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와 자유
켄 로치 / 키노필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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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1984>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나, 그 외에도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작품도 있다. <동물농장>은 우화적 특성을 살린 문학으로 1917년 러시아의 2월 10월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다룬 작품이다. 조지 오웰이 나폴레옹이란 돼지를 두고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드러나듯이, <1984> 역시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감시제국의 빅 브라더 역시 스탈린의 철권정치를 비판한다. 빅 브라더가 만든 최고의 적이 과거 같이 빅 브라더와 활동했고, 그 적이 만든 그 책은 오세아니아에서 가장 위험한 서적이었다.


물론 그 책이 레프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조지 오웰의 소설은 스탈린에 대한 비판과 반 스탈린적인 작품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나마 <동물농장>과 <1984>는 우화적 이야기 가상적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지만, <카탈로니아 찬가>는 그야 말라 오리지널 이야기다.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소설의 형태를 가진 조지 오웰의 자기 기록이었다. 조지 오웰의 소설이 상당히 영화제작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문학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화 시나리오로 사용되므로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 점에서 <카탈로니아 찬가>는 다른 작품과 달리 매우 리얼리즘을 강요한 작품에서 그 원작을 토대로 만든 켄 로치의 <Land and Freedom>은 작가의 눈을 그대로 살린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동물농장>은 1954년 영국 애니메이션 감독 존 핼라스와 조이 베첼러에 의해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SF적인 디스토피아적인 영화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카탈로니아 찬가>로 만든 <Land and Freedom>은 1936년 스페인 민주공화국의 탄생에서 발생된 내전의 아픔을 역사라는 거대한 서사로서 보여주기보단 그 서사 안에서 단순히 자신만의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역사라는 거대서사가 개인에게 큰 영향을 준다고 해도 그 거대한 역사가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인간이란 점이다. <Land and Freedom>에서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자도 있었지만, 자신의 국가도 민족이 아닌데도 총을 든 자들도 있었다. 과거의 적국이었고, 자신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비행기와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모인다. 그 이유는 스페인내전에서 민주공화국을 되찾기 위해서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는 파시스트 국가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일으키고, 오히려 국민을 적으로 삼는다.


조지 오웰이 그 내전에 참가한 것처럼 영화 속 주인공 데이빗은 영국인으로 자신의 삶에 새로운 바람을 찾기 위해, 그리고 파시스트에 의해 유린당하는 스페인 국민들을 돕기 스스로 POUM(통일노동자당)에 가입한다. POUM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에 아나키스트와 같은 반파시스트 진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무기가 부족하고 적의 힘이 강해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 전투를 벌인다. 그 덕분에 많은 스페인 영토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고, 파시스트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영화명이 <Land and Freedom>인 것처럼 땅과 자유(권리)라는 타이틀처럼 POUM에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운다.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땅이 필요했고, 그 땅을 지키기 위해선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1936~1938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고, 1917년 볼셰비키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트로츠키의 국제주의에 반대하는 일국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내전의 POUM을 제거하기로 한다. 실제 지원을 중단하고 POUM의 중심인물을 숙청하기도 했다. 게다가 POUM을 파시스트와 내통한 적으로 내몬다. 스탈린주의에 의해 스페인내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프랑코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반파시스트 연대와 국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항공폭격을 가한다.


20세기 최고의 천재 미술가, 피카소의 <게로니카> 탄생은 무자비한 인명을 살해하던 독재자들에 대한 분노인 것이다. 실패로 끝난 스페인 민주공화국과 반파시스트 전쟁에 모두 실패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그 당시에는 패배자였으나 후세의 역사에서는 승자가 되었다고 말이다. 부당한 권력한 폭력을 휘두른 압제자는 자신의 권력이 살아있을 때만 살아있던 자이지, 후대에 이르러 정당한 평가에 의해 그 죄악이 드러나게 된다. 데이빗과 POUM 대원들은 자신들이 수복한 마을을 비록 4주만 차지하고 다시 파시스트에게 내어주게 되었지만, 자신들이 행한 의지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데이빗은 전쟁 중 사랑에 빠진 베이트가 죽을 때, 그녀의 묘지를 만든 마을의 흙 한 줌을 가지고 온다. 전쟁에서 POUM은 패배해도 자기 자신에게 패배하지 않았다는 신념이다. 영화를 본다면 다소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조지 오웰은 언제나 담배가 없는 것과 추위에 괴로운 기억이 가장 인상적이라도, 그 전쟁에서 같이 파시스트에 대항하던 동지들이 스탈린에 의해 서로 총구를 겨누는 것에 대한 슬픔은 <Land and Freedom>에서 크게 느낄 수는 없다.


아마 영화제작 시기가 1995년인 점에서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스탈린의 잔재가 사라짐에 따라 스탈린에 의해 희생된 자들의 명예가 다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이 살아있던 시절, 스탈린의 영향력이 미친 공산권 국가에서 POUM은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을 생각하면, 조지 오웰이 느낀 그 당시 상황이 영화에서는 매우 심각한 주제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은 POUM의 해체와 과거 동지간의 갈등이 주요 초점이라면 <Land and Freedom>은 당시 POUM의 투쟁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를 감상하면 영화화면이 보통 전쟁영화의 spectacle적인 요소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나 후자나 spectacle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게 아니지만, 적어도 영화라는 것이 전자처럼 오락과 낭만으로 가득한 세계가 아니라 후자처럼 일상적인 요소가 매우 강한 점을 보여준다.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담배와 땔감이 부족하다는 투덜거림이 바로 그 증거고, 영화에서도 물자부족과 자신의 몸을 계속 갉아대는 이도 그렇다. 카메라영상은 멀리 있는 모습보단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치중되어 있다.

