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 섬 레분토에서 어설픈 어부로 살아가던 우노 간지는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불린다. 아이들이 놀려도 그냥 웃고 마는, 부당한 대우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는 정말 바보일까? 돈이 없으면 서슴없이 빈집털이하는 걸 보면 바보라고 하기에는 너무 똑똑하고, 남들이 험한 말을 해도 그냥 웃고 마는 걸 보면 정말 바보 같고. 우노 간지. 그는 누구인가.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그가 저지른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에 푹 빠져 읽고 있었지만, 한 번씩 어떤 느낌이 차올라서 답답했다. 그는 이렇게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왜 한 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 머리를 다쳐서? 바보여서? 이게 죄라는 걸 몰라서? 그는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궁금증은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형사와 함께 달리면서 놀라움으로 변해갔다. 경악했다.


소설은 세 명의 시선이 교차로 진행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여러 범죄의 용의자인 우노 간지. 이 사건에 뛰어들어 온몸을 불사르는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이는 산야의 여관 딸 마치이 미키코. 처음 돈이 필요해서 소소하게 저지르는 간지의 빈집털이는 금방 멈출 줄 알았다. 그는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가 유흥을 즐기며 흥청망청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니, 그의 범죄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에게도 부족한 뭔가를 채워주는 수단이 되었겠지.


그의 재능이자 장기인 빈집털이를 계속하면서도 그는 사람을 헤치지는 않았다. 레분토를 떠나면서 사기를 당한 그는 위기도 잘 넘겼다. 물론 남의 것을 훔쳐서. 계속되는 범죄는 경찰의 추적을 받기 시작하지만, 간지는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 더 의아한 건 간지의 태도다. 주변에 경찰이 깔려있고, 계속되는 사건에 간지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여자와 여행을 가다니. 이 무슨 강심장인가.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언제 잡힐지 몰라서 숨어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 뛰지 않나? 두려움과 불안으로 심장이 두근거릴 것 같은데? 간지는 보통의 이런 감정을 넘어선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정말 생각이 없는 건지 뭔지, 도통 모르겠다.


처음 레분토의 다시마 사업가의 집에서 불이 난 사건, 도쿄의 은퇴한 사업가가 살해된 사건, 6살 아이의 유괴사건. 별도의 사건으로 보이는 이 범죄들이 우노 간지라는 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면서도 긴가민가. 형사들은 여러 가지 증거를 확인하면서 간지를 용의자로 추적하지만, 평소 간지의 행동으로 보면 도저히 이런 범죄를 저지를만한 인물이 아닌 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를 아는 사람 모두 간지가 그 정도의 일을 저지를 거로 여기지 않는다. 그 바보가? 설마. 그래도 그가 했을지도 모를 범죄를 떠올리면 어떻게 해서든 간지를 붙잡아야만 했다. 그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려면 일단 그를 마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간지는 도망치고, 형사들은 그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린다. 그리고 간지는, 붙잡힌다.


모두가 간지를 쫓는다. 그가 정말 범인일까 궁금하면서,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범죄의 자백은 차치하고,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현재는 어떻게 흘러오게 되었는지 들어야만 했다. 이야기의 중심은 간지가 저지른 범죄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었지만, 점점 또 다른 방향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간지가 범죄를 저지르면서 보인 행동이 내내 이상했던 거다. 그는 타인의 감정에 신경 쓰지 않는다. 죽음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는다. 그냥 어떤 일이 일어난 상황 그대로만 받아들인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그는 그 자신을 버린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위험에 빠질 때마다 그의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여행을 간다. 바로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잊는다.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면 일을 다 끝났다. 누가 죽어 있거나, 앞의 사람이 화가 잔뜩 났거나, 내내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거나. 간지의 처지에서 보면 참 좋은 방식인데, 그가 언제부터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왔는지 추적해야 했다.


