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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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린 여자는 이제 눈물을 멈출 수 없다.(「입동」) 아이가 쓰다가 만 이름을 보는 순간 견디고 있던 슬픔은 폭발했다.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아이지만, 다들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지만, 아니다. 그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을 상실의 고통이라는 것을,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 순간, 슬픔을 견디는 이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냥 울게 내버려 두는 게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오래전에 산 도배지를 입동이 되어서야 꺼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아는 사람, 누구일까?
 
뜻밖이었다. 그동안 읽은 김애란의 소설에서 서늘함과 추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이번 소설도 역시 우리 인생의 꼬질꼬질함을 유쾌함으로 들려줄 거로 생각했다. 착각이었지. 예상하지 못했던 쓸쓸함이 밀려왔다. 안쓰러웠다. 저절로 알게 되며 스미는 슬픔에 공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 그게,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좀 울어보니 어때? 이제 그 슬픔은 좀 덜어졌니?'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작가의 말처럼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하면 안 되는 말과 해야 할 말이 인물이 되어 나타난' 순간을 지켜볼 뿐이다. 그렇게 작가가 전하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여전히,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 희망을 대입시키는 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고.
 
소설 속에서 마주하는 희망은 우리가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다면, 오늘을 살아갈 의미도, 내일을 기다릴 이유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런 까닭으로 받아들이자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간혹 이야기에서 강요된(?) 희망이 현재의 삶과 괴리를 느끼게 한다면, 소설 속에서 외치는 희망은 공감하지 못한 불편으로 남을 뿐이다. 김애란의 이번 작품이 담백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렇게 강요된 희망으로 섣불리 위로를 꺼내지 않아서다. 슬픔 뒤에 바로 희망을 놓지 않고 현재의 상태 그대로를 전할 뿐이다. 슬프면 슬픈 채로, 아프면 아픈 채로. 나의 오늘이 타인의 삶과 동떨어진 것 같이 보여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수밖에, 뭘 더 하겠냐고 묻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들려주며 우리의 오늘을 보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듯,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이국의 열기 속에서 교수 임용 소식을 기다리는 화자의 서늘함과 분노로 여름을 느끼는 듯했다.(「풍경의 쓸모」) 타국의 더위 속에서 보는 핸드폰 문자의 한글은, 마치 스노우볼 속의 눈 내리는 풍경 같다. 지금 그와는 아무 상관 없이 흘러가는 계절을 눈앞에서 마주한 것처럼, 쓸모없는 풍경만이 그의 문자함을 계속 채운다.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고, 피하고 싶은 소식이 도착한다. 이런 게 인생인가, 라고 묻고 싶은 표정을 그린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멀어지는 이국의 불빛이 보였다. 비행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다 유대용 안대를 쓰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섯 시간 동안 일단 아무 생각도 안 할 작정이었다. 잠을 청하려 천천히 숨을 고르는데 속에서 기체인지 액체인지 모를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올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그것을 내려보냈다. (182~183페이지, 「풍경의 쓸모」)
 
여기에서 우리가 슬픔을 감당하는 하나의 방법이 전해진다. 그는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내려보내는' 것으로 그 순간을 통과한다. 임용에서 탈락했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았다는 걸 안 순간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순간을 참아낼 뿐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고통을 건너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이, 작가는 어떤 대책을 남겨 두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건너편」과 「가리는 손」에서 현재 상황이 무엇을 선택하게 하는지 보여주며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어떻게 할래? 다른 선택이 있어?’라고 묻는 것처럼. 「건너편」의 여자는 매번 남자와 헤어질 타이밍을 놓치지만, 결국 헤어진다. 그를 생각나게 하는 '노량진'이라는 한 단어에 시선이 머물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오늘 남자 없이 지나가야 내일이 열 수 있다. 「가리는 손」의 엄마는 '설마 내 아들이?'라는 의문을 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을 거다. 내 아이가 그럴 리 없어, 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지만, CCTV 속 아이의 표정에 의문을 품는다.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으니까.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면 안 되나?' 하는 불안을 남긴 채로 머문다. 그렇게 오늘만 모른 척하면 다 지나가게 될 거야. 그러다가 불안은 죽음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듯, 마지막 순간으로 이어진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할머니는 집에 늙은 개를 들여 그 과정을 나날이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50페이지, 「노찬성과 에반」)
 
