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빛의 노래
유병찬 지음 / 만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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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란 것이 유럽에 등장할 때 화가들은 조형화나 초상화와 같이 실제 대상을 그리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사진이 그대로 선명하게 색을 나타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로 화가들은 새로운 그림을 찾아내어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사진까지도 초점과 빛의 굴절 그리고 사진촬영방식에 따라 새로운 사진영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카메라는 실용의 도구만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사고, 특히 디지털카메라의 보급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사진은 여기저기서 찍어대는 일상이 되었다.

 

사진이 가진 미학적 가치는 그저 재미로서만 혹은 도구로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진으로 보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카메라는 사실 남이나 혹은 다른 대상물을 관찰하는 기계이다.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세상과 동일하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내 눈만이 아니라 카메라로서 정리된다. 카메라의 사진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 서브컬처 계열에서는 코스튬플레이 문화에서 가끔 보면, 미학적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코스튬플레이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사람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찍는 것으로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만 찍는 것은 예술로서 의미가 없고, 단지 인물사진만 불과하게 된 것이다. 사진을 보는 것에서 사진의 미학이란 인간만 대상으로 할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것을 할지가 세세하게 길이 갈린다. 적어도 사람이 있든지 혹은 없든지 카메라 속에 드러난 대상보단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손길이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사진에는 객관적으로 무엇이 찍혀있지만, 주관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는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연히 알라딘 서점과 네이버블로그 활동하면서 알게 된 유레카 작가의 사진집을 보았다. 내가 그동안 많이 보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림은 웅장하고 거대한 것들을 주로 많이 올린다. 특히 매년 12월 말에 나오는 달력에 항상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만든 달력 카탈로그는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사진예술이다. 사진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에 소리처럼 귀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본다. 눈으로 보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볼 수도 혹은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본다는 것은 곧 어느 시각자의 의지와 선택이 달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사진이란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그저 주어진 것에 익숙해졌다. 사진에 익숙해진 만큼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선택으로 세상을 보지 않은 것이고, 그에 따라 세상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저 살아온 셈이다. 유레카 작가는 그런 것을 거부하여 사진을 찍고자 했다. 자연의 조금만한 모습에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커다란 잎에서 물이 고여 흘러가는 것은 자연이란 살아있는 것이고, 문명의 세계에 우리가 살아있어도 자연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이웃하고 있다.

 

자연에 대해 파노라마의 거대한 장광을 보여주기보단 오히려 안개로 가려진 도시와 유전자를 확대한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과학문명의 답답함을 보여주었다. 미세한 자연의 세계지만, 그 미세한 거대한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사진에 담아내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당연한 것들만 보고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 안에도 작은 자연은 있었고, 새들도 하늘을 향하여 날고 있었다.

 

우연히 길가다가 보는 마네킹에서 마네킹의 얼굴이 없는 것은 우리의 얼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표정 없는 얼굴, 개성 없는 인간, 물질만능에 길들여진 인간에 의해 버려지는 쓰레기들, 우리 일상의 언제나 우리를 버리는 연습을 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산내면에 간 커피숍이다. 현대사회에서 커피가게는 늘 사람들이 붐비고, 차 한 잔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평, 저런 평이 오고간다. 산내면이라고 하니 아마 경주인 것 같다.

 

경주시는 관광과 문화역사자원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사람들, 하지만 경주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농사짓고 사는 농부가 있다. 밖에서 논밭을 보고 온 늙은 노총각 2명이 다방찻집에 들어온다. 다방 커피 맛은 뛰어날리 없다. 바리스타가 있어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틱 커피를 넣어 만들기도 그렇다. 대충 커피가루에 프리마와 설탕을 넣어 휘젓는다. 그런데 그것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커피의 맛은 커피 속에 들어가는 재료의 질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만들어내는 손맛의 지경일 수 있다. 미각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게 아니라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콤해질 것이다. 결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해 농촌에서 농사짓는 노총각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우랴? 손님 2분이 오니 마담은 김양보고 가게 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이 미묘한 기분이 든다. 그들도 사람이고 위로받고 싶은데 세상은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소외받은 자와 것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산내면 별다방의 커피가 쓰면서도 달달한 것은 아마 그런 것이다.

 

그런 삶의 미학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마지막 통기타를 잡고 연주하는데 몰두하는 어는 남성의 모습이다. 작은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말없이 기타와 악보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그에겐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 소중한 것들이 있다. 비록 다른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그런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사진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심지어 지나가는 새와 들판에 올라와 있는 잡초까지도 말이다. 사진에 찍힌 대상들은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말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 이 세상 앞에서 무덤덤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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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0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울컥.^^

만화애니비평 2015-09-01 15:39   좋아요 1 | URL
책 감사합니다. 울컥
 

 

1. 들어가면서

19세기 서구사회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경제의 성장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 등 다양한 문명을 발전해왔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서구문명은 팽창하게 되면서 기존의 서양사회가 아닌 동양을 비롯한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서구사회의 문명은 합리주의를 토대로 정치적 이념과 사회경제적 요소들을 비서구권에 적용시키려 했다그 과정에서 서구는 기존 동양문화가 서구문명보다 우월하지 못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탄생하게 되었다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의 관점은 동양사회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체계적인 요소가 부족하므로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겼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 서구에 비해 미개하고 열등하므로서구인들은 동양인들을 계몽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이것은 서구사회가 동양을 침략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서구의 침략은 기존 영토노동력자원뿐만 아니라 동양사회의 문화까지 침범했다동양문화에서 다양한 문화에서 가장 심하게 훼손당하는 것은 종교 내지 신앙이었다서구사회의 지배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동양권에 대하여 근대화가 진행되었고그 결과 기존 동양사회에서 전통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했다한국사회 역시 20세기에 도래하면서 전통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21세기가 도래하면서 서구사회화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 세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이 도래하면서 기존 서구사회의 편견과 억압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동양문화권 및 제3세계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世界化)라는 슬로건은 획일화된 국가의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유하게 되었다한국사회는 근대문명 및 민주주의 도래로 서구화를 진행시켰으나세계화를 위한 문화적 정체성에서 그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서구화 과정에서 많은 전통문화가 해체되었고그중에서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민간신앙이나 민속종교 등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쇠퇴했다.


신화(神話)는 어느 특정한 국가와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가진 무의식적인 집단 심리이다신화를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고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성을 확립하는 것이다한국 신화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한국 신화를 어떤 매체로 통해 전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영화나 드라마 등과 같은 대중매체보단 만화애니메이션웹툰 등과 매체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따라서 본 논문은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만화애니메이션 작품을 소개하고작품에 등장하는 한국 신화에 대해 연구하였다.