 

전쟁에서 꾸미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켄 로치 감독이 만든 작품에서 카메라는 보통 헐리웃 영화처럼 깔끔한 영상보단 투박한 영상으로 인물을 그려낸다. 또한 영화 시퀀스에서 전쟁하는 장면보다 전쟁 외적인 영상이 제법 많은 비중을 부여한다. 파시스트가 정복한 마을을 수복할 때 농지를 모두 공유하여 공동농작을 하는 것에 대해 토론할 때 그 토론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 스스로 권리를 찾아가는 여정도 중요하나, 그 여정이 도달 이후에 어떻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다음과 같은 패배의 기록, ① 데이빗과 POUM이 스탈린의 군대에 의해 강제무장해제 되었을 때, ② 데이빗과 POUM이 목숨 걸고 지킨 마을이 다시 파시스트에게 빼앗긴 것, ③ 데이빗이 수명이 다해 사망했을 때 마치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이나, 데이빗의 손녀는 데이빗의 무덤에 시를 낭송하고, 데이빗이 목숨 걸고 싸운 곳에서 가지고 온 흙 한 줌을 다시 데이빗 무덤에 뿌려준다. 데이빗이 지키려한 그 가치는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와 함께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 흙 한 줌이 자신들이 지킨 땅, 그리고 그 땅에서 자유를 만끽할 인간에 대한 권리가 영원히 이어지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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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4-0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좋죠. 마지막 장면에서 먹먹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는군요. 캔 로치 작품치고는 꽤 규모가 큰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를 볼 때는 이 작품은 카탈로니아`를 바탕으로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몰랐네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봤는데... ㅋㅋㅋㅋ 만애비 님 땜에 아, 그렇구나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4-06 13:07   좋아요 0 | URL
곰곰발님이 좋아하는 켄 로치 작품을 하나하나 홀랑홀랑 보고 글을 적어야죠. 우울한 4월 그저 책 읽고 글 쓰는 게 저만의 자위적인 위로가 되겠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4-06 15:16   좋아요 0 | URL
4월의 우울이라..... 맬랑꼴리하네요. 서울 오시면 막걸리 한 잔 합시다.

만화애니비평 2015-04-06 15:18   좋아요 0 | URL
2월달 설연휴에 서울에 갔었죠. 그때는 형집과 큰아버지집에 간다고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아마 시간되면 SICAF 서울 애니메이션축제 되면 가지 않을까 하나, 서울에 요새 가는 게 참 괴로워지는군요. 멀다 멀어 몸과 마음도
곰발님과 저기 탑골공원의 막걸리에 돼지고기를 올려 크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 동백 숲길 맑은 그늘 물 끝난 곳 구름 이네
정민 지음, 김춘호 사진 / 글항아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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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동양에 있는 국가이나, 현재는 서구사회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서구화가 되었다. 물론 국제사회 동향과 미래에 대한 움직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고, 앞으로 그런 추세를 맞추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구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중세유럽과 르네상스 이전인 16세기까지 농업중심에서 17세기부터 목축업이 성행하였고, 19세기부터 공업이 발달하여 상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산업구조가 농업, 공업, 상업으로 이어지고 20세기는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산업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부터는 다른 산업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문화를 향유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경제단위의 확대로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게다가 대규모공업화와 농업의 기계화 도입은 대량생산으로 이어지고, 단기적인 인구증가는 직업체계에서 누구나 회사, 공장, 농사, 장사만 한다고 하여 그 수요를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직업을 찾아봐야 할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대안이 되는 사업이란 바로 문화산업이다. 문화산업은 하루아침에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가꾸고 자라면 크게 꽃을 피우는 과실수와 같다. 흔히 예술과 철학을 말한다면 분명 프랑스와 영국을 생각할 것이다. 미국은 자유주의 정치에서 하버드대학교를 생각하겠지만, 예술로선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

 

파리에 위치한 베르사유의 궁이나 루브르박물관은 세계적인 예술품이 있어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쇄도한다. 그들이 파리의 문화를 즐기면 그 거리의 식당이나 문화 상품을 파는 곳도 성행한다. 그에 따라 상업이 발달하고, 음식을 먹으면 농산업이 유지되며, 상품을 만드는 공장이나 수공업자도 이어져간다. 문화산업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주는 경제적 돌파구다. 하지만 문화산업은 결코 무에서 유로 되는 게 아니다. 그 무의 공간을 만들어줄 기본적인 베이스가 필요하다. 한국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의 농업 국가였고, 해방이후 근대화시절에 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대규모 공업은 처음에 많은 노동인력을 필요하게 되었으나, 기계의 발달은 인력을 감축하고, 서비스산업이란 사업이 발달한다. 하지만 이젠 서비스산업도 소비하는 주체인 소비자의 소비능력 감퇴로 과소소비의 한계에 도달했다. 산업구조가 더 이상 기존체계로는 무리고, 앞으로 다른 산업이 필요하고, 여기에 대한 인력과 투자개발은 새로운 직업군을 필요하게 된다. 문화산업의 기반은 바로 인문학적 소양과 창의적인 생활 그리고 문화적 베이스가 되는 그 민족만의 특이성이다. 한국에서는 아마 위에 3가지 모두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인문학 전공자가 줄어들어 그들이 사회에 나가면 생계가 힘든 세상이고, 문과계열은 취업위주의 교육을 추구하여 문화적인 소양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겁다. 이런 사회적 구조와 교육현실은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사고를 모두 막아버리게 되고, 그들에게 문화적 생산력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한국처럼 mass culture 즉 대중문화를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다른 하위문화나 고급문화 또는 counter culture 같은 반문화를 찾을 수가 없다. 결국 다양성이 문화산업의 기반이고 에너지다.