그렇다. 어릴 적 삿포로에서 살던 때 어머니의 결혼 상대에게 매일 야단을 맞았다. 젓가락을 쥐는 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을 먹고, 법을 흘린다고 엄한 꾸지람을 들었다. 어느 날 자신은 감정의 스위치를 내리는 기술을 익혔다. 그 이후로 무서운 것이 없어졌고 긴장하는 일도 없어졌다. 설사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2, 99페이지)


작가는 1963년 일본에서 실제로 발생한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의 내용으로 추측하자면, 이 시기는 전쟁이 끝나고, 사는 것은 넉넉하지 못했을 테고, 여기저기 노동자의 모습이 많이 보였던 시절인 듯하다. 각 가정에 전화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단다. 유괴사건은 그 전화가 중요 단서가 되어 실마리를 잡는다. 간지를 붙잡고 보니 그의 성장 과정의 흑역사가 현재의 간지를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지금까지 간지가 빈집털이를 놀이처럼 해왔고, 유괴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진 건 시작이 있었다는 거다. 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욕망에 집중하고,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기억을 잊으면서 살아왔던 건 누구의 책임일까. 소설은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내왔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현재의 그가 만들어졌다는 걸 설명한다. 그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데, 그의 인생을 만든 환경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우리는 이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여기에 적용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좋은 흐름을 가까이하면 그 흐름에 섞인다. 자라나는 시기에 보고 듣고 배운 것들로 어른의 바탕이 된다. 이 소설이 그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간지의 시간을 보여준다. 죄의 근원을 물으면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일은 범죄이며, 살인이고, 용서받을 수 없다. 단숨에 읽히면서도, 이야기에 푹 빠져들면서도,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독자만의 결말을 아직 내리지 못하게 한다. 어렵고 또 어렵기만 하다.



#죄의궤적 #오쿠다히데오 #은행나무출판사 #소설

#범죄 #선과악 #추리소설 ##책추천 #문학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6-25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잡힐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도 할 텐데, 우노 간지는 그런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다니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볼 듯합니다 범죄자는 만들어지기도 하죠 어릴 때 좋은 어른을 하나라도 만났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런 일은 없어서 감정의 스위치를 아예 내려버리게 됐군요 그런 거 안되기도 했지만, 저지른 죄가 있으니 안됐다고만 생각할 수도 없겠습니다


희선

scott 2021-06-25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싶었는데 구단님 리뷰 읽고 바로 7월용 책으로 쟁여둠요 ^ᆞ^
 
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에 장례식에 다녀왔다. 돌아가신 분은 103. 이 나이까지 사신 분을 처음 봤고, 최근에 장례식에 다녀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코로나 상황에 장례식은 조촐했다. 가장 낯설었던 것은, 기존에 경험했던 장례식의 분위기와 너무 달랐던 거였다. 죽은 이를 보내는 자식들의 나이가 보통 70~80.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이 정도 나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지지 않았던가. 실제로 죽은 이의 가장 큰 자식은 오래전에 먼저 하늘로 갔다고 한다. 103세의 부모를 보내는 70~80대 자식들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오래 사셨다면서 슬픔을 거두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리 나이 많은 부모를 보내는 일이라도, 같이 늙고 죽어가는 나이의 자식이라도, 부모의 죽음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낯선 감정은 사라지고, 오직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슬픈 건, 슬픈 거다.


돌아가셨어.”

우리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시신의 모습을 한 존재가 엄마 대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신의 손과 이마는 차가웠다. 그건 여전히 엄마였지만, 앞으로 엄마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둘렀단 가제 천이 턱을 받치고 있었다. (124페이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글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겪을 일이고,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금,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쨌든 슬픔이고, 그래서 슬퍼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글은 의외로 담담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간이 마냥 슬픔으로 채워진 게 아니라, 그 기회로 한 여자의 생을 더듬고 육체의 죽음을 바라보며, 딸의 시선으로 어머니를 본다. 죽어가는 엄마의 옆에 머물면서 모녀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이제야 엄마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1963년의 어느 날, 시몬은 로마의 한 호텔에서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져 다쳤다는 것. 겨우 전화기까지 간 어머니는 친구에게 전화하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다. 넘어져서 다쳤으니 병원 생활은 누워있는 것이 전부다. 곧 시몬과 여동생이 왔고, 자매는 교대로 엄마의 곁을 지킨다. 넘어져서 다친 것을 치료하려고 간 병원에서 어머니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엄마가 욕실에서 넘어지지 않았다면 암에 걸린 것도 몰랐을 테니, 오히려 넘어진 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떤 병 앞에서도 다행인 건 없으리라. 이제 수술이라는 중요한 선택이 남았다. 수술하면 한 달 정도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수술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고 하고. 근데 나는 여기서 참 궁금하더라. 수술하고 한 달을 더 사는 것과 수술하지 않고 곧 죽는다는 시간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정말 고민이 되더라는. 그래서 다시 이 상황에 나를 대입하면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나는 이 상황에서, 엄마의 죽음과 수술을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자매는 어머니에게 복막염 수술이라고 말하고 암 수술에 동의한다. , 여기서 또 궁금해지네. 엄마는 정말 자기가 복막염 수술을 했다고 믿었을까? 자식들이 자기 앞에서 병을 숨기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른 척한 건 아닐까? 어쨌든 시몬의 어머니는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듯 보이다가 통증이 심해지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듯하면서도 결국 나아지지 않는 쪽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고, 어느 날은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문병에 담소를 나누다가도 귀찮아하고, 아주 오래전 기억을 꺼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이 생기다 보니, 으레 그렇듯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거리를 좁힌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이 이제 조금씩 보이는 일을 여기서도 듣는다. , 인간은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왜 항상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이 이렇게도 많은 거냐고. , . 그냥 그때 그 순간에 바로 알게 해주면 안 되나? 매번 뒤늦게 알아채는 것들 때문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괴롭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106페이지)


