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립 반 윙클의 신부(일어: 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 영어: A Bride for Rip Van Winkle)> 영화 제목에 대해

 

영화제목은 왠지 간단해야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하고 다가가는 것이 쉽다. 만일 발음이 어렵거나 단어가 길게 되면 사람들은 뭔가 특이한 것을 알겠지만, 뇌리 속에서 금방 잊어진다. 이런 점에서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는 그동안 한국에서 <러브레터>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를 기대하고 온 관객에겐 많은 희비가 오고갈 작품이다. 내 생각으론 희극이나 비넣기극적 요소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별개의 세상이 열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영화가 20세기 말에 개봉하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배경이 된 훗카이도는 눈의 왕국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를 드러낸다.

 

그래서 아마 이 영화를 두고 이와이 슌지라는 네임드에 의해 이끌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여 로맨스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파국으로 스쳐가니 말이다.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영어 Rip Van Winkle를 찾아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잠만 자고 있는 사람으로 검색된다. 그렇다면 “Rip Van Winkle”가 있다면 “A Bride for”는 누구란 말인가? 영화는 감독이 남성이나, 주인공은 여성이다. 남성감독이 여성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잠만 자고 있는 사람모두 여성이란 점이 특징이다.

 

물론 신부는 잠만 자는 사람이나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일 수도 있다. 처음 붉은 우체통에 나타난 나나미(한글로는 7가지의 아름다움)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고, 마시로(한글로는 아주 하얗다는 의미)는 잠만 자고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 앞부분을 보면 <립 반 윙클의 신부>처럼 2사람 모두 신부이고, 2사람 모두 상대방의 신부인 것이다. 다소 동성애적인 코드가 숨겨져 있지만(이런 점에서 미국 페미니스트 인문학자 매릴린 옐롬 신간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 자매애에서 동성애까지, 그 친밀한 관계의 역사>을 읽어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아닌 서브컬쳐 내에서 이런 동성애적 요소는 깊이 자리 잡고 있다.

 

2. <립 반 윙클의 신부>와 서브컬쳐의 관계성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과연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감독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을 느낀 분들은 아마 대중문화만 젖은 분일 것이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보는 미디어의 관계성은 대중문화에 의해 주도되고, 그것은 다양성이나 개성을 존중하지 않은 일관적인 시선을 요구한다. <립 반 윙클의 신부>를 보면 상당히 일본 오타쿠적 문화가 깊이 개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애적 요소에서 일본은 이미 코믹 유리히메(백합공주)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유리라는 단어가 백합을 의미하고, 백합은 일본에서 여성의 동성애를 의미한다.

 

애니메이션에서 <유루유리>, <카나 메모>,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케이온> 등은 동성애적인 코드가 숨어있지만,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나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본 리뷰를 작성중인 남성인 나조차도 <유루유리>, <케이온>을 매우 재미있게 봤다. 동성애적 코드라 해도 너무 극단적인 요소를 추구하지 않고, 재미나 유쾌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장기간 TV에서 방영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동성애라는 문화적 코드는 매우 낯설고도 이상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서 직접적인 성행위를 강조하는 일부 레즈비언 세계만이 아니라 친구끼리의 우정적 요소가 많다.

본인은 여성이 아니라, 뭐라 말하기가 다소 곤란하나, 가끔 대학이나 회사에서 보면 화장실을 갈 때 남성은 혼자 가는 반면, 여성은 2명이서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남성의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 2명이 화장실을 사이좋게 손잡고 가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동성애가 위에서 말하듯이 그런 극단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우애성에 대한 스킨쉽 내지 프랜드쉽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나나미와 마시로의 관계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부터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3. <립 반 윙클의 신부><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연장선인가?

 

<립 반 윙클의 신부>이 다소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이유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약력이다. 그는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보통 영화감독이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작품의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본인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시나리오를 전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러브레터>같은 멜로드라마를 제작했으니 그가 <립 반 윙클의 신부> 말고도 다른 영화에 주인공에 나온 점을 일반 대중들은 쉽게 생각할 수 없다.

