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리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건 서로에 대한 미량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우리는 서로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 상대에게서 바닥을 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 바닥이나 밑바닥이 정확히 무엇을 가르키는지 우리로서는 알지 못했다 . (210
쪽)
나는 에어컨 바람에
가볍게 일렁이는 촛불을 볼 때마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 내 책상은 에어컨 바로 아래 있었고 그래서 나는 가끔 추위를 느꼈다 . 여름에 느끼는
추위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 이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일까 , 나는 가끔 생각했다 . (211
쪽)
봄에 우리는 아무도
벚꽃을 보러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그해 봄 벚꽃을 본 사람은 회사원이 유일했다 . 회사가 여의도에 있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출퇴근길에 벚꽃을 볼 수밖에 없어서였다 . 벚꽃을 보러 몰려든 인파에 지쳐 돌아온 회사원의 이마에 파리한 벚꽃 잎이 하나 붙어 있었다 .
누군가 그에게 벚꽃 잎이 붙어 있다고 지적하자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고 그렇게 꽃잎이 모기처럼 짓이겨졌다 . 하지만 우리는 벚꽃 잎에 우리의
존재를 이입하지 않았다 . ( 212 쪽 )
아직 20대인 청춘에 암울함을 그린 한유주 작가의 그해 여름 우리는 ㅡ
시작부터 , 언제 죽을까 , 자살할까 말까 하는 농담 같지 않은 말로 시작을 연다 . 마지막까지 누가 죽거나 하진 않는데도 벚꽃 잎이 이렇게
무겁게 여겨지긴 처음이다 . 살아온 세월만큼 그 무게를 꽃 잎 한 장에 턱하고 얹은 냥 , 무겁다 .
하긴 , 일본에선 벚꽃나무 아래는 늘 시체가 있다고 하던가 ? 그래서
벚꽃이 그리 사람을 홀리듯 잡아 끄는거라고 , 특히 강을 인접해 끼고 자라는 벚꽃은 유난하다고 , 들었던 기억이 있다 .( 믿거나 말거나 , 이
땅이나 그 바다 건너의 땅이나 전쟁없던 시기가 없으니 , 그런 전설이 나돌 법도 하다 . ) 암튼 이 청춘임에도 이미 마음은 중장년을 넘어
은퇴기같은 이들은 매주 복권을 사 당첨을 희망하고 한 주 한 주 죽음을 유예해가는 삶을 사는 중이고 , 농담이라는게 제삿상을 누가 차릴 것인가
하는 말이나 하고 앉았다 .
놀고 있지 않음에도 , 한명은 책을 만들고 한명은 회사를 , 한명은
초만들어 파는 일 , 한명은 글을 쓰는데
벌어서 각자 세금을 내고 ,건강보험료 , 과태료, 각종 요금에 같이 세를
낸 월세를 내고 나면 부릴 사치가 복권뿐인 , 죽어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침울해지는 이 사람들 .
인생은 길고 살아봐야 안다지만 , 이 청춘들은 지금 아는 거다 . 닭이
오리가 되지 않는다는 걸 . 개인의 일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없을 거란 걸 , 왜 ? 우리는 한국인이고 구체적인 개인들로서는 그냥 ,
자살하고 싶었단다 . 그래도 죽진 않는다 . 생각만 할 뿐 , 죽으려면 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죽겠냐고 죽기를 , 누군가 뒷처릴 알아서
해준담 또 모를까 ...
이게 앞으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일까봐 , 아니 이미 와있는 현재겠지 .
누군가 겪은 작년의 일이고 올해의 반복이라면 , 암울해 란 표현만으론 벚꽃을 나무하날 다 털어 모아도 모자랄 건데, 그 마음의
무너짐이란.
여름은 또 올테지 , 그해는 영원이란 시간 속에 서서히 침몰해가는 배처럼
, 얼마나 길고도 길게 느껴질 건지 ...
초속 5cm 라는 애니가 있는데 , 마치 그 이야기처럼 벚꽃이 떨어지는
시간을 그해 여름이란 표현으로 대신해 영원할 것 같은 , 이상한 초조함 과 불안감을 담은 소설 같다고 읽으며 , 영원할 것 같은 불안한 감정도
언젠가는 끝이난다 . 그게 뭐든.
꽃은 지고 잎은 피고 나무는 푸르고 겨울은 오고 또 , 봄이 오면 ,
어김없이 벚 꽃이 듯 ......
그러니 저 , 청춘들에게도 어김없이 그해 여름은 또 , 있을 것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