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변호인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양우석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영화 변호인이 TV에서 방영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알고보니 이 영화를 상영 후 CJ 부사장에게 엄청난 압력이 왔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짐작했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아픈 장면은 경찰에 끌려간 끌려간 아들을 보고 온 순애가 송변을 만나 변호를 애원하는 장면이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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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이정현 외 / 아트서비스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소설은 아마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가 살아가는 세상은 환상과 재미가 있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현실이 단지 꿈이라면 혹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이라면 말이다. 혹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 즉 이데아란 존재하지 세계가 존재하면 어떤 것일까 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품어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저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가 적은 것은 정치철학 도서로 군림하고 있지만, 책을 보면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 같은 형식이다.

 

플라톤의 대표도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이데아(Idea)에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 공간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관념적인 가치관이 존재하던 세계와 달리 현실은 물질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이니 다소 인식의 간극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세계, 유물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도 관념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실은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우리가 이상적 가치를 삼아야 하는 그 이념조차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해진 가치관을 우리 인간들은 말을 하고 있어도 전혀 반대로 움직이지는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있자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1세기 한국에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력이 돋기 시작한다. 물론 앨리스 그 자체가 그런 성향일 수 없으나, 소설 속의 앨리스는 상상 속의 인물, 즉 현실에 없는 가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가상적 존재이기에 마치 어느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우리 인간들은 그들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필연성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 현실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앨리스라면, 당연히 환상적 가치관이 녹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오히려 너무 적나라하기에 게다가 그 현실이 우리에게 낯설고도 외면하고 싶기에 더 환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21세기 현대사회를 거치어 오면서 지난 20세기의 흔적을 외면하려 한다. 공장이나 산업노동자는 1960~80년대의 대표적 서민의 삶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공업 중심의 노동생산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서비스 중심의 사회로 산업체계가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도 산업노동자는 존재하고, 산업재해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이야기,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추악한 모습을 이 영화에서 여지없이 보여준다. 바로 앨리스란 여성이 그동안 세상이 자신에게 대해준 부조리에 대한 반동으로서 말이다. 영화초반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기보단 주인공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와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이다. 보통 한국의 여성이 신고 있는 신발을 생각해보자. 주말의 시내가 아니더라도 보통 평일의 주거지 주변을 돌아다니면 어린 학생들은 운동화, 20대 내지 30대 직장인들은 구두, 중년 여성들은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을 신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는 다르다. 앨리스 동화책에서 귀여운 에이프릴이 달린 원피스와 아기자기한 구두가 아니다.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신고 다니는 안전화였다. 안전화를 신어본 경험이 있다. 물론 공장보단 공사장 쪽 안전화를 신어봤지만, 기본적으로 신발이 아주 무겁고 매우 튼튼하다. 안전화를 신고 다니는 앨리스 수남은 신문배달, 식당, 청소 등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하는 슈퍼 우먼(Super woman)이다. 보통 남자도 체력이 감당되지 않은 노동시간을 그녀는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단 1가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남편, 인간 규정과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수남을 보면 2가지의 삶에서 갈등한다. 하나는 여중을 나와 여공으로 취업하느냐 아니면 고등학교로 나와 엘리트(나는 앨리스라고 생각한다)로 되는 것에서 엘리트(앨리스)를 선택한다. 문제는 학교에 가서부터다. 자격증을 많이 따고, 주판과 타자기를 잘 사용해도 그녀에게 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정현 씨가 연기한 앨리스의 고등학교시절은 아마 1980년대 정도일 것이다.

 

1980년대 컴퓨터 XT가 나오고, 1990년대 386486, 21세기 오면 펜티엄과 그 이상의 컴퓨터가 등장했다. 인간이 손으로 직접 계산하고 타이핑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컴퓨터 엑셀이 계산하고,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만들어낸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 작업도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작업 중이니 말이다).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사회적으로 문명발전이 더해지면 기존의 기술력은 아무 것도 쓸모 없는 잡동사니가 된다.

 

앨리스가 가진 기술은 모두 별 볼일 없는 게 되어 버렸고, 졸업 후 그녀가 처음 들어간 회사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이었고, 결국 그녀는 작은 공장의 사무직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배경에서 앨리스의 고등학교 시절이 1980년대라는 점에서 당시 대학을 안가고 취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취업을 해도 전문적으로 기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공장에 가게 되고, 사무실에 가서는 보조요원만 되었다. 학교선생은 앨리스에게 가슴을 풀어헤치면 그래도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공장에 가니 자신보다 더 볼륨을 가진 여직원이 있었다.