 

그것도 제목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단어를 올린 이유는 더욱 그렇다.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TVA26, 25화와 26화를 새롭게 극장판으로 만든 <End of Eva>가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20세기 말, 인간의 소외 군중 속의 고독, 14살 소년의 가족과 사회에 대한 고민이 사이코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흔히 말하여 중2병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사회나 한국사회는 그동안 전통사회를 유지하여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어른이 어린아이를 돌보고 가르쳤다. 공동체문화는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관장했다.

 

그러나 서구화에 따라 인간사회는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경되고, 인간은 공동체 안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이 구성원을 조직하는 부품이 되었다. 인간소외가 발생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이란 자신을 관심으로 대해주는 보호자가 아니라 단지 어른들이 모인 사회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카리 신지라는 어린 소년으로 보는 세계라면, <립 반 윙클의 신부>는 결혼적령기에 도달한 성숙한 여성이 보는 세계이다.

 

4. 이와이 슌지 감독과 안노 히데아키 감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가이낙스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가이낙스에서 애니메이션감독을 맡다가 퇴작하여 KARA라는 미디어제작업체 사장이 된다. KARA 설립 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다시 재각색하여 만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을 제작한다. 그런데 이와이 슌지 감독과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애니메이션 감독이지만, 상당히 우수한 실사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Love and Pop>은 일본 여고생들의 원조교제에 대해 날카롭게 다룬 작품이고, 영화 <식일(式日)>은 인간의 느끼고 보고 싶은 이상과 괴리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식일>이란 작품을 보면 남자주인공이 이와이 슌지이다. 2000년에 나온 작품으로 가이낙스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이후 실사판 및 애니메이션판 <큐티 허니:Re)를 만들기 전이다. 나름 실험적이고 과감한 영상을 보여준 <식일>에 이와이 슌지는 영화배우이면서 작중에서 그의 직업처럼 영화감독으로 나온다. 세계 최고의 오타쿠,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만든 실사영화에 <러브레터> 감독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미 2사람은 상당히 문화적 감성을 나눈 것으로 알 수 있다.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음악 몇 가지가 중요한 장면에서 나온다. 특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는 주인공 나나미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 매우 슬픈 상황,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음악이다. 이 음악이 유명해지게 된 동기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에서 아스카가 양산형 에바와 싸우면서 나온 OST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아스카, 이와이 슌지의 나나미, 1사람은 어린 소녀, 1사람은 성숙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세계란 가혹하고 처절하다.

 

이뿐만 아니라 안노 히데아키의 KARA 홈페이지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그때 회사에서 만든 로고가 보이고, BGM이 들리는데, 바로 그 음악이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도 나온다. 이와이 슌지 감독이 만든 <립 반 윙클의 신부>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작품세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이 음악이나 혹은 촬영기법(나나미가 거짓 이혼청부업자에게 속을 때 묶은 방)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실사 및 애니메이션 영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으나, 그 감독이 누구하고 작품을 같이 이끌어 나갔던 점도 중요하다.

 

5. 가식의 세계 일본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플래닛이란 마이너계통의 SNS에서 나나미는 친구와 애인을 만난다. 그의 남편을 SNS에서 만났고, 그녀는 바로 약혼과 결혼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나나미는 주변에 친척이 없어서 플래닛의 아무로를 통해 가짜 친척을 초빙하고, 그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를 해결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로부터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말을 듣고, 남편의 불륜 대상자가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말한 어느 남자에게 속아 그녀는 강제로 이혼을 당한다. 이혼을 시어머니로부터 권유당하는 장면에서 아무로가 시어머니의 의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로는 플래닛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정보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인간이었다.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찾아 자신의 이윤을 추구한다. 생각해보면 왜 이렇게 일본사회가 차갑게 되었을까? 인간관계성에서 일본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나나미라는 여성은 상당히 힘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나름 순수하고 진지하며 언제나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세상을 그녀를 속이고 외롭게 만든다. 인간(人間)이란 한자어는 사람 사이라는 의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있어야 사회적으로 인간이란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나나미에게 친구가 많이 없다는 점, 모든 것을 SNS에서 도움을 받는 점은 일본사회가 진정한 인간관계가 파탄난지 옛날이란 사실을 상기해준다. 나나미의 어머니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이혼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리고 나나미는 함정에 빠져 바람을 피워 이혼을 당했기에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없다. 인간관계가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없게 된 세상이었다. 이혼을 당한 후 혼자 외롭게 걸어가는 나나미는 모든 세상의 관계성에서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6. 해체된 가족, 조립된 가족

