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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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이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하는데, 루소의 사상이 그 사상의 기반을 다져놓은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과연 그런 국가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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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1 - L Novel
와타리 와타루 지음, 박정원 옮김, 퐁칸 ⑧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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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인간관계 심리묘사 그리고 인간의 군상을 제대로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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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에서 방영되면서 본 작품은 기존의 가이낙스 작품과 비교하여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이낙스에서 이때까지 마법소녀 장르를 제작하지 않았다.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의 경우 변신한다고 하나 그녀는 인간이 아닌 천사라는 점이고, 마법소녀 장르는 인간인 소녀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다. 변신이란 속성에 맞추어 보자면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는 일반적인 마법소녀 장르에 큰 차이점이 없다. 주인공들은 미지의 외계인을 위해 우주선의 엔진 조각을 찾아가고, 그것으로 통해 서로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성장물이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을 일본애니메이션 장르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마법소녀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조금 다른 특이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감독이 사에키 쇼지라는 애니메이터다. 사에키 쇼지는 1995년 가이낙스에서 에반게리온 동화를 시작하여, 2004<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의 감독으로 활동한다.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서 각본을 맡은 야마가 히로유키가 제작한 <마호로 매틱>에 참여하고, 2009<마호로 매틱> 특별편을 맡는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2005<이 사람이 나의 주인님>이고, 2012년 니시오 이신의 원작 <메다카 박스>를 제작한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초기에는 가이낙스에서 남성 중심의 오타쿠(열혈, 모에, 세카이계) 속성(<<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사람의 나의 주인님>, <마호로 매틱>,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메다카 박스> ) 작품을 제작하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를 제작하게 되었다. 가이낙스 창립 당시 Daicon 3 오프닝을 보면 나이 어린 소녀가 등장하여 비행을 하고 미사일을 날리는 모습이 나온다. 전투미소녀라는 특징과 더불어 롤리타 콤플렉스적인 요소도 등장한다. 전형적인 미소녀 모에 속성에 전투장면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이런 속성들이 가이낙스의 작품 토대가 되어 <톱을 노려라>,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가이낙스는 2017년 기점으로 변화가 생긴다. 안노 히데아키를 비롯한 많은 초기 가이낙스 인원들이 카라 스튜디오를 설립해서 가이낙스의 많은 초기 멤버들이 퇴사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초반에 가이낙스와 어느 정도 같이 제작하다 뒤이어서는 카라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이낙스 작품들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2010<하나마루 유치원> 같이 전혀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등장했다. 유치원생 3명을 중심이 되는 일상 장르로 기존 가이낙스 작품과 큰 차이가 생겼다.

 

주인공들도 예전에 거의 남자 중심으로 여자로 변하기 시작했고, 2011<단탈리안의 서가>는 애니메이션 안에서도 현실적인 리얼리티적인 작화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서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 감독인 사에키 쇼지는 <마호로 매틱> 특별편 이후 2012<메다카 박스>를 제작하고, 2011web애니메이션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2015년 정식으로 TV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 가이낙스의 흐름과 더불어 사에키 쇼지 감독이 맡은 작품에서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는 상당한 변화를 부여한 작품이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는 최근 일본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인물에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된 것, 여성 캐릭터는 남성들의 모에요소를 만족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된 점에서 현재 애니메이션에 흐름에 상당히 맞추어가고 있다. 그러나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가 기존 가이낙스 작품세계를 배신한 것이라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치되는 작품은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의 주인공 스바루는 평범한 중학교 여학생으로 우주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매사 자신의 소심한 성격, 자신감 없는 자신에 대해 고민을 하고 산다. 우연히 플레아데스 성인을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어릴 적 친한 친구인 아오이를 만나게 되면서 과거에 아는 아오이와 지금의 아오이는 서로 다른 것처럼 느낀다. 단절된 시간의 교류 속에 변화라는 큰 물결에 스바루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마법소녀 장르로 볼 수 있고, 그 특징 중에 마법소녀로 변신한 주인공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활약하는 점이다.