 

2. 한국 신화의 특성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는 단군신화(檀君神話)이다. 단군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는 정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으로 다스리기 시작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에게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기고, 인간 세상에 삼백 예순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다가와 자신을 인간이 되길 바라자,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양식 삼아 동굴에서 100일 동안 견디라고 한다. 호랑이는 인내력이 부족하여 굴에서 뛰쳐나온다. 곰은 환웅과 약속을 지켜 인간의 여성이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웅녀였고, 웅녀는 환웅과 혼인을 맺은 후 단군왕검을 출산한다. 단군왕검은 고조선(古朝鮮)을 설립하고 한국인의 국가 시조가 된다. 단군은 고조선을 1,500년 정도 다스린 후 1,908년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국가 시조인 단군왕검이 홍익인간 정신으로 만든 고조선이란 국가를 설립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군신화의 특징은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점이고, 신이 인간으로 변신(출산)하여 지상에 살다가 다시 신으로 돌아가는 점이다. 단군신화 이후 한국의 고대국가 건국신화를 보면 신적인 존재가 하늘에서 강림하거나 또는 알에서 나와 최후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변신하는 모습으로 이야기도 등장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단군신화는 단순히 신화로서가 아니라 전통종교로서 그 흐름이 이어져있다. 한국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것으로 본다. 단군신화는 한국 최초의 건국신화이기도하나 한편으로 무속신화(巫俗神話)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왕검(王儉)은 국가의 지배자인 군주를 의미하나, 단군(檀君)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수명이 다하여 사망할 경우 넋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천(歸天)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국인의 시조인 단군은 신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의 군주가 되어 다시 신으로 돌아간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서양사상의 토대가 되는 플라톤의 사상에서는 신과 인간은 분리된 존재고, 인간이 죽으면 저승세계인 하데스의 궁으로 가게 된다. 플라톤의 사상에서 신은 완벽한 존재이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신에 대한 경건함을 가짐으로서 신과 이어지려고 했다. 현재 서양의 문화적으로 자리 잡은 크리스트교 역시 신과 인간은 완벽하게 분리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신화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서양의 사상과 달리 한국 사상의 토대가 되는 한국 신화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분리보단 일체형으로 보여준다.


신과 인간이 일체적 요소라는 점은 단군신화만 아니라 다른 한국 신화에서 보여준다. 한국의 신화는 크게 2가지로 나눈다. 1가지는 단군신화와 같이 건국영웅들이 출현하여 국가를 세우는 건국신화이고, 다른 1가지는 건국신화처럼 기록으로 전승되는 게 아니라 민간에서 구비 전승되는 무속신화이다. 무속신화는 간의 생활에서 민중들을 보살피는 민간신앙의 신들에 다룬 이야기다. 그래서 무속신화는 민중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며,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를 보여준다. 건국신화는 신적인 존재가 인간세계의 왕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라면, 무속신화는 인간적 존재가 신격으로 화하게 되어 인간사를 관장하는 주요 신들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무속신화의 신은 역사 내지 기록으로 전승되는 건국신화처럼 고정되는 게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같이 변화한다.


단군신화가 가진 샤머니즘(shamanism) 요소와 더불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도교(道敎), 불교(佛敎), 성리학(性理學) 유교(儒敎) 등이 민간신앙에 흡수되어 계속 반복적으로 변천되었다. 무속신화에서 다루는 신은 같으나 이야기의 구조나 인물, 배경 등이 지역에 따라 다르며, 시기적으로 또한 변한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변화하는 무속신화의 특징은 인간들의 상상력으로 재생산되므로 이야기가 끊임없이 생산되므로, 스토리텔링으로 그 가치를 지녔다. 근대문물이 유래되고 서구화의 도입은 한국 무속신화를 해체시켰으나, 최근 전통문화의 문화적 가치와 보전을 위해 무속인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한국의 전통문화는 단순히 문화재로서 관리하기보단 스토리텔링의 기능을 발휘하여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에서의 한국 신화

일반 대중들이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방법으로 영화, 드라마, 연극 등과 같은 대중매체로 접할 수 있지만, 이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과 같은 서브컬처 콘텐츠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그리고 상황들은 카메라 내지 실사영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림 위에 그려놓는 만화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이 더 재현성이 좋다. 게다가 애니메이션(Animation)은 생명이 없는 존재에 대해 혼을 불어넣어 생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Animate란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특성에 따라 신화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예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1988, 스튜디오 지브리),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 1997, 스튜디오 지브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尋神隠, 2001, 스튜디오 지브리) 등이 있다. <이웃집 토토로>는 나무에 사는 정령을 소재로 한 작품이고, <모노노케 히메>는 재앙의 신과 신의 숲이 등장하는 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일본의 다양한 신과 요괴들이 등장한다. 생명이 없는 존재에 대해 영적인 존재를 불어넣는 애니미즘(Animism)적 요소에 일본의 전통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일본 신화와 전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재를 작품 내 등장인물로 내세운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일본 내에서만 아니라 한국과 전 세계의 나라에서 흥행하여 작품성과 재미를 인정받았다.


신화의 상상력을 작품에 반영하여 일본 특유의 문화를 통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한 장면을 다른 문화권에서도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국 내 존재하는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화애니메이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는 단군신화이고, 그 신화에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환웅이다. 환웅이 웅녀를 선택한 모티브를 활용하여 만든 만화로 주간만화집지 소년챔프에서 연재 완료된 <사신전>이란 작품이 있었다. <사신전>의 시놉시스는 인간 세상에 내려온 환웅은 웅녀와 힘을 합하여 성품이 난폭한 호랑이족을 사해로 추방한다.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자 호랑이족이 다시 인간계를 침범하고, 평범한 고교생으로 환생한 환웅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미소녀 사신(四神)을 만나 각성하는 것에서 작품은 종결난다. <사신전>은 단군신화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요소에서 사신이란 영물(靈物)적인 존재를 등장시켜 도교적 요소를 작품 내 반영하였다.


또한 단군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라이트노벨 및 만화로 출간된 <나와 호랑이님>이 있다. 환웅이 웅녀와 결혼했는데, 그럼 남은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모티브를 부여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와 호랑이님>의 시놉시스는 주인공 소년이 호랑이와 웅녀의 후예 사이에서 연애를 다루고 있는 러브코미디 장르로 전개되며, 작품 내 추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보다는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요괴들이 등장한다. <사신전>은 기존 세계가 붕괴되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건국신화의 요소를 반영하였고, <나와 호랑이님>은 단군신화를 이야기가 시작되는 설정으로 삼아 민담과 전설의 요소를 반영하였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의 주제와 흐름이 서로 다른 방향을 전개되나. 기본적으로 단군신화를 소재로 하여 만든 작품인 점에서 한국인에게 익숙한 점과 더불어 작품의 독특한 설정과 개성을 보여준다.


무속신화를 소재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으로 만화 및 웹툰 작가 주호민의 <신과 함께> 신화편이 있다. <신화 함께> 신화편은 인간세상에서 저승이 만들어진 계기와 저승에서 죽은 인간을 관장하는 무속의 신들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별소별전으로 하늘의 신 옥황상제가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에게 저승과 이승의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시험한다. 인품과 성격으로 형인 대별왕이 뛰어났지만, 지식과 계략은 동생 소별왕이 뛰어났다. 동생 소별왕은 속임수로 이승의 왕이 되었고, 형인 대별왕은 저승을 주관하는 왕이 된다. 이 점에서 무속신화에 등장한 인간사는 이승은 부조리한 반면 저승은 공정하다고 여기는 부분에서 무속신앙은 당시 살아가는 민중의 억압된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대별왕이 저승의 왕이 되어 죄를 지은 인간을 벌을 내리는 염라대왕 및 저승 시왕(十王)을 임명하고, 염라대왕은 죽은 인간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차사를 임명하기 위해 차사전강림전이 나온다.