 

앨리스가 가진 자격증도 필요 없으나, 앨리스가 가진 여성적 매력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매일 공장에서 구박받고, 고독한 삶을 살아온 앨리스, 그녀에게 규정이 다가온다. 규정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노동자고, 처음 앨리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어준 사람이다. 영화에서 2사람의 출생이나 배경을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이 2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버려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고교진학과 여공 사이에 고민한 점에서 그녀는 원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고아인 확률이 높았고, 규정 역시 청각장애인인 점에서 부모에게 버려진 사람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부모와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거나, 의역하여 생각하면 부모의 도움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즉 아무런 경제적 지원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N포 시대의 청춘이었던 것이다. 단지 더 나아가 남편 규정은 청각장애인이었고, 우리의 앨리스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영화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앨리스란 제목이 들어간 순간부터 영화 속 세계에서 앨리스는 성실하나, 앨리스란 인간의 성향은 이미 앨리스틱(풀어 말하면 현실적인 감각이 약간 동떨어진 인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저 먹고살아갈 길만 생각하던 그녀가 세상의 쓴맛(소주를 마시며)을 느낄 때 옆에 규정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오직 규정만이 자신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었다. 여기서 앨리스는 스위치가 off 모드 on 모드로 교체되었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규정과 소박하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원했고, 규정은 자신의 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집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규정은 청각장애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보잘 것 없는 2사람, 그들은 동상이몽을 꾸었지만, 그래도 같이 의지해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심해진 규정은 난청상태가 심각해지고, 결국 귀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들은 전자기기 주변에 있으면 부작용이 생기고, 작업도중 규정은 절단기에 손가락을 잃고 만다. 부서진 보청기, 그리고 억지로 앨리스의 손에 수리된 보청기, 이때부터 앨리스는 힘겨운 사투를 벌인다. 앨리스는 남편이 원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다. 보통 사람이면 포기하지만, 수남은 앨리스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을 본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다.

 

자신이 버는 돈보다 집값의 시세가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도 100% 적금이 불가능하다. 급료 내에서 전기세, 물세, 세금, 전화세, 식비 등등이 나가기 때문이다. 생계 때문에 집을 구하지 못하다가 결국 140,000,000원을 대출받는다. 금융자본주의에 노출된 우리 서민이 10년 넘게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집을 사서 남편이 기뻐할 것이라 여긴 앨리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집을 사자 남편이 앨리스의 손을 잡아주며 슬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카메라(남편의 시선)로 보이는 앨리스 손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과 손바닥에 베인 굳은 살, 그 옛날 부드러운 손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그런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슬프게 우는 남편을 보자, 앨리스는 남편의 손가락이 잘린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죄책감과 그동안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인 남편이 아직까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뻐한다. 하지만 남편은 벽에 드릴을 뚫고, 뭔가를 설치한다. 드릴사용법에서 마지막 그림에 어떤 남자처럼 그림이 당신도 멋진 남자라며 말을 건네는데, 남편이 집 안에 봉을 설치한 이유는 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아내인 앨리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집을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그것을 포기한 남편이 집을 아내에 의해 구하게 되자, 자신이 아내의 삶에 장애물 1호라는 것을 스스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규정, 오히려 그것이 앨리스의 스위치를 Normal에서 High로 전환되게 만들었다. 앨리스는 집을 전세로 내놓고 자신은 원룸 고시촌에서 살아간다. 좁은 방에 침대 하나에 방의 3분의 2는 차지하고, 나머지는 작은 수납공간만 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 후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힘든 일과 외롭게 고시촌에서 살아가는 앨리스, 그녀가 이런 선택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동네가 도시계획구역에서 금회 시범적으로 도시개발계획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도시재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당초 그 지역이 철거되고 새로운 아파트나 상가 그리고 도로가 신설된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부동산투기나 시세차입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된다. 영화에서 앨리스가 살아가는 지방자치단체는 해정구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서울시 영등포구 목동 일원이다. 목동문화체육센터 옆에 있는 임야공원, 한강 옆으로 안양천이 흐르는 동네였다.