 

그들의 활약은 역시 별의 조각을 모우는 것이나, 그것은 표층에 존재하는 이야기로 보여주고 내면의 이야기는 스바루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스바루의 고민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다. 단지 신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은 언제나 자신에게 냉대하여 항상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는다. 대신 스바루는 부모님 모두 계시고, 스바루에게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준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이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제작된 가이낙스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제작 20년 후 대치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언제나 신지에게 완벽한 임무수행을 요구했고, 신지는 그것에 고통스러워해도 주변 네르프 요원들은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신지에게 그 무리한 요구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에바에 타지 않으면 신지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자신은 쓸모없는 아이가 되는 것에 상처받는다. 그러나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에서 스바루의 아버지는 어떤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분명히 불량품은 나오고, 그것이 못쓰게 될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는다. 분명 거기에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

 

스바루는 자신에 대해 아직 어른도 아니면서 어린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고, 불안정한 자신의 모습에 두려워한다. 스바루의 고민은 아오이가 바뀐 것처럼 점차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스바루는 자신만이 아니라 아오이 역시 스바루가 변화한 것에 무서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만 불안한 게 아니고 자기만 어중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량한 엔진부품이 지금 당장 쓸모없어서 버림받는 게 당연하다 여기지만, 스바루의 아버지는 그 엔진부품이 지금은 쓸모없다고 하여 결코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한다.

 

결국 어중간하고, 불량한 부품처럼 필요 없어 보이나, 그 모든 것이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을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청소년들은 언제나 자신의 현실에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그런 요소를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에서 스바루로 통해 보여주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부모 같은 어른들의 따듯한 시선, 그리고 친구들과의 유대감이다. 자신은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지와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의 스바루, 물론 인간은 처음에 혼자나,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방과 후의 플레이아데스>가 밤하늘의 별자리인 플레이아데스를 지칭한 것처럼, 밤하늘의 별은 서로 빛을 내며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준다. 물론 플레이아데스 전설을 찾아보면 슬픈 그리스신화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밤하늘의 별자리란 우리 인간에게 많은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주었다. 방과 후에 학생들은 자기에게 시간이 개인적으로 주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방과 후란 거의 학원에 가거나 PC에 앞에만 매달려 있을 뿐이다. 꼭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아 관찰하는 필요는 없으나, 자기만의 별자리를 찾아떠나는 여정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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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벌루션 No.0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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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좀비들이 탄생한 시기를 알리는 것이 <Revolution NO.0>이다. 1학년 때부터 친구들이 뭉치게 된 동기 그리고 그들이 언제부터 도전이란 단어를 찾았는지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로다. 누군가 우리보고 "너희들은 할 수 있다 내지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잘 알고 있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알고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다. 바꾸기 위해선 우리는 단순히 하면 되? 라는 말만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하게 될 수 있는 계기나 상황이나 길라잡이는 되어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도 나 자신도 어른이란 범주를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런 연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사리사욕을 위해 어떻게든 희생시킨다. 희생되는 자들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른바 문제아들, 사회가 포기하고 학교가 포기한 사람이다. 문제아란 이정표가 붙는 순간 세견이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길가에 죄 없는 사람을 건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코질 하는 사람이라면 비난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누구에게 해를 주지 않는데도 단지 아웃사이더(out-sider)란 신분에 의해 몰리는 경우가 많다. <Revolution NO.3>에서 좀비들은 자신들이 아웃사이더에서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것보다 아웃사이더이기에 새로운 바람으로 만들었다. 세이와여고라는 아가씨 학교에 난입하여 그녀들과 사랑을 꿈꾸는 좀비들, 우리 사회는 계층의 구분화가 사회의 고립화를 몰고 왔다.


그렇다면 이 고립을 부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제3의 계급인 좀비들이야말로 그 바람의 중심점이다. 단 조건은 무관계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들과 같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난자질을 당한 열등이웃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 열등해질 수밖에 없는 나의 의지가 아니지만, 그 열등한 위치란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Revolution NO.0>는 바로 그 혁명 이전의 이야기다. 미완으로 이어진 혁명, 그러나 미완의 실패가 있었기에 좀비들은 성공했다.


<Revolution NO.0> 역시 좀비스 시리즈로 매우 유쾌하고 재미난 소설이다. 순수문학보다 장르문학에 가깝고, 가네시로 가즈키 작품은 만화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이 학교에 등교하면서 친구 순신과 만난다. 순신은 항상 손에는 책을 잡고 있는데, 그 책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Fly daddy fly>와 <Revolution NO.3>에서 항상 책을 잡고 있던 순신이다. 그런데 이번에 순신이 잡고 있던 책은 단 1권이었다.


