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 고산자의 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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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때 남자끼리 영화를 본 안쓰러운 기억이 든다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까지 이어온 옛날 친구와 극장가를 찾아가니 보고 싶은 작품이 매진이 되었다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영화를 찾아보니 차승원 배우가 출현한 <고산자대동여지도>를 보았다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한국이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과 영화촬영 당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란 점이다영화촬영 시 무대 세트 외에 현장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는 배를 타야 한다만일 진짜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촬영했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우리나라의 해양 특성상 서해가 아닌 남해 측의 대한해협 그리고 독도가 있는 동해는 수심이 깊고수심이 깊기에 파도의 높이가 매우 높다.

 

그런 곳에서 촬영했다면 많은 배우와 스텝 분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그러나 영화는 영상미도 중요하나영상서사에 드러나는 스토리텔링즉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영화 <고산자대동여지도>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지겨운 감이 없지 않았다김정호 선생이 고생하여 전국을 돌고권력자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많은 백성이 신음하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다시대적 흐름에 대해 잘 반영한 것은 알겠지만김정호란 인물이 영화에서 권력자들의 입김에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심했고영화초반 차승원이 보여준 다소 개그적인 요소에 치중한 느낌이었다.

 

영화초반부터 재미를 주려다 후반에 갈수록 진지한 고통이 다가올수록 영화내용이 약간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김정호를 다룬 영화가 있다면 소설도 있을 것이다영화와 소설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영화에서 김정호의 가족은 어린 딸 하나이고소설에서 가족은 망나니 아들 하나와 늙을 때까지 옆에서 보필해주던 딸이 있었다영화의 딸은 천주교 박해 때 고문으로 죽었지만소설은 그저 늙어가는 모습만 보여준다어느 모습이 김정호에 더 가까운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김정호의 기록은 여전히 미상이고그의 행적 역시 뚜렷하지 못하다단지 그의 기록만은 기록물로 우리나라 문화재에 큰 빛을 안겨주었다.

 

영화에서 김정호는 외적인 모습에 치중한 것 같았지만이에 반해 소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는 외적인 모습보다 그의 내적 심경주변사람들을 통해 보여준다소년 김정호는 어느 날 빛을 본다지도에 새겨진 많은 지리적 정보양반출신이 아닌 김정호가 한자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한자를 안다는 것그것은 책을 읽고 책을 쓸 수 있으며책으로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당시 민란이 발생하고 정국은 어지러워도 그래도 민란을 막을 수 있는 이유는 지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알아야 병법을 알고전략과 책략을 짤 수 있다또한 지리적 정보를 담은 지도를 안다는 것은 전술에서 매우 중요하다글을 안다면 또한 조선의 정치통치술인 유교를 알 수 있다조선의 유학은 공자와 맹자보단 오히려 주자의 성리학에 가까웠다다산 정약용 선생이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보고 잘못된 생각을 고칠 의지가 없는 당대 현실을 비판했다글자 하나를 다르게 해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던 조선이었다문자를 안다는 것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권력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년 김정호는 한자를 보통 사대부양반보다 더 잘 알지만그의 신분이 한계였다조선의 후기는 그야말로 위기였고세도정치가 판을 치는 조선은 민중의 비명과 신음으로 넘치는 세상이다소년 김정호의 아버지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한양으로 이사 온다그의 아버지는 얼음을 지고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면 돈 대신 매를 받는다얼음을 이미 다 녹아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만일 정확히 길만 제대로 보고 간다면아무런 고생이 없는데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나는 인간이 공간의 구조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한다공간은 한편으로 문화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분리가 이루어진 최초의 영역이라 본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의 작가 임나경 소설 중에 <곡마>에서 북촌과 남촌이란 단어가 나온다북촌은 부유한 양반이 사는 곳이고남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곡마>의 남자주인공 종사관은 가난한 무관이라면세도가들은 북촌의 권력자들이다.

 

지금 서울에 북촌 한옥마을이 있다고 한다공간적인 영역에서 과거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의 피를 이어가고 있을까과거의 죄를 후손이 책임지는 것은 부당하나그 죄에 의해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공간이란 영역은 인간에게 벗어날 수 없는 주박을 걸어준 것이다주박은 과학적으로도 얽혀있지만오히려 비과학적인 논리에 얽매여 있다김정호가 지도에 목숨 거는 이유그것은 지도를 보고 살아야 할 인간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점이다보부상들이나 상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다추운 겨울 산에서 길을 잃으면 추위와 배고픔에 죽거나맹수와 산적에 의해 습격 받는다.

 

만일 제대로 된 길순라군이나 혹은 포졸들이 돌아다니는 길이 표시된 지도가 있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김정호가 원한 지도란 바로 저런 것이다언제라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지도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만 백성의 손에 있어야 하는 점이다인간이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도 본인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김정호의 인생은 자세히 모른다영화나 소설은 실제 인물은 허구의 이야기로 또 다른 영역으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설에 많은 공감이 가는 이유는 소설에서 김정호의 슬픔은 김정호만의 것이 아니었다옆에 신분을 초월한 오랜 친구도 있었고그를 알아주는 학자들도 있었다사랑하는 여자존경스러운 청백리 상관오랫동안 정리해온 지도와 판본 등이 무참히 잘려나갈 때 김정호는 담담하게 받아낸 게 아니다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머문다김정호란 인물이 한국인 선조에서 위대한 인물이나소설에서 만난 김정호는 위대한 인간보단 미련하나 인간적이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옆집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과자 하나 주면서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하지만 마음이 아프게도 그렇게 마음만 착해빠진 사람은 항상 손해보고 고통을 받는다역사에서 그때의 패자는 먼 미래에서 승자라고 한다김정호란 이름이 지금 우리 현대인에게 계속 되새기는 점에서 그는 역시 역사의 승자이다승자의 이름이 짙을수록 우리는 그에게 가해진 시대의 슬픔을 알아야 한다소설에서 청일전쟁이 등장한다정말 청일전쟁에서 대동여지도가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적어도 일본의 지리학자는 지도의 진면목을 알았다단지 그게 조선의 민중이 아니라 조선의 민중을 탄압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조선시대 후기 정조시대는 그야말로 르네상스였다정약용 선생이 관직에 오를 때 우리에게 찬란한 문화가 이어질 듯하다정조대왕 서거 이후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는 피로 얼룩진 비극을 만들었다유학은 본래 만민 즉 백성을 위한 학문이다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유학자란 백성이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기 위해 존재하라는 의미이다유학자는 항상 열린 사고로 토론과 대화를 주고받으며윗사람은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어 포용해야 한다공자의 유학 중 논어를 다룬 도서를 보니 그러하다.