 

나나미는 부유한 여성도 아니고, 누군가 의지할 곳도 없는 여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였다. 호텔에서 머물며, 호텔 관리인을 일하던 그녀에게 다시 아무로가 다가온다. 여유가 넉넉하지 못한 나나미에게 들어온 제안은 아르바이트였다. 그것도 주말 결혼식 하객으로 말이다. 결혼식에 등장한 남성은 이미 결혼한 사람이나, 새로운 애인을 위해 결혼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몸이나 새로운 결혼식에 친척을 부를 수가 없었다. 대신 찾아온 이들은 아무로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 임시로 조립된 가족이었다.

 

조립된 것들은 다시 해체되기 마련이다. 조립된 가족관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와 남동생이 생긴 나나미에게 순간적으로 가족이란 안식처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로 뒤풀이한 후 모두 흩어지고, 이날 처음 본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1잔 더 하자고 했지만, 가게를 나온 후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만들어진 가족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맡은 2사람에게 실제 가족을 물어보니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돌아갈 곳은 있지만, 자신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고독과 가식, 허무함이 넘치는 일본사회의 단편을 그렇게 희극적인 장면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광야에 버려진 청소년들이 느낀 소외라면,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 어른들 역시 고독과 소외에 몸부림을 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나미는 그런 세계에서 오직 솔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인 점에서 아이러니한 세상이란 점을 엿볼 수 있다. 호텔에서 계속 근무하던 나나미가 어느 날 아무로에게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어느 고급저택의 메이드로 근무해달라는 요청이었다.

 

7. <립 반 윙클의 신부>의 집

 

그녀가 도착한 집에 주인이 없고, 단지 집을 지켜주면 된다고 했다. 혼자인 줄 알았던 나나미는 전에 만난 마시로를 만나게 된다. 마시로는 일하는 하우스메이드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집주인이었다. 집안을 보면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다. 방 한쪽을 보니 맹독을 지닌 생물이 있고, 마루에는 파티를 한 흔적이 있었다. 옷이 가득한 방에는 이상한 옷들이 가득했다. 메이드복, 교복, 각종 의상들, 나는 처음에 어떤 오타쿠의 방 내지 코스프레를 즐기는 사람의 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시로의 직업이 배우였고, 그녀가 맡은 역할은 AV(Adult Video), 일본 포르노 여배우였던 것이다(AV장르에 여배우가 교복이나 메이드복을 입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언제나 술에 취해 밤늦게 찾아온 마시로, 나나미에게 찾아온 마시로는 이상하게도 나나미에게 과도한 스킵쉽(나중에 키스도 한다)을 하고, 나나미에게 많은 따뜻함을 느끼려 한다. 나중에 마시로가 몸이 아픈 와중에 전화를 대신 받은 나나미는 그녀가 AV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이상한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로는 나나민에게 마시로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친구라고 말해준다. 영화를 보면 계속 느끼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식의 세계에서 소외를 느낀 채 고독한 하루를 보내는 점이다.