그리고 서천 꽃밭을 관리하는 사라도령과 그의 아들 할락궁이를 이야기인 할락궁이전과 집터와 집을 수호하는 신의 이야기인 성주전녹두생이전이 있다. 작가가 창작으로 만든 지장보살전칠융전도 있지만, <신과 함께> 신화편에 등장하는 신들은 본래 신이 아니라 인간에서 시작된 점이 특징이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인간이던 시절, 부조리한 현실을 이겨내어 신이 된 점에서 제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무속신화를 소재로 개봉된 작품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고스트메신저>가 있다. <고스트메신저>21세기에 도래하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죽은 자를 관리하는 저승이 디지털화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저승세계를 묘사하였다. 무속신화가 고정된 이야기로 전승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하여 변화하는 것처럼, 한국 신화는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에서 계속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 마무리하면서

세계화에 따라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상으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하고 있다. 다양한 부류의 국가와 민족이 모여 공감대 이상으로 상대방의 개성과 특징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화의 정신은 다양성과 상호공존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한국과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세계로 향하여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화적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매체가 필요하고 그 매체는 영상매체가 탁월하다. 그동안 한국은 서구화로 인해 자국의 전통문화를 크게 훼손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이것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영상매체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사라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으로 제작하고, 더 나아가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지컬 등과 같은 대중문화로 제작하여 많은 소비자들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신화는 그 민족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며, 그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구조이다. 만화애니메이션은 상상력으로 가득한 매체이며,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매체다. 신화가 만화애니메이션에게 전해주는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무속신화가 종교적으로 무속신앙으로서는 쇠퇴했지만, 무속문화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성묘나 제사를 지낼 경우 산신제를 올리고, 집과 자동차를 새로 구매할 때 고사(告祀)를 지낸다. 어촌지역의 어민들은 선원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뜻에서 무속인을 불러 용왕제(龍王祭)라는 굿판을 벌인다. 무속문화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야기의 모티브는 항상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특정지역과 상징물을 아는 것보다 한국인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신화는 그 문화집단의 보편성을 잘 보여주는 점에서 한국인의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신화를 이용한 만화애니메이션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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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이미지 존재론

이미지라는 것은 현대사회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대해 묻는다면 난감할지 모른다. 존재적인 구성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게 이미지가 아니라 관념적인 영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상이 존재해도 그것은 만지거나 느끼거나 할 수 없다. 가상의 투영체가 현실의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왔다. 흔히 2D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 즉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지로 존재하는 캐릭터는 현실부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한편으로 파생실재(hyper real)의 존재들은 설사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해도 우리에게 과연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 TV 드라마를 그나마 보던 때 최고의 인기배우가 최진실이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그의 아이들은 각종 악플과 루머로 시달린다. 그러나 최진실은 육체적으로 소멸해도 영상에서는 존재한다.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반드시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연예인조차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도 영상에 남겨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광이라면 반드시 찾는 히로인이라면 오드리 햅번이나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일 것이다. 그녀들은 이미 육체적 존재는 현실은 없다. 하지만 영화광들은 그녀들의 사진을 모우고, 때로는 다른 여배우들이 그녀를 흉내 내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영상은 인간의 죽음조차 죽음이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불러낸다.

 

이미지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강사 분이 갑자기 <공각기동대>를 이야기할 때 그런 존재론적인 부분이 대략 이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실재로 있다고 여긴 게 과연 진짜였는가? 공각기동대 극장판 <Ghost in the shell>에서 인형사란 존재가 등장하여 의체를 가진 인간의 기억을 해킹한다. 어느 남자가 사진을 보며 자신의 가족이라고 동료에게 소개하나, 막상 그 사진은 강아지가 찍혀있다. 그가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기억이란 과연 사실인가? 허구인가? 가상의 존재에 대해 성행위도 마찬가지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후속 극장판 <이노센스>의 경우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그 소녀의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를 기본 자료로 삼아 섹스로이드의 운영체계로 만든다.

 

인간이 아닌 기계인간을 인간과 성행위를 한다는 설정과 더불어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영상으로 가능하기 시작했다. 이미지라는 가상의 영역이 인간에게 미치는 여파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반드시 이미지는 위와 같이 배우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나 공상과학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 그 자체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광고를 넘어가면 그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 섬뜩한 자본주의의 미학

현대인들에게 신용카드를 가지지 않을 자는 얼마나 있을까? 나도 보통 마트나 술집에 결재할 때 신용카드보단 현금결제를 하려고 한다.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나 사고, 술집에 가서 소주 몇 병 혹은 막걸리 몇 통 정도 마시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보단 현금을 우선하려는 이유는 카드의 이용은 물리적으로 자신의 지갑에 꽂힌 화폐의 수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통장에 있는 잔액을 소비한다. 현대인들은 화폐를 지폐나 동전으로 들고 다니겠지만, 나머지 재산을 봉건시대처럼 집에 금화나 보석으로 나두지 않는다. 유럽 봉건사회에도 은행은 있었지만, 은행 내에 화폐 역시 금화와 보석이다. 강도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그대로 사라질 존재다. 현대의 화폐는 지폐보단 은행에 기록된 사이버머니다.

 

공인인증서를 로그인하여 은행계좌에 보이는 금액이 나의 현재 재산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의 숫자로 보일 뿐, 자신의 손 안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신용카드의 신기루란 바로 그런 식으로 작용하기에 내가 당장 어느 정도 결재해도 많이 쓴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게 해준다. 하지만 1달에 1번씩 우편으로 날아오는 대금청구서는 자신의 소비생활의 비극성을 알려준다. 신용카드의 경제적 패턴이 우리 일상을 깊이 침투할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미학에 빠지게 된다. 원하는 데로 물건을 구입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자유는 오로지 그 개인의 자유이며 권리다. 그러나 뒤에 다가올 경제적 책임은 자유롭지 못한 결박이 된다. 신용카드 광고에서 모든 것이 그 카드 하나로 되는 순간, 우리는 카드로 인해 모든 것이 매개되고, 자신의 생활에 불편함까지 느끼게 된다.

 

예전에 내가 사람들을 내 차를 태우고 대구 팔공산에 간 적이 있었다. 팔공산에 위치한 파이데이아 인문연구소 북 카페를 가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 같은 도서모임 한 분이 내 차를 보며 놀라듯이 말했다. “어라 중형차인데, 수동이네요. 게다가 하이패스와 네비도 모루 분리되었고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된 상태도 있었지만, 일부로 차량을 수동을 구매했다. 기름연료도 아끼고 구매비도 저렴하나, 더 중요한 건 운전은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지 차의 편리성에 기대기가 싫었다. 하이패스를 지날 때 단말기를 이리저리 옮기고, 일일이 하나하나 정리하는 내가 재밌게 보일지 모르나, 나는 “자동에 의존하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안 되면 엄청 불편해요.”라고 했다.

 

신용카드의 광고로 돌아가면 신용카드 하나가 모든 것을 통용하게 해준다. 버스지하철, 식당과 핸드폰요금 결재, 심지어 불우이웃돕기가 카드로 세금도 카드결재가 가능하다. 분리된 기능이 하나로 모이면 모일수록 편리함은 증가하나, 만약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더욱 놀란 것은 모바일 기능이었다. 모바일기능


이 작동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마트폰 단말기를 분식하고 교체하는 순간 엄청난 수고가 들인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해킹이 만연하고, 스마트폰에 금융기능은 더더욱 금융범죄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에게 편리한 도구는 인간 그 자체에게 더 불편한 족쇄를 걸게 해주는 함정이 되었다. 문명의 이기와 편리함에 빠진 인간, 결국 그런 일들은 인간 스스로 의존적이고, 시스템에 의해 사육되어가는 수동적 존재로 전략한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도구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루소가 이 책을 저술할 때가 1750년 중반 정도다. 250년 훨씬 지난 지금의 문명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광고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40대 남성, 실제 그가 찾아야 할 사람은 늦은 나이라도 같이 삶의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미래를 같이 열어갈 사랑을 찾아야 하는 게 바르다. 광고 속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다를 수 있으나, 광고에서는 신용카드의 기능이 모든 일상을 차지했다. 인간의 곁에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대체된 것이다. 어째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자본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의 만능을 보여주는 광고는 자본주의의 미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30초 광고는 식당에서 식사할 때 잠시 본 기억은 난다. 3분은 아니다. 3분에 나온 광고는 신용카드의 아름다움보단 차라리 소름이 돋는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였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다가가는 것처럼 말이다.