 

하다못해 성리학의 시초인 주자가 만든 소학에서도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했다그런 점에서 소설의 실수는 성리학과 공자의 유학을 조금 잘못 배치한 것이 아닐까 하다민족의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성리학의 병폐를 항상 지적하고공자의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실학이 왜 필요한가에서 백성에게 잘 살아가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공자는 사실 논어에서 농민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했지만정약용의 사상은 농민에게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정보를 연구했다.

 

양반출신의 정약용양민 출신인 김정호신분은 분명 차이는 있지만그들이 보고자 하는 미래와 그들이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사람은 같았다그들의 의지가 높은 이유는 그들이 원대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그 꿈에서 헤엄치는 이들이 조선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선후기 양반이 아닌 자가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던 시대가 왔다신분이 양반이고행실도 양반이던 자들은 세도가들에게 미움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나고한적한 지붕 아래 책만 읽어야 했다김정호란 인물이 조선시대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그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작가 역시 현대인이고그분이 바라보는 조선시대라 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인 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집안문중 어르신들 중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나오기 150년 전 동국여지지도를 제작한 분이 계신다당파싸움에 밀려 한적한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었으나그분이 바라본 것은 중앙정부의 권력이 아니라 주변에 널린 것들에 대한 탐구였다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공부하고 연구해도 그것이 제대로 백성의 삶으로 녹아들기 위해선 행정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분의 형제와 친구들은 당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고그 비참한 모습을 본 후 병으로 죽었다그분과 그분의 친구에 의해 한국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 유지가 넘어갔으나성호 이익 선생 역시 백발의 선비로 인생을 마감한다이런 분들이 빛을 밝히게 된 건 한국인 역사에서 다행일지 모르나그 사실을 알면 알수록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권력 앞에 남을 희생시키는 세상돈 앞에서 양심을 파는 사회김정호 선생은 조선의 산과 강은 나라의 것이 아닌 백성들의 것이라 했다.

 

비록 군왕이 존재하던 시대라도 군왕은 군주로서 백성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게 목적이어야 하는 도학을 추구해야 했다군주제가 존재한 조선이면 민주제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은 오죽할까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정부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시련과 실패의 통한에도 길을 찾아간 김정호 선생이나형제들의 목이 참수되고 귀양살이에서 빛을 보여준 정약용 선생 역시 만백성을 위해 살아갔다그들의 위대한 업적이라 하나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맛은 너무나도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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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립 반 윙클의 신부(일어: 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 영어: A Bride for Rip Van Winkle)> 영화 제목에 대해

 

영화제목은 왠지 간단해야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하고 다가가는 것이 쉽다. 만일 발음이 어렵거나 단어가 길게 되면 사람들은 뭔가 특이한 것을 알겠지만, 뇌리 속에서 금방 잊어진다. 이런 점에서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는 그동안 한국에서 <러브레터>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를 기대하고 온 관객에겐 많은 희비가 오고갈 작품이다. 내 생각으론 희극이나 비넣기극적 요소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별개의 세상이 열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영화가 20세기 말에 개봉하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배경이 된 훗카이도는 눈의 왕국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를 드러낸다.

 

그래서 아마 이 영화를 두고 이와이 슌지라는 네임드에 의해 이끌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여 로맨스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파국으로 스쳐가니 말이다.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영어 Rip Van Winkle를 찾아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잠만 자고 있는 사람으로 검색된다. 그렇다면 “Rip Van Winkle”가 있다면 “A Bride for”는 누구란 말인가? 영화는 감독이 남성이나, 주인공은 여성이다. 남성감독이 여성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잠만 자고 있는 사람모두 여성이란 점이 특징이다.

 

물론 신부는 잠만 자는 사람이나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일 수도 있다. 처음 붉은 우체통에 나타난 나나미(한글로는 7가지의 아름다움)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고, 마시로(한글로는 아주 하얗다는 의미)는 잠만 자고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 앞부분을 보면 <립 반 윙클의 신부>처럼 2사람 모두 신부이고, 2사람 모두 상대방의 신부인 것이다. 다소 동성애적인 코드가 숨겨져 있지만(이런 점에서 미국 페미니스트 인문학자 매릴린 옐롬 신간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 자매애에서 동성애까지, 그 친밀한 관계의 역사>을 읽어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아닌 서브컬쳐 내에서 이런 동성애적 요소는 깊이 자리 잡고 있다.

 

2. <립 반 윙클의 신부>와 서브컬쳐의 관계성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과연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감독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을 느낀 분들은 아마 대중문화만 젖은 분일 것이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보는 미디어의 관계성은 대중문화에 의해 주도되고, 그것은 다양성이나 개성을 존중하지 않은 일관적인 시선을 요구한다. <립 반 윙클의 신부>를 보면 상당히 일본 오타쿠적 문화가 깊이 개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애적 요소에서 일본은 이미 코믹 유리히메(백합공주)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유리라는 단어가 백합을 의미하고, 백합은 일본에서 여성의 동성애를 의미한다.

 

애니메이션에서 <유루유리>, <카나 메모>,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케이온> 등은 동성애적인 코드가 숨어있지만,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나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본 리뷰를 작성중인 남성인 나조차도 <유루유리>, <케이온>을 매우 재미있게 봤다. 동성애적 코드라 해도 너무 극단적인 요소를 추구하지 않고, 재미나 유쾌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장기간 TV에서 방영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동성애라는 문화적 코드는 매우 낯설고도 이상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서 직접적인 성행위를 강조하는 일부 레즈비언 세계만이 아니라 친구끼리의 우정적 요소가 많다.

본인은 여성이 아니라, 뭐라 말하기가 다소 곤란하나, 가끔 대학이나 회사에서 보면 화장실을 갈 때 남성은 혼자 가는 반면, 여성은 2명이서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남성의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 2명이 화장실을 사이좋게 손잡고 가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동성애가 위에서 말하듯이 그런 극단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우애성에 대한 스킨쉽 내지 프랜드쉽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나나미와 마시로의 관계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부터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3. <립 반 윙클의 신부><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연장선인가?