 

나나미는 아무로에게 위조된 마시로의 비밀을 듣는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절실한 친구, 모두와의 관계성이 끊긴 나나미가 마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나나미는 단순히 하우스메이드로 월100만엔의 급여가 아닌 진정한 마시로의 친구로서 대해준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마시로를 위한 눈물에서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서로 파티를 연다. 마시로는 나나미에게 같이 죽어 줄래? 라고 묻는다. 마시로는 이미 시한부인생이기에 그렇게 묻는 것이나, 나나미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8. 나나미의 슬픈 승리

 

다음날 아무로는 마시로의 집에 장의사를 데리고 와서 시신이 2구가 있을 것이란 한다. 하지만 나나미는 살아있었고, 그녀의 손에 고동이 잡혀있지만, 독이 든 것이 아니라 평범한 고동이었다. 마시로는 아무로에게 같이 죽어줄 사람을 원했다. 만일 나나미가 속물적 인간이었다면 같이 죽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나미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한부 인생, 말기암 환자이던 마시로에게 세상을 그야말로 허무의 세계이다. AV세계 목숨 걸고 촬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껴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말기암이라면 그동안 암이 진행되었으며(몸무게가 10가 감소한 점에서 암이 발병한 시기가 알 수 없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술로 밤을 보내고, 독이 든 동물을 구입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된 마시로, 그녀가 AV배우로 많은 돈을 벌어도 결혼하객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나와도 마시로는 나나미처럼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 마시로가 아무로에게 같이 죽어줄 사람을 추천할 때 아무로는 나나미를 추천했다.

 

인간은 나를 위해 우는 것은 가식이나, 남을 위해 울어주는 것은 인간애의 표본이다. 나나미의 눈물에 마시로는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다. 나나미의 가식 없는 행동에 그녀는 주변으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당했다. 그녀의 마음은 죽음을 앞둔 1사람의 영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나나미의 승리를 슬픈 이유는 그녀의 삶이 옳다는 것이 마시로의 마지막 모습에서 보였고,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나나미의 입장에서 힘든 고통이었다.

 

9. 왜 그들은 옷을 벗는가?

 

영화를 보면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나나미와 아무로는 마시로의 유골단지를 들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찾아간다. 마시로의 어머니는 딸이 못마땅하고, 유골도 받기 싫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찾아온 2사람을 맞이해준다. 딸의 죽음을 두고 가슴에 한이 맺힌 그녀는 마시로의 유산(거대한 액수)을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독한 소주를 마시고, 과거와 현재의 얼굴이 다른 마시로를 말하며, 그녀를 찾아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때렸다고 고백한다.

 

오열에 젖은 마시로의 어머니는 슬픈 눈물을 보이면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당황한 나나미와 아무로는 그녀를 말리나, 그녀는 옷을 다 벗고 정좌한 후, 입은 연다. 자기도 옷을 다 벗으니 이렇게 부끄러운데, 마시로도 너무 부끄러웠을 것이라 말이다. 차를 가지고 와서 소주를 입에 대지 않은 아무로는 그 모습을 본 후 자신도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술을 미친 듯이 마시기 시작한다. 오직 이윤만 생각하던 현실주의자가 눈물을 흘린 채 나체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로란 존재가 그동안 아무로에겐 돈줄, 어머니에게 꼴도 보기 싫은 못난 딸이었다.

 

하지만 1사람이 세상을 보내고, 마시로란 인간 역시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점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의 존재가 가식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롭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있다. 알몸의 인간에게 쇠사슬을 모두 벗어던진 자연인이다. 순수하게 자연인이란 존재로 마시로의 죽음을 위로한 것이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인간의 관계가 점차 오프라인보단 온라인으로 이어진다. 친구와 연인조차 SNS와 인터넷으로 매개된 경우가 많다. 겉모습은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의 진실성은 상대방에게 요구하기가 참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나미처럼 진지하고 솔직한 마음을 알아봐주지 않을까? 영화에서 나나미는 아무로가 옷을 벗는 장면을 보면서 그녀 본인은 벗지 않은 이유는 이미 그녀는 가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식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나나미처럼 살아가면 직장에서 쫓겨나고, 시댁에서 쫓겨나며, 심지어 목숨 그 자체도 박탈당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나미의 삶을 부정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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