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 홀로 죽어도 외롭지 않다
우에노 치즈코 지음, 송경원 옮김 / 어른의시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 혼자 사는 노인이 집에서 홀로 죽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서서히 몸이 약해져 걸을 수 없으면 그대로 집에서 죽게 된다. 하지만 고독사라는 건 그 전부터 고독하게 살던 사람의 얘기다. 혼자 살아도 고독하지 않으면 고독사가 아니다. 그래서 '집에서 홀로 맞는 죽음'이다. 


* 임종을 지킨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 곁에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임종의 과정이다. 최선을 다해 과정을 겪은 사람들은 "내가 집에 없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각오는 되어 있다"고 말한다. 


* 지금의 가정임종은 누구나 자기 집에서 죽었던 옛날과는 전혀 다르다. 과거 가족들이 도맡았던 간병은 의료 수준이 낮아서 거동을 못하는 환자는 쉽게 욕창이 생겼다. 위생 수준이나 영양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욕청은 점점 악화되었고 거기에 잡균이 들어가서 감염증으로 사망하기도 햇다. 집에서 하는 간병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간병 부담이 커진 것은 간병 수준이 올라가고 기간도 길어지고부터이다. 바꿔말하자면 간병이 꼭 필요한 중증 상태가 되어도 수준 높은 간병으로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간병력이 있는 가족과 같이 살면 당연한듯이 집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그 간병자원은 바로 며느리이다. 시부모의 간병은 자연히 며느리에게 맡겨졌다. 싫든 좋든 울며 겨져먹기로 며느리들은그 일을 해왔다. "'선택할 수 없는 간병'은 강제노동이다"라고 말한 것은 평소 거침없기로 남 못잖은 나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쉽게도 아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메리 데일리가 한 말인데 그녀의 말대로 강제노동은 강제수용소에만 있지 않다. 가족 내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며느리들이 간병자원으로 쓰이는 일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히구치씨는 간병력으로서의 며느리는 이미 '절멸한 종'이라고 선언햇다. 


* 병원은 환자보다 의료인의 사정에 맞춰 만들어졌다. 환자는 회복하고 싶은 간절함과 기간한정이라는 조건에 매달려 어떻게든 병원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 병원에 입원하면 내 생활은 모두 병이 되어 버린다. 집에 있으면 병운 잔지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될 뿐이다.


* 집과 가깝거나 교통편이 편리한 조건 좋은 보육원이 있어도 몇몇 곳을 더 돌아보고서 자기 마음에 드는 보육원에 아이를 맡긴다. 보육원에 대해서는 질을 중요시 한다. 

그런데 노인시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몇 군데를 비교하면서 질을 따져 보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간병 부담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다, 시설에 맡기고서 안심하고 싶다는 가족의 이기심이 엿보인다. 시설이 누구를 안심시키기 위해 있는 것인지 내가 깊은 의문을 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지금의 노인들에게는 자기 소유의 집이 있다. 게다가 주택도 남아돈다. 동거가족만 없다면 나가 달라는 말을 들을 일도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자택에서 그대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시설을 늘릴 필요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너무 많이 지어 버린 탓에 앞으로 유지관리비가 들어갈 일만 남았다. 


* 긍정적으로 보자면 싱글인 시바타 씨는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죽기 직전까지 '가정호스피스'를 실현했다. 죽기 이틀 전 익숙한 환경을 떠나 미지의 공간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니, 인간의 생활은 오늘처럼 내일이 이어지는 관성의 선물이다. 그것을 순식간에 바꾸려면 큰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  시바타 씨를 보면서 집에서 홀로 죽는 데에는 '확고한 의사는 필요 없다. 그저 하루하루 우물쭈물 조심조심 지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시바타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죽어가는 사람은 죽는 순간에 '생명의 배턴'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 준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숨을 거두는 순간에 함께 한 사람은 그 생명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한 나라들의 노인복지 역사를 더듬어보면 노인복지는 간병이 필요한 세대의 요구가 아니라 간병을 하는 세대의 요구에 의해 추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 젊은이들이 "부모님이 쓰러지셔서 모시고 살려고 합니다만"이라든가, "본가에 들어가서 부모님 간병을 해야 할까요?"라고 상담을 해올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의사를 결정하는 사령탑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간병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 만약 가까이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모 집 근처에서 따로 사는 것을 권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집에 간병이 필요한 노인이 있으면 집은 간병일을 하는 직장이 되고 만다. 심지어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는 365일 24시간 근무체재이다. (...) 그렇지 않아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가족간병이다. (...)  가족이 따로 산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니다. 파트타임 가족이 뭐가 큰 문제가 될 것인가. 


* 당신의 노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당신 자신 뿐이다. 부모도 형제도 아니다. 그리고 자식으로서 가장 큰 효도는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이 안 계셔도 나는 잘 살 테니까 안심하고 먼저 가세요'라는 것이다. 부모가 먼저 죽는 게 순서니까.


* 그래서 나는 부모에게 같이 살자고 하는 자식의 제안을 '악마의 속삭임'이라 부르는 한편, 부모에게는 설령 거기에 '노'라고 대답하더라고 자식 신세는 안 진다는 밉살스러운 말은 하지 말라고 조언해왔다. 여차할 때는 부탁하는 게 좋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노후니까.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여주고 온 마음을 다해 길러줬는데 부모가 곤경에 빠지면 손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자식의 생활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는 게 조건이다. 



*부모가 먼저 죽는 게 일반적인 순서다. 아버지, 어머니. 안심하고 먼저 가세요. 저는 부모님이 안 계셔도 잘 지낼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복지가 있는 게 아닐까?


* 튜브영양을 할지 말지, 인공호흡기를 달지 말지 어느 한 쪽을 편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그때 망설이고 휘둘리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다. 만약 그런 가족이 없다면 주위 사람이 본인과 함께 망설이고 고민학 생각하면 된다. 나는 살고 죽는 데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나 태어나는 방식도 선택할 수 없었듯이 죽을 때나 죽는 방식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서로를 비난하는 가족에게 오가사와라 씨는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본인은 평온하게 떠났다는 뜻이겠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 (...) 자신이 연구한 대로는 흘러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 퀴블로 로스도 죽음 앞에서 버둥거리며 발버둥을 치는 한 명의 인간이구나 하고.


*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다만 언제 어떤 식으로 죽는지는 모른다. 살고 싶어 버둥버둥 발버둥 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는 방식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죽음은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임종기에 대한 연구에서 내가 얻은 큰 성과는 이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일은 자신의 의지를 뛰어넘는다. 그것을 컨트롤하려는 마음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손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일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 그리고 나를 비롯해 가족이 있는 사람도 가족이 없는 사람도 많은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종교가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저세상을 구원으로 여길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일은 이 세상에서 해결하고 싶다는 것이 내가 품고 있는 실천적인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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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3-07-10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보봐르의 노년과 장 켈레비치의 죽음을 번갈아 읽느라 정신이 없네요^^

Grace 2023-07-17 11:22   좋아요 0 | URL
보봐르의 노년과 장 켈레비치의 죽음??
아이구 궁금하네요.
그들의 노년과 죽음이 어떠한지 필리아 님의 서재에 가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