 

도시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부동산시세 차이 내지 혹은 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문제는 그 도시계획 구역계에서 앨리스가 사는 동네만이 우선적으로 시범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때부터 앨리스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내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구청 소속 상담실을 운영하는 경숙이 자신의 동네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기 위해 전문시위가 최도철 예비역원사를 이용한다. 전문시위 횟수가 300번이 넘은 그는 이른바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시개발사업을 자신들의 동네로 옮기기 위해 조작한다.

 

국가와 주민이란 이름 아래 경숙과 최원사는 대대적인 공작활동을 펼치고, 구청직원은 경숙이 구청에도 알력을 행사하고, 최원사라는 전문시위가의 권위의식으로 마을주민들을 포섭해갔다. 앨리스는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결국 이 2사람과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최원사의 집에 가서 구타를 당한다. 최원사 역시 이 시대의 희생양 내지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군에 몸을 받쳐 살아왔으나, 가족도 없이 혼자 독방에서 살아가는 노인이었다. 게다가 생계를 위해 길가에 버려진 종이박스를 모아 폐품가게에 팔며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살아왔지만, 국가는 그에게 고독과 가난만 주었고, 남은 것은 오로지 생고집인 그에게 전문시위 활동과 폐품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더우나 추우나 2만원을 받고 현장에 출동하는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다 같이 못살고 배고프고 힘든 서민이나, 진짜 적은 싸우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힘겹게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의 그림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경숙은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최원사가 죽은 후, 경숙은 최원사가 분신자살했다고 주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평소 잘 아는 세탁소 사장을 이용한다.

 

최원사가 죽기 전에 청년부장에서 이제는 최원사의 행동대장으로 임명한다. 영화에서 경숙은 세탁소 사장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 전화는 자기만 하고 약은 3개에서 1개만 먹으라고 한다. 상담소 운영을 하면서 세탁소 사장을 알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준다(왜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을 세탁소 사장의 얼굴을 쓰담아 주는 것일까?). 세탁소 사장이 경숙의 말을 잘 듣는 이유는 단순히 약을 전달해주는 상담원이 아니라는 점이 내 생각이다.

 

이렇게 앨리스는 다수의 적들과 상대해야 한다. 두뇌파 경숙, 행동파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 그리고 더 나아가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형사들까지 말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살인용의자로 수사대상에 올라간 앨리스에게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가 찾아오는 장면에서 좁은 고시촌 침대는 3사람이 앉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형사 2명 사이 중간에 끼인 그녀의 작은 몸은 더 작은 몸으로 보인다. 형사가 그녀의 고시촌을 방문 후 서로 대화를 한다. 고참형사는 신참현사와 대화 중 이런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범죄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가난한 사람은 고의로 범죄를 일으키는 것보단 우발성에 의한 사고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 말은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점,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개인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구원이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거기에 대한 분노와 저항에는 매우 가혹하다. 안 그러면 앨리스가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에게 심한 몰골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의료현실의 모순도 나온다. 사람이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을 때 의사들은 환자의 호흡기를 떼라고 한다. 뇌사 판정을 받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자살시도로 뇌사가 된 남편이 계속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가 눈처럼 불어난다. 그러나 병원입장에서 죽기 일보 직전의 환자를 강제로 내보낼 수 없다. 환자가족이 파산해도 빚만 계속 늘어나도 병원은 끝까지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지 그런 부담을 안기 싫어 앨리스에게 안락사와 존엄사를 선택하도록 한다.

 

뇌사판정을 받으면 생존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안락사라는 제도가 없다. 일부 선진국에서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다. 더 이상 살아갈 가망 없이 병마의 고통에 의해 끔찍한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오히려 죽음이 축복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의사에게 언제나 존엄사란 극단의 선택만 요구받는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사실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경제적인 조건에서 생활은 파탄 나고, 오랫동안 지켜본다고 마음까지 지친다. 하지만 앨리스의 선택은 너무나도 달랐다.

 

영화를 보면서 엽기적이고 끔찍하고 때로는 측은하고 고소하기만 했던 영화 같았다. 앨리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점에서 우리라고 앨리스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 소중한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 앨리스가 그토록 잔혹한 동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나를 찾아주는 사람을 찾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선악의 도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과 악이라 도덕적 가치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권력에 의해 조성된다.

