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믿을 것인가 -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가 전하는 올바른 신앙의 길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신영복>의 책들을 읽을 때 그랬다.

이런 분이 나의 아버지이거나, 나의 남편이거나, 나의 형제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원(願)이

그렇게 많이 올라왔었다. 지금 또 한 분이 그런 지극한 願을 가지게 만든다.

어찌하여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남편이나 형제 중에는 이토록 내가 따르고, 본받고 싶으며,

배우고 싶은 많은 것들을 가진 분이 없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더욱 절절해진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는 또 어떤가. 그 많은 선생님들 중에는 어찌하여 이런 한 분을

만나뵙지 못했을까.

 

이 책은 종교인이라면, 신앙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내용으로,

무엇하나 뺄 것 없이 모두 새겨서 가장 바람직한 종교생활로 이끌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우리 모두가 어떤 종교를 가지건 상관없이 이렇게만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종교로 인한 전쟁이라는 어불성설에서만큼은 벗어날 수 있을텐데...

 

십일조에 대한 의문도 해소가 되었으며, 점점 비대해져만 가는 공간적인 大교회에 대한

시선도 정리가 되었다. 교인들의 제사에 대한 나의 생각도 확고하게 정리되었다.

저자야말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이며,

가장 그 분이 원하시는대로 행하고 계신 분인 것 같아 가슴 뻐근하게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올라온다.

 

큰 산, 또 하나의 울창하고 거대한 산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가장 경건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이 너무나 좋다. 이 큰 산에 비하면 나는 무척이나

작지만, 그렇다고 작기만 한 내가 주눅이 들거나, 의기소침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자랑스럽다. 나는 이 큰 산 앞에 있으며, 이 큰 산을 나는 볼 수 있으니까.

 

 

 

 

 

*지금 우리나라에는 지나치게 큰 교회와 지나치게 작은 교회가 너무 많다. (...) 여러가지

면에서 보았을 때 신도 수가 500명에서 700명 정도 되는 규모의 교회라면 좋을 것 같다.

이 정도면 목회자들도 목회하기에 알맞고 교인들도 질적으로 정돈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홉 사람이 고민하는 문제는 내버려두고 교회에 오는 한 사람을 붙들고 신앙운동이 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폐쇄적이다. 말씀과 진리는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교회를 키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가 큰 예배당을 지었다든지, 교인들의 수가 많이 늘어서 몇 차례의

예배를 드린다는 자랑은 하지만 교회의 신앙적 전통이나 교회에서 어떤 지도자들이 배출

되었다는 사실은 소개하지 않는다. (...) 훌륭한 목사는 자신이 목회자로 성공했다는 칭찬을

받기에 앞서 우리 교회에서 이런 지도자들을 키웠고, 고마운 인물을 배출했다는 사실을

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적어도 크리스쳔이라면 물질적인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건전한 일 자체가 목적임을 깨닫

도록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주어야 하며,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을 위한 봉사에

있다는 가치관을 확고히 가져야 한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격적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채워가며

외롭게 사는 독신자들이 새로운 사랑의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자체가 교회의

책임 아니겠는가. 신앙은 예배와 교회행사라는 사고와 신앙은 생활이라는 생각 중 어느 편이

더 현실적이며 소망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자기를 본존하려는 사람은 잃게 되고 자기를 내주는 사람은 보존케 된다는 지혜도 진리인

것이다. 모든 것은 이웃을 위해서,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신념이 곧 신앙인의 인생관

이 되어야 한다.

