지 않은 불성(佛性)을 자각(自覺)하게 해주는데 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은 각자(覺者:깨달은 이) 이여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천재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발현 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한 두명 특출난 천재성을 발현한 사람, 혹은 깨달은 사람이 나타나면 이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숨겨진 천재성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거나 깨달음의 경지를 단박에 알수 있다면 그건 이미 본인 내면에 본래 갖추고 있던 천재성이나 불성을 비추어 본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성본래불(自性本來佛)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거의 완성형이 아닌가?
다만 아직 알이 깨지기 전 상태, 어미 새가 밖에서 한번 쪼아 주는 것이 부족한 상태.
그래서 선지식의 '할(喝)'과 '방(棒)'이라는 한방 쳐주는 방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석가모니 부처님과 큰스님을 비롯한 모든 선지식은 지금도 우리에게 줄 한방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알 껍질 안에서 좀 더 쪼아 놓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어쩌면 깨달음은 줄탁동시(啐啄同時) 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성장과 완성은 어쩌면 한 껍질을 벗겨 내는 가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는가?
주: 줄탁동시 (啐:우는 소리 줄,啄: 쪼을 탁, 同:같을 동, 時 때 시):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새끼가 안에서 울고 동시에 어미 닭이 호응하여 밖에서 쪼아야 한다는 뜻.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