 

물론 극단적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를 말하려면 그 윤리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제3자 역시 심판대에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앨리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앨리스는 세상의 룰과 자신의 룰에서 자신을 선택했다.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적으로 상당히 높다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적 가치는 기존에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촬영기법이나 연출에 대해서는 저예산이므로 그다지 높은 평가는 어렵다. 단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과 흥미가 있다. 생계밀착형 잔혹동화이고 현대사회 한국이니 N포 세대에겐 낯설지는 않으나 낯설게 되어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행복해지고 싶은 게 죄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죄를 박살낼 수 있을까? 앨리스의 적으로 나온 이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하고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딱하다. 딱한 사람끼리 싸우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 자체가 이상한 나라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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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꽃과 부수는 세계>는 SF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지금은 2016년이라면 그 시대는 2100년 기준으로 시작한다. 물론 작중에 등장하는 도로시와 듀얼의 시기는 2100년보다 더욱 더 후에 존재하는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조금 겉모습의 이미지처럼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 3명이 등장하여 뭔가 귀여운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닐까 하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런 소녀로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영상서사로써 흘러간다. 전형적인 스토리나 혹은 스포일러 등보다는 이 영화에서 말해주는 의미하는 바가 뭔지 생각해본다면, 인류에 대한 감독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환경, 솔직히 인간은 신석기 시대부터 도구를 만들어오면서 인류문명이란 것을 만들어왔다. 특히 철기시대에 오면서 중앙집권제로 이어지고, 각국에서 전쟁과 더불어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기원전 5~6세기 동양에서 공자와 석가모니가 있고,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있다. 이들의 존재처럼 종교와 정치가 어느 정도 학문적 영역에서 큰 발전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쟁의 손길은 모든 인간에게 흘러가고, 20세기 큰 전쟁을 맞이하면서 인간들은 전쟁이란 것들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분쟁국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고, 최근에 이슬람 과격테러로 분쟁이 일어나지만, 과거의 전쟁에 비하면 횟수의 차이는 분명하다.

 

전쟁의 순기능을 인정하기 싫으나, 전쟁은 인간사회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수를 줄이고,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등장하고, 과학적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의 수레에서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의 목을 겨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인류가 윤택해지면서 한편으로 비참해졌다. 환경이란 단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길을 나오면서 대기 중의 미세먼지가 코를 자극하고, 눈을 피로하게 만든다. 미세먼지의 농도가 강하면 호흡기 질환이 심해지고, 미세먼지의 입자가 작으면 폐 속으로 들어가 폐기종 같은 질환을 일으킨다. 과거에 결핵과 폐렴에 의한 폐질환이 이제는 대기오염으로 대체되고, 과거 이질이나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이 이제는 수질오염으로 인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모순에서 인간의 세계를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줄 도구나 시스템을 원한다. 아니라면 어떤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신화처럼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고도 때로는 위대하기도 하다. 양날의 검이란 말처럼 검은 자신의 목을 노리지만, 자신이 노려야 할 대상의 목도 노리기 때문이다. 지구환경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오염원의 통제고 오염원의 억제다.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없으면 지구는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에 몸살을 앓을 일도 염려도 없고 숲속의 작은 새들의 서식처를 잃을 일도 없다.

 

지구의 환경이 쇠약함에 따라 새롭게 만든 Mother System, 지구는 대지의 어머니라 하고, 지구를 Earth라고 하나, Gaia라고 하는 이유는 대지에서 만물의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지구를 파괴하고, 지구를 망치는 존재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있다. 지구의 대자연은 아름답고 위대하나,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지구에서는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기계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인간처럼 감성적이고 느낄 수는 없다. 이게 바로 기계와 인간의 차이다. 기계에겐 윤리라는 것이 없다. 단지 도덕적인 요소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래서 도로시와 듀얼이 사는 세계에는 2차 공간에서 바이러스가 나오고, 그 바이러스의 토대는 2차 가상공간의 데이터베이스가 실현화 된 3차 공간에서다. 3차 공간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불안하고 때로는 오류의 집단으로 나올 수 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슬프고, 아프고, 잔혹하고, 거절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소녀가 리모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의 세계에 새롭게 찾아온 인격화된 프로그램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듀얼과 도로시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프로그램으로 활동하는 그녀에게 인격이란 그저 만들어진 그 자체, 인격이 있다고 해도 감정은 그저 주입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 느끼고 행동하고에 대해 뭔가 새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다. 단지 듀얼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이 석연하지 않다는 것만 느낀다. 그 환상의 의문을 깬 것이 바로 리모의 역할이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하고 친구가 되어 다양한 경험을 나눈다. 여행을 가고, 요리는 하고,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때로는 마음이 아픈 모습도 목격한다. 이때까지 프로그램이기에 맛이 있는 음식도, 재미있다고 여기는 일들도 모르고 살아온 도로시와 듀얼에게 리모는 신기한 존재다.