 

3.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

위 제목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책 제목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에게 다양한 문명혜택이 돌아가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불만투성이다. 실재 이 책에서는 미국의 1960~1980년대 이야기를 해준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늘어나는데, 왜 불량품이 많은지, 소비자가 불량품을 구매하여 항의해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은지 말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그런 형태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의 중심으로 가는 점에서 소비사회에 소비자는 권리를 누리는 경제적 주권자가 아니라 단순히 기업의 이윤을 위해 소외되는 존재로 전략했다. 문제는 소비하는 주체들은 거의 대부분 많은 국민이나, 그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기보단 그저 그 개인의 영역으로 돌린다.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에서 자유적인 조건이 이런 식으로 전도된 게 아닌가 싶다.

 

신자유주의 국가 중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도 되겠지만, 우선 미국이다. 자본주의 영역은 자유주의와 함께 겹치어 갔지만, 자유의 조건은 철학에선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가깝다면, 현실의 자본의 차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을 따라가는 것처럼 말하나, 고전경제학의 애덤 스미스나 최후의 보루인 존 스튜어트 밀까지 넘어가면서, 밀의 <자유론>을 보면 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성의 절대적 판단으로 그 사람의 판단과 논리가 중요하며, 타인에 대하여 이타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아마 이런 논리라면 현대에선 보인 신자유주의라는 게 자유주의철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드러난다.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지 않고, 자본의 자유로서 움직이나,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 그 자체는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자본은 자본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점이다.

 

돈을 은행에 넣고 가만히 넣고 있다면 예전에는 이윤이 제법 되었지만, 금리의 조정으로 통장의 이자가 낮아지면서 어느 누군가는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돈을 제대로 굴리지 못한다고 여긴다. 결론은 누군가 계속 돈을 굴리는 일이 생기면, 반대로 누군가는 굴리지 못할 것이고, 돈을 굴리지 못한 사람 중에는 그나마 생계수단을 유지할 수 있는 부류도 있는 반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처음에 나온 자들은 빈민의 여성이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활보할 때 국가세금을 낭비하는 자들을 매도하고, 그들 대부분이 흑인여성이라고 미디어에서 떠들던 시기를 예를 들었다.

 

전에 TV를 보면서 미국의 어느 백인관료가 흑인 슬램 가를 돌면 젊은 흑인남성에게 군에 입대할 것을 제안한다. 미국은 거대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이며, 군대를 운영하려면 첨단화된 시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군인이 필요하다. 군인을 선발하려면 장군과 장교 같은 지휘관과 고급인력이 필요하나 아래로 부사관과 사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력으로 본다면 장교와 부사관보단 사병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가난한 흑인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흑인여성 특히 아이를 양육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각종 감시와 언론의 매도성은 그들은 계속 그 사회에서 고립 내지 또는 소모되어야 할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위직과 재벌가문의 후예들은 군에 가지 않거나 면제받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군에 가는 것은 평범한 집의 남성이다. 그런데도 그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군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부분보다 오히려 남녀 간의 불평등으로 전도시킨다. 특히 미디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또는 문제가 터지면 그 일들을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물꼬를 돌린다. 최후에는 이상하게도 그런 문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반드시 그런 일은 군대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아니라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처음 주제인 이미지, 이미지는 TV의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문잡지, 인터넷, 스마트폰, 심지어 길가에 네온간판과 전단지도 포함이다.

 

우리의 관심사를 우리의 생활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접해도 아무 관계없는 것들로 대체된다. 가끔 연예인 기사가 뜨면, 주변에 사람들이 화제로 삼아 입을 올린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게 나보고 뭐 어쩌라고?”, 여자연예인들이라면 “내하고 만날 거야? 데이트할 거야? 평생 나하고 손잡을 일도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언론에 접하는 비극적 소식에 대해 논하면 사람들은 “뭐 좋은 일이라고, 나와 관계없자나.”라고 한다. 아무 관계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 반면, 타인의 불행한 사고에는 자신의 무관계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지만, 이제는 언론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고가 시보다 더 철학적인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들은 전체화와 개별화란 이중적인 잣대로서 서로의 영역을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어떤 A란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B라는 사람에게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 보는 나는 C라는 사람이다. 결국 B가 당하는 상황에서 D라는 인물이 무관심하게 보고, 만약 내가 A의 비극을 논하고 B의 상태를 이야기하더라도 D는 요지부동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좋지 않은 일 대신 어떤 이익에 대한 일이라면 어떨까?

 

4. 비판과 비판에 대한 비판, 대안은 무엇으로?

어떤 부당한 압제에 대해서도 그 압제자와 주변 무리들은 자신들의 테제가 있다. 되도 않은 논리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잘 포장한다. 그렇다면 이에 반대하는 안티테제가 있다. 안티테제들은 그들의 주장과 의도하는 바를 폭로하고 저항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관계에 있던 자들이 서로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있고, 압제자이든 아니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태클을 거는 일도 있다. 반대를 위한 게 과연 무엇을 위한 반대인가?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인가? 목적보단 집단적인 행동인가? 과거 독재자와 압제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분명 안티테제의 효과는 정당성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안티테제만으로 가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무조건 하기와 안 하기의 경계선에서 나오는 것은 힘겨루기고 힘겨루기가 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 하나를 밟는 일이었다. 주로 우리나라에선 80년대까지라 보면 될 것이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정치적 수단은 무력에 의한 통치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지식과 행정에 의한 통치로 전환되었다. 특히 지식이 무지식의 대중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식은 국가권력과 시장자본과 결탁하기 시작했고, 언론과 미디어에서 지원했다. 지식의 세분화, 관료행정의 책임보단 하위행정에 책임전가로 이어졌다. 지식과 권력은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고, 지식에 대한 폭로 역시 지식에 의해서였다.

 

지식이 인간을 속이는 도구로 되고, 속임수를 파헤치는 도구로 되었다. 강연자분이 말한 것과 뒤풀이에서 나온 4대강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4대강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정치 관료와 국가행정기관의 합작품이다. 국토부와 환경부를 주도한 작품이다. 마치 거대하게 포장한 이 사업을 만약 우연히 하천 인근을 지나면 허구임을 알게 해준다. 문제는 당시 설계과정 시에 제대로 된 현장조사를 하지 않았고,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수준이라고 한 점에서 현장과 설계의 관계가 전혀 맞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국토부가 사업자와 승인권자로 되었다면 협의권자는 환경부다.

