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리 없는 빛의 노래
유병찬 지음 / 만인사 / 2015년 8월
평점 :
사진이란 것이 유럽에 등장할 때 화가들은 조형화나 초상화와 같이 실제 대상을 그리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사진이 그대로 선명하게 색을 나타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로 화가들은 새로운 그림을 찾아내어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사진까지도 초점과 빛의 굴절 그리고 사진촬영방식에 따라 새로운 사진영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카메라는 실용의 도구만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사고, 특히 디지털카메라의 보급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사진은 여기저기서 찍어대는 일상이 되었다.
사진이 가진 미학적 가치는 그저 재미로서만 혹은 도구로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진으로 보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카메라는 사실 남이나 혹은 다른 대상물을 관찰하는 기계이다.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세상과 동일하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내 눈만이 아니라 카메라로서 정리된다. 카메라의 사진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 서브컬처 계열에서는 코스튬플레이 문화에서 가끔 보면, 미학적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코스튬플레이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사람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찍는 것으로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만 찍는 것은 예술로서 의미가 없고, 단지 인물사진만 불과하게 된 것이다. 사진을 보는 것에서 사진의 미학이란 인간만 대상으로 할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것을 할지가 세세하게 길이 갈린다. 적어도 사람이 있든지 혹은 없든지 카메라 속에 드러난 대상보단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손길이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사진에는 객관적으로 무엇이 찍혀있지만, 주관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는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연히 알라딘 서점과 네이버블로그 활동하면서 알게 된 유레카 작가의 사진집을 보았다. 내가 그동안 많이 보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림은 웅장하고 거대한 것들을 주로 많이 올린다. 특히 매년 12월 말에 나오는 달력에 항상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만든 달력 카탈로그는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사진예술이다. 사진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에 소리처럼 귀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본다. 눈으로 보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볼 수도 혹은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본다는 것은 곧 어느 시각자의 의지와 선택이 달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사진이란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그저 주어진 것에 익숙해졌다. 사진에 익숙해진 만큼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선택으로 세상을 보지 않은 것이고, 그에 따라 세상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저 살아온 셈이다. 유레카 작가는 그런 것을 거부하여 사진을 찍고자 했다. 자연의 조금만한 모습에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커다란 잎에서 물이 고여 흘러가는 것은 자연이란 살아있는 것이고, 문명의 세계에 우리가 살아있어도 자연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이웃하고 있다.
자연에 대해 파노라마의 거대한 장광을 보여주기보단 오히려 안개로 가려진 도시와 유전자를 확대한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과학문명의 답답함을 보여주었다. 미세한 자연의 세계지만, 그 미세한 거대한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사진에 담아내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당연한 것들만 보고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 안에도 작은 자연은 있었고, 새들도 하늘을 향하여 날고 있었다.
우연히 길가다가 보는 마네킹에서 마네킹의 얼굴이 없는 것은 우리의 얼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표정 없는 얼굴, 개성 없는 인간, 물질만능에 길들여진 인간에 의해 버려지는 쓰레기들, 우리 일상의 언제나 우리를 버리는 연습을 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산내면에 간 커피숍이다. 현대사회에서 커피가게는 늘 사람들이 붐비고, 차 한 잔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평, 저런 평이 오고간다. 산내면이라고 하니 아마 경주인 것 같다.
경주시는 관광과 문화역사자원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사람들, 하지만 경주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농사짓고 사는 농부가 있다. 밖에서 논밭을 보고 온 늙은 노총각 2명이 다방찻집에 들어온다. 다방 커피 맛은 뛰어날리 없다. 바리스타가 있어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틱 커피를 넣어 만들기도 그렇다. 대충 커피가루에 프리마와 설탕을 넣어 휘젓는다. 그런데 그것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커피의 맛은 커피 속에 들어가는 재료의 질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만들어내는 손맛의 지경일 수 있다. 미각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게 아니라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콤해질 것이다. 결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해 농촌에서 농사짓는 노총각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우랴? 손님 2분이 오니 마담은 김양보고 가게 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이 미묘한 기분이 든다. 그들도 사람이고 위로받고 싶은데 세상은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소외받은 자와 것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산내면 별다방의 커피가 쓰면서도 달달한 것은 아마 그런 것이다.
그런 삶의 미학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마지막 통기타를 잡고 연주하는데 몰두하는 어는 남성의 모습이다. 작은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말없이 기타와 악보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그에겐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 소중한 것들이 있다. 비록 다른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그런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사진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심지어 지나가는 새와 들판에 올라와 있는 잡초까지도 말이다. 사진에 찍힌 대상들은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말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 이 세상 앞에서 무덤덤하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