 

그러나 사실 바이러스란 존재는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 혹은 인간 그 자체에서 나온 불순물이다. 인간은 모든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싫은 것들도 있다. 현실세계 인간은 모두 Mother System에게 의존하다 그것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다시 Mother System를 저지하려 했지만, 모든 지구의 시스템을 장악한 Mother System을 정지하는 것은 내 폐 속에 암이 있어서 그 폐조차 모두 잘라버리는 같은 행동이었다. 더 이상 인류에게 숨을 쉴 공간이란 있을까?

 

지구를 관리하는 Mother System에서 그런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 감정을 부정하는 자신의 구조체계를 변모해야 했다. 그래서 Mother System의 프로세스 백업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바이러스로 인정하게 하여 Mother System의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인 듀얼과 도로시로 하여금 삭제되어야 했다. 그것은 지구를 멈추게 한 것은 인간이겠지만, 인간이 없다면 지구가 멈추는지 아닌지도 모르며, 인간만이 현실을 자각하기에 비로소 지구라는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기쁜 것만이 아니라 슬픈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듀얼과 도로시의 경험에서 듀얼은 자신이 관리한 가상세계에서 바이러스가 된 자, 스미레를 직접 지운다. 아름다운 피아노를 연주하는 꿈이 많은 소녀 스미레, 물론 프로그램의 업무로 본다면 듀얼의 일은 합당하나, 과연 친구였던 자의 꿈을 파괴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저 주입된 것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정말 자신이 슬픈 일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겪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도로시도 처음에 듀얼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대략 19세기 유럽 귀족가문의 딸로 활동하고 있을 때, 도로시는 이때까지 가지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매를 가졌다. 그곳에서 나눈 정이란 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상공간에서 경험한 자신의 마음과 기분은 가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Mother System의 의도 아래 태어난 리모는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다. 인간은 시스템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그곳에 머물려 정체되면 아무 것도 만들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물론 인간이 이때까지 같은 인간에게도, 자연의 동물에게도, 대지의 자연에게 해왔던 잔인한 짓들은 관객의 눈으로 보는 나 역시 많은 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그런다고 인간 그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 세계를 모두 부수는 것과 같다. 작품의 제목처럼 유리의 꽃은 인간에게서 완벽한 모습, 즉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이고, 부수는 세계는 그런 아름다운 겉모습을 추구하는 세계는 결국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새롭게 탈피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주제성은 물론 이해할만하나,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잔잔히 보여준 점은 감독의 역량으로서 역량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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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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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 글을 쓰는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내 글에 대해 생각하면 문법이나 문장의 매끄러움이 부족한 것을 안다. 과거에 적은 내 글에 비교하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특히 논문을 심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부분이 역시 문법과 어감의 난해성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마음 한편에 숨은 불편한 초조함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억눌리기에 충분하다. 이런 식의 화두를 던지 이유는 이번에 읽은 서적이 <밤이 선생이다>라는 황현산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여 문학서적과 번역도서를 출간한 이 분, 황현산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그의 프로필을 보니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번역했던 분이다. 디드로의 책을 읽지 않으나, 그 책의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번역자의 이름으로 황현산이란 이름을 본 것 같았다. 문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동기는 황현산 교수의 <밤이 선생이다>가 매우 논리적인 성찰은 논리로서 풀어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문체로 살려낸 것이다.

 

내 글을 본다면 그렇게 쓸 자신이 없다. 내 글을 보면 상당히 파고 들어가는 감이 없지 않게 강하다. 이른바 오타쿠라는 무단히 파고들어가는 인생살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아니라면 다른 삶에 의한 요소인가?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타인과의 소통이 잘 되는 편은 아니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정보의 인식은 정확히 알아들어도 거기에 대한 기호적인 대답은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쉽게 말하면 엉뚱한 녀석이다. 인간에 대해 내가 생각하자면 누구나 변태적인 요소가 있고, 도착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긴다. 변태라고 하여 성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격과 말투, 몸짓, 관심, 취향, 정체성까지 파고들어간다고 여긴다.