 

*신부와 수녀들이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면 교회도 재산을 소유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십일조 문제도 그렇다. 구약시대에는 종교세금이 지배층의 수입으로 되어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도 그 십일조의 혜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버림받은 서민들이, 정치는

부패하고 가난에서 구출될 길이 없으므로 수입의 십 분의 일을 잘 바치지 않았다. 그 상황이

구약 말기인 말라기 시대에는 더욱 심했다. 그래서 세금을 받는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로

'십일조'를 잘 바쳐보아라.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너희 창고가 넘치도록 보답해 주실 것이다'

라는 호소를 했다. 그것이 십일조에 관한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의 견해다. (...) 만일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그리스도를 대신해 쓸 수 있다면 우리는

경제적으로 궁핍함이 없는 복지사회를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인 봉사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는 기여의 경제관을 신도들에게 심어주어 주님의 뜻이 신도들을

통해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오해 없길 바라나, 경제는 인간을 위해

쓰여야 한다. 인간을 위해 경제적 축복이 있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경제적 도움을 사회로부터 받기보다는 사회에 경제적으로 이바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시픈 것은 크리스천들의 생활에 사치와 낭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신념이다. 세상 사람이라면 내가 번 돈은 내가 쓰고, 많이

벌었기 때문에 많이 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간접적으로 사회경제를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 뜻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와 같이

가난하게 살 수는 없지만 부자와 같이 호화롭게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생활의 손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으로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으며, 소유를 즐기기보다는 봉사를 택하기 때문에 은총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중산층 이상의 낭비와 사치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배치될 수도 있다.

(...) 귀중한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며, 기업 정신을 봉사 정신

으로 이끌어줄 경제관이다. 우리가 내는 세금이 교회에 헌금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세금도 헌금과 같은 의미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 가치는 그 결과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해 값있게 쓰임이 옳은 것이다.

(...) 모든 교인과 가난한 근로자들이 세금을 내고 있는데 우리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는 안 된다. 선의의 선택에 따라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더 많은 세금을 냈다고 해서 잘못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개신교에서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죄다 아니다는 식의 구속을 주기보다는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조상들의 선한 유지를 받아들이는 길인가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신앙이 생긴 후에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이 옳을 것이다.

신앙적으로 무엇은 죄가 되고 무엇은 죄가 안 된다는 것은 신앙인 된 후에 스스로 선택하고

해결 지을 문제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지만 선조들의 선한 뜻을 저버리는 사람보다는

제사를 드려서라도 선조의 고마운 봉사를 이어받는 후손들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 생각이

교회와 다르다고 해서 죄악의 책임을 묻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 교회가 저지르는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죄악은 얼마나 많은가. 황금만능

주의는 얼마나 만연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인간성을 모독하는 죄악은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는가. 남의 눈의 티는 나무라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디보다 교회 안에서 더 많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이슬람 교도들이 기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조용히 침묵을 지킬 것이다.

문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보거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예수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재림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뜻이 역사 속에 머물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의

재림은 앞으로 올 것이거나 미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개인과 역사의 현재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실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으며 성경의

뜻과 능력은 현재 속에 영원을 성취하는 책임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은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서나 기독교를 이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류의 생활과 사상에 끼친 성경의

위력과 역사적 영향력을 알기 위해서라도 성경은 읽어야 한다. 논어를 읽어야 하는 것은

유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으뜸가는 정신적 고전이기 때문이다. 살의 가치와 역사적 유산을

찾기 위해서는 누구나 논어를 읽어야 하며, 오히려 그 책을 읽은 적이 없는 크리스천이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역을 읽은 적이 없는 교양인과 지성인은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가. 역사상

최고의 고전인 성경을 읽지 못했다면 그것이 곧 지성적 성장의 결함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당하게 얻은 수입의 십 분의 일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쓸 수 있다는 경제관을

갖고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교회 재정의 어려움을 풀기 위해 십일조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교훈이 아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기도하는 신앙생활에 있다. 유교의 중심은 자기반성에 있고 불교의 정신은

禪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매우 큰 독립기념관을 세웠다. 좁은 한국 땅 중에 180만 평을 차지했는가 하면 건축

자재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역사를 왜곡시켜서 그 대응책으로

장만한 것이었다.

미국 같으면 그런 방대한 규모의 기념관은 짓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방법을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일본 같으면 작은 기념관을 지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공간적 전시성이

너무 강하다.

지금은 기념관의 인건비를 충당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 하니 기념관 건립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쿧고 싶어진다.