원래 이 작가가 이렇게 글을 쓰는가 싶을 정도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을 차분하게 적은 느낌에 놀랍기도 했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나 싶기도 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완독한 게 없기에 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비교 대상이 없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애매한 분위기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읽기에는 충분했다. 더불어 내가 경험할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엄마는 어제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하고 오셔서 1차보다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 이러다가 뉴스에서나 보던 심각한 부작용 사례를 내가 눈앞에서 보는 건 아닐까 걱정하다가, 마침 읽고 있던 이 책을 생각하니 또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고. 원래 병원행이 잦았던 엄마였지만, 최근 반년 사이에 병원 생활은 사람을 너무 지치게 했기에 다시 또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니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담기 시작했던 많은 것이 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그 문장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마 자신의 경험이 가장 정확한 죽음의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거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앞에서 시들시들 누워계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문장의 여러 곳을 곱씹었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시간에야 비로소 화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게 또 다른 슬픔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거북했던 딸의 시선은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온전히 받아들인다. 외면했던 장면들을 되살리고 그 외면의 일부였던 어머니를 소환하며 화해한다. 그걸 화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다. 어쩌면 작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또 다른 시선으로 딸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머니는 그동안 한 번도 딸을 외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다 알게 되지는 못할 테니까.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8페이지)


어머니의 늙은 육체를 보는 것도 어색하고 어렵기 그지없었다. 늙어가는 게 어디 육체의 한 군데뿐이겠냐마는, 언제 봐도 적응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작가의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그대로 전해진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엄마랑 목욕탕에 가는데, 예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일 때마다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등을 밀어드리는데, 갈수록 늘어지는 근육에 타올을 낀 내 손이 다른 방향으로 밀릴 때마다, 혹시나 살이 아프지 않을까 물어보면서 조심스럽게 등을 미는 일을 계속하는 게 그저 편하지만은 않다. 작가가 적어낸 그 과정을 보는 것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엄마의 몸은 어느 순간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을 것을 아니까 말이다. 그 어떤 말을 해도 경험을 능가하는 감정과 표현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빨리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완벽하게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그 공감에 바탕에 되는 건 슬픔일 테니.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이 시간 동안 죽음이 우리 곁의 일상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민낯을 드러낸다.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어머니를 곁에서 지킨 가족들이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도 알았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누구라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지만, 외부에서 기인한 것들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의 장례식 예행연습을 하는 거로 생각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도 가족을, 어머니를 보내는 일에 많은 사유가 담겨 있었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3페이지)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아직 엄마가 내 옆에 있을 때 시간을 좀 더 같이 보내야지 하는 한 가지 바람만이 남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라도, 앞집 아저씨 뒷말을 하는 의미 없는 수다라도, 아픈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라도. 작가의 말처럼,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나의 엄마 역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노인들이 어서 죽어야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자기는 죽기 싫다고, 이제야 좀 숨 쉴만한데 왜 죽냐고, 자식들하고 손주들하고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나는 엄마가 이렇게 말해주어서 정말 고맙다. 다행이다. 아마 엄마가 내 앞에서 입버릇처럼 어서 죽어야지 한다면 막 화를 냈겠지. 듣기 싫다고.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화내는 것밖에는 없어서.