 

세계화로 통해 우리를 서구사회의 틀이란 옷을 입는 것도 좋으나 가끔은 우리만의 옷을 찾아 입는 것도 필요하다. 옆 나라 일본이나 유럽의 국가에선 자기만의 특유문화를 살려 관광 사업으로 만들거나 또는 관련 상품으로 제작한다. 스토리텔링으로서 문학, 연극, 영화, 만화, 게임 등으로 새롭게 재생산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여 다시 발굴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립뿐만 아니라 새로운 산업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각 마을의 특성을 살려 축제라는 행사를 개최하는 일이 많아졌다. 축제에서 단지 먹고 노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한다면 그 행사는 더욱 값진 것으로 변한다.

 

하지만 이런 축제와 행사의 질을 올리는 것은 문화적 유산이 기반 되어야 한다. 황무지 위에 씨앗을 뿌려도 꽃이 피기는커녕 나무줄기조차 올라가지 않는다. 이번에 읽어본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은 기존에 내가 가진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대만권역에서는 다도문화에 대한 교류가 있다. 중국 운남성의 보이차, 일본의 말차 같은 것들이 유명하다. 한국의 대표차로는 작설이 있을 것이다. 다도문화와 관련하여 다산 정약용 선생은 차를 마시면 나라가 흥하고, 술을 마시면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문화의 보존만이 아니라 건강을 챙기고, 차는 선비들의 독서생활에서 즐기던 것이므로 우리 조상의 지혜에서 술보다 차를 권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가 강진 다산초당이듯이, 유배지 주변에 있던 월출산 자락의 백운동 역시 좋은 경치였다. 다산초당이나 이 책이 소개하는 백운동 별서정원이나 생각하면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많다. 이런 역사와 문화공간이 숨 쉬는 곳이 국가에 의해서보단 그 문중의 후손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한국이 양반과 상놈이 없어진 곳이지만, 진짜 양반가문이라면 그런 양반의 특권의식이 아니라 양반들이 지켜오던 그 문화적 유산을 기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 누구의 지원 없이 오로지 후손들의 손으로 지킨 문화유산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화산업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책을 읽어보면서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리 문화유산이 저 멀리 일본과 유럽에 있었다는 점이 참 안타깝다. 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은 그 나라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문화자본으로서 그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민 교수가 저술한 이 책에서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가 당시 이 서원의 주인들과 그들을 방문한 나그네를 찾으며 우리 문화와 자연을 음미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초의선사와 완당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시대 차의 성인으로 모셔진 것처럼 강진에서 유배생활이 한국의 다도문화의 활성화 시킨 것을 생각하면 좋은 문화유산을 발굴한 것과 같다.

 

흔히 한국의 차밭이라 하면 보성차밭을 생각하나, 그곳은 일제가 대규모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에 비록 차의 생산은 많으나, 단지 넓은 차밭을 제외하면 문화적 유산가치가 강진에 비해 부족하다. 백운산의 죽로차는 대나무 숲의 이슬을 먹은 찻잎을 따서 만든 차로 그 맛이 어떨지는 모르나 분명 깊은 세계를 가질 것이다. 대학시절 다도문화동아리에서 활동할 적에 한 번 강진의 다산초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다산 선생님이 기거하신 다산초당은 윤단의 별채였고, 거기의 후손들은 다산 선생님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의 후손들이 계속 초당과 주변을 지키고, 다산차를 지켜왔다.

 

다산 선생님의 제자 18인이 만든 모임인 다신계에서 그 중 한 사람의 후예가 그 차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사서 마신 차는 이때까지 어느 작설차보다 뛰어나지 않았다. 구수하고 깊은 차 맛에서 다산 선생도 좋아한 백운산 죽로차 역시 상당히 좋은 차란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별서정원의 조경과 주변 환경은 자연에 대한 인공적 자연미가 무척 어울려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은 운치가 있을 것이다. 현대처럼 뜨거운 자동차매연 아래 콘크리트 숲을 걷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안정이 없다. 맑은 물과 공기 그리고 푸른 숲과 한옥, 과거의 것이라고 하나 지금의 우리 마음에 치유로서 그 가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그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며, 많은 기록을 남겼으니 한국의 국문학과 미술까지 같이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동안 한국은 먹고 사니즘에 정작 미래에 먹고살아갈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모습을 알고, 그 현재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문화적 유산은 바로 거기부터 시작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계속 한국이란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자산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문화에도 중요하다. 2012년 유네스코 인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되셨다. 한국의 인물과 그 인물로 통한 문화적 유산이 세계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유산에 대한 관심을 가질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문화적 가치가 오르면 교류가 활성화되고, 교류가 활성화되면 상품과 시장이 발달된다. 우리의 미래는 좀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은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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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바고 문화사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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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얻은 별명 하나가 있다. 그것은 카나리아라는 새인 것이다. 카나리아라고 하면 귀엽게 생긴 작은 새로 울음소리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관상용(觀賞用)으로 자주 이용한다. 만약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위 별명에 대해 생각하면, 내가 귀엽게 생겼거나 혹은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카나리아로 된 동기는 그렇지 못하다. 카나리아 앞에 수식해 줄 단어가 붙어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탄광(炭鑛)이다. 옛날 사람들의 지혜는 바로 일상생활에서 비로소 알 수 있는데, 바로 카나리아를 탄광에 보내 이상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탄광에는 대기 중의 산소가 21% 이하일 가능성이 높고, 만약 산소가 일정치가 낮고 일산화탄소 내지 이산화탄소가 높을 경우 인간은 질식사로 사망한다. 특히 일산화탄소는 산소에 비해 인간의 헤모글로빈와 결합도가 300배 가깝다. 탄광에 카나리아가 들어가는 순간 죽게 되면 그 탄광은 매우 위험한 곳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탄광의 카나리아(목소리가 성인남자치고 굵지 않고 약간 가는 편이고 노래는 못하는 편도 아님에 불구하고)가 된 것은 바로 담배냄새에 무척 민감하다는 점이다. 집에서 잠을 자는데, 누가 대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 바로 감지하는 점, 전에 아는 분의 결혼식장에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몰라도 나는 담배냄새를 맡은 점이다.

