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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기사단장 죽이기 2: 전이하는 메타포 ㅡ 무라카미 하루키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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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보이는 것이 좋아요 .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정도로 . "
( 본문 12 쪽 )
늘 그렇지만 재미있는 책은 마지막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 끝이 궁금해 다음 장을 미친듯 넘기면서도 점점 줄어드는 책 뒷 쪽의 무게가 한 숨이 나는 걸 , 그러다 마침내는 마지막 엔딩에 서운해져 버리고 . 더할 나위없는 재미였는데도 계속되면 좋겠다는 바람에 날 알지도 못할 작가에게 괜한 심통을 부려보게 되곤 한다 .
주인공이면서 한번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 나 ' 는 9개월 간 아내 유즈와 떨어져 심정적 이혼을 겪게 되면서 자신을 외딴 산 속에 유폐시킨다 . 철저히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자신만의 고독한 작업을 할 셈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주변인들과 엮여 사건의 매개자이며 촉발자가 되서는 말할 수 없는 것과 말없이 지켜져야 할 것들에 대한 시간을 온 몸으로 겪고 배우게 된다 .
그 시간들에 나타나는 현상이 이데아 , 메타포 , 이중 메타포 등등이다 . 그들은 그림 속의 존재로 형상을 빌려 나타나기도 하고 과거에 그가 알던 그리운 이의 목소리로 나타나기도 하며 , 여행지에서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게 마주한 인물로 나타나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 또 고양이의 촉감이나 이계라고 밖에 표현 못할 공간으로도 나타나며 , 들릴 리 없는 소리들로 변주되어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관계를 이끈다 .
그리고 나는 , 손에 잡힐듯 눈에 보일듯 생생한 그림 하나를 두고 온갖 상상을 한다 . 기사단장 죽이기 . 소설 속의 주인공 ' 나 '와 열 세살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도 그랬듯이 그 그림이 그려지고 우리 앞에 표현된 이유에 대해서 ...아흔이 넘어 사물의 인지조차 놓은 노인의 깊은 심연에 가느다란 무엇으로 남은 그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 우리에게 단지 난징대학살의 진상과 지난 독일의 잔혹한 시간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 다는 아니었을텐데 , 어쩌면 그것은 한 인간의 주마등 끝에 자리한 회한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 그때 그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었다면 자신은 그런 그림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후회없이 연인만 가혹하게 보내고 살아 죄인의 심정으로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짙은 회한 .
남은 그림을 '나'가 봐야 했던 이유는 , 지금의 생에선 그런 전쟁이 다시 되풀이 되진 않더라도 한 사람의 생에 후회란 그같은 짙은 상념을 남기는 그림으로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뭔가를 만들어 낼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 였을거였다 . 지독한 나치의 시대도 , 제 2차 대전도 끝나고 현재의 우리시대는 총칼의 위력보단 뭔가 서서히 인간을 잠식하는 것들에 둔감하게 사로잡혀 가고 있는 추세다 .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속도를 못 느끼는 둔감함 , 생생하게 피흘리는 전쟁보다 은근하게 인간을 잔인으로 몰아넣고 있는 생의 터전이 지금이다 .
'나' 는 그런 생업에서 무뎌진 한 인간이고 알게 모르게 염증이 난 사람이기도 하다 . 은연 중에 자신이 꿈을 접고 ,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인물 . 그러면서 한쪽으론 그게 자신이 잘 하는 일이고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인물 . 자신이 그렇게 까지 하는데 아내가 자신말고 바람을 피우다니 , 용납이 될리가 없다 . 그런 생각은 말로 드러나지 않아도 몸으로 생활에서 점차 곁에 있는 사람을 지치게 하기 마련이다 . 분명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의 희생자적 관념이 된다 . 주부 콤플렉스가 괜히 있는게 아닌거다 .