작가가 써 내려간 죽음의 정의 같은 문장들은 언젠가 내가 겪을 순간을 준비하는 것만 같다. 병원 생활이 더 잦아지는 엄마를 보는 일은 괴롭고, 그때마다 혹시 모를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사람도 없다. 그러니 103세 노인의 죽음이 호상이라며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은 틀렸다. 죽음은 죽음이고, 어떤 죽음도 평범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 나이는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닥친 사고일 뿐이라는 작가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저, 우리에게 다가온 일상의 불행이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6-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서는 누구나 죽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해도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런 생각은 못하겠지요 103세에 세상을 떠나다니... 죽음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다 슬프겠습니다 작가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쓰기도 하는데, 그것도 애도가 아닐까 싶네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구단씨 2021-06-24 21:18   좋아요 1 | URL
정말요. 읽으면서도, 타인의 경험을 보면서도 느껴요. 이렇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하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고 감당하는 게 내 몫이 되면 또 생각대로 다가오지는 않더라고요.
작가의 애도 방식이 이 책으로 남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경이로울 만큼 행복하다.

내가 있는 곳은 수용소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함께 흥에 젖기 위해 연주한다.

나는 내 부모의 집을 나왔다. 정말로 나왔다. (312페이지)


15년간 아버지에게 감금당하듯 살아온 소녀가 그 집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끔찍했던 기억을 뒤로하고 현재의 삶을, 그녀가 잃은 많은 것을 찾아가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회복은 더뎠다. 쉽게 꺼낼 수 없는 기억이 되어 일상을 마비시켰다. 사십여 년이 지나고 이 책이 나온 이유가 그 고통의 시간을 증명한다. 선뜻 말할 수 없던 시간이 그렇게나 길었다. 정신적인 학대가 한 인간의 성장과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보여주는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딸을 초인으로 만들겠다며 시작된 아버지의 계획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세상은 한없이 위험하며, 배신자로 들끓고,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를 적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훈련처럼 아버지는 딸을 훈육한다. 가두고, 씻지도 못하게 하면서, 연장을 쥐여주며 일을 시킨다. 자신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상처에 독한 술을 부어 소독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소변보는 일을 어린 딸에게 수발들게 하고, 딸이 당하는 성폭력을 보고도 외면한다. 아버지가 행하는 모든 일은, 딸이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당연했다.


이 책을 읽는 그 누구도 모드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방식에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더없이 사악한 인간이 우글거리는, 더없이 위험한 세상에서, 아무도 믿지 말고, 세상을 지배하고 살아갈 존재로 만든다는 그의 신념을 누가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광기에 휩싸인 아버지 손에서 자란 모드가 세상으로 뛰쳐나오기까지 버티게 한 건,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동물들이었다. 나이 들어가는 개, 두 마리의 말, 무리에게 공격당하던 오리. 그리고 책과 음악이었다. 아버지는 전쟁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음악을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모드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쳤다.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혔다. 그런 시간이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모드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위기를 감지한 좋은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발휘한 모드의 의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잘못된 신념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그 아버지 역시 잔인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이 광기의 시작은 모드의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드의 아버지 역시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인물이며, 그가 겪은 두 번의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릇된 방식이라는 게 그 계획의 오류였지만. 모드의 어머니 역시 부모와 남편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했으며, 남편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딸에게 또 다른 가해를 하는 존재가 된다. 모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드. 세 사람 모두 희생자와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이기고 버티며 존재하려고 애쓰는 게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드의 아버지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잘못된 신념은 어린 딸을 어떻게 망쳐가고 있는지 보여주었으니까. 그런데도 강인한 정신력의 모드는 이 이야기의 의미가 된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삶이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해준 것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것을, 온통 폭력과 오욕과 복수와 배신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 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157페이지)


조금씩 버티고 나아가는 그녀의 의지는 아버지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그녀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문을 연다. 트라우마를 이겨낸 그녀가 이 책으로 현재 그녀의 삶을 보여주었듯이, 우리에게 닥칠 불행과 위기를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지 미리 증명하는 답이 된다. 그녀 옆에서 의지가 된 동물들과 책(문학), 음악이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게 했다. 그녀의 말처럼, 자유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321페이지)라는 신념이 그녀에게 완전한 치유를 선사해주었기를 바란다. 충격으로 시작했지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하면서 페이지를 덮게 하는 책이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절망이 아니라는 희망을 남기는 듯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전부 다 나를 위해서라고 되풀이해 말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나를 위해, 예외적 존재가 될 운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내는 일에, 나의 형체를 빚고 조각하는 일에 바치고 있다고 말한다. (35페이지)


