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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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장례식에 다녀왔다. 돌아가신 분은 103. 이 나이까지 사신 분을 처음 봤고, 최근에 장례식에 다녀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코로나 상황에 장례식은 조촐했다. 가장 낯설었던 것은, 기존에 경험했던 장례식의 분위기와 너무 달랐던 거였다. 죽은 이를 보내는 자식들의 나이가 보통 70~80.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이 정도 나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지지 않았던가. 실제로 죽은 이의 가장 큰 자식은 오래전에 먼저 하늘로 갔다고 한다. 103세의 부모를 보내는 70~80대 자식들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오래 사셨다면서 슬픔을 거두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리 나이 많은 부모를 보내는 일이라도, 같이 늙고 죽어가는 나이의 자식이라도, 부모의 죽음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낯선 감정은 사라지고, 오직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슬픈 건, 슬픈 거다.


돌아가셨어.”

우리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시신의 모습을 한 존재가 엄마 대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신의 손과 이마는 차가웠다. 그건 여전히 엄마였지만, 앞으로 엄마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둘렀단 가제 천이 턱을 받치고 있었다. (124페이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글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겪을 일이고,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금,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쨌든 슬픔이고, 그래서 슬퍼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글은 의외로 담담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간이 마냥 슬픔으로 채워진 게 아니라, 그 기회로 한 여자의 생을 더듬고 육체의 죽음을 바라보며, 딸의 시선으로 어머니를 본다. 죽어가는 엄마의 옆에 머물면서 모녀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이제야 엄마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1963년의 어느 날, 시몬은 로마의 한 호텔에서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져 다쳤다는 것. 겨우 전화기까지 간 어머니는 친구에게 전화하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다. 넘어져서 다쳤으니 병원 생활은 누워있는 것이 전부다. 곧 시몬과 여동생이 왔고, 자매는 교대로 엄마의 곁을 지킨다. 넘어져서 다친 것을 치료하려고 간 병원에서 어머니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엄마가 욕실에서 넘어지지 않았다면 암에 걸린 것도 몰랐을 테니, 오히려 넘어진 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떤 병 앞에서도 다행인 건 없으리라. 이제 수술이라는 중요한 선택이 남았다. 수술하면 한 달 정도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수술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고 하고. 근데 나는 여기서 참 궁금하더라. 수술하고 한 달을 더 사는 것과 수술하지 않고 곧 죽는다는 시간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정말 고민이 되더라는. 그래서 다시 이 상황에 나를 대입하면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나는 이 상황에서, 엄마의 죽음과 수술을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자매는 어머니에게 복막염 수술이라고 말하고 암 수술에 동의한다. , 여기서 또 궁금해지네. 엄마는 정말 자기가 복막염 수술을 했다고 믿었을까? 자식들이 자기 앞에서 병을 숨기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른 척한 건 아닐까? 어쨌든 시몬의 어머니는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듯 보이다가 통증이 심해지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듯하면서도 결국 나아지지 않는 쪽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고, 어느 날은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문병에 담소를 나누다가도 귀찮아하고, 아주 오래전 기억을 꺼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이 생기다 보니, 으레 그렇듯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거리를 좁힌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이 이제 조금씩 보이는 일을 여기서도 듣는다. , 인간은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왜 항상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이 이렇게도 많은 거냐고. , . 그냥 그때 그 순간에 바로 알게 해주면 안 되나? 매번 뒤늦게 알아채는 것들 때문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괴롭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106페이지)


원래 이 작가가 이렇게 글을 쓰는가 싶을 정도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을 차분하게 적은 느낌에 놀랍기도 했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나 싶기도 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완독한 게 없기에 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비교 대상이 없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애매한 분위기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읽기에는 충분했다. 더불어 내가 경험할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엄마는 어제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하고 오셔서 1차보다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 이러다가 뉴스에서나 보던 심각한 부작용 사례를 내가 눈앞에서 보는 건 아닐까 걱정하다가, 마침 읽고 있던 이 책을 생각하니 또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고. 원래 병원행이 잦았던 엄마였지만, 최근 반년 사이에 병원 생활은 사람을 너무 지치게 했기에 다시 또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니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담기 시작했던 많은 것이 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그 문장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마 자신의 경험이 가장 정확한 죽음의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거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앞에서 시들시들 누워계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문장의 여러 곳을 곱씹었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시간에야 비로소 화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게 또 다른 슬픔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거북했던 딸의 시선은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온전히 받아들인다. 외면했던 장면들을 되살리고 그 외면의 일부였던 어머니를 소환하며 화해한다. 그걸 화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다. 어쩌면 작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또 다른 시선으로 딸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머니는 그동안 한 번도 딸을 외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다 알게 되지는 못할 테니까.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8페이지)


어머니의 늙은 육체를 보는 것도 어색하고 어렵기 그지없었다. 늙어가는 게 어디 육체의 한 군데뿐이겠냐마는, 언제 봐도 적응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작가의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그대로 전해진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엄마랑 목욕탕에 가는데, 예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일 때마다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등을 밀어드리는데, 갈수록 늘어지는 근육에 타올을 낀 내 손이 다른 방향으로 밀릴 때마다, 혹시나 살이 아프지 않을까 물어보면서 조심스럽게 등을 미는 일을 계속하는 게 그저 편하지만은 않다. 작가가 적어낸 그 과정을 보는 것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엄마의 몸은 어느 순간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을 것을 아니까 말이다. 그 어떤 말을 해도 경험을 능가하는 감정과 표현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빨리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완벽하게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그 공감에 바탕에 되는 건 슬픔일 테니.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이 시간 동안 죽음이 우리 곁의 일상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민낯을 드러낸다.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어머니를 곁에서 지킨 가족들이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도 알았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누구라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지만, 외부에서 기인한 것들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의 장례식 예행연습을 하는 거로 생각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도 가족을, 어머니를 보내는 일에 많은 사유가 담겨 있었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3페이지)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아직 엄마가 내 옆에 있을 때 시간을 좀 더 같이 보내야지 하는 한 가지 바람만이 남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라도, 앞집 아저씨 뒷말을 하는 의미 없는 수다라도, 아픈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라도. 작가의 말처럼,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나의 엄마 역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노인들이 어서 죽어야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자기는 죽기 싫다고, 이제야 좀 숨 쉴만한데 왜 죽냐고, 자식들하고 손주들하고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나는 엄마가 이렇게 말해주어서 정말 고맙다. 다행이다. 아마 엄마가 내 앞에서 입버릇처럼 어서 죽어야지 한다면 막 화를 냈겠지. 듣기 싫다고.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화내는 것밖에는 없어서.


작가가 써 내려간 죽음의 정의 같은 문장들은 언젠가 내가 겪을 순간을 준비하는 것만 같다. 병원 생활이 더 잦아지는 엄마를 보는 일은 괴롭고, 그때마다 혹시 모를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사람도 없다. 그러니 103세 노인의 죽음이 호상이라며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은 틀렸다. 죽음은 죽음이고, 어떤 죽음도 평범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 나이는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닥친 사고일 뿐이라는 작가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저, 우리에게 다가온 일상의 불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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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서는 누구나 죽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해도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런 생각은 못하겠지요 103세에 세상을 떠나다니... 죽음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다 슬프겠습니다 작가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쓰기도 하는데, 그것도 애도가 아닐까 싶네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구단씨 2021-06-24 21:18   좋아요 1 | URL
정말요. 읽으면서도, 타인의 경험을 보면서도 느껴요. 이렇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하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고 감당하는 게 내 몫이 되면 또 생각대로 다가오지는 않더라고요.
작가의 애도 방식이 이 책으로 남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