순신은 주인공에게 책 제목을 이야기해준다. <감옥의 탄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책제목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다. 고등학생이 읽는 것은 물론이거나 대학교 인문사회대학 학부생조차 어려운 서적이 푸코의 서적이다. 이 소설에서 푸코의 서적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학교란 곳이 감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공장, 병원, 회사, 군대, 학교, 고아원 등과 같은 집단수용시설은 인간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처벌을 내린다.


감시체계는 판옵티콘 시스템, 즉 일망감시시설로 작용한다. 넓은 산 안의 수용소(학교)는 학생 전체를 감시할 수 없지만, 그 감시를 대신하는 게 사루지마와 선생들이다. 그들은 손에 죽도나 방망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이 자신들의 시각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한다. 소설후기에 이 모든 폭력적 행위가 있었냐는 말에 작가는 실제 겪은 일이라고 한다. 이런 폭력교사가 우리에겐 생소할지 모르나, 우리 한국사회 역시 익숙한 인물이다. 좀비들만큼은 아니나 비인간적으로 학교교사로부터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폭력을 나 역시 당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군가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모르나, 그들이 진짜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부터 나는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말 잘 들으라고 하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을 보면 모순이 많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고, 때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나이가 많은 어른도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합리적인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Revolution NO.0>에서 좀비들이 당하는 것을 말이다. 억지로 입학생을 느려 입학금을 받고 교묘한 술수로 학생들을 퇴학 및 정학시키는 모습에서 교육의 가치는 인간의 완성이 아니었다. 학교의 이익, 자신들의 편익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의 시작점이다. 교장을 비롯한 학교선생들은 감시체제에서 처벌을 담당하던 존재지, 진정으로 감시하는 존재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말이나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를 생각하면 순신이 들고 다니는 책 제목 <감시와 처벌>처럼 감시의 수단으로 비인간적 폭력을 합법적 처벌로 이어진다.


그래서 좀비들은 <Revolution NO.0>에서 판옵티콘의 학교를 도망치기로 한다. 감옥을 탈옥하여 다시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감옥 안의 죄수처럼 살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판옵티콘이 이미 작용된 사회는 자기검열이란 무서운 의지가 살아있다. 남의 감시가 결국 하나의 생활적 양식이 되어 그 감시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주변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만든다. 인간 사이의 감시와 고발은 사회 대다수 약자에게 속박을 쇠사슬만 안겨준다.


문제가 있는 사회, 불만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하다면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만의 법칙을 구축해야 한다. 법칙이란 힘이 있는 자들이 자기들 편리를 위해 만든 허울 좋은 명분이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자신만의 법칙이 존재해야 한다. 좀비들이 선택은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면 용기다. 그리고 계층이 다른 자들과의 공감과 공유다. 그래서 <Revolution NO.0> 마지막과 <Revolution NO.3> 초반에 똑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생물학 선생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서 말이다. 좀비들은 우리보다 더 못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다. 우리가 더 추락한다면 어디와 겹쳐 보일까? 좀비는 진화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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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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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예술적이야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막상 보통 사람들과 예술에 대해 논하는 순간, 그들이 말하는 예술에 대하여 논하는 순간 당황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예술이란 단지 세간의 흐름이나 조류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세간의 평가 역시 중요하나, 문제는 그 평가를 본인들이 정확히 인지하는지 혹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두고 흔히 이렇게 말을 한다. “미술관에 가는 이유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기 위해서인지? 아니라면 그림이 걸린 벽을 보러 가기 위해서인지?”

 

예술 중에서 역사가 오래되고, 다양성이 넓은 미술은 더욱 그런 모순에 빠지게 된다. 가령 미술에 대한 평에서 지난 19~20세기는 혁명과 전쟁으로 세계가 요동치던 시기다.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갔으며, 이들을 위해 많은 혁명가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21세기에 오면서 더 이상 세계를 바꾸려하는 혁명가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20세기 말 소비에트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진영으로 혁명가란 단어는 무색하게 만들었다. 물론 소비에트연방이 19172월과 10월 혁명에 의해 탄생했지만,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혁명은 실패한 것으로 돌아갔다.