다른 집에서는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고 춥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어준다는 얘기를 채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혼자다.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외톨이다. 혼자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 혼자만 떨어져 있는 것은 지옥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다. (118페이지)


아버지의 손이 내 얼굴로 다가오고, 아버지의 긴 손가락이 내 이마 위에서 열을 확인한다. 이제 그 손이 내 뺨을 어루만져주길 나는 온 힘을 다해 기원한다. 손가락 끝이라도 한 번만 만져준다면 바로 그 순간 이 집과 철책과 담이 사라지리라. 우리는 함께 바깥에서 자유롭고 행복하리라. 하지만 손길은 없다. 아버지의 손가락은 내 이마를 곧 떠난다. 곧이어 아버지가 문 쪽을 향해 고함치는 소리가 지금까지의 마법을 깨뜨린다. “자닌! 모드 깼어! 백포도주 가져와!” (153페이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6-19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드 아버지도 자기 아버지한테 학대를 받았군요 그런 거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드 아버지가 한 일을 용서할 수는 없겠습니다 자신이 당한 일을 생각하고 자기 딸한테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자신이 당한대로 자식한테도 하는 것 같아요 폭력은 대물림 된다고 하니... 동물, 음악, 책이 있었다니 다행이고,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벗어나서 다행입니다


희선

구단씨 2021-06-22 23:11   좋아요 1 | URL
어느 전문가가 했던 말이 기억나요.
마음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내면의 아이를 찾아서 그 시작부터 다시 걸어봐야 한다고요. 모드 아버지도 비슷한 시작이 아니었나 싶어요.
 
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령과 논리를 조합해 진실을 제시한다. (181페이지)


마음이 약해지고 불안할 때 찾는 게 점집 아니었던가?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리운 사람 찾아보려는 이들에게는 더한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 영매가 아닐까 싶다. 믿고 싶지 않지만, 또 완전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이상한 마음이 자꾸 끼어든다. 그래서 가끔은 영매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바라는 결과를 기다리기도 한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을 가진 자는, 언제나 약자다.


고게쓰는 추리소설 작가다. 형사도 아닌 그에게 죽을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달라면서, 그의 능력을 무조건 믿는 듯한 말투다. 사실 그에게는 범인을 찾는 능력은 없다. 가끔 경찰의 의뢰를 받고 몇 가지 조언과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거기에 영매 조즈카 히스이를 만나면서, 그녀의 능력을 지켜본 게 전부다. 그도 남다른 추리력으로, 심지어 그 눈썰미로 추리소설까지 쓰고 있지만, 조즈카의 능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는 그녀의 시선은, 자칫 미궁으로 빠질 뻔한 사건까지 해결하는 지경에 이른다. 도대체 영매 조즈카, 그녀는 누구인가.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었는데, 형사가 범인을 잡지 못하고 답답할 때 점쟁이에게 간 적도 있다고 하더라만. 이 경우는 좀 다르게 시작된다. 고게쓰가 여자 후배 유이카의 부탁으로 영매를 만나러 가고, 영매의 기이한 조언에 따라 해보려고 하던 중에, 유이카는 죽는다. 그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해봐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조즈카의 섬세한 관찰력이 없었다면, 아마 유이카는 죽어서라도 편히 눈감지 못했을 것이다. 억울해서. 그때부터 인연이 된 조즈카와 고스케가 마치 한 팀이라도 된 것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살인 사건의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우는 여자 살인, 수경장 살인, 여고생 연쇄 교살 살인. 세상에 참 다양한 이유의 살인이 있다는 걸 이 책 보고 다시 느낀다. 이렇게 죽은 영혼은 또 얼마나 아프고 억울할까. 그래서 사건 해결에 조즈카의 참여가 뜬금없다고 생각되면서도 어떤 의미로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죽은 영혼을 위로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건 해결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뤄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운을 느끼고, 희생자의 영혼에 접속하면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조즈카의 초월적 능력 앞에서는 풀리지 못할 사건이 없다.