 

 

결혼식장 전체가 일정구역을 제외하면 전부 금연구역인데, 누군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담배냄새로 인해 짜증나는 상태로 결혼식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혼식장을 보고 난 뒤 식사하러 갈 때 일행들에게 담배냄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후각이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담배에 대한 극단적인 이질감이 있어서는 모르나, 덕분에 탄광의 카나리아가 탄생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조금이라도 상한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이상한 맛과 냄새를 느끼고, 만약 그냥 넘기면 장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장염에 걸린 일들은 1년에 1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고, 담배는 일상에서 언제나 마주치는 대상이다. 담배에 대한 부분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담배냄새는 매워 내 눈을 아프게 하고, 코를 찌르는 냄새는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게 만든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친구가 담배 피우면 뭔가 싶어 하나 물고 빨아보면 아무런 매력도 없고 그저 먹먹한 느낌만 난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던 잠깐 사귄 여자 친구와 키스에서는 뭔가 모를 불쾌감이 왔다. 물론 담배를 깊게 피던 사람도 아니고, 담배 자체도 순한 편인데도 말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담배 하나를 잡고 흡연실에 가는 회사직원, 길가에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물고 다니는 사람들, 담배는 이제 어디 가더라도 누군가의 두 손가락과 위아래의 입술을 연결해주는 교량이 되었다. 좌우와 상하 중심에 있는 담배, 그것은 인간관계도 그렇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로선 담배를 피우는 부류의 사람들과 그렇게 대화할 일이 없다. 흡연실에서 담배 한 가치는 모르는 신입사원이나 경력사원조차도 친하게 만든다.

 

 

담배의 기발한 능력이란 바로 어색함의 무력화다. 담배의 기능 중에 사람의 마음을 진정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담배를 서로 피우면서 이야기하면 쉽게 친해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게다가 술자리에 특히 담배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술은 인간의 뇌를 자극하여 성격을 급하게 만들거나 혹은 아주 늘어지게 만든다. 이때 담배 하나를 피우면 잠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정신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 이렇듯 담배는 우리 일상생활에 매우 깊숙이 자리 잡은 기호품이다. 단지 문제는 기호품이 되어도 세상 모든 사람의 기호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담배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현재 우리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 역시 마주치는 물건이다. 그런데 이 담배가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오늘 어떻게 하여 이 모습으로 하게 되었는가?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담배라는 게 일상생활에 뿌리내린 것처럼 담배문화와 관련된 것들은 누구나 1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특히 왜 한국인들은 담배나 또는 담뱃불을 빌리는지, 왜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지, 담배의 맛을 도대체 무엇인지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문학동네 출판사에 나온 <담바고 문화사>는 우리 담배문화의 시작부터 근대까지 자세히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어 지루하거나 또는 어려워 다가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을 한자로 남은 조선시대 기록은 잘 정리하여 해석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즐비하게 정리해놓았다. 우리가 누구나 알만한 역사인물이 나오고, 담배는 일상생활 속의 물건이라도 그것이 조선시대 후기 정치적 갈등까지 이어지는 것도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에 기거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내가 그 다산초당 직접 방문할 때 주변에 야생차로 가득했으며, 높지 않으나 은근히 산세가 험한 곳이라 작은 절벽 아래로 차나무들이 이래저래 자리 잡았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제자와 친구들이랑 차를 만들어 마셨다. 그래서 다산(茶山)이란 호처럼 차를 사랑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남다(南茶)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남쪽의 차, 즉 담바고 담배이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한국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던 만큼 그가 겪은 유배생활은 처음 포항 쪽에 위치한 장기현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기나긴 귀양, 낯선 공간과 외로움, 개혁을 꿈꾸던 조선의 지식인은 붕당정치에 의해 비참하게 먼 길을 가야 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담배라는 점이 신기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담배애호가 정조와 정약용이 있었다는 점에서 신기했다. 담배라는 것이 조선 임진왜란 후 새로 왜국과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반입되다가 어느 순간 동아시아 최고 담배생산지가 되었다. 담배는 청국과의 교역에 매우 중요한 위치였고, 전쟁 중에 담배가 없었다면 물자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2차례의 호란은 피폐한 국가제정으로 몰고 갔으며, 청국과의 관계에서 담배는 여러모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조선의 담배가 최상의 상품이고 최고의 선물인 점에서 담배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던 시절 제일 중요한 물건이었다.