예술의 전당만 해도 그렇다. 큰 집을 짓는다고 해서 예술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

기능이 풍부해졌으니 집도 있어야겠다는 것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김형석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세 권째 김형석 교수님의 책을 읽고 나니 <국기에 대한 맹세>가 떠오른다.

이 맹세도 일부 구절이 달라져있던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아마도 교수님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맹세로써 가슴에 새길 수 있는

마지막 분이 아니실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할 수 있는 마지막 어른.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만 살아서 내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하는 일보다

국가가 내게 해 주어야 하는 것에 더 민감한 시대에 살고 있지 싶다.

 

교수님의 100년 인생은 정말 대한민국의 역사였다.

 

윤동주 시인은 너무나 옛날 옛적 사람이었는데, 세상에나, 교수님은 윤동주 시인과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니, 김일성과 같은 마을이었다니!

 

살면서 가끔은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모르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 같은.

 

<물론 우리는 이웃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에 절대적인

부정적 가치판단과 제약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더 선하고 고귀한 가치판단과 선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소수의 우리가 좋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의 전체적 질서까지

훼손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사회질서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더라도

사회는 성장할 수 있으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가치와 질서는 보존, 육성되어야 한다.

동성애의 문제도 그렇다. 세상 모든 사람이 동성애를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동성애를 반대는 하지 않아도 선한 가치와 질서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p.300 >

 

이 구절을 읽는데 맞아, 내 생각도 바로 이것이었어! 라고 무릎이 탁 쳐지는 것이다.

또하나의 애매했던 나의 관점이 확연히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들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 때문에 책을 읽는다.

 

앞으로의 나의 삶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가 보인다.

지역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나는 무엇을 남기고 죽을 것인가?

 

고귀하고 훌륭한 본보기가 계시니 이 어찌 고맙지않으랴!

 

 

 

 

 

 

 

 

 

 

*나 혼자 남았다.

모친과 아내까지 떠나간 집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아내를 보낸 뒤, 얼마 동안 여행을 했다. 미국에 있는 세 딸들의 집도 방문했다. 두 달

가까이 걸렸다.

인천공항에 내렸는데 갑자기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없어졌다. 

내 인생의 책임은 다 끝냈다. 모친과 아내는 아쉽지 않게 보내드렸다.

그런데 내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내 마음의 집이 비어 있는 것이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다. 버스나 택시를 탈 때는 반드시 승하차 시에 인사를 한다.

내가 친절과 감사의 뜻을 표하면 그들도 친절과 교양을 쌓아갈 수가 있다. (...) 나는 지금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대신 해주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 (...) 나는 교인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한 기도는 별로 드리지 않는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해야

하며 교회보다도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드리는 정성과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학(미국 오스틴 대학)에서는 150년 동안 시험 감독은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였다.

학생들은 비록 이 과목때문에 실격하거나 학교를 떠나게 된다고 해도 자기를 믿고 있는

교수와 친구를 배반하는 부정행위는 자기 인격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에 범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모두가 갖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점이 아메리카의 벍은 장래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부인은 어린애도 없는 자기가 아무 일도 없이 집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민망하고

자기도 일을 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시민 같아 미음이 편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랐는데 교회에 헌금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세금을 더 내는 것이 사회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얘기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말을 통해 이 가정은 미국 사회를 생각하고,

미국 정부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버릇이 없다는 뜻은 배우지 못했다, 본받을 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예의범절을 모른다,

공경심이 없다, 더불어 살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정신적 가치와 질서를 모르거나 해친다,

독선적 사고 때문에 더 고귀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인격과

선한 노력을 폄하하거나 해친다 등등의 인간관계와 그 규범을 말하는 것 같아, 찰학적

용어를 빌리면 인간애의 정신을 훼손시키며 사회의 선한 질서를 악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분(스코필드 박사)은 박정희 정권 기간을 한국에서 지냈다. 박 정권의 좋은 점을 얘기

할 때는 우리와 함께 편히 얘기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단점이나 마땅치 않게 여겨

지는 정책을 말할 때는 반드시 "나, 대통령에 대한 불만스러운 얘기를 해도 괜찮겠어요?"