히스이는 타인의 냄새가 그렇게 잠깐 새에 변하는 것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고 했다. 고게쓰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딱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이 뒤집혀버리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고게쓰도 그런 경험이 있다. 눈을 감으면 그 말을 했던 사람의 표정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고작 한마디로 나라는 인간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199~200페이지)


조즈카와 고게쓰의 조합은 과학적인 사건 해결을 위한 완벽한 팀이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이는 그대로를 추적하면서 사건 해결에 접근하는 게 고게쓰라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추론을 제시하면서 죽은 이와 보이지 않는 사건 상황을 말하는 이는 조즈카다. 어쩌면 막연한 환상처럼 들리는 조즈카의 추론을 뒷받침하는 게 고게쓰의 합리적인 수사 과정 설명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살인 사건들은 자칫하면 미제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을 들으면서 하나도 놓치지 않는 조즈카가 아니었다면, 이 사건들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터였다. 조즈카와 고게쓰의 하모니가 빛을 발하고 있을 무렵,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연쇄살인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연쇄살인을 멈출 수 없다고 여길 무렵, 소설은 반전으로 독자를 놀라게 한다.


두 사람이 명콤비로 이 시리즈를 이어갈 거로 여겼다. 새로운 분위기의 추리소설이었고, 맛깔나는 탐정 시리즈가 될 것 같았다. , 이들이 어떤 상황으로 치달을지는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고, 무엇보다 영매라는 특이한 캐릭터의 등장은 신선했다. 영매 탐정. 비췻빛 눈동자로, 누가 봐도 아름답고 보호해주고 싶은 비주얼. 그녀의 특별한 능력으로 경찰 수사에 도움을 주면서, 마지막까지 그 능력을 빛나게 하는 해결사가 된다. 아우, 입이 근질근질. 이 소설의 결말에 놀라면서도, 아쉽기도 할 테다. 이 콤비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반, 사건이 해결되어 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 반.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영매 탐정의 활약이 계속되어도 좋겠다는 바람만이 남는다.


한편으로는 정말 궁금하기도 하더라. 영매의 기운이 어떻게 다가올까 싶은 마음. 정말 인간에게 저런 능력이 주어지는 걸까? 믿기 어려운 상황은 계속 일어나지만, 살인 사건 해결을 위해서라면 믿기 어려운 이 상황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사건이 일어나고 시신이 놓였던 자리에서 영매의 재연을 보면서 신비함은 고조된다. 그렇게 재연한 영시의 힘은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한 문장도 허투루 볼 수 없게 한다. , 모든 것이 마지막의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어. 범인의 고백과 살인 이유를 듣다 보면, 인간의 감정이 보통의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는 섬뜩함이 남는다. 역시 인간이 가장 무서운 존재인 걸까.


사람의 혼은 어디에 있을까.

죽으면 그 넋은 어떻게 될까.

수수께끼는 많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위안은 되리라. (314페이지)


아직 끝나지 않은 조즈카의 활약을 기다리는 이유가 충분한 이야기다.


#미스터리 #추리소설 #오컬트 #시리즈 #책추천

#영매탐정조즈카 #아이자와사코 #비채 #문학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6-11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데, 말했다가 정말 그러면 안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게쓰 죽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말해버렸네요 이게 아니면 괜찮겠지요 고게쓰가 뭔가 하는 걸 보면 아닐지도... 영매사 탐정 괜찮을 듯합니다


희선

구단씨 2021-06-17 16:02   좋아요 1 | URL
무섭죠? ㅎㅎㅎ
후반부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의외였어요.
 
춥고 더운 우리 집
공선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하다.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반년이 넘어가는데, 나는 아직도 엄마가 사는 시골의 낡은 집을 우리 집이라고 부른다. 목적지를 말할 때도 아파트로 갈게, 아파트에 들어왔어.’ 이렇게 표현하지 집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입에 붙은 습관처럼 말이 그렇게 나온다. 나는 아직 이 집에 정이 붙지 않은 걸까? 아니면 언제가 될지 모를 또 다른 이사계획에 마음이 붕 뜬 걸까, 그것도 아니면 폭력적인 소음으로 공격하는 윗집 사람들 때문일까. 머릿속에 막연하게 채워진 생각들이 만들어갈 그곳이 궁금하다. 이제까지 살아온 집의 기억에 보태 앞으로 살아갈 집은 어디의 어떤 집이 될는지.


집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자신에게 수없이 물었을지도 모른다. 집의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먹고 자고 쉬고, 일상의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할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까지 아우르는 존재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곳. 작가가 머물다 온 그 집들을 생각하면, 집은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장소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낡고 불편했지만, 간절하면서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은 집들이 작가에게는 정신적인 공간이었을 테다. 작가가 걸어온 시간을 가득 채운, 가난의 모습이 곳곳에 묻어있는 그곳. 집에 대해 잘 몰랐지만 편한 집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한 그 시절의 이야기에 우리는 또 꿈을 꾼다. 편한 집, 내 공간, 마음이 안정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작가가 찾던 집도 그런 곳이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한 공간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결국에는 오랜 세월의 끝을 정착하려고 선택한 집에 머물며 오늘을 살게 하는 곳을 찾았다.