 

인간은 원래 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면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쇠사슬에 묶인 존재라고 해야 하나? 어째든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 존재가 되고, 자연적 본연의 모습과 현실의 인위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진 간극 아래 자신의 입장과 의지가 모호하게 비치된다. 즉 인간은 본연적인 삶을 살 수 없고, 삶의 틀에서 타자와의 관계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자신의 본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본연적이지 세계가 형성되어 자신의 말과 언어로 표출된다.

 

황현산 교수 역시 삶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단지 그 분은 아주 부드러운 섬세한 글로 보여준다면 나는 오히려 투박하고 퍽퍽한 느낌이 강할 것이다. 문체의 부드러움과 표현에 대한 환상적 요소, 삶에 대한 시선이 언제나 비딱하게 보는 나에게 무리인 것 같다. 언제 개인적으로 작문하여 내가 다시 확인해보면 뭔가 작품 내 등장인물이 다소 강박적인 반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눈의 대신 관찰할 때도 역시 뭔가 경계하는 날카로움이 담겨있다. 즉 내 글은 절대 부드럽고 친절한 글은 아니다.

 

그런다고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하나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적인 보고 느끼는 것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을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 예술적 삶을 제대로 맛 볼 수 없다. 솔직히 그렇지 아니한가? 1970년대 6시 되면 오디오의 파놉티콘이 울려 퍼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인간은 생물이고, 자기만의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있다. 낮에 물론 자신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에 접해 있겠지만, 밤의 공간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다.

 

낮에는 착취당하고, 밤에는 위로받는다. 사실 낮에는 타인의 눈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나 밤에는 자신의 눈에 맞추어야 한다. 고요한 밤이 왜 중요한가? 조용한 방에 시야를 빼앗기는 것도 없이 오로지 어둠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낮과 밤은 모두 같을지 모르나, 인간 개인에게 낮과 밤은 서로 다르다. 낮과 밤 속에서 단지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대조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 언제나 낮의 밝은 것만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강박관념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움직인다. 자신의 결정한다는 그 자체도 사회적인 조건과 현실의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점은 부정하고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만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기만적인 것을 추구해온 것이다. 작가는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나, 과거에 의해 조성되어 미래로 움직이는 시간적 존재다. 시간적 단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축척을 무심코 버린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몰라, 자신의 장소는 만드는 것보다 어디든지 화려한 곳이 보이면 너도 나도 상관없이 달려든다. 유행의 시대에 걸맞은 화제의 장소는 언제나 인파로 가득하다.

 

자신을 생산하기보단 스스로를 소비하고 소모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그런 세상에 태어나다보니 나 역시 황현산의 글에 많은 놀라움을 느낀다. 작은 섬에 태어나 소금의 맛까지 말하며 바다의 정취와 산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시의 소모품이 아니라 농가의 인간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 찬 회색 빛 천국에서 하늘의 달조차 매연에 가려져 흐릿하다. 현대인들은 감수성은 메마르고 감정은 폭발한다. 드라마를 비롯하여 TV를 거의 안 보는 나에게 TV 드라마만큼 가장 재미있는 콘텐츠이면서도 가장 저질스러운 콘텐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하고, 오로지 욕망과 기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세상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파생실재의 공간이나, 우리의 공간은 드라마부터 소외된 실존하는 가상에 위치해야 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꺼리는 세계, 밤이라는 것은 어둠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빛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우리는 밤이라는 어둠을 너무 외면한 것이다. 산문집처럼 밤이 선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주변에 화려한 것만 보고 듣기를 강요했기에 우리 안의 세계를 찾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인간들을 잊어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려고 했다. 밤이면 낮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한산하다. 낮에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나와 주변의 소리를 기울이고, 다음으로 그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에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은 맞으나, 지나친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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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영화와 만나다
김윤아.이종승.문현선 지음 / 아모르문디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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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근에 감상한 애니메이션 중에 <몬스터 아가씨가 있는 일상>이란 작품을 보았다. 물론 한국에서 아가씨란 단어가 들어간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질리 없으니 당연히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아가씨가 있다는 점에서 한 명의 남성에 수많은 여성이 그에게 구애를 구한다. 보통 일본 애니메이션은 남성중심으로 시장을 개척했기에 남성이 주인공이 되어 수많은 여성들 품에 안기는 것은 흔한 장르 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 다르다. 작품은 남성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조적으로 서포터 하는 역할로 나온다. 중요한 활약상을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몬스터 아가씨들인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반인반수, 반인반신 식으로 되어 있는 존재들, 상반신은 인간의 여성으로 나온다. 대부분 미인에다가 스타일도 참으로 좋다. 그러나 허리 아래를 보면 뱀의 꼬리, 말의 다리, 새의 다리, 물고기의 지느러미, 거리 다리 등등으로 나온다. 상반신은 인간형이나 하반신은 인간이 아니다. 다른 세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존재가 인간 세상에 찾아와 그녀들은 자신들이 머물 장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 거기서 인간 보호자를 구하여 홈스테이를 해야만 체류가 가능하다. 이른바 가족이란 형태로 인간과 같이 생활을 해야 하는 점이다. 인간이 아닌 그녀들은 물론 생식기능을 가졌기에 인간과 교미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 중간에서 무엇이 나오느냐이다.

