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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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이로울 만큼 행복하다.

내가 있는 곳은 수용소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함께 흥에 젖기 위해 연주한다.

나는 내 부모의 집을 나왔다. 정말로 나왔다. (312페이지)


15년간 아버지에게 감금당하듯 살아온 소녀가 그 집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끔찍했던 기억을 뒤로하고 현재의 삶을, 그녀가 잃은 많은 것을 찾아가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회복은 더뎠다. 쉽게 꺼낼 수 없는 기억이 되어 일상을 마비시켰다. 사십여 년이 지나고 이 책이 나온 이유가 그 고통의 시간을 증명한다. 선뜻 말할 수 없던 시간이 그렇게나 길었다. 정신적인 학대가 한 인간의 성장과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보여주는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딸을 초인으로 만들겠다며 시작된 아버지의 계획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세상은 한없이 위험하며, 배신자로 들끓고,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를 적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훈련처럼 아버지는 딸을 훈육한다. 가두고, 씻지도 못하게 하면서, 연장을 쥐여주며 일을 시킨다. 자신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상처에 독한 술을 부어 소독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소변보는 일을 어린 딸에게 수발들게 하고, 딸이 당하는 성폭력을 보고도 외면한다. 아버지가 행하는 모든 일은, 딸이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당연했다.


이 책을 읽는 그 누구도 모드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방식에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더없이 사악한 인간이 우글거리는, 더없이 위험한 세상에서, 아무도 믿지 말고, 세상을 지배하고 살아갈 존재로 만든다는 그의 신념을 누가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광기에 휩싸인 아버지 손에서 자란 모드가 세상으로 뛰쳐나오기까지 버티게 한 건,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동물들이었다. 나이 들어가는 개, 두 마리의 말, 무리에게 공격당하던 오리. 그리고 책과 음악이었다. 아버지는 전쟁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음악을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모드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쳤다.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혔다. 그런 시간이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모드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위기를 감지한 좋은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발휘한 모드의 의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잘못된 신념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그 아버지 역시 잔인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이 광기의 시작은 모드의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드의 아버지 역시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인물이며, 그가 겪은 두 번의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릇된 방식이라는 게 그 계획의 오류였지만. 모드의 어머니 역시 부모와 남편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했으며, 남편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딸에게 또 다른 가해를 하는 존재가 된다. 모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드. 세 사람 모두 희생자와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이기고 버티며 존재하려고 애쓰는 게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드의 아버지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잘못된 신념은 어린 딸을 어떻게 망쳐가고 있는지 보여주었으니까. 그런데도 강인한 정신력의 모드는 이 이야기의 의미가 된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삶이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해준 것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것을, 온통 폭력과 오욕과 복수와 배신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 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157페이지)


조금씩 버티고 나아가는 그녀의 의지는 아버지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그녀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문을 연다. 트라우마를 이겨낸 그녀가 이 책으로 현재 그녀의 삶을 보여주었듯이, 우리에게 닥칠 불행과 위기를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지 미리 증명하는 답이 된다. 그녀 옆에서 의지가 된 동물들과 책(문학), 음악이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게 했다. 그녀의 말처럼, 자유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321페이지)라는 신념이 그녀에게 완전한 치유를 선사해주었기를 바란다. 충격으로 시작했지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하면서 페이지를 덮게 하는 책이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절망이 아니라는 희망을 남기는 듯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전부 다 나를 위해서라고 되풀이해 말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나를 위해, 예외적 존재가 될 운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내는 일에, 나의 형체를 빚고 조각하는 일에 바치고 있다고 말한다. (35페이지)


다른 집에서는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고 춥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어준다는 얘기를 채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혼자다.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외톨이다. 혼자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 혼자만 떨어져 있는 것은 지옥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다. (118페이지)


아버지의 손이 내 얼굴로 다가오고, 아버지의 긴 손가락이 내 이마 위에서 열을 확인한다. 이제 그 손이 내 뺨을 어루만져주길 나는 온 힘을 다해 기원한다. 손가락 끝이라도 한 번만 만져준다면 바로 그 순간 이 집과 철책과 담이 사라지리라. 우리는 함께 바깥에서 자유롭고 행복하리라. 하지만 손길은 없다. 아버지의 손가락은 내 이마를 곧 떠난다. 곧이어 아버지가 문 쪽을 향해 고함치는 소리가 지금까지의 마법을 깨뜨린다. “자닌! 모드 깼어! 백포도주 가져와!” (15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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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19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드 아버지도 자기 아버지한테 학대를 받았군요 그런 거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드 아버지가 한 일을 용서할 수는 없겠습니다 자신이 당한 일을 생각하고 자기 딸한테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자신이 당한대로 자식한테도 하는 것 같아요 폭력은 대물림 된다고 하니... 동물, 음악, 책이 있었다니 다행이고,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벗어나서 다행입니다


희선

구단씨 2021-06-22 23:11   좋아요 1 | URL
어느 전문가가 했던 말이 기억나요.
마음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내면의 아이를 찾아서 그 시작부터 다시 걸어봐야 한다고요. 모드 아버지도 비슷한 시작이 아니었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