 

<립 반 윙클의 신부>이 다소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이유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약력이다. 그는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보통 영화감독이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작품의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본인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시나리오를 전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러브레터>같은 멜로드라마를 제작했으니 그가 <립 반 윙클의 신부> 말고도 다른 영화에 주인공에 나온 점을 일반 대중들은 쉽게 생각할 수 없다.

 

그것도 제목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단어를 올린 이유는 더욱 그렇다.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TVA26, 25화와 26화를 새롭게 극장판으로 만든 <End of Eva>가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20세기 말, 인간의 소외 군중 속의 고독, 14살 소년의 가족과 사회에 대한 고민이 사이코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흔히 말하여 중2병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사회나 한국사회는 그동안 전통사회를 유지하여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어른이 어린아이를 돌보고 가르쳤다. 공동체문화는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관장했다.

 

그러나 서구화에 따라 인간사회는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경되고, 인간은 공동체 안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이 구성원을 조직하는 부품이 되었다. 인간소외가 발생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이란 자신을 관심으로 대해주는 보호자가 아니라 단지 어른들이 모인 사회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카리 신지라는 어린 소년으로 보는 세계라면, <립 반 윙클의 신부>는 결혼적령기에 도달한 성숙한 여성이 보는 세계이다.

 

4. 이와이 슌지 감독과 안노 히데아키 감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가이낙스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가이낙스에서 애니메이션감독을 맡다가 퇴작하여 KARA라는 미디어제작업체 사장이 된다. KARA 설립 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다시 재각색하여 만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을 제작한다. 그런데 이와이 슌지 감독과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애니메이션 감독이지만, 상당히 우수한 실사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Love and Pop>은 일본 여고생들의 원조교제에 대해 날카롭게 다룬 작품이고, 영화 <식일(式日)>은 인간의 느끼고 보고 싶은 이상과 괴리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식일>이란 작품을 보면 남자주인공이 이와이 슌지이다. 2000년에 나온 작품으로 가이낙스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이후 실사판 및 애니메이션판 <큐티 허니:Re)를 만들기 전이다. 나름 실험적이고 과감한 영상을 보여준 <식일>에 이와이 슌지는 영화배우이면서 작중에서 그의 직업처럼 영화감독으로 나온다. 세계 최고의 오타쿠,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만든 실사영화에 <러브레터> 감독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미 2사람은 상당히 문화적 감성을 나눈 것으로 알 수 있다.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음악 몇 가지가 중요한 장면에서 나온다. 특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는 주인공 나나미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 매우 슬픈 상황,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음악이다. 이 음악이 유명해지게 된 동기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에서 아스카가 양산형 에바와 싸우면서 나온 OST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아스카, 이와이 슌지의 나나미, 1사람은 어린 소녀, 1사람은 성숙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세계란 가혹하고 처절하다.

 

이뿐만 아니라 안노 히데아키의 KARA 홈페이지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그때 회사에서 만든 로고가 보이고, BGM이 들리는데, 바로 그 음악이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도 나온다. 이와이 슌지 감독이 만든 <립 반 윙클의 신부>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작품세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이 음악이나 혹은 촬영기법(나나미가 거짓 이혼청부업자에게 속을 때 묶은 방)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실사 및 애니메이션 영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으나, 그 감독이 누구하고 작품을 같이 이끌어 나갔던 점도 중요하다.

 

5. 가식의 세계 일본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플래닛이란 마이너계통의 SNS에서 나나미는 친구와 애인을 만난다. 그의 남편을 SNS에서 만났고, 그녀는 바로 약혼과 결혼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나나미는 주변에 친척이 없어서 플래닛의 아무로를 통해 가짜 친척을 초빙하고, 그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를 해결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로부터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말을 듣고, 남편의 불륜 대상자가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말한 어느 남자에게 속아 그녀는 강제로 이혼을 당한다. 이혼을 시어머니로부터 권유당하는 장면에서 아무로가 시어머니의 의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로는 플래닛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정보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인간이었다.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찾아 자신의 이윤을 추구한다. 생각해보면 왜 이렇게 일본사회가 차갑게 되었을까? 인간관계성에서 일본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나나미라는 여성은 상당히 힘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나름 순수하고 진지하며 언제나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세상을 그녀를 속이고 외롭게 만든다. 인간(人間)이란 한자어는 사람 사이라는 의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있어야 사회적으로 인간이란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나나미에게 친구가 많이 없다는 점, 모든 것을 SNS에서 도움을 받는 점은 일본사회가 진정한 인간관계가 파탄난지 옛날이란 사실을 상기해준다. 나나미의 어머니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이혼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리고 나나미는 함정에 빠져 바람을 피워 이혼을 당했기에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없다. 인간관계가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없게 된 세상이었다. 이혼을 당한 후 혼자 외롭게 걸어가는 나나미는 모든 세상의 관계성에서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6. 해체된 가족, 조립된 가족

 

나나미는 부유한 여성도 아니고, 누군가 의지할 곳도 없는 여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였다. 호텔에서 머물며, 호텔 관리인을 일하던 그녀에게 다시 아무로가 다가온다. 여유가 넉넉하지 못한 나나미에게 들어온 제안은 아르바이트였다. 그것도 주말 결혼식 하객으로 말이다. 결혼식에 등장한 남성은 이미 결혼한 사람이나, 새로운 애인을 위해 결혼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몸이나 새로운 결혼식에 친척을 부를 수가 없었다. 대신 찾아온 이들은 아무로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 임시로 조립된 가족이었다.

 

조립된 것들은 다시 해체되기 마련이다. 조립된 가족관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와 남동생이 생긴 나나미에게 순간적으로 가족이란 안식처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로 뒤풀이한 후 모두 흩어지고, 이날 처음 본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1잔 더 하자고 했지만, 가게를 나온 후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만들어진 가족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맡은 2사람에게 실제 가족을 물어보니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돌아갈 곳은 있지만, 자신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고독과 가식, 허무함이 넘치는 일본사회의 단편을 그렇게 희극적인 장면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광야에 버려진 청소년들이 느낀 소외라면,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어른들 역시 고독과 소외에 몸부림을 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나미는 그런 세계에서 오직 솔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인 점에서 아이러니한 세상이란 점을 엿볼 수 있다. 호텔에서 계속 근무하던 나나미가 어느 날 아무로에게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어느 고급저택의 메이드로 근무해달라는 요청이었다.