 

 

양반들이 피우던 담배는 장죽(長竹)을 이용했고, 서민이 주로 이용하던 것은 곰방대였다. 길고 긴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던 양반들은 시간에 대한 풍류를 즐겼을 것이고, 짧지만 편리한 곰방대를 물던 서민들은 고된 하루의 일과를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담배를 맛으로 피우기도 하지만, 왜 담배에 사람들을 끌릴 수밖에 없는가?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은 단지 담배가 가진 성능이나 효과에 치중되어 있다. 물론 담배가 가진 독성이 인간의 폐와 장기에 영향을 미치며, 담배를 횡죽(橫竹)하는 것은 못된 버릇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이유란 바로 인간이 시간이란 것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한가로운 자나 지겨운 자 모두 담배가 좋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조선시대에 놀이나 문화생활에 한계성이 있었다. 영화, TV, PC, 라디오 등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방도가 없었다. 시간은 과연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같은 24시간을 주어진다고 해도 결국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난감한 부분이 생긴다. 선비들은 대부분 독서를 하며 학문을 수행하고, 과거를 보고 관료로 등용되며, 때에 따라서는 정치를 수행한다. 혹은 자연과 집안에서 풍류와 예술을 즐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시간과의 싸움이다. 인간은 지겨운 시간을 이기기 힘들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있는 것도 지겨운 일이다. 담배는 입에 빵 대신 장미를 물게 해주는 도구라고 볼 수 있다. 담배 한 번 물고 생각이 잠기면 마음이 다시 안정을 찾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한숨만 내쉬는 것보다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밤하늘을 보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는 점을 말이다. 한가함의 의미로 장죽은 선비의 무료하고 한가한 시간을 더욱 보배롭게 해줄 것이다. 이에 곰방대는 지겹고 힘든 일에 잠시 마음을 달래는 도구일 것이다.

 

 

담배란 그렇게 우리 민족 역사에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못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없다. 귀양길에 오르면서 잠시 앉아 자신의 입장에 서러워하고, 헤어진 형님을 그리워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담배 장죽을 입에 물고 다시 길을 떠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안쓰럽게 느껴진다. 유배생활 중에 길가 모퉁이에서 친구인 시보와 군보를 기다리며 장죽을 입에 무는 그의 모습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물론 담배가 모든 이에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때는 낭만이란 것이 있었다. 일제 강탈기가 도래하면서 담배는 원래 장죽과 곰방대가 아니라 종이를 말아 넣은 지권연이 수입되고, 지권연은 지금 형태의 담배가 되었다. 지금 우리 담배형태는 약 100년이 넘은 셈이다. 장죽과 곰방대가 당시 유교사회의 관습이 남아있었고, 일제는 그런 유교관습이 제국주의 침략에 방해되고, 경제적 수탈을 위해 지권연을 조선인들에게 판매했다. 물론 담배를 사람들이 많이 피우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담배로 보이는 우리 일상과 전통 그리고 문화가 급속히 사라진 점은 확실히 아쉬운 것은 분명했다.

 

 

담배에 대한 일화를 민화, 시조, 교지, 상소 등 다양한 역사적 기록을 참조하면서 <담바고 문화사>는 우리 담배문화를 보여준다. 그 당시 혹은 지금이라도 담배에 대한 문화적 유사성은 있었다. 담배 한 가치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변에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담배가 개별적인 소모품이 아니라 곰방대나 장죽의 도구였다. 그래서 누군가 빌려주는 것은 다소 성적인 문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고, 위생적으로 좋지 못했으며, 게다가 사농공사 계급사회에서 사대부가 하위계급에 머리를 숙이는 상황도 발생했다. 담배로 인해 재산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에서는 평등주의적인 요소가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유사한 문화현상을 많았다. 다소 우리 문화사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지루할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 책은 매우 재미있다. 시조내용도 재미있고, 해설내용도 재밌는 흥밋거리로 가득하다. 특히 김홍도와 신윤복의 민화는 그림을 보는 재미도 선사해준다. 고리타분한 지루함이 없는 <담바고 문화사>는 오늘 우리에게 다소 한국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조금 관심을 주는 도서라고 생각한다. 우리 문화는 버려지는 게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거나 때에 따라선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유물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지키는 것에서 우리 문화는 다양한 맛을 내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 맛은 애연가에게 달콤하고, 비애연가에겐 매울 수도 있지만, 아마 문화적 유산은 맵고 달콤한 맛을 가진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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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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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책 나오는군요! 이건 사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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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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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블로그 활동을 하다가 이웃 분의 포스팅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스팅 하던 주제는 서울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인상파 화가 전시회였다. 이때 전시회 주제에서 메인 그림으로 소개된 그림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장갑에 양산을 잡고 멀리 떠나는 배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에서 <작별>이란 그림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의상에서 느껴지는 색의 미학도 그러하나 작은 손에 잡힌 양산, 게다가 살짝 접힌 손가락, 얼굴은 옆에 뺨만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상당한 품위를 가진 우아한 여성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등을 반득하게 피며, 검은 여기를 내뿜는 배를 바라보는 그 여성의 눈가에선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떠나보낸 사람은 사랑하는 남자인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양산이 그런 것 같았다. 뾰쪽한 것을 잡은 여성의 손, 그것은 아마 남성의 상징인 남근인 것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태운 배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들을 이래저래 살펴보다, 그 아름다운 선과 색, 그리고 따뜻한 색감들은 나에게 큰 인상을 건네주었다. 미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다. 단지 그림을 처음 보며 로코코의 탐미주의적인 요소의 여성도 보이고, 고전주의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그려진 여성들은 대부분 우아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는 그의 작품 중에 <꿈>이란 그림이 있다. 어느 한 여성이 벤치에 책을 올린 채 정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은 없고, 단지 지금 나의 고독인지 혹은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드레스와 장갑에서 보이는 우아한 몸짓에서 어떤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낯선 거리감과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 넘친다. 책을 읽는 여자의 느낌인가?

