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의 꽃
김옥숙 지음 / 새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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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또 하나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생각해보니 이미 들어왔던 이야기 말고는 어떤 역사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았다. 배워왔던 것 말고는 더 알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늘 하루 먹고 사는데 그게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난가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서는, 오늘 하루 끼니를 채우는 일이 사는 전부가 아님을 많이 느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모이니 나라가 바뀌는 기적(?)을 보고, 우리가 사는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시간에 반드시 봐야 하는 것들. 제대로 아는 것, 큰 그림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여기 또 있었다.

 

정현재는 히로시마 원폭 관련된 소설을 쓰려고 합천을 찾아간다. 그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인 것을 숨긴 채로 살아왔는데, 소설을 위해 그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거다.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 합천 원폭피해복지관에서 만난, 심하게 화상을 입은 얼굴로 그동안 고개 숙이고 살아왔던 강분희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그는 캄캄하게 가려진 그때 그 시간을 본다. 전쟁 통에,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강분희의 아버지 강순구는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향한다. 거기 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히로시마로 갔다. 유독 합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던 히로시마. 어려웠지만 열심히 살았다. 거기서 자리 잡고 살면서 아이도 낳고, 어느 정도 살만해졌던 그때.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터트린다.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쏟아졌고, 터진 원폭으로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은 다쳤다. 다쳤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엉망이 되었다. 원폭 사건으로 강분희는 몸에 화상을 입고, 강분희와 마음을 나눴던 동철은 발을 다쳤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딸의 모습에 강순구는 가족을 데리고 합천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합천에서도 먹고 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랴. 강순구는 온몸을 다해 가족을 보살피려 애쓴다.

 

소설은 정현재의 현재와 강분희 가족의 역사가 교차로 진행된다. 단순히 소설 한 편 쓰겠다고 찾아간 합천에서 자기도 모르게 원폭 피해자들의 현실을 마주한 정현재는 자기가 피하려 했던 고통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거다. 그의 변화는 원폭 피해자, 원폭 피해자 2세, 3세들의 이야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있는데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아니, 그 사실에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을 그대로 들으면서 그 자신이 부정하려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했고 대한민국은 해방되었다는 사실 이면에 자리한 것을 이제야 본다. 거기서 끝났다고 여긴 전쟁이 원폭 피해자에게는 계속되고 있던 거다. 비극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은 후련하게 끝났다고 여긴 게 잘못되었다. 그때 거기 있던 조선인들을 잊고 있던 거다. 7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원폭 피해자가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란 게 마음 아프다. 물론 나도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일본이 '유일'이 아니라 그냥 피폭국이라고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더군다나, 그때의 고통은 거기서 모든 상황을 평정하고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걸 이 소설로 새삼 알게 된다.

 

과거에서 머물지 않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정현재가 만난 인물들의 인터뷰로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이, 그때 그 순간에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이유로, 몇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고통이 대물림된다는 게 이 소설이 전하는 핵심이자 우리가 봐야 할 문제다. 현재진행형은 고통. 강분희의 화상은 겉으로 보이는 고통이 전부일 것 같지만, 아니다. 그녀의 첫아이는 사산되었고, 그녀의 딸 박인옥은 병명도 모를 병에 태어나면서부터 잘 걷지도 못하고 평생 고통받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라는 병명을 알았다) 박인옥의 큰아들은 중증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3대에 걸친 원폭 피해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끝났어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는다. 여전히 그들의 삶은 진행 중이며 고통은 역시 삶과 함께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원폭의 참상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들에게서 듣는다. 동시에 우리, 아니 전 세계가 같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남긴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 원폭 피해자의 2세, 3세들로 이어지는 피해들. '합천'이 왜 '한국의 히로시마'인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이야기가 흐르면서 더 깊고 오래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컸다. 그동안 보고 들어왔던 것에 가려진 것들이 들춰지면서, 고통의 시작점을 찾게 한다.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는 일본에 가려진 대한민국의 원폭 피해자들, 더 깊고 많은 이유로 원폭을 투하한 미국, 검은 비를 맞으며 유전되는 고통. 언제 또 되풀이될지 모를 비극에 맞서 원폭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관심 두고 최선의 답을 찾아야 할 문제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억은 과연 힘이 될 수 있을까. 기억은 어쩌면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기억은 미약할지라도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수억 명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숲이 되고 산이 되고 거대한 산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진정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 아닐까. 어둠을 기억해야만 빛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255페이지)

 

그의 꿈은 보통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연애를 하거나 직장을 갖거나 가정을 가질 수 없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어야 했던 삶. 그가 꿈꾼 것은 결코 큰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 계단을 힘차게 오르내리고, 아침이면 출근을 하고 퇴근시간에는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잔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는 삶. 자식 노릇을 하고, 동생 노릇, 친구 노릇, 애인 노릇을 하는 것.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 작고 소소한 것을 꿈꾸는 일조차 그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206~207페이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저 안녕한 하루를 보내겠다고, 평범한 인생을 살겠다는 게 너무 큰 바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일이었다. 이 얼굴로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몸으로 낳는 아이는 괜찮을까... 참혹한 현실을 겪어내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치료도 되지 않는 병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만이 겪을 수 있는 아픔이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보통에 이르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계속 그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현실이 감당이 안 되더라. 그런 현실이 자식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보는 마음은 또 어떨까. 사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원폭 피해를 모르는 나도 안다. 그러니 원폭 피해를 대물림받은 그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길이겠나. 그래서 이 소설이 전하는 울림이 크다.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고 있으니 해결을 위해 나아가야 하고... 그 끝이 어디일지, 언제쯤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시선이 모이는 힘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으니 길이 보이지 않을까. 여전히 그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작은 손 하나씩 모여 변화를 시작한 우리였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물음과 동시에 답을 내놓는 소설이다. 2017년 5월의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희망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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