 

7. <립 반 윙클의 신부>의 집

 

그녀가 도착한 집에 주인이 없고, 단지 집을 지켜주면 된다고 했다. 혼자인 줄 알았던 나나미는 전에 만난 마시로를 만나게 된다. 마시로는 일하는 하우스메이드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집주인이었다. 집안을 보면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다. 방 한쪽을 보니 맹독을 지닌 생물이 있고, 마루에는 파티를 한 흔적이 있었다. 옷이 가득한 방에는 이상한 옷들이 가득했다. 메이드복, 교복, 각종 의상들, 나는 처음에 어떤 오타쿠의 방 내지 코스프레를 즐기는 사람의 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시로의 직업이 배우였고, 그녀가 맡은 역할은 AV(Adult Video), 일본 포르노 여배우였던 것이다(AV장르에 여배우가 교복이나 메이드복을 입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언제나 술에 취해 밤늦게 찾아온 마시로, 나나미에게 찾아온 마시로는 이상하게도 나나미에게 과도한 스킵쉽(나중에 키스도 한다)을 하고, 나나미에게 많은 따뜻함을 느끼려 한다. 나중에 마시로가 몸이 아픈 와중에 전화를 대신 받은 나나미는 그녀가 AV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이상한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로는 나나민에게 마시로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친구라고 말해준다. 영화를 보면 계속 느끼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식의 세계에서 소외를 느낀 채 고독한 하루를 보내는 점이다.

 

나나미는 아무로에게 위조된 마시로의 비밀을 듣는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절실한 친구, 모두와의 관계성이 끊긴 나나미가 마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나나미는 단순히 하우스메이드로 월100만엔의 급여가 아닌 진정한 마시로의 친구로서 대해준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마시로를 위한 눈물에서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서로 파티를 연다.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같이 죽어 줄래? 라고 묻는다. 마시로는 이미 시한부인생이기에 그렇게 묻는 것이나, 나나미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8. 나나미의 슬픈 승리

 

다음날 아무로는 마시로의 집에 장의사를 데리고 와서 시신이 2구가 있을 것이란 한다. 하지만 나나미는 살아있었고, 그녀의 손에 고동이 잡혀있지만, 독이 든 것이 아니라 평범한 고동이었다. 마시로는 아무로에게 같이 죽어줄 사람을 원했다. 만일 나나미가 속물적 인간이었다면 같이 죽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나미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한부 인생, 말기암 환자이던 마시로에게 세상을 그야말로 허무의 세계이다. AV세계 목숨 걸고 촬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껴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말기암이라면 그동안 암이 진행되었으며(몸무게가 10가 감소한 점에서 암이 발병한 시기가 알 수 없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술로 밤을 보내고, 독이 든 동물을 구입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된 마시로, 그녀가 AV배우로 많은 돈을 벌어도 결혼하객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나와도 마시로는 나나미처럼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 마시로가 아무로에게 같이 죽어줄 사람을 추천할 때 아무로는 나나미를 추천했다.

 

인간은 나를 위해 우는 것은 가식이나, 남을 위해 울어주는 것은 인간애의 표본이다. 나나미의 눈물에 마시로는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다. 나나미의 가식 없는 행동에 그녀는 주변으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당했다. 그녀의 마음은 죽음을 앞둔 1사람의 영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나나미의 승리를 슬픈 이유는 그녀의 삶이 옳다는 것이 마시로의 마지막 모습에서 보였고,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나나미의 입장에서 힘든 고통이었다.

 

9. 왜 그들은 옷을 벗는가?

 

영화를 보면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나나미와 아무로는 마시로의 유골단지를 들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찾아간다. 마시로의 어머니는 딸이 못마땅하고, 유골도 받기 싫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찾아온 2사람을 맞이해준다. 딸의 죽음을 두고 가슴에 한이 맺힌 그녀는 마시로의 유산(거대한 액수)을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독한 소주를 마시고, 과거와 현재의 얼굴이 다른 마시로를 말하며, 그녀를 찾아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때렸다고 고백한다.

 

오열에 젖은 마시로의 어머니는 슬픈 눈물을 보이면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당황한 나나미와 아무로는 그녀를 말리나, 그녀는 옷을 다 벗고 정좌한 후, 입은 연다. 자기도 옷을 다 벗으니 이렇게 부끄러운데, 마시로도 너무 부끄러웠을 것이라 말이다. 차를 가지고 와서 소주를 입에 대지 않은 아무로는 그 모습을 본 후 자신도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술을 미친 듯이 마시기 시작한다. 오직 이윤만 생각하던 현실주의자가 눈물을 흘린 채 나체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로란 존재가 그동안 아무로에겐 돈줄, 어머니에게 꼴도 보기 싫은 못난 딸이었다.

 

하지만 1사람이 세상을 보내고, 마시로란 인간 역시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점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의 존재가 가식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롭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있다. 알몸의 인간에게 쇠사슬을 모두 벗어던진 자연인이다. 순수하게 자연인이란 존재로 마시로의 죽음을 위로한 것이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인간의 관계가 점차 오프라인보단 온라인으로 이어진다. 친구와 연인조차 SNS와 인터넷으로 매개된 경우가 많다. 겉모습은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의 진실성은 상대방에게 요구하기가 참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나미처럼 진지하고 솔직한 마음을 알아봐주지 않을까? 영화에서 나나미는 아무로가 옷을 벗는 장면을 보면서 그녀 본인은 벗지 않은 이유는 이미 그녀는 가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식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나나미처럼 살아가면 직장에서 쫓겨나고, 시댁에서 쫓겨나며, 심지어 목숨 그 자체도 박탈당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나미의 삶을 부정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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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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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 <곡마>를 읽게 된 동기는 약간 사소한 이유가 있지만, 소설 <곡마> 발매 이전에 재미있는 그림을 보았다.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인데, 그 모습이 참으로 특이했기 때문이다. 말 위에 있는 사람이 온갖 이상한 자세로 말을 타고 가는데, 마지막 장면에 말 2마리 위에 서서 가는 것이 아닌가? 현대로 보자면 말 위에서 현란한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단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니라 서커스단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들이 말위에서 보여주는 호기는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무관이 전장에서 펼칠 전투에서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에 위대한 성인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그가 무관시험 도중 말 위에서 낙마하여 낙방한 사례가 있다. 어릴 적에 단순히 승마를 하다 떨어진 것이라면 장군이 실수를 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무과시험을 본 순간 낙마할 정도로 고난이도 기술이란 점을 알았다. 소설 <곡마>는 여해와 월하선이 무관 지기택 종사관을 두고 서로 기 싸움을 하는 것이 간단한 소설의 이야기 내용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관이 수행하는 마상재 행사라는 점이다.

