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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가는 길 ㅣ 큰곰자리 32
이승호 지음, 김고은 그림 / 책읽는곰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어른들이 아이들을 골리거나 놀려먹기 좋은 이유는 어린 아이들이 단순한데다 진지하기 때문일 거다. 아이들은 이기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 아주 조금의 동기 부여가 필요하고 어른들은 그 맥락을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러니 동이나 동순이처럼 울면서도 당하고 무릎이 깨지면서도 당하고 노래를 열 곡 이나 부르면서도 당한다. 단 여기서 어른은 아이들에게 거는 장난의 정도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 휴일을 맞아 내기장기를 두고 싶은 아버지가 있다. 친구는 제법 멀리 떨어져 사는데 전화로 부를 처지가 아닌 모양. 아침밥도 먹기 전부터 막걸리내기 장기를 두고 싶은 걸 보니 여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방법은 아들에게 시키는 것. 가기 싫어도 한 살 아래 여동생이 가겠다는데 오빠 체면에 안 간다 할 수 없다. 여동생과 오빠 사이에 경쟁을 붙여 모종의 계획을 실현하려는 아버지의 계획에 오누이가 걸려들었다. 게다가 ‘빚을 받아오라’는 분명한 과제가 있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동생한테 방아깨비를 잡아줘야 하고 미꾸용이 사는 냇물 하나를 건너다 업은 동생을 냇물에 빠트리고 개구리가 참견을 하고 개 절뚝이 전생이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놀라는 것은 모름지기 여행-모험-과제 수행에 당연히 조건절들이다. 결정적인 것은 아버지 친구인 최 씨가 무섭다는 것. 아는 길이고 아는 사람에게 빚을 받아오라는 정도의 심부름은 적당하다. 안전한 과정이지만 과제를 수행해야하는 심부름이어서 이야기가 흐트러지지 않았으리라. 짧든 길든 집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행위를 통해 존재는 약간이라도 변하게 되어있다. 그게 길이다. 과제 수행의 최대 고비를 무사히 넘기까지 긴장과 응축의 과정은 이후 해소의 과정으로 즐겁게 풀어지면서 유쾌한 이야기가 되었다. 결과물은 풍성하다. 일단 빚을 받았고, 신선한 달걀을 얻었고, 오누이는 뜨끈한 형제애를 느꼈으며 잃어버린 구슬을 찾았고 폭탄에 가깝게 똥까지 쌌으며 맛있는 아침밥상을 마주했다. 뒤늦은 아침잠은 후식처럼 달콤하다. 게다가 용돈까지! 이 모든 것을 통해 얻는 것은 못 미더워하는 어른에게 자기 존재를 확인 시킨 데서 오는 뿌듯함 혹은 성취감일 것이다.
이야기의 구도는 익숙하다. 심부름을 가는 중에 세상 존재들이 변하는 것 또한 익숙하다. 임무는 훌륭히 해낼 것을 알기에 ‘어떻게’가 이 작품을 즐겁게, 새롭게 만들텐데 그게 바로 말이다. 이 작품에서 빛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실감나는 충청도 말이다. 그리고 두 어른과 두 아이. 의뭉스러운 어른들과 맹랑한 동순이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도 팽팽하고 싱싱하다. 동이는 동순이에 비해 덜 빠릿해 보이지만 지고 싶지 않은 고집이 제법 튼튼하다.
이 일요일 아침 잠깐의 소동이 그야말로 장기 놀이에 미친 두 남자 어른이 벌인 별짓이라는 게 가장 큰 재미다. 부인들의 눈총을 피해 좀스럽게 보이는 것도 마다않고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각자의 승리를 다짐하는 두 남자 어른, 그런 줄 까맣게 모르고 제 할 일을 용케 해내고 아침잠에 빠져든 두 꼬마 아이를 담은 그림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 것처럼 재미있다.
잘 들여다보면 그게 다 충청도 지역말이 꼬이고 풀리면서 빚어내는 풍경들이다. 여기 쓰인 말들을 교과서적 표준어로 바꿔보면 말맛이 확실히 다르고 나아가 이야기 맛도 다르다. 왜 교과서적 표준어는 재미가 덜할까. 말에는 그 사회의 정서가 담기는 것이고 그래서 말은 한 사회의 세계관을 담는다고 했겠다. 충청도 지역의 느긋함, 의뭉스러움, 눙치듯 느릿하지만 할 말을 다 하는 고집 같은 것들의 주체가 아이들이어서 즐겁다. 얼핏 어른들이 제 목적을 다 이룬 것 같으나 아무것도 모른 채 잠이 든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겨먹었다는 것도 신난다. 텍스트 사이사이를 누비며 웃고 또 웃기는 그림들도 한몫을 단단히 한다.