라는 양해를 구하곤 했다. 나는 그에 비하면 제자격인 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꼭 갖추곤 했다. 나도 배우고 싶은 면이 많았다.

 

*구체적이고 필수적이면서 실천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청소년기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의 체험을 터득하도록 이끌어주는 일이다. 봉사의 실천이 사랑의 정신을 키워주며

그것이 곧 행복과 인생의 보람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 봉사정신이 없는 지도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인생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은 이웃과 사회를 위해 무엇을 남겼는가

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때로 존경하는 사람들의 동상이나 기념관을 대하는 때가 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리들을 위해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뜻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자녀들에게 상속해주는 것은 법적으로 용납하지 않는다.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과 제도라고 믿고 있다. 그 세금이 후대들을 위한 복지 혜택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나 찾아온다. 그러나 죽음을 체험해본 사람은 없다. 죽음은 순간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후에는 삶이 끝났기 때문에 죽음도 사라진 뒤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죽음은 관념적으로 삶과 더불어 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삶이 없으나

삶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결식에 가보면 그때마다 꼭 알려지는 식순이 있다. 그 사람의 태어남부터 죽음까지의

경력이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졌던 유일하면서도 전체적인 삶과 그에 대한 평가다.

그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가'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는가'다. 그 내용에 따라 그의 일생이 나타나며 평가된다.

 

*죽음의 의미도 그러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뜻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주어진 삶을 다

바치고 싶은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참되고 영원한 삶의 길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아나 - 미로 찾기 접지 속지
론 클레멘츠 외 감독, 드웨인 존슨 외 목소리 / 월트디즈니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테피티의 심장을 마우이가 훔쳤고,

그 심장을 잃은 테피티는, 세상에나! 테카였다니!!

테피티이면서 동시에 테카일 수도 있는 우리들,

우리들의 삶을 보는 것 같았다.

 

마우이는 훔친 심장을 다시 테피티에게 돌려주었고,

테피티는 마우이의 I am sorry! 한 마디에 그를 용서한다.

우리도 이리 회개해야 할테고,

우리도 용서가 이리 쉬워야 할텐데...

 

눈썹조차 초록이던 테피티는 너무 아름다워서,

말 한 마디조차 없는데도 그 위엄과 사랑을 어쩌면 그렇게 잘 표현했는지,

그녀가 다시 초록의 섬으로 자세를 바꾸는 장면은 과연 압권이었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악과 싸워서 이겨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은 모아나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평온,

그녀의 평온이 부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모든 음악가의 음악 이야기 - 개정판 마음이 쑥쑥 자라는 세상 모든 시리즈 2
유미선 지음, 최상훈 그림 / 꿈소담이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직 베토벤만 편애해서 듣다 보니 다른 음악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덕분에 하이든의 종달새, 천지창조도 들어보고,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의 활기와 기상, 기개에도 빠져보고,

아주 오랜만에 안익태의 한국환상곡도 들어보게 된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일본 기생이었고,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푸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리던, 미사 중간에 불려지던 무반주 노래가 그레고리오 성가이며,

그레고리오 교황의 어깨에 비둘기가 앉아 성가를 불러주고,

그것을 교황이 다시 서기에게 불러주었다니,

그레고리오 성가, 노래로 하는 기도, 말조차도 참 아름답다.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여서인지, 브람스는 평생 클라라만 바라보며 독신으로

살았다는 이야기같은 것은 실려있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 김형석 교수의 신앙과 인생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싶었다.

저자의 인생과 종교가 가득한 이 책에서, 기대했던 대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접하게 되니,

나도 그를 본보기로 본받고 따라서, 내 삶도 역시 선하고 아름다운 시간들로 채워나가야겠다

하고 다짐하게 된다.

가장 바람직한 종교인의 자세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무척 큰 수확이었다.

진정한 종교인은 내 것만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으라, 믿으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믿고 있을 뿐이다.