 

마상재 행사를 조선의 무관이 모여 훈련하는 훈련원에서 주관한다. 훈련원과 관련하여 내 직계 할아버지 중 1분이 훈련원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업무를 수행했다. 훈련봉사는 조선시대 군사 시재(試才)와 무예 훈련 및 병서 습독을 관장하는 무관이었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손자 되는 분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았다. 기록을 찾아보니 무과시험에서 갑2위로 차석을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정도 무예능력이 뛰어나기에 그런 마술(馬術)을 부릴 수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들의 형제나 사촌들을 보면 만호(萬戶)직을 맡은 분도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약간 촌수가 먼 친척들이 전장의 장수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하신 분들도 많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하면 대부분 글만 읽고 상황이 닥치면 도망치는 거드름을 피우는 부류가 많았지만, 임진왜란 전후의 무관은 참으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이란 도서를 보면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무관의 반란이 두려워 결국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완전히 청나라의 말굽에 밝혔고, 조선은 아무런 힘조차 내지 못하는 약소국이 되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다.

 

<곡마>의 소설은 보면 조선의 악운이 시작되던 찰나의 배경인 것 같았다. 시대적으로 조선이란 점은 나오지만, 그 시대가 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여해의 어머니 기련은 지아비를 잃은 청산과부이다. 한국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각해지던 시절은 병자호란을 거친 후이다. 병자호란 이전까지 사대부 양반들의 무능함과 부패함이 극을 이루었고, 인조반정 이전 광해군이 만든 중립외교가 붕괴되면서 명·청 교체시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 후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는데, 그중에 여인들이 참 많았다. 몸값을 주고 풀려나거나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이 조선에 왔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집에 오니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청나라 오랑캐에게 몸을 판 더러운 여자라고 욕하고, 친가에 가니 가족들은 여자가 시집이 가면 그 곳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여성들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이런 여자를 환향여(還鄕女)라고 하나, 우리는 속된 말로 화냥년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비극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당한다. 전쟁 중에 성질이 포악한 군대가 마을을 접수하면 우선 남자들은 모조리 죽인다.

 

여자는 겁탈하고, 아이들은 노예로 삼는다. 집에 남편이 죽게 되면 조선시대 여성은 재혼을 하지 못한다. 그대로 청산과부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조선초기에는 재혼이 가능했지만, 사회적 모순은 이렇게 억울한 사람만 만들어낸다. 남편이 죽으면 시댁에서 며느리에게 강요하는 게 있다. 그것은 열녀문을 가문에 세우는 것이다. 여해의 어머니 기련(성이 기씨인지 모르나)은 그런 시대의 조류에 태어난 여자인 것 같았다. 병자호란 이후 열녀문에 대한 집착,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담바고(담배의 옛말)가 유입되는 처음에 장죽(긴 대나무)에서 곰방대가 들어올 정도라면 17세기 후반 내지 18세기 초반으로 보이며, 더 중요한 점은 조선통신사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수교가 단절되다 광해군이 일본과 다시 수교를 놓았으며, 인조 역시 청나라와 명나라 관계에서 일본에 대한 외교 전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궁궐의 당상관들이 흥청만청 주색을 밝힌 점을 본다면 숙종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효종과 현종은 평소 검소하고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신하들의 관계에서 마찰이 심했다. 개혁의 의지를 가진 2사람은 실세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는 자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빼앗는 게 아니라 농민의 세금을 줄이거나, 사대부들의 특권을 다소 제한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구중궁궐 높으신 관료가 주색에 빠지려면 많은 재물이 필요하고, 그 재물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다. 왜구의 침입도 문제지만, 주색과 재물에 미친 탐관오리들은 더욱 문제이다. <곡마>는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처해진 시대적 맥락과 상황은 반영된 점을 알 수 있다. 소설을 보면서 생각한 점은 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입장이나, 작가가 여성과 남성이냐에 따라 글의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관이나 혹은 이야기풀이 방식이 다르겠지만,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점에서 뭔가 색다른 점이다.

 

전에 정유정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야기 구조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도 섬세한 내면을 작은 표정과 행동을 묘사한 점에서 매우 독특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곡마>에선 조선통신사 행렬에서 마상재를 펼치는 건 양반출신의 무관이다. 시대적 조건에 종사관이 우위에 있지만, 소설은 여해와 월하선의 라이벌로 나오는 애정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양반과 천민, 승려와 역죄인의 등장에서 시대적 한계와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관점도 보인다.

 