자주 집 꿈을 꾸었다. ‘보이라에 에아가 차서 방이 냉골이라고 추위에 떠는 엄마 꿈, ‘입식 부엌에 지름 보이라를 못 놔서 서러운 아버지 끼무. 꿈속에서도 나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있다. , 언젠가 돌아와 아궁이에 물도 차지 않고 보일러에 에어도 차지 않은 번듯한 입식 부엌에 기름보일러를 놓아드리리라. 엄마,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리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선 나는 아궁이 물을 푸며 읽었던 책 몇 권 안고 집을 떠났다. (44페이지, 아궁이에 물을 푸며 책을 읽다)


작가가 어릴 적, 거대한 큰집 옆에 자리한 세 칸 초가집이 작가의 집이었다. 엄마가 힘들었음은 물론이고 그 후로 아버지가 다시 지은 부로꾸집(블록집) 역시 불편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집은 아버지의 거듭된 실패와 모습을 같이 한다. 더 좋아질 것 같았지만, 더 좋아지지 않았던 생활 공간으로 남았다. 어디를 봐도 완벽한 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그곳을 거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처음 자취를 시작한 광주의 어느 식당 방.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의 봉제 공장에 취직하면서 경험한 기숙사, 역시 낡고 오래된 임대아파트까지. 그리고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게 구매했던 담양 수북의 땅. 땅만 사면 집은 저절로 짓는 거로 여긴 건 아닐까? 나도 그랬다. 땅만 구하면 집 짓는 것은 업체에 맡기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땅(자리)을 구하기도 어렵고, 집을 잘 짓는 업체를 만나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이제는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집 짓는 꿈을 꾼다. 작가의 시행착오를 들으면서 웃음이 나고 공감되는 건 그 때문이다. 나보다 앞서 경험한,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작가에게 존경을 담아본다.


어렸을 적의 시간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성장을 거쳐 나이 든 후 수북으로 돌아가 집을 짓고 사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세입자로 살던 게 굳이 나쁘지는 않았을 테지만, 작가가 내버려 둔 땅에 집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일은 마냥 힘들었던 집주인 때문이었다. ‘더는 안 되겠다, 집주인의 갑질을 겪지 않을 내 집을 지어야지.’ 그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림 그리듯 해놓은 설계도를 가지고 시공자를 찾는 일부터, 부족한 예산으로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하는 계산까지 해야 했다. 저자는 말하는 장면들이 눈에 선했다. 듣기만 해도 아찔했다.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정말 정직하고 성실한 시공자를 만나지 않은 다음에야,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룰 수 없는 꿈이었으리라. 내가 마련한 장소에 내가 원하는 집을 짓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큰일 없이, 무사히(?) 집은 완성되었다. 작가는 그 오랜 세월 쌓아둔 집을 끌고 새로 지은 집으로 들어간다.


조만간 집이 완성되면 좋든 싫든 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로서는 엄청난 결단과 돈을 들여 땅 위에 처음 짓는 내 집이다. 남이 지어놓은 아파트에 돈만 지불하고 들어가는 것과는 뭔가 차원이 다른 일임이 분명하다. 땅 위에다 스스로의 결정으로 집을 짓는 것이 엄청난 일이라는 걸 집을 짓는 중간에서야 갑자기 깨달았다. 아이구야, 내가 뭣도 모르고 큰일을 저질러버렸구나! (99페이지, 그녀, 집주인 여자 때문에)