오랜 시간을 함께 산 사람들을 보면 우여곡절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 문제 없이 평생이 순탄했어요 . 하는 부부는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일이 코너에나 모셔야 할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 또 자주 듣는 얘기중엔 여자가 바람이 나면 대게의 경우는 남자가 잡고 , 여자는 가정을 깨려고 한다는 이야길 많이 접했을 거다 . 나만해도 그런 이야길 많이 들었다 . 그럴법 하다고 생각한다 . 왜냐면 여자는 대게 한 마음에 두 사람을 동시에 못 담기 때문이다 . 뭔가를 목적하고 마음에 담은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곁에 있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 다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여자는 그렇다 . 나를 기본으로 상상을 해봐도 ) 그것에도 역시 한계는 있을 거다 . 유즈 역시 평범한 사랑을 꿈꾸는 여자였으니 자신을 원망하는 남편의 온몸의 아우라를 견디는 건 아무리 사랑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피곤한 일이었을 터 .
주인공 ' 나 '는 여행을 하면서 분풀이하듯 무아지경의 상태로 여기저기를 해매고 다닌다 . 그러다 미야기 현 , 이와테 현 근처에서 예의 하얀색 스바루의 남자를 만나고 그(스바루)의 여자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 여자를 만나 , 제 안의 흉폭한 심정과 진짜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 그는 그녀가 아닌 실제로는 아내를 죽이고 싶었던 걸거다 . 그렇기에 어느 밤 꿈에서 그라면 보통 있을 수 없던 일을 비록 꿈일지라도 아내 유즈에게 성적해방을 난폭하게 해치우며 만족을 하고 , 사악해지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는 사악한 아버지*가 되고 . < 나중에 기사단장의 말을 들으면 사악한 아버지* 라고 하는 걸 보아 , 그 스바루 남자는 그녀를 쫓는 사악한 아버지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 주인공 '나 '가 일반적인 형태로 부모가 되었다면 어쩌면 그런 사악한 아버지가 되었을 수도 , 또 , 옷장 속에 갇힌 마리에 앞에 서있던 남자로 친부지만 뭐에 씌여 나쁜짓을 하는 아버지였을 수도 , 암튼 상상의 여지가 너무 많다 >
그것은 모두 꿈의 일이다 . 현실에선 그는 그런일은 상상도 못하니 멘시키 와 마리에 두 골짜기 사이에 끼어서 그림을 그릴 뿐이다 . 이따금 기사단장이 나타나 이런저런 조언 아닌 조언을 해준다 . 이 모든 일은 그가 꿈일지언정 사무쳐서 해 놓은 일을 잘 풀어 원만하게 흘러가도록 하는데 있다 . 그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을 보고 그의 맺힌 한을 풀어 줄 필요가 있었듯이 ( 마지막에 기사단장을 도모히코 앞에서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며 또 기록하는 긴얼굴을 나타내 증거하게 함으로 이중으로 그의 한을 풀게 함 ) 그와 유즈 사이의 막힌 강물을 돌아 흐르게든 바로 흐르게든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모든일은 필요한 일인 것이다 .
그러니 멘시키와 마리에는 그가 사악한 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장치된 메타포이며 이중 메타포이다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ㅡ 더니 , 정말 영화 제목하나 기막히게 지었다 . (아..이 책과 상관없이 ..) 멘시키는 아마 마리에와 어쨌든 가까워질테지 . 실이라는 뜻을 가진 '무로 ' 의 아버지가 된 ' 나 '와 유즈는 잘 살고 있을 것이다 . 무로에게 앨리스와 체셔고양이와 토끼와 세상 어딘가로든 연결된 많은 동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 지금쯤이면 여기와 시차가 없으니 한가로운 주말이려나 , 이렇게 유와 무의 틈을 소설의 이야기로 매꿔도 보며 아 , 너무 즐거웠다 .
다들 난징 대학살이니 , 안슐루스니 그게 중요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물론 중요하지 않은게 아니라 , 너무 많은 것들을 크게만 생각하느라 전쟁도 , 불사하고 참전도 당연시하고 하는거 아닌가 ... 한 인간의 고뇌 , 인간의 삶과 사랑 , 그런거... 눈에 보이는게 좋다는 말 , 눈에 보이지 않는 정도로 ... 마리에의 그 말이 나는 이 소설에서 내내 울림이 가장 컸다 . 무뎌지지 않고 생이 주는 아주 작은 주름과 나이듦에도 새삼스레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소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