승려 명단과 사대부 청산과부 기련은 절대 맺어줄 수 없는 운명이다. <곡마>에선 주요 인물관계 속에서 복선과 암시를 많이 넣는다. 그래서 충분히 독자가 중간에 그 장치를 읽어내면 주인공들의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확인하고, 심지어 박수무당이 중간마다 날리는 말문에서 이미 운명이 정해져도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인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소설이 계속 이야기를 나가자고 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이 결코 헛된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월하선이 아무리 못된 계략을 꾸미고, 주색으로 고위관료를 유혹해도 그녀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고, 여해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다. 한쪽은 권력을 이용하여 몸을 빼앗으려 했고, 한쪽은 마음으로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길 원했다. 제 아무리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좋지 못한 것만 유지하여 폐단이 심각했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작가가 여성이기에 여성의 관점에서 많이 서술한 점이 많았다. 여해의 친구 장포가 전지수로 활약하자 많은 아낙네들이 장포를 두고 군침을 흘린 점에서 단순히 사랑이나 성욕을 남성만이 소유물이 아니라 여성들도 가지고 있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여성 자체가 능동적으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시대적 벽을 알고 있다. 그런다고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여우로 소문난 형조판서의 아내나, 기방의 명기 월하선, 군마장의 구경꾼 여해조차 자신의 마음이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단지 그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형조판서 아내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고, 월하선은 주색으로 권력을 움직였다. 여해는 오로지 달리는 말을 통해 종사관으로 다가간다. 앞의 2여자와 달리 인간의 본능이나 혹은 집착에 매달리지 않는다. 마상이란 재주에 감동하여 거기에 마음을 다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킨다고 했는가? 종사관 옆의 판관 이두홍도 처음에 여해를 두고 놀리거나 혹은 위협했지만, 극적인 상황에 이를 때 여해를 믿어주었다. 인간에게 믿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쉽고도 간단하다. 사소한 철사 하나들이 계속 이어져 단단한 커다란 철근이 되는 것이다. 단지 철근을 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곡마>는 사실 마상재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보단 마상재를 통해 인간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서로가 원하는 사람이 있어주면 행복해한다. 하지만 만일 서로 같이 있어주지 못하더라도 그 상대방이 계속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아니나 안심은 된다. 소설 <곡마>에서 이미 단추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운명의 뒤틀림은 시작된다. 그래도 적어도 세상 어딘가 내가 살아있고, 나의 정인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들이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만큼은 살아있다는 게 삶의 흔적이다. <곡마>는 그런 삶을 살았을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지금보다 먼 과거라도 지금 우리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공감이나 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전해주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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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하기 -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설득과 소통의 법칙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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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과 저번 정권을 지나오면서 한국사회는 이상한 조류로 흘러들어간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민주 공화국이어야 하는데, 만주 참주국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 사회적 변화와 정치권 파동에서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생활력이 계속 감퇴하고 있다. 정치에 대해 논하자면, 한국사회 특히 기성세대나 어른들은 정치학 9단이다. 정치학이나 철학, 기본적인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요, 심지어 그런 책도 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만 모이면 정치이야기이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TV에서 카드라 하는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우스꽝스러운 형태를 야기한다.

 

한국 정치사회적 이슈에서 다룰 것들이 너무 많으나, 최근 가장 위험요소가 된 것은 지진이다. 지진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지만, 경주에서 6.0 밑까지 흔들리는 다소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이 원인을 찾아 나선다.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 은 우선 지구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주술사들이 피지배계층에게 충성심이나 신앙심의 부족이 원인이 아니라 지구 기상이변에 대한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구 지표면 아래 맨틀이란 마그마가 움직이는 곳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지진이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강한 폭탄이 폭발할 때이다. 그러나 화산활동에 의한 지진보다 위력이 약하다. 아는 동생이 추석 때 친척집에 가니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을 두고 북한 핵실험이라고 말하던 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구과학 전공자까지는 아니나, 지구과학을 고교시절 이과전공으로 선택하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본다면 웃음만 흘러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회적 이슈에서 과학적 근거를 두고, 정확한 사실성을 두고 이야기할 게 오히려 반대로 감정적으로 혹은 의구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일반 국민들이 이런 이야기를 믿고, 혹은 이런 이야기를 믿도록 뒤에서 부채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문제의 해결보단 오히려 문제의 회피를 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우선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부처의 정보를 기대한다. 일반 국민들이 기상을 관측하거나 지진정보를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기술적 도구가 없다. 공공성으로써 기술력과 장비를 보유한 정부기관의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정부부처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또는 대응하지 못하면 국민들은 불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 기관을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정부수장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하는가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국가는 정부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국회, 정부, 법원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대통령이다. 정부기관 수장이 각 정부부처를 관리하지 국회에서 정부부처를 운영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행정으로 이어지고, 특히 재난의 경우는 생명과 직결된다. 대통령의 판단력이 많은 것들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력이란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의 사고세계에 존재하지 타인의 관점에서 알 수 없다. 이때 판단력을 전달하는 방법은 말과 글이다. 글은 적는데 시간이 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정보를 주고받기에 적정하지 못하다. 결국 실시간적으로 대응하려면 글이 아닌 말로써 사람들과 대화해야 하고, 그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보조차 말로 들어야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인간에게 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말 한 마디가 진짜 여러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한 일이다.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게 옳은 것인가? 정치사회적으로 대통령은 늘 많은 일들을 마주친다. 오랜 검토 후 판단을 내리는 사무도 있지만, 실시간으로 처리할 일도 많다. 급박한 재난이나 혹은 갑자기 조성된 회의나 만남, 상대편이 날리는 예측불허의 질문 역시 그렇다. 여기에 얼마나 잘 대응을 하는가? 여기에 얼마나 상대방을 이해하는가에서 발언자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

 

<대통령의 말하기>, 참여정부시절 청와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던 그가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 대화, 회의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정권에 따라 대통령 및 정부기관의 국무위원들이 잘 한 업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때는 좋아도 뒤에 가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당시에는 문제라고 여긴 것이 뒤에 가서 다시 재조명 받는 일들이 허다하다. 노무현이란 이름은 어떻게 볼지는 관찰한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단지 그가 비교할 부분은 역대 대통령과 비교하여 대화와 토론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대화와 토론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꺾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토대로 상대방의 의견을 들은 후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한국은 토론문화가 엉망이다. 평소 자신보다 어리거나 직급이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말이 더 좋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이 답을 틀리거나 몰라도 그냥 그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대화는 결국 소통이고, 소통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면 상대방에게 잘 이해되거나 공감되어야 한다.

 

진보진영의 문제점은 아마 이런 부분일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논리와 이성이 없지만 감수성과 감정을 내세우고, 진보는 논리와 이성만 내세우는 것이다. 최근 진보진영은 논리와 이성조차 상실(아니 왜곡)하고, 감수성만 잔득 내세우는 산파 극이 되어버렸다. 자칭 엘리트나 지식인들의 글에서 보이는 내용은 잘난 문구나 용어만 들어가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하면서 대중을 호응을 얻지 못하면 정치적 기반이 붕괴된다. 평소 나처럼 그냥 자신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한국사회에 살아가는 국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말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은 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하기>에서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때와 집무할 때, 그리고 퇴임 후의 모습을 담았다. 대화에서 나오는 말이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가지고 있는 인생철학에서 나온다. 대화를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입장이 필요하다. 단지 말의 방식에서 거창하기보단 담백하고 소박하게, 어려운 문구보단 쉬운 단어, 강렬한 의미를 전달할 때는 반복적인 배치가 인상적이다. 이런 대화법은 반드시 대통령만이 아니다. 2015년 가을 나는 학술세미나에서 한국의 신화와 문화콘텐츠 관계성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발표를 듣는 청중들이 만일 국내 교수나 연구자, 혹은 학생들이면 몰라도 외국인들이 많았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고, 그 국가나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인 신화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 신화는 더욱 낯선 존재다. 그때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대본을 만들지도 않았고, 내가 작성한 논문조차 보지 않았다. 오로지 화면에 올라간 자료를 보았으며, 대사는 머릿속으로 암기하여 발표했다. 이때 착안점은 외국인이다 점이고,한국문화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의해 가려진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탈근대 내지 탈서구화를 거치면서 한국 역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했다는 점을 밝혔다.