 

오히려 혁명을 주장하던 볼셰비키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다.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흐름에 예술에 무슨 영향을 주는가에서 바로 이런 역사적 순간들이 예술을 탄생하게 만든다. 예술은 그 시대의 모습이고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 또는 그 현실에서 절망하는 비극에서 예술은 탄생하게 된다. 20세기 최고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경우 그는 평생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프랑스 공산당으로 활동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파시스트를 저항한 파블로를 두고 우리는 그를 배척하는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미술품은 대부호들의 수집품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예술이 어느새 시대정신과 저항의식이 반영된 세계가 아니라 상품으로 전략한 신세다. 이런 세계에 도래하면서 예술이란 무엇이고 그 예술을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은 우리 시대 대표적 예술가를 만나고 정리한 내용이다. 진중권 교수가 창비라디오에서 문화다방에 늘 새로운 게스트를 2회에 걸쳐 대화를 나누고 녹음을 한다. 평소 진보논객이나 정치적인 활동보단 문화평론가 및 미학자로서 이 책이 나온 것이다.

 

물론 문화평론이나 미학에서도 정치적인 요소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어떤 사회적 활동이 정치적이다. 심지어 내 자신이 정치에 관심 없다거나 혹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선전 역시 정치적인 발언이다. 문화를 파헤치기 위해 사회과학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필요하고, 미학을 한다는 것은 철학에 관여된다. 미학과 관련하여 공부한다면 미학 그 자체를 배우는 게 아니라 철학 관련 도서를 찾아보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 미학은 철학이란 칼로서 예술을 파헤쳐 보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에서 항상 갈등하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보거나 또는 그런 공간을 꿈꾸는 경우 예술을 창조하게 된다.

 

예술의 시작은 이 책에서 이외수 작가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따온 말처럼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예술을 우리 인간이 계속 추구하는 이유는 인간은 빵(식욕)과 고기(성욕)만으로 살아가기 없기 때문이다. 뭔가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잠재적 의식, 또는 지루함과 한가함의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시도, 이런 것들이 예술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물론 예술이라 하여 아름다운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기존의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려는 것에 대해 철저히 파괴하려는 반() 미학적인 아방가르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동일할 수 없고, 모든 인간은 목적이 정해진 어느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기준을 파괴하고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모더니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약자와 비주류의 이야기도 대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윤리성의 부재라는 한계점이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새로운 예술적 조류는 모더니즘 사조에 계몽주의적 정신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포스터모더니즘의 세계에서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예술이란 바로 그렇게 새로운 흐름을 찾아가거나 또는 그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지 유행이란 이름처럼 공장사출기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소통과 공감, 더 나아가 사유와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예술이란 것을 대중적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이상이어야 하는가이다. 대중적인 예술이 없다면 보통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흐름을 전해줄 수 없고, 예술이 너무 대중의 취향에 부합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문화적 상품에 불과하다. 게다가 예술가들은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원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생계를 마련해야 하는 노동자들이다.

 

생계의 기로에서 그들은 독특한 자신들의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대중의 기호로 넘어가면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예술을 만들 수 없기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대중의 세계에 나아가지 않으면 자신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현대에서 예술가들의 모습이다.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에서는 한국 대표 예술가 7인을 소개한다. 그 중에서 아는 얼굴도 있지만, 모르는 얼굴이 더 많을 것이다.

 

우선 사진으로 구본창, 건축으로 승효상, 배우로 문성근, 미술가로 임옥상, 소설가 이외수, 음악평론으로 강헌, 시각디자이너로 안상수, 미디어 아티스트로 박찬경이 있다. 내가 이중에서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건축가 승효상, 배우 문성근, 소설가 이외수, 음악평론 강헌이었다. 박찬경은 예전에 내가 보고 싶던 영화 <만신>의 감독이었다. 아마 일반인이라면 배우 문성근이나 소설가 이외수는 잘 알겠지만 그 외에의 인물은 모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자신의 한글프로그램을 실행하여 글꼴을 찾아보면 안상수라는 이름이 정확하게 나온다.

 

그런 점에서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을 읽는다면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하여도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은 어디서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냥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보단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그들이 무슨 의미로 만들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더 좋다. 알면 알수록 새로운 맛이 베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맛을 우리가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밥만 먹고, 잠만 자고, 일만 하고, 성행위만 하고 살아갈 수 없다. 생리적 동물성과 사회적 동물성으로 우리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문화에 대하여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문화를 즐기고 싶은데 막상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문화는 즐기기보단 오히려 낯선 세계처럼 다가올 것이다. 다양성이 존재하고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라면 우리는 늘 새로운 즐거움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 예술가라면 우리 역시 예술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좋다. 예술은 우리에게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것만큼 가까이 존재할 수 있는 문화양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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