 

"저물어 가는 저녁,

석가님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 감람산 웅기중기 솟은 바윗돌 모퉁이에 가지런히 누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잠드는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보라."

                                                                   - <영원과 사랑의 대화(김형석)> 중에서

 

저물어 가는 저녁,

나는 김형석 교수님의 옆에 서서 흐트러짐 없는, 차분하고 겸손한 음성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나를 위해 한 일은 남는게 없어요.' 라던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일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오히려 그것이 나 자신의 신앙과 성경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고,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내가 나름대로 신앙과 성경적인 신학을 터득하게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죄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교리나 율법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다. 만일 많은 종교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웃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라는 뜻을 가르쳤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훨씬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의 희망이 밝아졌을 것이다.

 

*조선 왕조 초기에 우리는 주자학을 신봉해 왔다. 그것은 독일의 관념 철학과 성격이 비슷한

논리의 관념성, 즉 형식논리에 속하는편이다. 그리고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의 윤리성이나 도의적 가치보다는 교조주의로 수용하면서 형식적으로 교화했던 것이다.

이 둘, 즉 형식 논리와 교조주의가 합쳐지면서 불행하게도 흑백 논리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흑과 백은 이론상으로는 추정할 수 있으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이 있을 뿐이다. 백에 가까운 밝은 회색과 흑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 있을

뿐이다. 경험주의자들은 짙은 회색에서 밝은 회색을 찾아가고, 합리주의자들은 흑백을

구별하며 백색을 택하는 방법을 따랐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우리 것은 백이고 너와 너희들 것은

흑이라는, 중간을 배제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유림과 학문을 노하는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흑백 논리 위에 권력을 독점하려는 집단 이기주의까지 가세하면서

파벌 위주의 대결과 싸움이 해소되지 못했다. (...) 노사가 협력보다는 투쟁을 일삼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지극히 작은 대립에서도 결사반대나 결사 투쟁을 예사로이 내세우는 풍토도

그러하다.

 

*딸은 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하고 성실하며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 보여도 성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믿고 사랑할 수

있어도,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가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멀리하게 된다. (...)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보다는 겸손하고 성실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주님의 뜻에 더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부모를 위하며 존경하게 되어 있다. 효는 존경과 위하는 뜻으로

채워진다. (...) 가족 관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위해 주는 삶이다.

자녀들이 먼저 부모를 위해 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다. 부모가 먼저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해 주면, 아랫사람들은 그것을 배우고 따라가게 되어 있다.

 

*가장 소중한 사고력은 어떻게 키워 주자는 것인가. 어렸을 때의 성적으로 일생을 평가하거나

지식의 축적량으로 인물을 결정짓는 교육계에서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소망스러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내 후배 교수들이 무리를 해 가면서도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이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과 장래를 위해서라면

교육 이민을 나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모든 자녀가 성공과 행복을 찾아 누릴 자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좌절

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교육이다. 왜 이런 후회스러운 걱정을

하는가. 개성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인생의 황금기는 과연 언제인가? (...) 우리가 얻은 결론은 60에서 75세까지였다는 공감대

였다. 50부터인가 하고 생각해보았으나 그 기간에는 일은 열심히 했으나 아직 인간적인

미숙함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했다. 그래도 60이 되면서부터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

지도자의 품격을 갖출 수도 있고, 사회인으로서의 자신감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도 그랬던 것 같았다. 60 이전에는 인간적으로 아직 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인했던

셈이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모든 면에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 같다.

그 60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는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언제쯤이 가장 좋은 나이였는가 하고 물으면, 75세 정도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받아 영광을 더하는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이웃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에

궁극적인 해답을 주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확신을 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기독교

의 높은 뜻이 있다면, 그 진리는 우리의 연구나 지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였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교훈이 우리 모두의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 되는 목표는 교회를 통해 참 신앙을 가진 많은 주님의 일꾼을

사회 모든 분야로 보내는 책임이다.

전 인격을 갖추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새로운 사명을 갖고

하늘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