 

환경영향평가 협의 시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위에 드러나지 않은 점은 사업자와 협의부서, 그밖에 환경관련 학회조차 문제를 제대로 의문시하지 않은 것이다. 행정기관 말단은 이 일을 실제로 담당하나, 이 일에 대한 권한은 없다. 협의과정은 담당자로부터 하나, 사업에 대한 진행은 상부에서 결정한다. 관료주의적 행정은 그 문제의 해결권을 가진 자와 그 일을 수행하는 자가 분리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말단관료는 관련규정에 따르고 결재권이 없어서 책임회피가 되고, 상부기관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지 않기에 담당자에게 문제를 제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핑퐁게임 같은 피해보는 사람만 방황하여 결국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비단 이런 문제는 4대강만이 아닐 것이다. 그마나 4대강은 하천이 공공의 재산이고, 개인이 소유할 수 없고, 개발조차 어렵다. 하천구역은 친수구역으로 설정하여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유도하지 않은 이상 하천은 복원 및 보전구역으로 설정된다. 개발은 주로 이루어진 곳은 도시지역과 도시인근지역이다. 도시내부와 도시인근은 결국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다. 도시의 개발이 머리 아픈 것은 개인의 이익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도시의 개발은 주거환경개선, 교통소통, 공원부지로 통한 자연환경 향유라는 슬로건이 따라 붙는다. 문제는 도시의 땅은 국유지와 공유지보단 사유지에 기반 한다. 특히 부동산의 이익은 나의 영역이 아닌 옆에 있어도 영향이 온다.

 

대규모아파트 주거단지가 오면 모두 환영하고, 만약 혐오시설이 오면 반대를 한다. 강연에서 말한 푸코의 저항을 실현하려면 먼저 그 시설이 오는 기능적 요소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도시에서 아파트단지가 오고, 특히 재개발이 오면 땅값이 몇 배로 오른다. 집값이 오른 사람은 좋겠지만, 나중에 자기가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갈 수 없으면 문제가 된다. 대규모공사는 부동산증가라는 이익과 더불어 공사 시 분진, 소음, 진동, 토사유출이 문제가 되고, 완공 후에는 교통체증, 교통소음, 일조권장해, 빛 반사 등이 문제가 된다.

 

환경적으로 본다면 개발은 이중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개발은 필요하나 막상 그 지역의 주민들의 입장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나 주변 이권단체와 관련단체가 사업자와 국가세력을 지지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부산에 당초 공원지역이나 공공시설이 유치되기로 한 지역에 대규모 상업시설이나 공업시설로 용도 변경된 경우가 있다. 그 일을 추진하는 자들은 자본가들이고, 그 자본가들은 정치행정과 결탁한다. 문제는 주민이 피해를 보는데도, 그 주민들은 자본가들에 대해 반발하면서 그 자본가와 결탁하고 있는 정치행정들에게 비판 없는 지지를 보여주는 일들이 있다.

 

강의내용에서 계몽이 새로운 억압과 차별을 만들지만, 계몽적인 요소가 배제된 경우 도시의 난잡한 개발이 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기능은 주거만이 아니라 인간생활 그 자체를 영위하는 곳이다. 도시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고,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 어느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개발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파괴된다. 도시는 토지라는 개념이 사유지로 되어 있으나 토지 아래의 지하수와 암반, 토지 위의 대기층은 사유화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일정장소의 파괴는 그 장소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이어진다.

 

물론 도시개발이 중요한 사업이 되어 어느 지역에 큰 발전이 될 수 있겠지만, 때로는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지역의 특성과 지역주민의 입장보단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이 많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열쇠는 개발사업자와 관료집단보단 지역주민에 의해서 유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주민에게 그런 지식적 배경이 없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이다. 그런다고 반대만 외쳐도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하는 것과 어느 것이든 반대하는 것은 한계성이 다다른다. 대안의 영역은 삶에서 다른 방식을 구현하기를 바란다. 도시에 대한 예술적 기능이란 바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만들게 해준다.

 

삶의 예술성에서 과거 농촌에서 농번기에 서로 농가를 부르는 농민들은 그게 삶의 형태다. 그러나 지금은 무형문화재 내지 민속 문화로 본다. 과거 어부들이 용왕제를 지낸 것이 근대에 이르러 미신에서 다시 그 마을의 축제 내지 그 사회의 문화행사로 전환된다. 농촌과 어촌의 행사도 사실 도시화라는 이름아래 묻혀간 전통들이다. 부산은 기본적으로 농업보단 어업이 활성화되어 있고, 어항이 있는 마을에선 용왕제 외에도 다양한 민간문화가 남아있다. 그런데 만약 주변이 개발되어 어항조차 존폐위기라면 그 문화의 유지에도 치명적인 위기로 될 것이다.

 

공간의 파괴는 정신적 파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어느 지역의 도시개발사업에서 당산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나무는 그 마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로 민간신앙에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아마 몇 십 년 전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 다양한 목공용품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환경영향조사로 나무 존치상태를 점검하여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환경영향평가 제도로 통한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반영되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마을은 원래 울산에 위치했지만, 변두리에 위치했으며, 아파트보단 주택이 많았고, 상업시설도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였고,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도시의 발전으로 대규모 주거단지로 많은 인구가 생기고, 이에 대한 인프라로 대형마트로 설립되고, 도로가 넓어진다. 이런 발전은 부동산의 증가로 되고, 세를 들어가는 영세민 입장에서는 그 지역에서 장사를 포기하게 만든다. 만약 그 지역주민에게 적정한 대안이나 혹은 그들이 안심하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외면했다. 실제 서울수도권에서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신축된 대규모 상업시설로 들어갔으나, 그곳의 임대료가 너무 비싼 나머지 결국 나오게 되었고, 그 건물은 추후에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에 매각되었다.

 

영세한 지역 상인들에게 고객은 필요하나, 그 고객들이 너무 대규모로 조성된 곳으로 이동하면, 결국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없다는 점이다. 강의를 들으며 전에 읽은 최병두 교수(대구대학교 지리학과)의 <환경갈등과 불평등>이 생각났다. 위천공단 조성에서 당초 경상북도가 지역자치단체에서 대구로 이전되고, 대구시는 위천공단에 대한 문제로 중앙정부와 지역주민과 갈등을 빚어왔다. 대구지역 일자리와 산업시설용지 부족은 산업단지 조성이란 정책적인 방법이 있지만,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대규모 단지가 조성되면 사실상 대구주민보단 입주업체에 해당되는 직종과 직렬이 들어온다. 대구지역 주민들이 기계공학 전공자나 자동차학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만약 자동차공장이 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대규모 부지조성 시 곤란한 점은 자본이 중앙정부로부터 나오면 부지공사 시 지방업체가 주도되는 게 아니라 대규모 건설사가 주도되며, 지방업체는 소외된다. 또한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이 입주하면 많은 수익이 지역주민에게 가는 것보단 수도권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부산항의 무역의 이익에서 발생하는 세금이 지방자치단체보다 오히려 중앙정부로 가듯이 기업의 이윤과 국가의 세금이 중앙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단지 오는 것으로 환영하고, 집값이 오른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삶의 질을 저하시킬 우려를 그들 스스로가 만드는 것과 같다.