어찌 되었든, 머물기로 다짐한 곳에서 또 정을 붙이기 마련인가 보다. 잔디를 잘못 심어서 후회하고, 데크에 잘못 올린 지붕 때문에 여름 더위에 시달리고. 그러면서도 내 집이라는 안정이 주는 시간을 살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수북의 집에서 작가는 시골 마을 주민이 되어 살아간다. 시골이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폐차한 차 대신에 이용하는 대중교통으로 다른 풍경을 본다. 장날에 읍내에 나가는 경험, 버스에 올라탄 이들의 이야기에 살아간다는 것을 배운다. 뭐든지 도시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버스에 올라탄 할머니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주는, 교통카드가 아니라 손에 쥔 잔돈으로 버스비를 내는, 그러다가 동전이 손에서 우르르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 짐보따리를 버스에 싣고, 지팡이도 올리고 몸도 실어야 하는 이들의 느린 행동에도 기다려주는 버스 기사. 나 역시 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이런 기사님 보기 어려운 이곳에서는 마치 다른 공간의 이야기 같아서 낯설다. 그 느림과 이해가 부럽기도 하다. 사고 없이 천천히, 누군가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버스의 모습을 그리면서, 작가가 머무는 시골 마을의 풍경을 읽는다.


작가처럼, 나도 집을 생각하면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 시절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좁은 집에서 부모님과 육 남매 북적거리면서(사실은 낑겨지내면서) 살았던 시간, 수시로 싸우고 울고불고하면서, 가난에 원망만 가득하던 마음. 생각하면 아프기만 한 공간에 기억이 더해져, 그 시절의 행복과 불행이 따라온다. 솔직히 말하면, 행복보다는 불행하다고 여기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뭐든 힘들고 부족하기만 했던 기억, 마음의 여유는 생각도 못 하던 날들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우리는 어렸고, 그래서 더 이해하지 못했고, 그 집에서 고생하던 엄마의 애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오래되고 낡은 집만큼이나 엄마도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그렇게 부족하고 낡은 곳이어도 지키고 있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집주인의 갑질 없이, 매달 나가는 월세 걱정 없이, 언젠가 내쫓길 걱정 없이 지내는 일이 정말 어려운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그 동네 그 집이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우리가 걸어온 시간과 모습 그대로를 담아낸 그곳이 가진 의미를 묻는다. 집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말하는 듯하다. 가지고 있다가 값이 오르면 팔고 나올 부동산이 아닌, 눈비 막아주면서 머물기 좋은 곳. 내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고, 언제 떠나도 돌아올 수 있는 곳, 그렇게 안심이 되는 곳. 엄마가 자주 이사를 생각하면서도 쉽게 그 낡은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게 아닐까. 예산이 맞지 않아 이사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집을 떠나지 않고 새로 집을 짓는 일을 꿈꾸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안다. 엄마의 기억 속에 가난과 고생이 전부가 아니었던, 그래도 행복하고 따뜻했던 시간의 그 집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가지 못할 시절의 아름다움이 엄마의 기억 속에 있을 것만 같다.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그 시절의 이야기가 머물러 있는 곳이 되어.


왠지 마음이 고적한 날이면, 어떤 그리움에 목이 메는 날이면 전라선을 탈 일이다. 그래서 하나도 특별할 것도 없고 하나도 별날 것 없는 곡성역이나 구례구역이나 괴목역에 내릴 일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누구를 만날 일도 없이. 아무 일 없이 기차역으로 가서, 아무 일 없이 강물 가까이 흐르는 기차역에 내리자. 그래서 강물이 헤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 일 없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리라. 그가 그 기차역, 그 강물 언저리쯤에서 사랑을 만나 새로운 둥지를 틀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있을쏘냐. (188페이지, 아무 일 없이 기차역으로 가자)


집이란 곳은 떠나야 한다고 여겼던 저자가,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거쳐 고향 근처로 내려온 이야기가 애틋하다. 집에 대한 기억이 단순히 집으로만 머물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일까. 그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낸 삶,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한다. 춥고 덥지만, 가끔은 시원하고 따뜻했을 그곳을 기억한다.



#춥고더운우리집 #공선옥 #한겨레출판 #에세이 #산문

##책추천 ##인생 #머물곳 #기억 #시간 #세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6-11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집을 지어서 살기로 하다니,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네요 집 지어주는 곳하고도 잘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걸 하고 그 집에 들어가서 살게 돼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했으니 집에 정을 붙이고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집은 식구들이 함께 사는 집이라는 생각이 더 들겠습니다 집도 떠나봐야 그 집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을 안 떠나봐서... 좋은 기억뿐 아니라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집이 있다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6-17 16:01   좋아요 1 | URL
물리적으로 완벽한 집이 될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정 붙이면서 나만의 집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싶어요.
저도 고향집 생각하면 우울한 기억이 많은데, 지금은 그 집에 다니러 가면서 엄마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그 집이 헐리고 새로운 집이 지어진다고 하면 이상하게 슬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