 

공통적인 영역에서 한 부분으로 선택하여, 문화적 가치와 형태, 그리고 흐름전개 과정으로 설명했다. 생각해보면 계속 이런 것들에 대한 지적연구와 관련 문화콘텐츠 작품에 대한 리뷰와 글쓰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나 역시 제대로 완벽하게 이해해야 했다. 외국인들 특히 서구문화권 학자들이 동양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신화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 세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식 문화에 적응되지 않기에, 내가 발제를 하고, 질의를 받을 때 한국의 지식이 아닌 서구의 지식으로 응대해야 했다. 물론 영어까지 소화할 수 없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이 보는 시각은 분명 다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나만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대화는 타인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흥미를 끌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가? 위트와 유머, 그것을 만들어가는 재치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란 오랫동안 정제된 시간의 축척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그의 얼굴에도 그의 표정에도 그의 말과 글에도 드러난다.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비서관 윤태영은 노무현의 말을 정리할 수 있고 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어도, 그렇게 말을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모두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할 수 없더라도 말 그 자체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거짓 없이 솔직한 맛이 필요하다. ()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 인()과 말씀언()자가 결합되어 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이 믿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말은 달콤할 수만은 없으며, 때로는 잔혹할 수도 있다. 상대에게 말을 할 때 그 어느 것보다 진실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진실이 담긴 말을 어떻게 상대에게 접근할지는 그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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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26 14:45   좋아요 1 | URL
슝~~~
 

<벤허>하면 생각나는 것은 아주 웅장하게, 매우 거대하고 그리고 상당히 잔혹한 4륜 전차 경기일 것이다. 영화사에서 <벤허>는 상당히 유명하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벤허>1959년에 제작된 것이고,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무성영화 시절 15분 정도 내외로 상영된 적이 있었다. 흑백영상에서 컬러영상, 그리고 카메라 기계 및 기술의 발전에 컴퓨터 그래픽까지 더해지니 2016<벤허>Activity 느낌을 불어넣은 영화인 것 같았다. <벤허>는 본래 종교적인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 원작이고, 영화로 제작되면서 거의 1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로마시대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그들의 저력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보다는 그리스 문화권에 대해 조금 더 관심 있게 보았다. 주로 플라톤이 살던 시절이고, 살라미스 해전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통한 그리스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보았다. 로마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앞부분 정도 보았다. 로마에 대해 깊이 알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시오미 나나미의 <로마 이야기>를 보는 게 정답일 것 같은데, 그 부분까지 들어가지 못한 점이 아쉽기도 하다.

 

<벤허>라는 영화는 서기 원년, 즉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시각부터 시작되는 영화고, 영화의 말미 역시 예수가 죽고 나서 벤허가 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다소 영화에 대한 내용이 유출되고 있는 점에서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는 게 다소 매너위반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도 이미 <벤허>라는 영화는 오랫동안 전 세계의 영화 팬들에게 사랑받았기에 중요한 건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어떻게 찾아가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평점을 보았다. 관객들에게 제법 좋은 점수를 땄어도,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바닥을 면하지 못했다. 내가 만약 <벤허>라는 영화에 점수를 몇 점을 줄 수 있는 가에서 10점 만점에 대략 4점이면 많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제법 잘 나온 부분은 볼거리이다. spectacle이란 어떤 이미지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반영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어지는 사회, 그리고 그 이미지가 강하게 다가오는 매체 중에 하나가 영화라면, 영화 역시 강렬한 spectacle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벤허>가 종교의 목적성을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세계 속의 관객이 열광하는 것은 역시 경마경주다. 내가 별을 4개를 줄 수 있는 것은 경마경주의 강렬함, 그리스와 벌이는 해전의 묘사, 초반에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부임할 때의 웅장함, 그리고 이런 장면들을 시시각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쇼트들이었다. 영화의 쇼트가 지나치게 많았다. 초반 벤허와 메살라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갈등을 빚는데 계속 카메라가 클로즈업(Close-up)으로 정면을 보다가 어느 순간 벤허의 등 뒤에서 메살라를 바라본다. 어깨너머 샷(Over the Shoulder Shot)은 벤허의 시각으로 본 메살라는 상당히 불만이 차 있는 모습이었다.

 

도중에 카메라 기법에서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은 Walking-out side로 등장한다. 이 촬영기법은 카메라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돌아간다. 그 뜻은 피사체의 사이가 큰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벤허>는 로마에 의해 몰락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역사적인 맥락으로 본다면 기독교적인 우월주의를 나타낸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작품세계, 즉 서구의 사상이 매우 가부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권능, 그리고 아버지의 권능을 인정받은 큰아들에게 영광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서사구조는 유럽신화에서 그리스로마신화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많은 사람을 열광하게 만든 것처럼 북유럽 신화로 만든 <토르> 역시 그렇다.

 

주신인 오딘은 정신을 잃고, 토르는 몰니르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몰니르를 찾은 순간, 아버지와 자신을 배신한 동생을 물리치고, 다시 아버지의 권능 아래 살아간다. 한국이 가부장제도가 서구사회에 의해 깨진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서구영화들이 문화적으로 가부장의 권위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권력이란 주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 즉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아들보단 아버지에 의해(혹은 그 대리인에 의해) 거세당한 자만이 남아있다.

 

<벤허>는 유대인들의 왕자, 벤허의 삶과 모험으로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민중과 다른 왕자였으나, 민중이 품고 있는 분노와 증오를 느꼈고, 민중과 같이 예수의 운명적인 날을 보고 회개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자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다. 옛날에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길가에서 돌멩이를 맞아 죽거나 이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나병에 걸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예수가 죽은 후 비가 내리자, 그 빗물에 의해 병이 나았다는 점은 종교영화에서 비과학성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내세우는 것과 같다.