이 그림이 새겨진 어느 신문기사에서 나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란 소개를 받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겉표지는 에스파냐 출신 화가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의 <무도회 이후>라는 작품이었다. 무도회에 권력과 재력이 있는 속물적인 인간들 사이에 있기보단 차라리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책을 잡는 여자의 모습은 매우 도발적이면서 자신만의 공간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 기사의 소개에 나온 사진으로 매릴린 먼로가 아주 관능미가 넘치는 육체인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것도 있으며, 역시 내가 이끌린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이 있다. 개인적으로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수 곁에서의 기다림>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읽는 것은 책을 읽는 여자에 대한 책이다. 개인적 취향보다 소중하지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를 읽으면서 생각 드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여성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책이란 흔한 물건 중에 하나였지만, 19세기까지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은 흔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따라 인쇄술이 대량생산과 대량판매로 인해 유통되었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부류도 대다수의 대중보단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있던 중산층 이상의 부류였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20세기 이전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성들은 대다수 어느 정도 경제적 지위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가능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을 본 것처럼 가난한 여성 아니 가난한 남성 그 모든 사람들이 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으로 정착되던 시기는 아직 130년도 되지 않았다. 독서를 하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사색을 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시간적 여유, 공간적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런 조건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물론 이것조차도 호혜일 수 있다.

여자들이 왜 책을 읽으면 위험한가? 책에는 각종 지식이 담겨있고, 인간의 사유를 넓혀 준다. 고대사회부터 중세사회까지 글을 읽고 쓰는 것은 권력계층이 가진 특권이었다. 즉 인간의 언어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가능해도 글로서 쓰고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식으로 얼마든지 현실의 문제를 알 수 있었고, 자신의 통치를 해주는 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지식이 대다수 민중에게 퍼지는 순간, 부당한 현실에 반항하고 지배계층에 의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중 특히 여성에게 책은 금물의 대상이었다.

오직 볼 수 있는 것은 성경과 신학서적, 그것은 당시 중세유럽에선 신앙이 정치적인 제도와 권력을 좌우했기 때문에 종교와 신학에 대한 이념은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더 강력하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만약 여기에 정치학과 사회적, 그 밖에 많은 서적들을 여자들이 읽는다면? 남성과 똑같은 수준의 지성과 이성이 생기는 것이다. 작가인 슈테판 볼만은 이런 점을 잘 지적했고, 특히나 동양에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실천한 이유도 진시황 자신의 통치방법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대 지식인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이 없어지면 자신의 정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없어지고, 책까지 불태우면 앞으로 반대할 사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책을 읽는 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음으로서 현실의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시민 내지 지식인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은 권력을 지닌 남성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여성들은 뒷전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 혹은 지나치게 민감한 여성들은 남녀차별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더 나아가 계급에 대한 차별이었다.

그런 차별이 점점 와해되어 가던 시기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부터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혹은 근대사상과 근대정치의 틀을 만든 것이 프랑스대혁명이다. 전 근대적인 봉건왕조시대를 넘어 이제 다른 정치체가 열린 것이다. 이때 프랑스대혁명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보수보다 급진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들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자크 루소를 존경했고,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국민공회와 헌법체계를 만든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루소의 서적인 <사회계약론> 이전에 유명한 서적으로 <신 엘로이즈> 또는 <줄리>라는 서적이 있었다.

낭만주의 문학이 도래하고, 루소를 이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열광적인 사랑과 더불어 시대적 문제를 공격한 위험한 책이었다. 귀족이나 혹은 상류계급의 여성과 그녀를 사모하는 계층이 남자의 사랑은 낭만적으로 다루었으며, 끝내 이루지 못해 영원한 이별로 긴 여행을 가거나 때로는 베르테르처럼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는 당시 귀족이나 상류여성 또는 막 태어난 지식인 여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프랑스대혁명 여걸 롤랑 부인 역시 귀족의 아내지만, 루소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그 외에 수많은 여성들이 루소의 책에 흠모를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19세기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시기 책을 읽은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면 18세기까지 책 그 자체가 귀했다.