 

도시의 기능은 뭐든지 환경과 연결된다. 공간의 배치성에는 수질, 대기, 토양, 소음진동 등과 같은 환경적 영역과 충돌한다. 공원녹지 역시 자연환경과의 배치에서 인간생활환경과 밀접한 연계가 되어 있다. 강의 도중 해운대 동해남부선 선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로 공간부지가 광대하고, 주변지역 철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으며, 선로구간에서 보이는 경관은 아주 탁월하다. 그런 공간을 공공재산, 즉 시민의 휴식과 여유 공간이 아닌 기업이 호시탐탐 노린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가 해운대 달맞이고개다. 1990년대 정도만 해도 그렇게 많은 가게가 입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맞이고개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가게가 입주하면 산을 깎고 길을 내어야 하고, 그러면 녹지의 축이 좁아진다. 달맞이고개 도로 밑에 작은 공연장을 만들었는데, 자연석이 아닌 콘크리트 내지 화강암 재질은 녹지의 축을 파괴한다.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던 과거의 해운대 앞바다는 자연적인 모습이 농후했으나, 현재는 점점 갈수록 부산시내의 커피숍과 고급상점이 많은 곳처럼 변했다. 게다가 주변에 아파트나 대규모 주거단지의 조성은 더욱 환경적 부담을 키운다. 모두가 보기 위해서 그곳을 보전하는 것이 바르나, 다들 개인적 소유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자연은 파괴되고, 아름다운 환경은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간다. 공유지의 기능이 사유지화 될수록 환경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자들이고, 그에 반해 빈곤층은 나쁜 공기에 노출되고 불량한 주거환경에 의해 심신이 불편해진다. 도시에서 환경정의는 바로 이런 문제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삶의 예술이란 말은 각 개인의 삶에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민간에서 전해온 예술은 특별히 예술적인 목적이나 예술인이 모인 게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예술로서 만들어 온 것이다. 단순히 무조건 변화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변화라는 그 자체가 무리한 시도가 아닌 하나의 흐름에 따라 온 것이다. 대안의 선택에서 무조건 시도하려는 것과 반대하는 것에서 대안의 자세에서 다른 길을 보여주거나 혹은 잠시 중단하여 후에 의론을 나누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런 안건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예술인들이 하는 예술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나 혐오시설 신축예정지에 환경오염 피해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퍼포먼스로 하는 것 역시 예술이다.

 

그 예술은 특정한 세계관이 아니라 우리 삶이란 일상에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고주의보다. 언론과 미디어는 국민의 눈과 귀를 길들여 미디어에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에게 봉사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알아가는 것이다. 강의 자료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것처럼 제작은 그 지역의 자본을 투자하여 이익을 회수하려 하는 이고, 노동은 그곳에 투입되는 노동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느 곳을 갈취하고, 갈취당하는 곳에서는 노동으로 착취당한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행위라고 한다면 그 행위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고 해체하여야 한다. 그 행위는 일회용이 아니라 연속되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료 뒷부분에 르페브르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엉뚱하고 도발적인 행위를 하던 그들은 끊임없이 도시 안의 자본주의에 대해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부터 이상하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행위에 대한 목적성을 전달한다. 그들을 접하는 대중들은 그들의 도발에 처음 그들에게 분노하겠지만, 상황주의자들은 그것이 목적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언제나 당연한 것만 받아들이려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그 인식을 바꾸는 충격이 필요하다. 예술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의 생활에서 삶의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수단으로 자본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지만, 자본 그 자체에 종속당할 수만은 없다. 만약 종속당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권력자들에게 평생 소비만 하거나 노동만 하거나 또는 감시만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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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영화로 국내에서 <부러진 화살>을 이어 <변호인그리고 <소수의견>이란 작품이 나왔다. <부러진 화살>의 경우오판심리로 인해 수학교수의 투쟁을 다룬 것을 본다면 <부러진 화살>은 어느 개인과 권력을 가진 자의 대립구조로 이어져 있다이에 반해 <변호인>과 <소수의견>은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이건 어느 개인이 권력을 잡은 자를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집단의 개인이 국가권력 앞에 대항해야 하는 점이다. 3작품은 이렇게 하여 서로 갈림길 처음 나뉜다그리고 <변호인>과 <소수의견>은 자본과 권력의 관계에서 나누어진다군사독재 정권시절에 자본은 권력에 아첨을 했다하지만 이제는 권력이 자본 아래 결합하여 정경유차이란 관료주의적 유착관계로 이어진다.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는 곳에 반드시 권력의 입김이 작동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경제적 이익으로 공권력이 오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이념이 작용하는 것이다이에 반해 <소수의견>은 경제적 이익이 난점으로 올라와 국가권력의 이념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작품 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어느 누군가의 사주로서 이루어진다그 사주자는 바로 국가권력과 연계한 자본의 손길이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노동자가 서로를 위해 일을 하여 이익을 창출하고 그것은 곧 국가의 부로 이어지는데그 원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그렇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은 손이 아니라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력으로 얻어지는 이윤과 그 노동력을 제공한 자에게 지급되는 임금그리고 부동산의 지대다그런데 사실 경제적 현상에서 국내 정황을 보면 과장 돈 벌기가 수월한 것은 부동산의 지대다지대로서 부동산 임대료로 먹고 산다면 자신의 노동력을 들일 이유도누구를 고용할 이유도 없다그저 건물을 신축하여 그 건물을 팔거나 임대하는 순간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 한다대한민국에서 부동산투기가 과잉으로 이루어지고건물임대로 또는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대부분의 현명하다고 여기는 국민으로 제 살 깎아먹기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점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거나 혹은 타인의 이익에 현혹되어 부러워하기만 한다이것은 현실적인 문제다어느 주택지역에 재개발이 들려오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값이 오른 것에 환영을 했다그런데 그 곳은 대부분 대단지 아파트가 있던 곳이 아니라 주택 단위가 있었던 주거지역이었다주택은 아파트보단 가격이 낮으며보상비가 적다게다가 공시지가도 낮기 때문에 아무리 땅값이 올라도 그 돈을 받고 다른 곳에 가더라도 살만한 곳이 없다자신의 집을 팔아도 다른 집을 살 수 없었고오히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도장찍어줄 때 순간이 더 나은 상황이란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과거 주택재개발사업 시 개발구역 주민들은 임시적으로 다른 곳에 살다가 아파트가 완공되면 그 집으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점점 그럴 기회는 잃게 되었다설사 아파트에 살아도 철거예정인 아파트의 매각가격과 그 자리에 올라앉은 아파트의 가격은 사실상 1 = X가 아니라 1 < X이었다문제는 그 X라는 가격이 과연 얼마나 올라가는가에서 시작된다게다가 상가지역에 임대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상가건물 주인이 그 건물을 매각하면 자신들의 입장이 무척이나 곤란해진다세상은 인간의 인정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손실관계를 보고 움직인다.

 

문제의 여기서 시작한다자기 집을 팔아도 갈 곳이 없거나임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아무런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덕분에 생긴 비극이 용산참사고그 소재로 만든 영화가 <두 개의 문>이다진압으로 온 경찰관과 안에서 시위하던 철거민들의 생사가 갈린 투쟁에서 결국 화재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희생된다과연 그건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헌법에서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지만막상 생존권보단 개인의 재산권을 우선 시하는 게 대한민국이란 나라다생존에 위협받게 되는 순간 인간은 동물적 본능에 의해 날카롭게 반응하고만약 자신의 가족이 희생되면 이성이 잃어버리고난폭한 맹수가 된다.

 

<소수의견>은 바로 이런 사회적 모순관계에서 생긴 현상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영화는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 계열이 아니라면 실제가 아니 허구의 이야기를 만든 영상서사다하지만 이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인물과 어느 상황적 배경 자체만 허구이지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현실과 같다하지만 우리는 저 현실에 대해 잘은 모르고언론미디어에서는 대중에게 특정 정보만 제공한다현실에서 일어나도 그게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알 수가 없다.우리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지 않은 일은 오로지 미디어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소수의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진압과정이다용역으로 이루어진 깡패집단과 그들과 같이 철거민들을 제압하는 경찰은 서로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어느 특정시기에 진압을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무리한 작전을 시작한다이때 철거민인 박재호는 아들 신우가 오는 것을 보고경찰진압으로 아이가 다칠 것을 걱정하여 방 안 은신처에 숨기게 한다그때 박재호에게 다가온 의경 2의경 중 한 사람인 김희경은 박재호가 밀어뜨린 가구에 의해 넘어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박재호의 죄목은 공무방해치사죄다공무집행 중인 의경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그를 살해한 이유다인간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은 매우 큰 죄에 해당된다그러나 죄인인 박재호는 오히려 무죄를 외치며 그 당시 상황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박재호의 아들이 병원응급실에 운송 중 사망했는데그 원인은 낙하에 의한 추락사였다하지만 박재호는 아들의 죽음이 추락사가 아니라 과잉진압이라고 말한다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꼬이고 흔들리게 된다물론 영화를 보면 충분히 알고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놓인 박재호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된다단순히 플롯으로서 검사와 변호사의 대립관계만이 전부가 아니라이 영화에서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가 박재호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세상이 바뀌었다고 봤지만 결국 크게 바뀌지 않은 것 역시 말해주고 있다작품에서 윤진원 변호사는 지방대학 출신의 변호사다.