「노찬성과 에반」으로 늙어감과 죽음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며, 결국에는 「침묵의 미래」의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된 사어(死語)로 우리의 미래를 보게 한다. 늙어가다, 죽는 게 우리의 미래이자 순리라는 듯. 할머니가 찬성이 데리고 온 유기견 에반을 보기 싫어했던 것은, 에반을 보는 게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다. 늙고 병들고, 살리려 애를 써도 결국 죽고야 마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렇게 마주한 사어로 마지막을 확인한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매번 찾아오는 슬픔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상실을 심는다. 창밖 저들의 행복이 왜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지 서글퍼 하면서도 용기를 내지만, 그 용기는 행복이라는 답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잃은 자의 아픔은 아픔으로 남아있고, 절망을 느끼면서도 감당하는 게 답인 것처럼 또 다른 아침의 눈을 뜬다. 이렇게 살아지겠지, 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오늘을 또 한 번 견뎌야 하는 걸까? 마치 일 년 내내 추운 겨울인 것처럼?
 
그 겨울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작가는, 바깥은 뜨거운 여름인데 안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계절을 멈췄다. 상당한 시차로 더는 흐르지 않는 계절을 이 순간에 고이게 했다. 웅덩이가 더 깊게 파고 들어가 겨울의 폭설이 얼어붙은 듯이, 지금 계절이 여름이라는 것을 아주 잊은 듯이.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소설집의 처음과 끝에 배치된 작품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다른 듯하지만 닮은 두 작품에서 작은 틈을 본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이제 겨우 감정을 추스를까 하는 순간에 처음 슬픔을 마주한 그때로 돌려놓는다.(「입동」) 그들의 눈물이 아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실감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가 벽의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위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든다. 어쩌면 부부는, 그렇게 한 번씩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겪으며 치유의 자리를 넓힐 것이다. 가슴 속 서늘함은 그렇게, 조금씩 온도를 높여갈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잊은 것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마지막에 놓아 그 위로의 틈을 조금 더 만들고 글을 닫는다.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명지는 죽은 학생의 누나가 보낸 편지에서 밖의 계절을 본다. 이해할 수 없던 남편의 선택을 원망하면서 보낸 안의 풍경 너머, 비로소 밖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겨울 속으로 여름의 열기가 뛰어들 것을 보여준다. 차가움 속으로 뛰어든 뜨거움 때문에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온도. 이제 어느 쪽으로든 가능해졌다. 더 추워질 수도, 더 더워질 수도 있다. 계절을 잊은 듯 살아온 시간이 변할 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바깥에 흐르는 계절을 이렇게 보기 시작했으니, 더 열든 아예 꽁꽁 걸어 닫든, 그건 오롯이 각자의 몫이니 어느 쪽으로든 알아서 가보라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중략) 그러니까 거기 사 인용 식탁에서. 식탁과 맞붙은 산뜻한 올리브색 벽지 아래서. (20페이지, 「입동」)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266페이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여전히, 우리의 계절은 흐르겠지. 때로는 겨울의 추위에 움츠러들었다가, 가끔은 봄과 가을의 바람에 몸을 맡겼다가, 여름의 햇볕에 검게 그을렸다가. 내가 체감하는 계절은 매번 다를 수 있다. 겨울 속 여름을 살거나, 여름 속 겨울을 지내거나. 어쩌면, 그때마다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소한 것들로 현재의 계절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불편한 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의, 위로와 안부의 몇 글자가 미움과 분노를 그리움으로 변하게 한 것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은, 밖으로 나가 현재의 계절에 뛰어드는 방법을 몰라 허우적대던 사람들에게 온기가 스미는 방향을 가르쳐 준다. 답이 아니라, 여전히 질문을 남긴 채로 돌아선다. ‘자, 이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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