 

물론 영화 이전에 소설부터 그런 요소를 집어넣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이 뭔가 부드러운 요소보단 지나치게 억지스럽게 진행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서사구조나 연출력의 한계성을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는 액션을 강조하는 해전과 전차대회가 최고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화는 이미지와 소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지만, 영상과 소리는 결국에 시나리오라는 서사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방법이다. 그렇다면 서사적인 관점에서 <벤허>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

 

<벤허>는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 벤허로 통해 만들어낸 Fact + fiction이다. 사실적인 내용에 허구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이기에 최근에 이런 영화를 두고 Faction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 로마제국의 거대함을 볼 수 있었고,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예수를 죽였지만, 초기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하지만 이후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전후관계성,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영상의 시작과 끝만을 생각하지만, 영화의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서사는 끝으로 끝맺음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벤허>가 종교성에서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문화가 결국 승리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왕자 벤허가 예수를 신봉하는 점이나, 전차대회에서 로마를 누르고 이기는 것도 그렇다. 전차대회는 로마만이 아니다. 아프리카, 이집트, 터키, 게르마니아 등 수많은 종족과 국가들이 출전한다. 그 안에서 벤허가 이기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벤허가 승리한다. 이 영화의 이면에는 기독교 문화가 존재하는 백인들이 앞으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점을 은밀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2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로마 신화이다. 처음 벤허가 말에서 낙마하여 크게 다칠 때 가족들은 그들의 유일신을 향하여 소원을 빈다. 하지만 메살라는 다른 신에게 빈다. 미네르바라는 단어가 메살라의 입에서 나온다. 로마인이었던 그에게 미네르바는 지혜와 무용의 여신인 아테네를 의미한 것이다. 아테네 여신의 이름을 딴 그리스 국가에서 아테네 도시국가가 있다. 그리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배출한 국가였고(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지만, 마케도니아 인간이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그리스의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그리스로마의 문화에서 그들의 신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 최고는 번개의 신 제우스이고,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신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이었다. 번개와 포도주에서 그리스 문화가 농경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은 유일신이 아니라 다양한 신을 믿은 것이다. 로마가 다양한 신에서 유일신으로 바꾼 이유는 한국에서 무속신앙이 삼국시대까지 활발하다가 불교로 바꾼 것과 같다. 종교가 다양하면 신앙이 저마다 다르고, 군중들은 신앙에 달라지고, 중앙정부에서 통치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에 정치는 종교적인 요소를 항상 동원한다.

 

이스라엘에 처음 온 빌라도나 로마의 관료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를 박해한 이유는 종교라는 신앙심은 강력한 정신적 에너지로 바뀌어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세상이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사상의 위력은 육체적 고통까지 초월하는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발휘한다. 빌라도는 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말한다. 사실 종교가 철학과 인류애하고 연결되면 위대한 사상으로 연결되나, 군중에 의한 집단심리로 이어지면 파시즘이 되고 만다.

 

아프리카나 혹은 원시민족의 전사들이 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창 하나를 들고 적진을 향하여 돌격할까? 그들의 의식을 보면 조상과 신이 전사를 지켜주며, 전사의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다. 원시적인 주술행위지만, 그 모습은 근현대적인 사회에서 볼 수 있다. 개인은 죽어도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는 영속한다. <벤허>가 전차대회에 관객을 유도했다면, 그런 종교적인 부분은 은밀하게 관객에게 침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제작진이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사란 점이고, 영화의 맹점은 할리우드 방식은 너무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나 전차대회 장면은 상당히 당시 상황을 고증하려 하지만, 남녀(밴허와 에스더) 간의 관계는 현대 미국을 많이 반영한 것 같았다. 이스라엘은 영미문화권이 아니라 중동문화권이다. 영화에서 시대적 배경은 중동이지만, 삶의 형태는 최대한 영미문화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내가 주장하는 바에서 이 영화는 백인의 우월주의 요소를 상당히 배경에 깔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이란 이름, 신의 이름과 권위 그리고 사명까지 받은 아들과 왕자라는 점, 메살라는 로마의 인간이고 벤허의 의형제(동생)이란 점에서 미국의 기독교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까지 포용한 위대한 문화를 가진 곳이란 점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국의 백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제법 많은 경제력과 정치적 권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하고 있는 가혹행위를 생각하자면, 기독교적인 사랑과 포용능력은 왠지 모를 가식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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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2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참 교묘한 장치가 많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6-09-21 21:57   좋아요 1 | URL
저는 묘한 야응이가 좋으냐, 영화를 보니 겉만 번지르하지 안은 거의 구시대적 가치관으로 가득했습니다.

기억의집 2016-09-2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이 서구 학자들에겐 더 인정 받는다 하더라구요. 시오노 나나미같은 경우는 일본 우익 역사사관을 가지고 있어 일본의 제국주의의 눈으로 로마 제국주의를 서술했다고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미국 영화사가 백인우월주의가 강하죠. 올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흑인배우들이 불참석을 선언할 정도면 여전히 미국은 백인우월주의가 득세인 것 같아요. 제가 미드 로앤오더 열혈 팬이어서 거의 다 봤는데 미드 보면 그나마 kkk단같은 백인우월주의를 범죄로 보는 시각이 강해서... 많이 나아진 듯 하긴 해요.

저는 요즘 미국에서 출판된 책을 연달아 읽고 있는데, 그래도 미국애들은 기존의 구시대적인 프레임을 깨려고 엄청 싸우더라구요. 한국언론에서 보도되는 것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았어요. 앨러바마 이야기같은 영화가 오늘날 다시 봐도 재밌잖아요. 하퍼 리같은 작가가 지금 시대에 봐도 대단한 것 같아요!

만화애니비평 2016-09-22 08:28   좋아요 0 | URL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아직 읽지 못했는데, 목록이 올라가는군요.
나나미 역사 같은 경우 그런 식민사관이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벤허가 지나치다 못해 어설프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미국이 기존 구시대적 가치관을 깨려고 하나 대중매체는 여전하고, 지식인들의 저술활동은 활발하고, 그러고 보니 촘스키 같은 지식인들의 노년화가 참으로 마음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