 

그는 지방이란 이유로 무시당하고어디 크게 좋은 자리도 못 간 채 국선변호사로 2년차 살아간다그 옆에는 윤변호사의 SM520와 비교되는 BMW를 몰고 다니는 이혼전문 변호사 장대석이 등장한다그는 과거 80년대 아마 서울대 법대생으로 데모시위를 했었고용의자로 수배되어 우연히 자기 친구 집에 갔다가 윤진원을 만나 그에게 공부를 가르친다하지만 결국 잡혀 들어가고군에 가게 되었으며자신과 같이 시위하면 사귄 여자는 다른 놈과 결혼했다면서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여준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과거를 후회해도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마지막까지 이길 수 없는 재판에 끝까지 조력하던 장변호사는 속물적 시대에 살아가는 무리 중에 남은 인간미를 찾을 수 있었다.

 

<부러진 화살>, <변호인>, <소수의견>은 모두 변호사가 인정받지 못하고검사들과 권력들의 집단으로부터 모진 견제를 받는다이기지도 못할 싸움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에 인간의 고뇌가 보인다특히<소수의견>과 같은 경우 이 세상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으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낭만주의 내지 휴머니즘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세계에 신이란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 신은 분명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전지전능한 능력과 그들을 숭배하는 엘리트의 솜씨로 신은 불가시적인 존재로 작품으로 등장한다그리고 그 신은 그들의 기도에 감응하여 철거를 강제로 시키고,경찰청에 압력을 가하며살인현장의 검증조차 제거한다.

 

헌법체계와 그 밖에 수많은 법률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며인간이란 모두 법 아래에 존재해야만 민주주의국가이나어느 누구는 법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법 위에 군림하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알아서 그들의 숭배자들이 움직여준다그 대표자가 홍재덕 검사다홍재덕 검사는 의경 하나가 죽고 시위자 아들이 죽은 현장을 존치해야 하나오히려 용역업체와 짜고 그 흔적을 지운다그 이유는 시위진압 중 과잉진압으로 민간인 그것도 미성년자를 살해한 게 작전의 실수였기 때문이다만약 그 사실을 알려지면 철거과정의 과잉대응과 미성년자의 살해로 철거의 본질을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박경철 의원은 그 이유를 잘 알려준다그 자리에 돈을 투자한 투자가들이 일정기간 안에 철거가 시작되지 않으면 투자 금을 회수하고그 사업자는 그동안 투자받은 돈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은행대출금의 이자와 이로 인한 손해부담이 막강했던 점이다결국 자본은 권력을 동원하고권력은 관료주의로서 움직였다관료주의는 학벌과 출신으로 이어졌고박변호사는 지방대학이란 이유로 멸시 당한다심지어 신우와 의경이 병원에 올 때 그들을 응급실에서 진찰한 의사마저 연세대 출신이란 점에서 법정에서 대놓고 무시하는 여검사의 모습도 나온다법의학자인 검시관은 서울대 출신이란 이유로 정형외과 전문의 소견을 깔아뭉개는 현실이 드러난다.

 

학벌주의와 정경유착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물론 학력으로서 좋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하나양심과 윤리가 없는 엘리트들이 다수 양성되면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진다.재판에서 패해도검사의 옷을 벗겨내지만검사는 국내 최고의 법무법인인 광평에 들어간다전관예우에 고액의 연봉으로 검사보다 못한 권력이라도 자본과의 유착관계는 여전하다올바른 양심보다 권력과 지위 앞에서 꼰대로서 내세우는 그는 윤변호사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사람은 희생당하는 자,국가에 봉사하는 자가 있는데자기는 국가에 봉사했는데윤변호사는 도대체 무얼 했냐고 묻는다.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우리 관객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키겠지만그것은 차라리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영화는 리얼리즘으로 이루어진 허구이지만허구로 만들어졌기에 현실에서 말할 수가 없는 진실을 허구인척 보여줄 수 있다재판과정에서 계속 불리한 상황만 처해지고검찰은 증인조차 빼돌리려고 한다실제 그럴 일이 일어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권력자들은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에 방해되거나 눈에 가시거리가 되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친다는 점이다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 모든 희생자와 그 희생자조차 진압해야 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옆에 있는 서민들이란 점이다.

 

박재호와 신우는 가난한 소시민이고김의경 역시 가난한 아버지와 살아가는 사람이다가난한 집안 살림을 생각하여 의경에 가면 추후 경찰시험에 가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군복무로 대체하나 변을 당한다처음에 박재호와 윤변호사를 증오로 바라보던 김의경의 아버지는 박재호의 사연과 모습을 보고 흔들리기 시작한다자신의 아들이 남을 죽일 리가 없는데그 누구보다 착하고 좋은 아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다고 말이다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없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박재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이지만박재호 입장에서 김의경은 자신의 아들을 눈앞에서 죽인 원수다하지만 그 아들들은 모두 세상에 없고아들 잃은 나약한 아버지만 있다.

 

자신의 삶을 모조리 잃어버린 두 아버지는 한 사람은 죄인이 되어 한 사람은 희생자가 되어 눈물로서 설움을 토해낸다과연 이 두 사람에게 왜 절망을 안겨줘야 했는지왜 박재호가 죄인이 되어야 했는가김의경은 신우를 무참하게 폭행하고김의경은 박재호가 내려친 쇠파이프를 맞고 의식을 잃는다.박재호는 아들을 품에 안고김의경은 동료의경의 품에 안겨 서로 눈물과 절규를 외친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영화는 진압에 투입된 의경도 건물에서 시위 중인 철거민도 모두 죄인이 아니라 희생자라고 말한다그러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철거민과 의경그들은 서로 원수를 보듯이 혐오스러운 악마의 얼굴을 바라보듯이 증오한다하지만 알고 보면 소시민으로 살아오던 철거민그런 철거민 앞에서 본래 일상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는 의경이 둘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저 힘없이 살아가야 하던 소시민들이었다그러나 이때까지도 이제부터 앞으로도 그들은 계속 누군가의 떠밀림으로 증오와 분노로서 싸우고 있다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이들은 자신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라며자신들이 받는 온갖 특혜를 누리고 살아간다그리고 그들은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희생자가 필요하다고 한다그 희생자란 누구란 말인가? <소수의견>에서 바로 그 소수자들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국민이란 점을 말해준다.

 

처음에 모두가 그런 상황에 처해지지 않겠지만어느 순간 그 상황에 도래한다는 점이다영화라는 허구적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소수의견>은 현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고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무관한 것으로 볼 것이다그러나 부조리한 일들이 발생하면 그 순간 자신은 대다수로부터 격리되어 소수자로 된다. <소수의견>은 바로 그런 점에서 무거운 영화다영화는 이길 수가 없는 거인을 상대로 계속 덤벼드는 인간을 보여준다.