책을 생산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그 책을 얻을 수 있는 경로 자체가 한정적이니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곧 특권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것은 곧 그의 지식의 보고이며, 또한 그의 지식은 권력이기도 하다. 어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소설의 등장과 보급은 엄청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처음 보고 놀랐지만, 18세기 전후로 책 1권이 보통 가족들이 2주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치란 점에서 책이 귀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단 번에 알았다. 하지만 이제 책은 점점 보급되면서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들어가게 된다. 여성들은 처음에 내부 활동만 하게 되면서 순종적인 인생을 강요받다 어느 순간 그 내부 생활에서 책으로 통한 여가생활을 가지게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존 지배계급과 그 지배계급에 의해 다시 여성을 지배하는 (권력층)남성과 남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한 이유는 아마 그런 기존의 이념에 순응적으로 따라가는 여성이 아니라 거기에서 탈피하거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책을 읽는 여성들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자신으로서 있는 모습이 많다. 곧 나는 나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의지와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후기에도 그런 진보적인 남녀관계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문학가 엘케 하이덴라이히는 여성의 자율적인 인간을 완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여자들은 표지의 글처럼 책과 나 사이에 당신이 들어올 빈 자리가 없다고 하나, 막상 그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엘케 여사의 글을 보면 책을 읽는 여자는 남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근대사회나 근대사회에서나 남녀의 결혼문화에서 여성에게 결정권은 없었고, 그저 시대의 도덕에 따라 흘러간다. 이제는 그녀들이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은 기사에선 이 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책 읽는 여자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녀들은 좀 더 영리해지는 것도, 이기적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나이가 들수록 여자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한 권의 책이 돼야 한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책을 읽는 여자들은 결국 책을 읽는 남자, 아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하고, 책으로 혹은 자신의 판단으로 얻은 그 무언가를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뭔가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잘 지적하다시피 21세기 시대는 영상의 시대다. 문자문화의 이전 시대는 종교의 관념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지배했지만, 다시 이제 이미지의 세계가 인간의 관념을 지배한다. 그런 와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속의 흐름에 부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의 항로를 찾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확실히 밖에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여자들은 뭔가 색다름이 있어 보인다. 물론 책이라고 하여 수험서 내지 교과서, 자기계발서 같은 단순히 자기의 이익을 위한 책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양식,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찾아 자신만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매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개성이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 중요한 것 같다. TV 내지 미디어로 익숙한 삶을 살게 된 현대인들은 도저히 각자의 개성을 알 수 없다. 흔히 미팅이나 또는 모임자리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가진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왜냐하면 항상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이제 막 개봉한 영화를 대형극장가에서 보고, 어제 재미있는 쇼 프로그램을 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제는 거의 대다수가 같은 것을 돌고 돌며 이야기하기에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야기의 형태는 다르게 진행되어도 결론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후크 송처럼 들린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취향을 읽거나 혹은 새로운 재미를 찾아 다른 분야의 서적도 읽어본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 최근에 읽어본 <서재에 살다>라는 책은 19세기 조선시대 북학파 및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인생과 업적 그리고 서재에 대해 다룬다. 이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것을 알았고,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방에 거주하는 내가 서울 쪽에 세미나 참석 후에 잠시 성북동 일원을 거닐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분이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로 통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 그리고 다른 재미와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서모임 때 새로운 지식과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인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서로 공감도 하기도 하나, 때로는 전혀 다른 반응이 오기도 한다. 그런 타인과 공감과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매력이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이 있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이질적인 존재 즉 책 제목처럼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로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책을 읽지 않는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더욱 위험하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세상의 물결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남겨둠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 그런 선택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을 그저 그래 다루지 않는다. 그 남자가 언제나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자신의 선택지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그녀들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가진 존재다. 프로이트가 남자들은 성욕에 빠진 존재라고 하듯이 나 역시 남자라서 성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 성욕을 가진 평범한 남자라도 여자에 대해 생각하면 성욕의 대상으로 살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체력의 한계가 있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욕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진 상대만이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인간은 한가로움을 추구해도 지루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가 보통 TV나 유행에 쫓는 여자들에 대해 눈이 갈 수 없는 것은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들과 있으면 언제나 지루한 기분만 느낄 것이다. 책을 읽지 않은 여자들만 있는 세계가 위험한 이유는 나라면 그 세계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 지루함 세계에 있는 여자들은 성과 이름, 얼굴과 형태만 다를 뿐 그 속은 어느 누구 하랄 것 없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책을 소개해준 분은 분명 여성인 것 같았다. 내가 이 책을 소개해준 것에 대한 소감을 덧글로 남길 때 그분이 나에게 답변내용으로 “요즘은 정말 지성과 감성이 이성이 고루 분배된 여인은 드물죠, 그림도 그렇고. 문학 속 인물들 그렇고, 살기가 바빠서 라고 탓하면서” 말이다. 물론 여기에 기본적인 품위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이란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어째든 책을 읽는 여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그녀들이 위험하다고 하나, 그녀들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는 정신적인 교감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남자들이 단순히 그녀들을 보는 시선에서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파울로와 프란체스코>처럼 있기보단 차라리 그녀의 손에 든 책에 대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녀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될 듯하다. 물론 이 시대는 그런 그녀들이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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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통해 주루룩 여성들을 감상용으로 보는 시점이 묘하기도 한데, 아름다운 걸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마릴린 먼로 책 읽는 사진 종종 보게 되면 들고 있는 책이 또 화제 아니겠습니까? 아니, 조이스 <율리시즈> 의식의 흐름을 저렇게 탐독하면서 읽을 수 있다니! 거의 다 읽었기까지! 여기 올려진 사진도 거의 막장 페이지가 보이려 하잖아요ㅎ...마릴린 먼로가 무슨 책들을 읽었나 평전이 읽고 싶어질 정도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13   좋아요 0 | URL
저도 먼로가 저런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했습니다. 육체적 미, 즉 남성의 눈을 자극하는 글래머에 저런 지적인 매력이라니..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묘한 게 좋습니다. 오덕의 특성상..후후후

AgalmA 2015-01-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걸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ㅎ
간송미술관 성북에 있을 땐 일년에 딱 두번 일주일밖에 개방이 안되는 데다 건물도 일제시대 건물이었나 해서 괴상했죠. 그림을 무슨 죄수들 감옥 들어가듯이 줄줄이 보는 희한한 상황이었는데 ㅎ 동대문 상설관이 생기니 여유부리며 더 안가게 된다는 함정 ㅎ;
김홍도<미인도>를 아직 실물로 못봐서 간송전시는 늘 눈여겨보긴 합니다. 모사로 그린 실물크기액자만 봐도 모나리자 저리 가랄 아우라예요.
서울 오시면 이제 간송미술관 편하게 보시겠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41   좋아요 0 | URL
요새 미디어는 그랗게 만들죠?
간송은 성북동 지나가면서 본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죠. 서울은 진짜 볼 게 많아 놀랬습니다. 부산에 살면 서울 사람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들이 있지만, 문화적 공간이 부족하죠. 저 같은 특이종자는 아무래도

