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ㅡ 손홍규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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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돌이켜보는 건 , 그이를 상실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심코 떠나보내던 순간의 자신이었다 . 갔다 올게 하는 목소리에 응 하고 무심히 대답했던 자신에게 왜 그때 직접 배웅을 해주지 않았는지 ,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는지 ,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는지 ,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는지 , 그토록 사소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지 않았는지를 무섭게 따져보기 마련이었다 .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후회가 잡초처럼 자라나 무성했을 테고 마음에 드리워진 빽빽한 그늘이 빠져나와 주위에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
(본문 57 , 58 쪽 ㅡ손홍규 ,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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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청년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청년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 사랑에 실패하고 원한을 품었던 ,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 절망해버렸던 그 청년은 그들의 내부에서 그들과 함게 늙었다 . 그들은 깨달았다 . 자기 내부를 헤매는 이 불길한 청년과 때때로 조우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음을 . 청년과 그들은 헤어진 게 아니라 함께 거주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힐난하고 할퀴면서 수십 년을 견뎌왔음을 .
(본문 64 쪽 )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자기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 여기가 다르지 .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유예 기간을 겪어야만 진정한 슬픔에 이르게 되지 . 상실한 사람의 부재를 거듭 느끼면서 ㅡ 먹을 사람은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밥상 위에 수저 한 벌을 올려놓았다가 혹은 방구석에서 그이의 유품임이 분명한 잡동사니를 발견했을 때처럼 최초의 상실 이후에 되풀이해서 똑같은 상실을 겪어야 한다는 걸 , 한 번 상실하게 되면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는 걸 깨달으면서 점점 더 깊은 슬픔에 이르게 되니 말일세 . 단순하고 우둔한 사람에게도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네 .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 그것은 오히려 고통을 겪는 사람이 획득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네 . 나도 그렇고 자네들도 그렇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입으로만 곡을 했지 어디 진짜 뜨거운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있던가 .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두 눈가에서 용암처럼 눈물이 흘러나와 귓속에 고이지 않던가 .
...... 그 아이는 말이야 , 지금 상을 치르는 사람 같지가 않았어 .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상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곱씹으며 노를 젓다가 지금 막 깊은 슬픔의 기슭에 닿은 사공처럼 노를 내려놓았지 . 아이는 단번에 깊은 슬픔에 이른 거야 . 무언가를 상실한 순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버린 거지 . 아이의 두 눈에서 용암 같은 눈물이 흐르는 걸 자네들도 보았잖은가 . 저 탁자 앞에 앉은 채로 수십 년을 살아버렸어 .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발버둥하다 겨우 알게 된 것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아이는 저기 앉은 채로 알아버렸어 .
...... 아우님들 , 저녁이라네 . 밤의 정강이라고도 할 수 있지 . 여기 적당히 어둡고 캄캄한 밤의 슬하에서 불 밝힌 주점에 어울려 앉아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자네들이 있어 기쁘다네 . 먼 훗날 그 아이가 돌아오면 우리가 되어 여기 이렇게 앉아 술잔에 술을 따르겠지 . 어쩌면 이미 돌아와 우리 사이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네 . 그 말을 하고 노인은 실수인 것처럼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
(본문 65 , 66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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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감정도 언제나 합금이었다 . 순수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 그는 살아야 했고 어떤 감정이 엄습하면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전혀 다른 감정을 쥐어짜낸 뒤 엄습하는 감정을 방어했다 . 그런 과정에서 감정들은 뒤엉켜 하나가 되어 동시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고 이렇게 합금처럼 태어난 감정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것을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말은 괴물일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서서히 괴물이 되어갔다 .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 그리고 남들처럼 꿈을 꾸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는 순간이 왔다 .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
(본문 68 , 69 쪽 )
진짜 어머니의 손님이 왔는데도 그 손님이 너무나 허깨비 같아서 부주의하게 그 옆을 돌아가다가 손님의 어깨를 친 적도 있었다 . 분명히 살아 있는 손님인데 헛것이 눈에 보이는 거라 여겼다 . 어머니와 아내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면 둘 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고 혹은 넋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때의 아내는 어머니가 불러들인 손님 같았다 . 그들은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다가 알아버린 사람들 같았다 . 삶이란 본질적으로 비극이라는 사실을 .