 

이길 수 없어도 싸우고 또 싸우는 이유는 왜 그럴까윤변호사가 사회적으로 상류집단이 변호사에 속해 있어도 그 안에서 그는 차별을 당한다차별에 의한 불만에서 윤변호사는 박재호라는 인간을 단지 피의자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소수약자로서 동질감으로 뭉친다상대에게 이기지 못했지만결국 윤변호사는 자신의 양심과 삶의 가치에서 승리한다우리는 삶의 승리란 과연 어떤 길인가영화에서 카메라 관점은 피해자를 변호하는 윤변호사의 관점으로 움직인다현실 언론미디어의 카메라는 윤변호사가 아니라 윤변호사 반대의 관점으로 움직인다이 거짓 같은 현실과 허구로서 사실 같은 영화에서 판단은 관객의 몫이고그 판단을 할 기회가 영화감상이라면영화감상조차 관객의 몫이다과연 그 책임은 어떻게 풀어 가야할까알아두어야 할 점은 우리 모두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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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X프린세스X블레이드 2 - Seed Novel
오버정우기 지음, 보라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 1권에서 리온이 교룡학원에 와서 그곳의 주인인 밀레니아와 용약의 계약을 맺는 것이 나온다. 처음에 교룡학원에 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리온은 동생 리에의 배웅으로 우연의 장난에 의해 학교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학원에 입학하였다면, 그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1권은 말 그대로 리온과 리에가 교룡학원에 온 점에서 서사의 발단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2권부터 그 서사의 진행이 되는 전개로 이어진다.


전반적으로 서사는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1권마다 작은 서사가 담겨있다. 큰 서사 안의 작은 서사에서 2권은 분명 전개로 되겠으나, 그 내부에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이란 서사구조가 있다. 2권 전체로 보자면 1권에서 드래곤은 오직 밀레니아 혼자라면 2권부터 새로운 드래곤이 나온다는 점이다. 1권에서 주인공 중에서 메인의 등장이라면, 2권부터 그 메인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보조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우선 밀레니아 학교의 주인이며, 학생회장인 점에서 자신의 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바로 3명의 드래곤이다. 1권부터 이상한 계략만 알려주는 샐리, 전투적인 슈, 지적이나 타인들과 벽을 쌓는 페이린이다. 모두 용족이고, 계층도 높은 부류다. 밀레니아가 용왕 중에서 최고 용왕의 딸이라도 나머지 드래곤 역시 용왕의 후예다. 그런 그녀들은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밀레니아와 같이 학생회에 소속된 자들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만물의 기준은 무엇인가 대해 설정한 부분이다. 만물의 영장은 인간이나, 여기서는 드래곤으로 대체된다.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서 용인전쟁 이후 드래곤이 만물의 영장으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왜 드래곤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인간의 의복, 음식, 생활 등 문화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드래곤은 인간과 다른 존재이나,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진 강력한 존재다.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점에서 진정 드래곤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드래곤의 지배방식은 힘으로 인간을 제압해도 결국 인간을 힘보단 힘을 만들 수 있는 문화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교룡학원에 밀레니아의 방식은 인간과 드래곤은 분명 차이가 분명한 종족이나 불평등한 조건을 인정아래 평등한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진정한 평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등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불평등적 요소를 인지하여 그것을 새롭게 정립하는 점에서 시작된다.


밀레니아가 과거 자신을 구하려던 인간 남자아이 리온에 대한 최소한의 은혜, 그것이 그녀의 의지다. 드래곤은 인간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력하다. 그들의 힘은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정도로 두려운 힘이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자신의 위치에서 인간을 조정하는 것보다 인간의 높이에서 맞추어야 비로소 공존이 가능하다. 밀레니아의 행동은 바로 인간의 행동방식에 어떻게 다가가는 점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감과 교감이란 점이다. 왜 용과 인간은 서로 다른데도 이렇게 서로 도우려 하는 것일까? 용이 차라리 인간과 전쟁을 하면서 모조리 섬멸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탄압하여 영원한 속박의 종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드래곤의 마음, 결국 작가의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나, 그것은 오래전 신화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대략적으로 이 작품은 드래곤, 용이 출현하고, 리온이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존재인 점에서 북유럽신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원소의 이론에서 불, 물, 흙, 공기는 지구를 이루고 있는 4가지 원소다. 물론 화학적으로 원소는 수소, 산소, 질소 등과 같은 다양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고대그리스에선 지구를 구성하는 4가지가 있고, 인간의 몸에도 4가지의 원소로 움직이는 것이다. 용도 저 4가의 원소로 힘을 낸다. 단지 조금 놀란 점은 나는 그리스사상으로 4가지를 분류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작품에서 성경의 기준으로 삼았다.


작가의 작품세계관 설정에서 성경 내지 북유럽 신화를 많이 이용했고, 생각 이상 잘 정리했다. 나중에 교룡학원을 침입하는 적이 만든 장치가 아크엔젤(1. 대천사, 구품 천사 중 한 천사로 국가 통치자의 보호와 특별한 사명을 전달한다, 2. 러시아 북구 백해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점에서 성경의 내용을 많이 반영한 것 같았다. 조금 아쉬운 점은 작품설정에서 매우 연구를 많이 한 만큼 작품 내 플롯이나 복선의 배치는 아쉬웠다.


아크엔젤을 사용하는 적의 정체가 너무 쉽게 파악되도록 적은 것이다. 판타지모험으로 라이트노벨은 잘 정리해놓았다. 주인공의 설정이나, 드래곤이란 종족이 가진 특이함이 보여주는 용녀 밀레니아의 행동 역시 잘 정리했다. 그러나 범죄 추리로 가면 아쉬웠다. 작품 자체가 추리물이 아니기에 큰 문제점은 되지 않겠지만, 조금 적의 정체가 쉽게 들키지 않게 배치를 신경 썼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주인공과 페이린 관계에서 좋은 흐름을 보여준 것 같다. 일본에서 드래곤을 히로인으로 내놓은 작품들이 제법 많다.


라이트노벨, 만화, 애니메이션 심지어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과 드래곤은 단순히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때로는 친구, 동지, 연인 등으로 나온다. 주인공 남성 1명에 다수 용녀들이 모이는 하렘구도가 보이기는 하나, 그 하렘구조에 너무 강조하지 않은 점이다. 물론 그런 구도로 이어지는 이유는 리에라는 여동생의 존재다. 리온에게 리에가 없었다면 그 세계는 자신만의 왕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있었고, 리온 역시 상당히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다.


그렇기에 하렘구도가 보이더라도 cliche(반복적인 패턴적인)의 최소한으로 막아주는 리에의 앙탈은 괜찮다고 본다. 만약 리에가 없었다면 아마 리온은 밀레니아와 달콤한 시간만 보내는 것만으로 바쁠 것이다. 또한 라이트노벨 일러스트에서 그 표지의 인물은 책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1권에서 밀레니아라면 2권이라면 페이린이다. 다소 중국계 의상과 이름을 가진 용녀로서 보는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는 않다.


단지 종족만 용족이지 용족 역시 보통 인간이 가진 고민이 있고, 때로는 질투도 한다. 기본적으로 라이트노벨 역시 그 기본토대는 신화의 세계다. 신화의 존재는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은 인간의 심리와 모순을 역설하는 존재다. 페이린 역시 그런 역설을 보여주는 히로인이다. 용녀 공주라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완벽해 보이는 인물이라도 막상 그 인물 내부로 가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다름 점은 특별히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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