예전에 서울에 페루애님과 막걸리 마신 적이 있는데, 다음 기회에 동대문 체크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전시보단 제가 남도에서 해남 윤선도 녹우당, 강진 정약용의 다산초당, 정약용의 외손자 방산 윤정기가 기거한 명발당도 가봤는데, 역시 실제 보는 게 좋죠.
다산초당에서 바라보는 강진포구....참...좋죠...

AgalmA 2015-01-22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저 위 기사 ˝남자들이여, ...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작성 글은 매우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권신장이 많이 돼 그것에 대한 비꼼과 비굴함도 느껴지거니와 기사니 만큼 다분히 선동적인 부분을 포함할 수 밖에 없겠지만 무자르듯이 그렇게 일반화시킬 부분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업적 인정하긴 하지만 가장 큰 패악 중 하나가 인류문화에 남성/여성 이분법을 더욱 고착화시켰다는 겁니다. 융이 왜 갈라섰는지 이해할만 했죠. 우산, 파이프 ... 비슷한 모양새만 나오면 너무들 쉽게 남근이라 말하지만 사실 당시의 복장문화부터 따져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그림이 그려졌을 때 작가는 프로이트 시대였나도 중요한 문제죠. 도상학적으로 그림에 그러한 배치 문화가 있었다는 것도 저도 알지만 프로이트 이론확립 후 모든 기표들을 성적잣대화하려는 경향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한 인식이나 교육이 저변화됨으로서 그것이 또한 역으로 더깊은 무의식화 과정을 밟습니다. 인간의 연상작용이 얼마나 쉬우면서도 편파적인지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학습된 삶으로 삶을 재단하는 또다른 폐단을 만들 수 있는 거죠. 진화가 진보가 아닌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실을 더 거론하되 제가 깊이 검증하지 않은 걸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거론할 때조차도 누차 검증하려 하고요. 다들 너무 쉽게 담론화 만들지만 사상의 자유 추구라는 명목하에 사회 갈등과 편견의 양산은 아닌지 모든 지식인은 경계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말은, 상대가 그 합을 찾게 만들어야지 내 말을 진짜로 믿게 만드는 답이자 끝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09:19   좋아요 0 | URL
우선 답글 전에 제 블로그에 가보면 ˝Das Kapital˝ 자본 오리지널이 있습니다. 1987년 이론과 실천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서적인데, 당시 강신준 교수님이 다른 분과 같이 공역했죠. 한국 최초의 자본 번역서라고 하더군요. 당시 검찰에 고소당했는데, 검사가 이 책을 보고 그냥 풀어주었다고 하던데(어려운 도서이니)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총 9권의 책 중에서 3권을 구했죠. 지금은 5000원에 파나, 앞으로 저 책의 가격은 엄청 비싸지겠죠? 한국 인문학 도서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니깐요.

http://tomanderson.blog.me/220149863532

아무튼 저는 일단 남성이고, 아갈마님은 여성이시겠죠? 모르겠습니다. 일단 신문기사 내용은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732645&cp=du

같네요.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은 제 개인적이고, 우선 이분법적인 요소로 통해 남녀의 차별문제를 인류학적 영역에서 상당히 공격을 많이 하는 부분이죠. 양산이란 이미지 상의 배치가 단순히 그 당시의 복장에 대한 흐름으로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남자)라는 것으로 전 생각했죠. 차라리 우산을 편 채 2~3명의 여자가 있었으면 그저 양산은 악세사리나 생활용품의 기능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라는 것, 정말 자유란 소중하나, 그 자유가 이성이 없으면 자유로 볼 수 없다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생각나는군요. 편파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 있고, 그 편파적인 요소가 업다고 믿는 것보다 차라리 있을 수 있으니 그것에 대해 망각하고, 혹은 지나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갈마님의 조언은 여러모로 좋은 의견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죠. 제 자신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거나, 약속시간을 정해놓고 지키지 않으면 물론 이 부분에선 강요하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요는 아닙니다. 공격도 아니고요. 제 말투가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늘 그 때문에 사과를 하곤 합니다; 저는 혹시 놓치고 계신 부분은 없으신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푸념이나 일상대화의 글을 쓰시는 게 아니니 더더욱.
이성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 자유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 현재 제 생각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저도 압니다. 종종 갔었죠. 이젠 없어졌다고 들은 거 같은데. 비싸지겠다는 말씀은 왜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인문학의 책임감을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서보다 사람의 가치가 더 덧없는 세월이라서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13:56   좋아요 0 | URL
제 답글에 아갈마님에 대해 강요나 공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지나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주신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아하하하...
보수동 책방골목 규모가 예전보다 많이 적어지게 되었죠.
이론과 실천에서 판매된 도서가 이젠 나오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완전한 세트가 아니라 분리되었으니 언젠가 마르크스 서적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마 먼 미래가 되겠지만) 물론 저는 팔지 않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4:46   좋아요 0 | URL
걱정했는데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없어지면 안되는데...그나마 유지된다니 그것도 다행입니다.
이론과 실천 좋은 책 많았었는데 그리 되었군요.
링크는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