(본문 71 쪽 )
치매가 심해진 시어머니 앞에 앉아 넋두리를 풀어낸 적은 있어도 소소한 일상을 살아온 이력에 버무려 간식을 먹듯 나누어 먹을 사람이 그의 곁에는 없었다 . 그는 너무 외로웠기 떄문에 외롭다는 걸 잊어버렸고 그걸 잊어버렸기에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절망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 밤마다 감옥을 나서는 꿈을 꾸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감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쓸쓸해하는 종신형 죄수처럼 .
(본문 100 , 101 쪽 )
그는 아들과 남편이 어떤 방식으로 다투었는지 , 아들이 한사코 제 아비와 달라지려 애쓸수록 사실은 얼마나 제 아비와 똑같아지는지 , 그래서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제 아비와 똑같다는 걸 꿈어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남편이 하던 것처럼 방문을 발로 차고 말은 하지 못한 채 씩씩대다가 집을 나가 버렸다고 고자질을 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아갔다 . 말을 마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는데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저 가슴 바닥에 수천만 톤이나 남아 있는 것 같아 서러워졌다 . 그는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에 견주면 모래밭에서 모래 한 알 골라낸 것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 해야 할 말이 까마득했고 그제야 조금은 남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조금 울었다 . 말 대신 눈물을 흘렸다 . 눈물 한 방울은 천 마디의 말에 버금갔다 . 눈물 두 방울은 십 년에 걸친 사연에 버금갔다 . 시어머니가 엉덩이를 끌며 그에게 다가왔다 . 악아 , 왜 우니 응 ? 울지 마라 악아 . 돈이 없니 ? ...... 이거 , 우리 며느리가 준 돈이야 . 우리 며느리가 나 맛난 거 사먹으라고 준 돈이야 . 우리 며느리 피 같은 돈이다 . 너 써라 . 울지 마라 .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 울지 마라 , 악아 . 사람이 돈을 울려야지 돈이 사람을 울릴 수는 없는 거다 . 울면 못 써 . 니가 우니까 나도 울고 싶잖니 , 응 ? 시어머니는 방긋 웃었다 . 그는 혼란스러웠다 .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 같았다 .
(본문 103 쪽 )
그는 두려운 눈길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 , 제가 누군지 아시는 거죠 ? 정신도 멀쩡하신 거죠 ?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시는 거죠 ? 알기 때문에 결국 거기로 가신 거죠 ? 어머니 ......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 여기서 얼마나 더 늙어야 해요 ?
(본문 104 쪽 )
사소한 일을 감당하지 못해 남편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 겨우 그것 때문에 이 사람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 그가 정말로 외롭고 불안할 때 남편에게 기댈 수 없게 될까 봐 서글펐다 . 남편은 벽에 기대어 두다리를 쭉 뻗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남편의 두 손은 가슴팍에 얹혀 있었다 . 아직 그가 젊었던 어느 날 남편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허공에 대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 그는 깜짝 놀라 방구석으로 기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 남편은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 같았다 . 한참을 그러더니 지금처럼 벽에 등을 기대며 스르르 주저앉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그는 남편 곁으로 다가가 서랍장 모서리에 부딪혀 까지고 피가나는 남편의 손등을 닦아주었다 . 잠든 남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 이른 아침 , 잠에서 깬 남편은 멍하니 앉았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 슬픈 꿈을 꾸었어 .
(본문 106 , 107 쪽 )
여자에게는 밥그릇도 국그릇도 수저도 단 한벌뿐이었다 . 먼 친척인 이 집으로 세 들어 온 뒤 시장에서 새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 거기에 밥을 푸고 국을 담고 숟가락질과 젓가락질을 하며 끼니를 때워 왔다 . 어쩌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전적으로 여자에게 속한 것들이었다 . 여자는 남자가 깨끗히 비우고 간 그릇과 수저를 씻으며 눈물이 나오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 어쩌면 멀지 않은 날 그 남자와 첫날밤을 치르면서 느껴야 했던 혼란을 이미 그 순간에 느끼는 중인지도 몰랐다 . 여자만의 것이었던 그것들에 남자의 숨결이 지나가버렸고 이제 그것은 여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 남자가 손대고 입댄 그것들로 다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란했다 .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
(본문 111 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