 

사자와 호랑이와 교배한 라이거나, 말과 당나귀를 교배한 노새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종들은 종을 남기기 어렵고, 수컷은 거의 불능에 가깝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종이 합하면 어찌 되는가? 그런 의문의 요소는 SF재앙영화 <더 플라이>를 보여주었으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과 교미하는 암컷 몬스터는 그대로 자신의 유전자를 담은 아이가 나오는 것이다. 라미라, 인간형 뱀 족 아가씨도 그렇고, 하피도 그렇다. 생각하면 그게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혹은 아닌지를 떠나서, 인간에서도 황인종과 백인종, 흑인종 등이 DNA를 후손에게 남겨둘 때 각각의 특징을 타고 태어난다.

 

그러나 <몬스터 아가씨가 있는 일상>에서는 인간의 요소는 없다. 이 안에는 엄청난 사회적 함의가 숨어있다. 제작국은 일본이고, 일본도 세계적으로 강대국이다. 그 나라에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것을 바라보는 일본사회가 바로 그 작품에서 숨어있는 의미다. 이래저래 소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남자주인공의 시선으로 보자면,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그들도 생명이 있다는 것이고, 몬스터일지라도 그들도 레이디란 점이다. 종족과 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몬스터 아가씨에게 모두 레이디로서 대우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적인 교류가 활발한 점에서 작품은 그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셈이다.

 

애니메이션의 신화인 디즈니메이션에선 그런 것을 교묘하게 헤게모니적으로 이용했다. 예전에 <알라딘>에서나 <라이온킹>에서 백인식 영어나 흑인식 영어가 다른 점을 이용하여 흑인식 영어는 나쁜 것으로 몰고 가거나 인종차별적인 이념을 작품에 반영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이나 그동안 해온 짓을 본다면 모든 것을 잘했다고 본 것은 아니나, 대중매체로 통한 영상물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기존에 존재하지 않은 이미지 세계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의 현실성으로 바꾸어 버리는 스펙타클이 존재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첫 장부터 이미지로 만들어진 세계는 이미지로 통해 모든 것을 만들고 파괴한다. 스펙타클의 전복은 곧 새로운 스펙타클의 옹립이기 때문이다.

 

스펙타클로 넘치는 영상세계는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보단 감성의 세계 내지 무의식을 자극한다. 문자는 우리가 읽고 생각해야 하나, 영상물은 이미지의 재현과 소멸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므로 환상적인 공간이 된다. 물론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이미지로 남아 우리의 인식 안에 각인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집단적인 무의식을 강조하기도 하고, 각종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서 영상의 존재는 큰 힘을 발휘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시대적 분위기가 영상 안으로 스며들며,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가 하나의 신화로서 영화로 태어난다.

 

우리의 문화를 알려면 영상을 배제하고서는 떨어질 수 없다. 비단 이번에 읽은 책 제목이 <신화, 영화를 만나다>이나, 영화에서 반드시 극장의 영화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영상서사물도 포함된다. 신화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고, 신화하면 우리가 아는 단군신화나 주몽신화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사에 녹아있는 다반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우리의 이야기보단 헤게모니적인 형태로 신화 속의 주인공에 열광하거나 그 신화적인 욕망을 분출한다.

