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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 김형석 교수의 신앙과 인생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18년 1월
평점 :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싶었다.
저자의 인생과 종교가 가득한 이 책에서, 기대했던 대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접하게 되니,
나도 그를 본보기로 본받고 따라서, 내 삶도 역시 선하고 아름다운 시간들로 채워나가야겠다
하고 다짐하게 된다.
가장 바람직한 종교인의 자세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무척 큰 수확이었다.
진정한 종교인은 내 것만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으라, 믿으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믿고 있을 뿐이다.
"저물어 가는 저녁,
석가님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 감람산 웅기중기 솟은 바윗돌 모퉁이에 가지런히 누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잠드는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보라."
- <영원과 사랑의 대화(김형석)> 중에서
저물어 가는 저녁,
나는 김형석 교수님의 옆에 서서 흐트러짐 없는, 차분하고 겸손한 음성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나를 위해 한 일은 남는게 없어요.' 라던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일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오히려 그것이 나 자신의 신앙과 성경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고,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내가 나름대로 신앙과 성경적인 신학을 터득하게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죄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교리나 율법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다. 만일 많은 종교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웃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라는 뜻을 가르쳤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훨씬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의 희망이 밝아졌을 것이다.
*조선 왕조 초기에 우리는 주자학을 신봉해 왔다. 그것은 독일의 관념 철학과 성격이 비슷한
논리의 관념성, 즉 형식논리에 속하는편이다. 그리고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의 윤리성이나 도의적 가치보다는 교조주의로 수용하면서 형식적으로 교화했던 것이다.
이 둘, 즉 형식 논리와 교조주의가 합쳐지면서 불행하게도 흑백 논리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흑과 백은 이론상으로는 추정할 수 있으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이 있을 뿐이다. 백에 가까운 밝은 회색과 흑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 있을
뿐이다. 경험주의자들은 짙은 회색에서 밝은 회색을 찾아가고, 합리주의자들은 흑백을
구별하며 백색을 택하는 방법을 따랐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우리 것은 백이고 너와 너희들 것은
흑이라는, 중간을 배제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유림과 학문을 노하는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흑백 논리 위에 권력을 독점하려는 집단 이기주의까지 가세하면서
파벌 위주의 대결과 싸움이 해소되지 못했다. (...) 노사가 협력보다는 투쟁을 일삼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지극히 작은 대립에서도 결사반대나 결사 투쟁을 예사로이 내세우는 풍토도
그러하다.
*딸은 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하고 성실하며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 보여도 성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믿고 사랑할 수
있어도,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가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멀리하게 된다. (...)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보다는 겸손하고 성실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주님의 뜻에 더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부모를 위하며 존경하게 되어 있다. 효는 존경과 위하는 뜻으로
채워진다. (...) 가족 관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위해 주는 삶이다.
자녀들이 먼저 부모를 위해 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다. 부모가 먼저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해 주면, 아랫사람들은 그것을 배우고 따라가게 되어 있다.
*가장 소중한 사고력은 어떻게 키워 주자는 것인가. 어렸을 때의 성적으로 일생을 평가하거나
지식의 축적량으로 인물을 결정짓는 교육계에서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소망스러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내 후배 교수들이 무리를 해 가면서도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이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과 장래를 위해서라면
교육 이민을 나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모든 자녀가 성공과 행복을 찾아 누릴 자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좌절
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교육이다. 왜 이런 후회스러운 걱정을
하는가. 개성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인생의 황금기는 과연 언제인가? (...) 우리가 얻은 결론은 60에서 75세까지였다는 공감대
였다. 50부터인가 하고 생각해보았으나 그 기간에는 일은 열심히 했으나 아직 인간적인
미숙함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했다. 그래도 60이 되면서부터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
지도자의 품격을 갖출 수도 있고, 사회인으로서의 자신감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도 그랬던 것 같았다. 60 이전에는 인간적으로 아직 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인했던
셈이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모든 면에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 같다.
그 60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는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언제쯤이 가장 좋은 나이였는가 하고 물으면, 75세 정도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받아 영광을 더하는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이웃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에
궁극적인 해답을 주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확신을 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기독교
의 높은 뜻이 있다면, 그 진리는 우리의 연구나 지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였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교훈이 우리 모두의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 되는 목표는 교회를 통해 참 신앙을 가진 많은 주님의 일꾼을
사회 모든 분야로 보내는 책임이다.
전 인격을 갖추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새로운 사명을 갖고
하늘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