 

신화가 과거의 이야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존재로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다르다고 하나, 인간의 근본적인 영역에서는 크게 변한 게 없다. 인간의 뇌가 약 만 년 전의 크로마뇽인들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인간이 발달된 것은 기술문명과 제도 등이 있지만, 인간 그 자체로서 진화는 하지 않았다. 문명적 진화와 신체적 진화는 다르다. 오히려 신체적으로 과거의 인간보다 퇴화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적인 조건에서 지구는 생물이 살기에 점점 좋은 곳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간은 문명과 자연, 근대와 전 근대 등 이항적인 조건에 의해 갈등을 빚게 된다. 지난날의 삶과 앞으로 삶에서 현재 우리 모습은 가운데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과거는 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만 다가오는 것인가? 항상 현실의 자신에게서 인간은 정체성이란 영역에서 고민을 한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는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으면 좋겠는가? 나는 무엇에 흔들리는가? 라는 다양한 주제의식을 던진다. 신화는 바로 그런 의미를 찾아가거나 찾아주는 의식적 역할을 수행한다.

 

책에서도 잘 지적했지만, 평소 한국역사나 신화에 관심이 없는 자들도 한국이 월드컵에서 상대국가하고 경기를 하면 월드컵주제가를 부른다. 그런데 가사 중에 단군의 자손이란 말을 사용한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같이 대륙을 호령한 역사의식은 다른 국가와 경기에서 한국은 강력한 민족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인 것이다. 2002 월드컵에서 Red Devils란 모습도 치우라는 전설적 무신을 현실에서 다시 등장하게 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때만 민족을 찾는 행위는 조금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신화적 존재가 역사적 존재로서 남을 때도 있고, 현재의 역사성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신화라는 것은 현실의 영역에서 언제나 우리 삶을 향유하고 있는 현재성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신화의 세계를 재현 내지 그 법칙을 따라가고 있다면, 우리는 신화를 그냥 수동적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신화, 영화를 만나다>는 그런 점에서 처음 접하기엔 조금 어려운 점은 없지 않으나, 영화와 신화 그리고 대중매체로 통해 보는 사회적 관계에 흥미가 있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하다. 각 파트별로 신화와 주제를 분리하여 설정하고, 각 파트 마지막 부분에서 읽을 만한 도서를 추천한다. 영화나 신화의 세계는 너무 광대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화 이야기와 문학이론, 영상이론, 문화사회학 도서들을 탐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을 알아가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삶이 어떤지, 내가 누군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위에서 언급한 <몬스터 아가씨가 있는 일상>에서 몬스터와 교미하면 암컷 몬스터는 인간을 낳지 않고, 인간과 몬스터 중간도 낳지 않고 바로 몬스터로 나온다. 일본사회가 나름 열린 것은 인정하나, 아직까지 몬스터라는 존재로 통해 외국인과 내국인하고 결혼하여 후세가 나오면 내국인이라는 것보다 외국인으로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는 배타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호의적이나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많으며, 몬스터에 대한 혐오의식을 가진 자들도 있다.

 

<신화, 영화를 만나다>에서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검토하면서 1920~30년대 미국대공황, 베트남전쟁, 각 정권에 따른 시대적 조건에 따라 영화장르 내용을 다룬다. 거기서도 사회적 흐름과 국제정세에 따라 영화의 장르가 탄생하고, 성공하는 사례도 보여준다. 이른바 영화에서 트렌드가 나타나고, 그 트렌드는 현실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읽게 해주는 것이다. 대중의 욕망이 매체로 통해 드러나고, 영화가 현대적인 신화로 재탄생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추천할 만하다.

 

영화를 감상하다면 다른 제작국이나 제작사 시기가 다르지만 같은 소재와 같은 주제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아더왕의 이야기가 나올 때 최근 <페이트 제로>라는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신화 속의 주인공은 언제나 이야기의 단골메뉴이고, 제작사나 대중의 기호에 따라 새롭게 탄생한다. 그 작품들의 원류를 알고 다시 보고, 재조합한다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이쪽 분야의 전공자나 관계가 전혀 없는 분들이라면 다소 짜증이 날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책이 아닌 게 다행이다. 인문학자들이 학술적인 시선이 담겨있지만, 어디까지나 책에서 다루는 것들은 대중매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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